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역사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졸본 지역에 건국하여 668년 멸망할 때까지 약 700년 동안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지배했던 고대 강대국입니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전성기를 누렸으나, 7세기 수·당과의 치열한 전쟁과 내분으로 멸망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에 부여에서 남하한 추모 일행이 부여 남쪽의 압록강 상류 졸본성에 정착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이때 추모는 국호를 자신의 조국과 성의 이름을 합쳐 졸본부여라 지었다.
현대인에게 고구려의 터는 곧 만주벌판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건국 초기에는 졸본성·국내성 인근의 험준한 산악지형에 자리잡은 탓에 생산력이 부족해 약탈경제로 발전했다 여겨지며, 건국 직후부터 일대의 국가를 잇달아 정복하는 등 상당히 호전적인 모습이 보인다. 건국초기 당시에는 서쪽과 남쪽에 한나라와 위나라의 군현이 버티고 있었던 까닭에, 서남 두 방면으로 크게 팽창하진 못하였고 나중에 가서야 점령할 수 있었다. 약탈 내지 점진적인 압박 전략이 주를 이루었다. 대신 일찍부터 동남쪽으로 뻗어나가 옥저, 동예 등 두만강 일대와 함경도, 강원도 지역의 여러 세력들을 복속시켰다. 이러한 정설 이외에, 초기 고구려의 위치와 정복 활동을 지금의 추측보다 더 동쪽으로 이동시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4세기 초, 미천왕에 이르러서는 팔왕의 난으로 대표되는 중국 서진의 혼란에 편승해 낙랑군과 대방군을 마저 일소하고 현재의 한반도 북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해 과거 위만조선에 속했던 모든 집단들을 통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령지방에서 발흥한 모용부 선비를 단, 우문 등 다른 선비족과 연합하여 저지하는 데 실패한 뒤로 한동안 내우외환을 허용하게 되었다. 이때 모용부에 더 가깝던 부여는 사실상 몰락했다. 북위가 계속된 전쟁으로 압박을 주고 북연과 전쟁을 치르다 고구려인인 고운이 북연의 통치자가 되자 화친하였다. 남쪽에서도 백제의 전성기로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등 수세에 몰리게 된다.
5세기 초, 탁발부 선비가 강성해진 틈을 타 요동에서 모용부 선비 세력을 축출하였고 남쪽에서는 백제를 격파해 위례성을 빼앗고 충청도 중원 일대까지 세력을 넓히며 신라에 침입한 백제, 왜, 가야의 연합군을 몰아내 구원함으로써 내정 간섭을 하고 조공을 받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후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으로 겨우 현상유지만 하는 상태였고 수, 당이 개입하기 전까지 이백 년 가량 요동을 독점적으로, 부여 일대를 대부분 점유한다.
후기에는 남부로 영토를 확장한 후 평양성으로 천도하며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한 국가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한반도 남부와의 접점은, 위만조선 멸망 이래 흩어졌던 한반도 북부의 재통합과 더불어, 훗날 한국사에 고구려가 포함되고 고려라는 나라가 세워지는 근거가 된다. 신라가 전성기를 맞으며 전성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토는 축소되지만 그럼에도 삼국 중 가장 큰 나라라는 지위를 잃지는 않았다.
이러한 고구려의 성장에 자극받은 물길이 힘을 모아 고구려를 견제하나 6세기 중반에 이르러 고구려에 의해 오히려 말갈 7부로 분할되고, 이는 고구려의 후계국인 발해를 건국하는 기반이 된다. 또 고구려는 전성기 전ㆍ후 요서 일대의 거란족이나 만주 일대의 말갈족을 통제했으며, 중국왕조의 침공에 존망을 건 전쟁을 치르는 등 인지도가 올라가 이후 고려 시대 등을 거치며 지금의 Korea라는 이름으로까지 계승되어 왔다.
고구려 역사 개요
고구려 (高句麗, 기원전 37년경 - 668년)는 백제, 신라와 함께 삼국시대의 고대 국가 중 하나이다. 지역적으로는 현재의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지배했던 나라이다.
1. 건국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주몽이 졸본에 도읍해 국호를 고구려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에 도읍했다 한다. 그러나 동명왕편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 및 부여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더 일찍 건국되었을 가능성이 제시되기도 한다. 3년에는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초기의 고구려는 부여 및 한의 4개 군현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비옥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벌였다. 또한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고구려는 왕족인 계루부를 포함한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2. 성장
53년 즉위한 태조왕 대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 즉위한 산상왕 대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복속시키고 한 군현에 대한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4년 위의 관구검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 대의 명재상 을파소는 194년에 진대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중국에 5호 16국의 혼란이 시작되던 4세기부터 고구려의 정복 활동이 재개되었는데, 미천왕은 313년 낙랑군을 점령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으며, 남쪽의 백제 및 신라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왕인 고국원왕 대에는 342년 전연의 대대적인 침공과 371년 백제 근초고왕의 침공으로 인해 수도가 점령되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3. 융성
소수림왕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한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372년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여 국교로 삼았으며, 태학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이를 통해 중앙집권화가 더욱 진전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대에 이르러서는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펼쳐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으로 군림하는 전성기를 맞았다. 391년에 즉위한 광개토대왕 대에는 북으로 후연을 멸망시키고 부여 및 말갈, 비려를 복속시켰으며, 남으로는 백제를 위축시키고 왜와 가야의 침공을 계기로 신라를 보호국화했으며 전기 가야 연맹을 해체하기에 이르렀다.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 대에는 중국에 대해서는 다면 외교 정책을 펼쳐 남북조와 교류하였으며, 대신 평양성으로 천도하여 적극적인 남하 정책을 펼쳤다.
