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심당 이춘홍
포덕69년(1928) 평양 출생
여성회본부 감사
여성회합창단장
"나 먼저
진실한 한울님이 돼야지요"
내가 원래 평양 출신이에요. 어릴 때 집안이 천도교였거든요. 우리 올케 아버지가 평양 제일 높은 자리인 천도교 종리원 원장 김이삼 씨라고. 그 분으로 인해서 우리가 천도교 집안이 됐거든요. 아주 어릴 때부터 천도교 했으니까 시일 따라 다니고 그랬어요. 올케가 우리 집에 시집 와 갖고 집안 전체가 천도교 하게 된 거예요.
기념 행사 때 대신사님이 끌려가는 거 그 장면을 재현했어요. 천도교는 교당이 엄청나게 컸어요. 그 기념 행사를 하는 거, 대신사님 역할을 하는 사람, 부인 노릇하는 사람들 팀들이 있었어. 한명빈 씨도 그 때 출연한 사람이야. 엄청 나. 우리 한 거에 비하면 요새 하는 거는 다 시시해.
일정 치하에 우리가 행사할 때는 기마 경찰이 천도교 주변에 좌악 서 있었던 거 기억이 나요. 행사는 그 안에서 천도교인들이 한 복들 입고 매 맞으면서 끌려가는 거, 그 형상을 그대로 재현했어요. 그거 볼라고 밤새 기다리고. 천도교가 굉장했어요 . 열성 이었고.
내가 여섯 살 때인가 제일 부러웠던 거는 조팔보라고 , 그 때 덕성학교인가 있었는데, 천도교가 하는 학교에요 그때 그사람 모습이 어땠냐 하면 내가 아주 어릴 땐데 솟컷트 했어요 천도교 여성으로서 신여성이에요. 나두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 하면서 시일 다녔던 생각이 나요. 그래서 나도 저 여자처럼 되 고 싶다고 했더니, 우리 어머니가 야단했어. 뭐 저런 게 좋냐, 시집이나 가야지 했던 생각이 나. 활발하고 깡뚱치마 입고 컷트 하고. 그 당시 한국 여성으로서는 그런 거 상상도 못해 때였지. 그 때는 우리 천도교 여성들이 신여성으로서 활동을 많이 했어요. 그게 내 꿈이었지. 결국은 경찰관이 된 것도그 영향이 있을 거야 아마.
북한에 있을 때도 똑똑하단 소리는 들었어요. 초등학교 선생질도 한 6개월 했고. 그 때 우리 아버지가 그러는 거예요. 네가 선생인지 학생인지 모르겠다는 거야. 애들하고 같이 뛰어서 잘 노니까. 일정 시대 때 요란하게 활동했었어요. 북한에 있을 때 민전이라는 게 있었어요. 천도교인 붙잡아다 놓고 인민재판 하고 그랬어요. 그때 내가 변론자가 돼서 나가 서 싸우는 거야. 그런데 우리 천도교인을 첩이라고 몰아치는 거예요. 그래서 막 투쟁한 거예요. 이 사람이 첩이라고 그러는데, 부모들끼리 협의해서 씨받이로 가다시피 간 건데 무슨 첩이냐, 본부인이 자식을 못 낳아서 처녀로서 그 집에 들어갔는 데 어째서 첩이냐고. 우리 교인은 씨받이로 간 거지, 첩이 아니다. 이래 가지고 변론을 해서 내가 이긴 거야. 그래서 우리 천도교인을 내가 구해 줬던 생각이 나고.
이남으로 온 거는 포덕 88년(1947년). 천도교인 체포령이 내려서 천도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잡혀갔다구요.
해방 직후에 내 가 황해도 수안군 지석면 천도교 부녀부장을 했어요.
천도교 부녀부장으로서 수안군 전체 순회강사를 했어요. 그러다가 체포령이 내린 거야. 열한 명이 체포령이 내렸다고 연락이 와서 피신 했는데 그것이 3월이었을 거예요.
