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9일과 20일 양일 간 모처럼 경주의 남산에 숨어 있는 신라 유적과 경주 이뤈에 펼쳐져 있는 명소들을 찾아서 아침 KTX에 뭄을 실었다.
신경주역에 도착한 것이 11시 45분, 신경주역사 앞 광장에 나오니 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역사가 매우 인상적이다.
우리 일행은 대기하고 있던 버스로 계획했던 첫번째 탐승지인 南山拜里三尊佛立像을 찾아 나섰다.
입상은 아래 보이는 바와 같이 지나치게 낮은 전각 안에 모셔져 있어 마치 챙 넓은 어른의 모자를 쓴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동그란 형태의 석불은 삐죽거리듯 입술을 약간 내밀고 웃음 지으며 손을 활짝 펼친 아기동자를 닮은 듯한 모스을 하고 있는 이 석불은 우리가 연전에 가 보았던 서산의 마애삼존불상과 더불어 가장 우리 민족의 토속적인 얼굴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 석불들은 선방사 주변에 흩어져 누워 있던 것들을 1923년에 한 곳으로 모아 세워졌다고 한다.
위의 세 개의 능(三陵)은 맨 앞의 능이 신라 54대 경명왕릉이고 중간이 53대 신덕왕릉이란다. 맨 뒤의 능은 8대 아달라왕릉이라는데 위의 두 왕들은 912년에서 924년까지 재위했던 임금들이었으나, 아달라왕은 154년부터 183년까지 임금으로 있었던 초기 임금이니, 어째서 이렇게 근 8세기 가까운 세대 차이가 나는 임금들이 함께 묻혀 있는지 궁금하다.
하기는 이 밖에 많은 능들이 여기에 줄지어 있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위의 암각은 삼릉계곡 선각육존불(線刻六尊佛)로서 가운데 불은 석가삼존불, 왼쪽은 아미타 삼존불이다.
자연 암벽의 동서 양벽에 각각 마애삼존상을 선으로 조각한 수법이 정교하고 우수하여 우리나라 선각마애불 중에서는 으뜸가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오른쪽 삼존상의 본존은 석가여래좌상이고, 그 좌우의 협시보살상은 온화한 표정으로 연꽃을 밟고 본존을 향하여 서 있다. 왼쪽 삼존상의 본존 역시 석가여래로서 입상이며, 양쪽의 협시보살상은 연꽃무늬 대좌 위에 무릎을 꿇고 본존을 향해 공양하는 자세이다.
정상에서 내려다 본 경주 시내
양각여래입상은 가파른 계곡 중간에 있는데 길을 막아 놓았기 때문에 가 보지 못하고
약 100m 멀리서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금오산 정상에 올랐다. 눈 아래에 펼쳐진 능선과 계곡들이 그리 높지 않은 산에 비해 산세가 수려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칠불암(七佛庵)
계곡을 따라 내려와 우리가 가장 보고 싶어하던 칠불암에 도착했다.
가파른 산비탈을 평지로 만들기 위해서 동쪽과 북쪽으로 높이 4m 가량되는 돌축대를 쌓아 불단을 만들고 이 위에 사방불(四方佛)을 모셨고, 약 1.7m의 간격을 두고 뒤쪽의 병풍바위에는 삼존불(三尊佛)을 새겼다.
삼존불은 중앙에 여래좌상을 두고 좌우에는 협시보살입상을 배치하였다. 화려한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미소가 가득 담긴 상호다. 양감 있는 얼굴과 풍만하고 당당한 자세를 통해 자비로운 부처님의 힘을 드러내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는 옷은 몸에 그대로 밀착되어 굴곡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손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배부분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이와 같이 깊은 산 속에 대작의 불상을 누가 조성했는지 알 길이 없으나, 칠불을 조각한 것도 놀라운 일이나 조각수법 또한 웅대하여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인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서출지(書出池)
경주시 남산동에 위치한 이 못은 사적 제138호이며, 신라 21대왕인 소지왕 때에 연못 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왕에게 글을 전했다 해서 서출지(書出池)라고 불린다고 한다. 주위는 약 200미터 정도의 작은 크기로 못 안에는 연(蓮)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고 연못가에는 1664년(현종5년)에 지은 '이요당(二樂堂)'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연못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 온다고 한다.
448년 정월 15일에 소지왕이 천천정에 나왔는데 쥐와 까마귀가 나타나서 울더니 특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날아가는 곳을 찾아가 보시오"라고 하였단다.
왕은 기사로 하여금 까마귀를 따라 가도록 하였는데, 남쪽에 이르자 두 마리의 돼지가 한창 싸우고 있었다. 기사는 돼지들의 싸움에 정신이 팔려 구경하다가 그만 까마귀의 행방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낙심한 기사가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데 문득 길 옆의 연못 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편지 한 통을 전해주었다.
편지의 겉봉에는 "이 편지를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열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왕은 희생을 줄이겠다는 의도에서 편지를 열지 않겠다고 했으나 일관이 "두 사람이란 일반인이요, 한 사람이란 왕을 가리킨다"고 아뢰니, 왕이 편지를 열어 보았는데 "거문고갑을 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왕은 즉시 궁으로 돌아와서 거문고갑을 쏘니 그 안에는 내전에서 불사를 맡아 행하는 승과 궁주가 사통(邪通)하고 있었다.
