빛과 소금
(마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다양합니다. 그 많은 삶의 모습에서 의미 있는 인생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살아가는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고 고백하며 의미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인생의 의미에 정답이 있을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스스로 보람 있는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것이 정답입니다.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는 모양을 빚기 전에 먼저 ‘쓸모’를 생각합니다. 어디에 쓸 것인지 생각한 다음에 모양을 만들고 구워냅니다. 집을 짓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쓸모를 먼저 설계합니다. 이처럼 인생도 ‘쓸모’있는 인생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쓸모’라는 것은 주관적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모양의 그릇이 나오고, 집의 모양도 다양합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정답이 없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쓸모’는 있어야겠지요. 쓸모는 자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입니다. 그릇이 자기를 위해 사용되지 않고 집주인이 사용하는데 편리하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자기만족이 아닌 타인에게 유익한 존재가 될 때 의미 있는 인생, 쓸모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쓸모 있는 인생을 살려면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는 ‘쓸모’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많은 소출을 거두어 만족합니다. 곳간을 더 크게 짓고 곡식을 가득 채워놓고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 밤 그의 영혼을 데려가신다면 예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며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눅 12:16-21) 자기가 모아둔 것의 쓸모를 생각하지 못했으니 어리석은 자인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쓸모를 알지 못하니 무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많은 것을 쌓아두고, 편하게 사는 것이 행복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모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받은 것을 묻어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와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그때 주인은 그를 가리켜 ‘악하고 게으른 종, 무익한 종’(마 25:26-30)이라고 부릅니다. 주인에게 쓸모없는 종이라는 말입니다. 주인을 위해 남긴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유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처럼 무익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면 해로운 사람이지만, 해를 끼치지 않더라도 다른 이에게 의로운 일을 행하지 않으면 ‘무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부족함이나 불편함 없이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 보이고, 부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회에 ‘쓸모’를 생각하면 무익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무엇이 되라’고 말해주기보다는 가치 있는 인생, 삶의 의미를 조언해주어야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대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공부 잘 해서 판검사가 되고, 고위공무원들이 되어 많은 권력과 부를 가지기도 합니다. 의사들도 많고, 박사들도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능력을 인정받는 운동선수들도 있고, 인기 많은 연예인도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유명인 중에서 본받을만한 사람은 몇이나 됩니까? 그들이 가진 권력과 명예와 부는 부러워할 만하지만, 그들의 삶이나 가치관은 비난받고, 외면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런 위험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 중에도 우리 사회에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그만큼 많은 것을 가지고 가치 있는 삶을 살라는 것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미 많은 것을 가졌고, 누리고 살면서도 무엇이 부족한지 한 자리 차지하려고 기웃거리는 모습이 추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들 중에서 국민을 이해하고, 국민을 섬기며 일할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 차리고 잘 살펴서 투표해야 합니다.
실력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가치 있는 삶을 깨달았다면 우리 사회가 훨씬 밝아질 것입니다. 힘없는 이들을 변호하는 이들, 약한 이들을 보살피는 의료인들, 자신의 재능으로 봉사하는 이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가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쓸모를 잘 알고,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쓸모 있는 인생을 말하려면 보편적 가치가 인정되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는 보편적 가치 기준이 없습니다. 모두가 ‘옳다’고 인정하는 기준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회가 정치에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권의 가치가 가치의 기준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가치를 따르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고,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기 때문에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십니다. ‘나는 아직 부족해서 소금이 되지 못하고, 빛을 비추기가 어렵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예수 열심히 믿고, 신앙생활 잘해서 빛과 소금이 되겠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지금 빛을 비추고, 소금의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은 부패하는 것을 막아주고, 음식의 맛을 내는 데 꼭 필요합니다. 소금이 건강을 해치는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만, 많이 쓰면 해가 되지만, 부족해도 건강을 해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평화로운 공동체가 되도록 세상 속에 녹아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을 소금처럼 짜게 만들면 병이 됩니다. 우리 역할은 맛을 내는 정도로 충분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연결해주고, 모두가 힘을 내도록 격려하고 지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소금은 맛을 낸 뒤에 자신은 사라집니다. 자기를 돋보이게 하지 않습니다.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빛이 없으면 생명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빛이 없으면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고, 생명을 창조하고 세상의 질서를 세우기 전에 빛을 먼저 창조하십니다. 빛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쓸모 있는 존재로 만들어줍니다. 그러나 빛은 형체를 가지지 않습니다. 자신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세상을 비추어 자기 일들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빛과 소금은 세상을 위한 존재, 세상에서 쓸모 있는 존재가 될 때 그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그렇지 않고 됫박 아래 감춰진 빛이나, 장독 안에 들어 있는 소금은 아무 쓸모 없어 나중에는 그 맛과 빛을 잃고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쓸모’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도 세상을 이롭게 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하시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약 2:14-17)이라고 하십니다. 죽은 믿음은 더 이상 쓸모없어 버려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행함을 ‘착한 행실’(16절)이라고 하십니다. 착한 행실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착한 행실을 마태복음 5:3-12절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흔히 팔복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더욱 구체적으로 풀어 설명하시는 말씀이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복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착한 행실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가리켜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처럼 쓸모 있는 존재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빛으로, 소금으로 살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음식 속에 있는 소금은 보이지 않지만 그 맛은 알 수 있습니다. 음식을 먹은 사람은 주인의 솜씨를 칭찬하겠지요.
어두운 길을 밝히는 빛을 보고 사람들은 그 빛을 켜둔 사람을 칭찬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서 잘 쓰는 말인가 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보냅니다.’ 저는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십니까? 예수님은 ‘너희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도록 살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소금이나 빛이 가치 있는 것은 맛을 내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할 때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우리 믿음이 세상에서 쓸모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고, 약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병든 것을 고치고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온 세상이 누리고 살 수 있도록 우리가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큰 빛, 많은 소금으로 일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며 실망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하여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칭찬하시는 주님의 참된 제자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