산으로 산으로 해서 황해도 천도교인 집으로 가서 밤에 가면 해 뜨고 나면 숨어있다 다른 집에 연결해서 보내 주고 해서 내가 살아난 거예요. 그래서 삼팔선 넘어온 거예요. 갓 스무 살 때.
시장에 나왔다가 빨리 도망가라 그래서 말도 못하고 집에 사람을 보내서 점조직처럼 교인들 많잖아요. 그래서 교인들이 연락해 갖고 나 시집 갈 때 가져갈 예단을 내가 딱 질 수 있게끔 한 보따리 싸서 가져왔더라구. 이남에 가면 돈이 다르니까 이거 갖고 살아가야 한다고 그거 한 보따리하고. 천도교인이 내가 써 준 편지 가지고 우리 아버지한테 가서 보따리하고 우리 딸 믿는다 하면서 우리 아버님이 안내자 둘 사셨어. 그 당시 화폐 개혁 돼서 돈이 없는데 현물밖에 없었거든요. 현물을 삼천 원을 주고, 사람 둘을 사서 나 한테 딸려준 거예요. 그렇게 삼팔선을 넘어왔어요.
그런데 같은 일행이 한 닷새 동안 같이 돈들을 내고 안내자 사서 같이 넘어오는데 자연히 소지품 보게 되잖아. 내가 순회 강사증이 있었거든. 그걸 보고 같이 넘어온 사람들이 나더러 간첩이라고 신고를 해 버렸어요. 이남에다가. 저 여자는 아무래도 신분증 같은 게 있다고. 천도교 출장증을 갖고 있었거든 간첩으로 신고를 해서 경찰에 넘어와 갖고 심문 많이 받았지요. 끝까지 내가 싸운 거야. 왜 날 잡아들이냐고. 내 목적이 서울인데 가야 되지 않느냐고. 같은 일행 중에 신고가 들어왔다 그래서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몰라. 천도교인이라는 걸 분명히 밝혔는데. 한 일주일을 심문 받았어요.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몰라. 물고문도 받고. 내가 왜 너희들한테 고문을 받아야 하느냐고 너무 억울하다고 나 천도교인이라고 막 대들고 그랬어요
그래서 일대일 조사하니까 뭐 나타난 거 없잖아. 그래 가지고 그 자리에서 안 되겠다 생각한 것이 경찰이 제일 나를 보호할 수 있겠다 싶어서 경찰로 들어왔죠. 1.4 후퇴 때 오라버니가 찾아왔었어. 지금은 돌아가셨어. 나는 그 당시에 현직에 있었고. 경찰로 들어갔지. 제 신원을 스스 로 보호할 수 있는 건 경찰밖에 없잖아요. 여자나 남자나.
포덕 91년(1950년)도에 여경에 들어갔나. 내 이름이 원래 이춘성이었어요. 그게 내 본 호적에 있는 이름인데 이남에서 육이오를 겪고 난 다음에 복직할 때 이름을 고친 사람들 많아요. 이남에서 경찰관 하고 있다는 것이 명단이 오르면 피해가 가잖아. 그래서 빨리 이름들 고치라고 그래서 이북에서 왔던 사람들은 본 이름을 내게 되면은 이북 가족 에 피해가 간다고 해서 수복 이후에 춘홍으로 고친 거예요. 포덕97년(1956년)도인가, 빨갱이한테 이춘성으로 넘어가면 피해 가 간다고 해서 중간에 이름을 고친 거야.
여경이 되고 나서는 참 착한 일 많이 했어요. 여경으로서. 이북에서 넘어오는 사람들 DDT 뿌려줬어요. 이가 많다고 그래서. 그걸 최일선에 서서 이북 사람들 넘어오는데 천도교인들은 무조건 통과시켜 줬다고. 이북 출신이어서 그 당시에 사찰계 근무를 했어요. 언제나 최전방, 최일선. 사상 문제에 제일 먼저 앞장 섰어요. 우리나라를 건국하는 데 최일선 자리 아니에요. 언제나 일선. 용감했지 뭐. 내가 왜 바지를 안 입나, 너무너무 많이 입고 살아서.