4. 쇠퇴와 멸망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헸다. 안원왕 대에 이르러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귀족들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551년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다. 동일한 시기에 북쪽에는 돌궐이 발흥하였다.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고구려는 신라와 밀약을 맺고 나제동맹을 깨트리는 한편, 돌궐의 침공에 대항하였다. 돌궐과의 전쟁이 교착 상태에 이르자 고구려는 다시 한강 유역을 수복하기 위해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 때 수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에게 복속을 강요하자, 고구려는 항전하였다. 수나라는 598년과 612년에 각각 침공해 왔는데, 두번째 침공 때 을지문덕 장군이 활약하여 살수대첩의 승리를 거두었다. 수나라는 이 전쟁의 충격으로 멸망하였으며, 고구려도 국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고구려는 수나라를 뒤이은 당나라와도 대치하였다. 당나라의 침공에 대비하는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연개소문은 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위협을 느낀 중앙 귀족들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은 642년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비롯한 귀족들을 모두 살해하고, 보장왕을 왕으로 세운 뒤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쥐었다. 연개소문은 대외 강경책을 펼쳐 648년 신라와 당이 연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일단 645년 당 태종의 침공은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의 활약으로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 자식들의 권력 투쟁이 일어났고, 결국 백제를 멸망시키고 여세를 몰아 침공해오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668년 28대 705년만에 멸망하였다.
그 후에도 검모잠, 안승 등의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다. 또한 671년까지, 안시성은 (보장왕이 항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함락당하지 않고 남아있었다고도 전한다. 결국 698년 고구려 귀족 출신인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일단락되고, 고구려는 발해에 의해 계승되었다.
삼국시대
삼국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가 정립(鼎立)하였던 한국사의 한 시기를 의미한다.
삼국시대는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7세기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패권을 다투며 성장한 고대 중앙집권 국가 시기를 뜻합니다.
삼국의 특징과 전성기
백제 (4세기 전성기): 근초고왕 때 요서·산둥·규슈까지 진출하며 해상 강국으로 성장했습니다.
고구려 (5세기 전성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만주 대륙을 호령하며 한강 남쪽까지 영토를 넓혔습니다.
신라 (6세기 전성기): 진흥왕 때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대가야를 병합하며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7세기 신라는 당나라와 결탁하여 나당연합군을 결성했습니다.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후 대동강 이남을 기준으로 삼국 통일을 완수했습니다.
이후 북쪽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남쪽에는 통일신라가 들어서며 남북국 시대로 전환됩니다.
신라시대
기원전 57년부터 서기 935년까지 약 992년간 한반도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로, 56명의 왕이 다스려 '천년왕국'이라 불립니다. 경주(서라벌)를 중심 삼아 독창적인 황금 문화와 불교 문화를 꽃피웠으며, 7세기 중반 삼국을 통일한 뒤 남북국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건국과 발전: 경주 지역의 6개 촌장이 모여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며 '사로국'으로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변방의 작은 나라였으나, 철기 기술과 제도를 정비하며 성장했습니다.
삼국 통일: 6세기 진흥왕 때 영토를 크게 넓히고, 7세기 무열왕과 문무왕 때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이후 나당전쟁에서 승리하여 대동강에서 원산문까지 이르는 한반도 중남부 지역을 통일했습니다.
통일신라와 멸망: 통일 이후 안정된 국력을 바탕으로 불국사, 석굴암 등 화려한 불교 예술과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하기에 이르러 귀족들의 왕위 다툼이 심해지고 지방에서 호족 세력이 일어나면서 후삼국으로 분열되었고,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며 멸망했습니다.
신라는 시조 혁거세부터 경순왕까지 56대, 992년 간 존속하였다. 국호는 신라·신로(新盧)·사라(斯羅)·서나(徐那)·서나벌(徐那伐)·서야(徐耶)·서야벌(徐耶伐)·서라(徐羅)·서라벌(徐羅伐)·서벌(徐伐) 등으로 불렸는데, 모두 마을(邑里)을 뜻하는 사로(斯盧)로 해석된다. 신라는 『삼국사기』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3기로 나누어 시대 구분을 할 수 있다.
① 상대(시조∼28대 진덕여왕, B.C. 57∼A.D. 654)는 원시부족국가·씨족국가를 거쳐 고대국가로 발전하여 골품제도가 확립된
시기이다.
② 중대(29대 무열왕∼36대 혜공왕, 654∼780)는 삼국을 통일하고 전제왕권이 확립되어 문화의 황금기를 이룬 시기이다.
③ 하대(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780∼935)는 골품제도의 붕괴, 족당(族黨)의 형성 및 왕권의 쇠퇴로 호족 세력이 등장하고 멸망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밖에 29대 무열왕 이전을 삼국시대, 그 이후를 통일신라시대로 구분한다.
문자의 활용은 통치에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자생활은 통치 문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언제부터 신라에서 문자가 사용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토기에 사용된 기호문자를 통하여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다양한 서체의 운용은 문자생활이 상당히 진전된 후에 가능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