이 때부터 우리나라 풍속에는 정월의 初亥日, 初子日, 初午日에는 백 가지 일을 삼가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으며,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하여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의 풍속이 생겨나게 되었다.
지금도 경주지방에는 정월 보름날 아이들이 감나무 밑에 찰밥을 묻으면서 "까마귀 밥 주자"고 하는 풍속이 전해진다고 한다.
남산 유적 답사를 끝내고 다음 날(2월 20일)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良洞>과 이언적이 학문을 논하던 <玉山書院> 그리고 울진의 川邊 절벽에 새겨진 <盤龜臺>를 다녀왔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良洞>
이 양동 마을은 500여년의 역사를 지니면서 그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서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옥산서원(玉山書院)
옥산서원(玉山書院)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 1491∼1553)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1573년(선조 6)에 창건되었다. 서원은 1574년(선조 7)에 '옥산(玉山)'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이 전국 47곳의 서원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훼철되지 않은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회재는 중종 때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주희의 주리론(主理論)적 입장을 성리학의 정통으로 밝힘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호를 '회재(晦齋)'라 한 것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회(晦)'자를 취함으로써 주희의 학문을 따랐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회재의 성리학은 그 후 퇴계에게 이어진다.
회재는 1610년(광해군 2) 9월에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 등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고,
'동방오현(東方五賢)'이라고 불리면서 조선조 도학(道學)의 우뚝 선 봉우리로 평가받는다.
회재의 고향은 앞에 보인 양동마을이다. 회재는 만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양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주시 안강읍 玉山의 한 시냇가에 자리를 잡고 거주처로 안채를 짓고 개울에 면하여 사랑채 독락당(獨樂堂)과 정자 계정(溪亭)을 경영하고 자연을 벗삼으며 약 6년간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그런 연유로 회재가 세상을 떠난 후 독락당에서 가까운 곳에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옥산서원(玉山書院)을 창건하였다.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이 탑은 신라시대 9세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시대에 보기 드문 층수며 기단부나 기층부의 특이한 모양으로 보아 당시의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蔚州 大谷里 盤龜臺 巖刻畵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변의 절벽에 290여 점의 암각화가 그려져 있다. 여기에 새겨진 그림들은 구석시대 사람들이 생활하면서 그린 그림으로 바다와 육지 동물 사냥과 포경 장면 등 육지동물의 생태적 특징과 당시의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번은 꼭 보아 둘 필요가 있는 사적지이다.
崔氏 古宅
다시 경주로 돌아와 그 유명한 최씨고택을 찾았다. 경주 법주가 이 집안에서 연원했기에 한 장 사진을 찍어 보았다.
이 집안에는 예로부터 엄격한 가훈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 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바이지만 참고로 그것들을 여기에 열거해 본다.
9대 진사, 12대 만석꾼의 철학이 있는 곳
<경주 최부자집의 가르침>
1. 최부자집은 "재물은 똥거름과 같아서 한 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가 없고, 골고루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라는 가르침을 바탕으로 "육훈"과 "육연"을 가슴에 새겨 '베푸는 삶'을 실천했다.
2. 최부자집 실천 의지는 중용의 의로움이다. "치우치지 말고, 성급하지 말고, 욕심내지 않는다. 어느 것이든 완벽한 가치는 없으며, 좌우에 치우침이 없이 의롭게 산다."
3. 이런 중용의 덕을 빼어 심기 위해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증조부 최세린의 호는 '대우(大愚:크게 어리석음)'였으며, 주친 최현식의 호는"둔차(鈍次:재주가 으뜸 가지 못 함)"이었음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위의 1번에 언급된 "육훈(六訓)"과 "육연(六然)"은 다음과 같다.
육훈(六訓) - 집안을 다스리는 지침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2. 만 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3.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4.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5. 주변 100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6. 시집 온 며느리는 3 년 간 무명옷을 입어라.
육연(六然) - 자신을 지키는 일
1. 自處超然 -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2. 對人靄然 - 남에게 초연하게 대하며,
3. 無事澄然 - 일이 없을 때 마음을 맑게 가지고,
4. 有事敢然 - 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하며,
5. 得意淡然 - 성공했을 때에는 담담하게 지내고,
6. 失意泰然 -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하라.
감사합니다. 2013년 2월 23일 아 곡 씀
첫댓글 명승지의 해설과 사진들 잘 봤습니다. 뜯깊은 산행이었군요. 경관만 따지면 태백 저리가라~
월등.
설화까지 곁들여 재미나게 읽고 문화재 관광 잘 감상햇습니다.
아곡 덕에 나는 앉아서 공짜로 경주 구경한번 잘 했소이다. 감사 감사.
아곡은 이번 전무후무한 태백은 못 봤지롱?
고로케 약올리면 나 혼자 태백에 갈 거지롱~~~
아주 훌륭한 역사 탐방을 하셨네요. 꽃피고 날씨 좋은 날 우리도 일찍 서둘어 하루 다녀오면 대단이 멋질것같네요.???
경주는 하도 많이가서 ''''태백은 5번 다너온중 눈맞고 ...눈곷피고 절경이지 아이쩡에 눈이 붇어 혼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