우리는 1분 대기조였다구. 언제 무슨 일 있 을줄 모르니까. 또 하나 보람을 느끼는 건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근무 했거 든요. 포로 석방 때가 6월 17일일 거예요. 거기에 차출돼서 야간 작업에 투신되어서 부산 가야 수용소가 오픈되서 나오는데, 그 사람들을 전부 초량에서부터 가정집에 배속시키는 거, 그걸 밤새 했다구.
대한민국에서 내가 참 역사다 싶고, 포로수용소 사람들 얼마나 잔인한지 알아? 뭔가 주면 그걸 다 담 바깥으로 사람들을 통해서 담요를 바꿔서 물감 사다 달라면 물감 사다 주고, 뭐 사다 달라는 대로 다 갖다 주는 거야. 그러니까 그 부대 안에서 못하는 게 없어. 인민깃발도 만들고 인민복도 만들고 다 하고 애기를 낳아서 옷도 해 입히고 인민군 노래 막 부르고 그래.
우리는 순찰을 해요. 우리가 지나가면 개승만이 세타트 지나간다, 그러는데 우리가 이겨 냈어.
그런데 포로 교환을 할 때 내가 여자 수송 담당했어요. 여자들이 얼마나 잔인해? 우리 보면 세파트 에민아이야, 우리들한 테 그러면 일제 대꾸하지 말라, 그걸 참으려면 이가 갈리는 데도 말도 못 하고 하나라도 도망가거나 무슨 사단 일어나면 큰 일나잖아. 그때 우리가 긴장해 가지고 차로 가서 내려서 실고 서 숫자 세서 여자들, 애기 수송하는 거, 부산까지 와서 수송선에 태우는 거 그거 실제 다 했잖아요.
원대 복귀해서 왔을 때 사찰계 직원이니까 또다시 차출되는 거야. 극비리에 오밤중에 여덟 시에 부산경찰서에 집합을 했는 데, 밤 9시를 기해서 가야산 포로 수용소를 오픈했어. 거기서 넘어오는 사람들은 전부 다 개인집에다 빨리빨리 숨기라는 거 야. 밤 아홉 시부터 새벽 네 시까지. 아홉시에 통행금지 사이렌 불면은 시민은 하나도 못 다녔거든요.
그러고나서 네 시에 뚜 하면 움직였어요. 그래서 아홉 시부터 네 시까지 빨리 작업을 하고 원대복귀하라, 이 명령 받아서 일체 말을 안 하고 암호, 수화로서 하는 거. 예스, 노만 그거를 치르는데 얼마나 긴장했는 줄 싸고 땀이 흐르고, 지. 오줌 눌 때가 어딨어? 그 상태에서 그냥 싸는 거야. 오줌줄줄 싸고 땀이 흐르고.
그 수 만이 넘어오는 포로들 개인집에다가 다 빨리빨리 안내 해서 은신시켜 놓고 빨리 경찰서에 돌아가서 딱 드러눠서 한잠 들까말까 했는데 사이렌이 울리고 그때사 난리가 난 거야. 헌병들이 보고. 다 소문 나 가지고 비상이 걸리고 잠든 날 깨우는 데, 아유, 나 좀 내버려 둬. 난 좀 잘 거야. 동료한테도 말하면 안 되거든. 절대 비밀이야. MP들이 하나도 찾지 못 했잖아.
우리들이 너무너무 치밀하게 짝 민가에 갖다가 은신시켜 놨기 때 문에. 그런데 부산 시민들이 너무 고맙게 잘 했어. 딱 데려가면 아줌마, 세 사람 왔어요. 네, 네. 대답하지 말고, 무조건 받아만 주는 거야. 이렇게 초량리에서 쳐다보면 가야산이 있는데, 거 기서 시커먼 머리가 쑥쑥 올라오는 거야. 만화처럼. 저 뭐냐구 했더니 가만 있으래. 내려오면 빨리 민가에 갖다가 분산시키 래. 왜요? 우린 내용도 모르고. 만나보니까 포로더라구. 포로들 나온 거야. 야, 이건 하나라도 건져야 한다고. MP한테 들키면 안 되니까. 그래서 열심히 했다구.
그러다가 포덕 101년(1960년)도에 제주도로 전직을 갔는 데, 거기서 내가 수사과 근무할 때 경찰관으로서 또 천도교인으로서 가장 보람 있다 생각하는 게 그건데, 살인 사건이 있었어요. 주범이 열아홉 살 난 청소년이야. 그 애를 해 터 끝까지 양자를 삼아 갖고 19년을 돌봤어요. 그 때 쿠데타 일어났잖아요. 그래서 민정이 군정이 되어버렸잖아요. 강도 살인은 무조건 사형인데, 그거를 항의하고 호소문 내고 미성년자니까 사형을 면해 달라, 군법회의에 넘어갔지만 감안해 달라 진정서를 내고 해서 군법회의에서 무기수로 돌아 갔어요. 19년 동안 유치장 바낄 때마나 면회 가고 해서 결국은 칠십 몇 년도에 하두 경찰에 대해 나쁜 인상만 주니까 전국적으로 모범 경찰관을 한번 발훼해 봐라 했는데 내가 해당이 됐어. 내가 안동에 일 년에 한 번씩 면회를 가거든. 연가를 안써 먹었다가 안동교도소를 갔는데, 그 교도소에 교목이 있잖아요. 내가 일 년에 한 번씩 오는데 사형수를 만나거든. 근데 사 연을 물어보더라구. 현직 경찰관으로서 양자 삼아갖고 이렇게 16년이 됐다.
꾸준히 뒷바라지 하는데 내가 여기 오려면은 비 용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드는데, 제주도에 새로 형무소가 생기는데 그리로 이감을 시켰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그 교목이 같이 힘써 줬어요. 근데 장기수는 제주도에 두지 못해요. 시설 이 미비돼서. 5년 이상 장기수는 제주도 수용 불가능이야. 그 거를 진정서를 내고 안동 신문에 내기 시작한 거예요. 그래 갖고 그게 펴졌어요. 그때 나는 천도교인입니다, 해서 천도교인으로서 죄인이다 아니다보다는 한울사람으로서 그렇게 한다고.
천도교인으로서 죄수를 돕고 있다는 걸 알아서 편지도 오고 날 찾아오기도 하 고. 그래서 천도교에 대해서도 퍼지기 시작했지요. 개한테도 나는 천도교인이지만 사람을 한울님처럼 섬기라 했고, 너도 한 울님 모신 사람으로서 착한 마음으로 돌아가면 너는 죽진 않는 다, 했거든요.
그 이상의 것은 나도 잘 모르니까. 그 후에 경전도 보내주는 분도 계시고. 그래서 그 일을 하면서 뭐든지 좋으니까 신앙을 가져라 했는 데 결국 진실한 기독교인이 됐었어. 신앙을 가지고 해서 19년 만에 석방이 됐어요. 포덕 120년(1979년)도에. 그 때 드라마가 나온 거예요. 법창야화 10회에 MBC에서 <여순경과 사형수>라고, 그 당시에 대단한 인기였어요. 책도 나왔고. 그 후문이 아 들이 석방되어 나와 가지고 책을 팔아서 돈을 많이 번줄 알고 돈 내놓으라고. 너무너무 무서웠어요. 그렇게 좋은 일, 착한 일 하고 여자 무궁화 봉사상을 탔는데 창설 이후 여경이 탄 거는 나 하나 뿐이에요. 국가에서 그애 석방시킨 덕분에 무궁화 봉사상 탔지.
제주도에서 용담정에 나무 천본보내준 거 보람 있고. 지금 가보면 나무 심은 지가 삼십 년이다 됐잖아요. 그래서 나무 쳐다보면 눈물이 나요. 나는 한 것도 없는데 너는 크게 잘 자라줘서 고맙다 생각하고.
포덕 120년(1979년)도에 정년 퇴직했지요 50살에. 그 때는 정년 퇴직이 빨랐어요. 연금도 없을 때고 우리는 연금도 못 타요. 고생은 육이오 겪으면서 제일 많이 했는데 국가보훈에서는 하나도 못 타. 요새 뭐 육이오 참전용사 제도가 생겨서 한 달에 7만 원 타는 거 있지. 하나 좋은 거는 죽게 되면 국립묘지 갈수 있다는거, 그게 하나 그저 보람이지.
정년퇴직하고 난 뒤에 서울와서 꽃꽂이 하고. 제주도 있을 때도 꽃꽂이 전시회를 여러번 했어요. 현직 경찰관으로서.
제주도에서는 천도교인으로서 뚜렷이 활동할 수 있는 건 없었고 제주도에 천도교가 없었으니까. 서울 올라 와 갖고 중앙위원도 했고 여성회 감사도 하고 열심히 나오고 볼수 있죠. 수련 많이 했어요. 화악산으로도 가고 수련을 열심히 했다고 지금은 독립군가 선양회 부회장으로 있어요. 해방 전에 우리 독립군이 부르던 노래. 요새도 애국단체 행사 때 우리 합창단 이 가서 노래 불러요. 내가 곧 팔십이 되는데 지금도 합창단에 나가요. 매 화요일마다 나가요. 본부 합창단장도 했고. 열심히 했어요.
시간 나는 대로 꽃꽂이 특강도 해 드렸고. 왜냐하면 내가 일정시대 꽃꽃이로 일본 선생한테 구박을 받았어요. 조센징은 꽃꽃이 안 하냐고. 그렇게 구박을 받아가지고 그 다음부터 는 너 나름대로 조센식으로 하라고, 온돌식으로 하라고 하더라 구요. 일본은 도꼬노마라고 해 가지고 쏙 들어간 데가 있잖아 요. 야, 너희는 온돌식으로 해. 꽃꽃이는 예술이니까 규격이 없다, 하면 된다, 그러면서 우리가 야만인이라 꽃도 꽃을 줄 모른 다고 하고.
해방 직후에 우리 고향 초등학교에 일본 선생들 다 가고 나니까 선생이 없는 거야. 그래서 육개월 동안 동네에서 봉사했다니까. 그래서 깡통에다 꽃 꽂는 거 가르쳐 줬다구요. 포덕 87년(1946년)도부터. 그러면서 내가 이걸 해야겠다 해서 내 자신이 개발한 꽃꽂이 가 있어요. 청심회. 천지인 해서 13번 기본 가지만. 우리가 13 자 주문이잖아요. 13번까지 기본 가지를 번호대로 딱 꽂으면 멋진 꽃꽂이가 돼요. 그거 하나 보람을 느껴. 그것을 체계화해 놓고 기초는 잡아놨어요.
전시회를 할 때 궁을기를 크게 해가 지고 열세 가지 나무를 특이하게 해서 인내천주의 13자 주문을 주로 해서 꽃꽂이를 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접목을 하더라구요. 선생님 기본이 너무 좋은데 인테리어화 되어 있기 때문에 오아시스를 다 이용하고 있거든요. 우리는 물을 중요하 게 여기잖아요. 물을 떠나서는 안 된다, 그래서 물, 그리고 나무가 있어야 하고. 수, 목, 석 이거예요.
그래서 나는 이 세 가지가 꼭 작품에 들어가게 지도했거든요 그런데 요새는 인테리어식으로 마른 것막 갖다 꽃으니까 신체 해요. 그래서 우리 전통 꽃꽃이 할 때는 청심회장님 좀 출품해 주세요, 해요. 그런데 출품하려면 한 사오십만 원 들어가거든 요. 참가비 삼십만 원 내야지, 작품 내는 데 한 십만 원 들지. 많 이 들어. 작년까지는 했는데, 금년에는 경제적 여유가 있을런 지 모르겠어요.
***
내가 천도교를 하면 하면서 속상하고 안타까운게 너무 많아요. 왜 그러냐면 천도교가 너무 좋기 때문에 게 안타까운게 많아요 많아요. 삼 년 불성이면 도 아니냐고 그랬잖아요. 삼 년만 지극히 하면 다 어떤 경지에 이르는데 그 경지까지 가기는 쉬워요. 보편적으로. 거기서 오만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우리 천도교 인들이. 선생님이 가르쳐 주면 어. 나도 그 경지에 왔다. 난 조금 더 했다. 이렇게 오만하기 시작하는 거야. 자기가 예언자처럼 자꾸 뛰쳐나가는 것을 너무 많이 봤어요. 그리고 마음을 비웠다 하는데 과연 비었는가 하는 거예요. 비었다 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남을 책하고 비방하는 소리를 하면 그건 비지 않은 거예요. 그런 말 절대 해서는 안 되는데, 한울님이 되지 않고 한울님의 길을 가지도 않으면서 한울님 행세하는 거, 민주 국민도 못 되면서 민주 경찰을 나무라는 거나 같지요.
한울님 모심을 알고 깨달았으면 한울님의 행동을 해야지, 실천을 해야지. 안다는 걸 갖고 행세를 하려고 하니까 탈선이 되는 거예요.
수련 많이 했다는 어른들도 저게 아닌데, 저 사람을 왜 나무랄까, 그 사람을 나무랄 자격이 있느냐 이거예요. 한울님이 됐으면 차도 참고, 더워도 참고, 좋아도 참고, 기뻐도 참고 웃음으로 다 통하잖아요.
그걸 못 해요. 그런데 현상이 똑같아요.
그래, 민주 국민이 되지 못하고 세금도 내지 않고 도망다 니는 놈이 제일 먼저 큰소리 하는 거나 마찬가지로 우리 천도 교인도 정말로 천도교인이면은 좀더 진실이 뭔지, 진실 자체도 모르면서 진실이라는 거를 아는 척하고 나서는 거, 그리고 가만 있으면 좋겠는데, 진실이 너무 힘들다는 거예요.
진실을 알고 진실을 행하면은 되는데 그걸 못하니까 속상해요. 절대로 비유하지 말자는 거, . 긍정적으로 살자는 거, . 핑계대 지 말자는 거지, 말하자면. 절대 핑계대지 말자, 그대로 받아들 이자는 거. 운명은 내가 개척해 나갈 수 있다. 운명 개척이 뭔가, 참고 받아들이는 것이 개척이라고 봐요. 시시비비는 우리가 할 거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이 해 주면 되고. 내가 할 거는 긍정적으로 보는 거, 그러다 보면 사계명만 정확히 지키면 다 되더라구요.
난아침마다 내가 오늘도 사계명을 지킬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저녁 기도식 할 때는 한울님 스승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오늘도 사계명 지켰는지 모르겠습니다, 내일도 사계명 지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주가 되고 그 다음에 그저 감사합니다, 건강 주셔서 감사하고 물약자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에 요. 우리 천도교인이 진실을 알고 진실을 행하는 길만 가면 인내천이 다 되는 거 아니예요. 내가 한울님이 되지 못하면서 누구한테 한울님이 되기를 바라요. 안 돼죠
■구술일 포덕 147년(2006년) 11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