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서] 평화를 기원하는 사람의 마음이 지켜낸 천년 은행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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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5. 7]
아이들의 날이어서였을까요? 아이들의 밝은 낯빛만큼 연휴 내내 하늘이 좋았습니다. 해맑은 날씨에 알맞춤하게 숲의 나무들이 재롱잔치 한 마당을 열었습니다. 바닷바람 탓에 식물의 개화가 비교적 늦은 천리포수목원에는 지금 겹벚꽃이 한창입니다. 수선화 꽃이 시들어 떨어지면서 바닷가 숲에서 새로 아름답게 피어나는 생명입니다. 이 겹벚꽃은 설립자 고 민병갈 님이 가장 먼저 지은 한옥인 해송집에서 배롱나무집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서 있는 나무의 꽃입니다.
꽃이 피어있을 때에도 그 화려함에 넋을 빼앗기게 되지만, 여느 벚나무가 모두 그렇듯이 이 나무 역시 낙화 무렵의 광경이 절경입니다. 며칠 더 지나 꽃잎이 떨어질 때면 이 나무 아래의 오솔길은 완전히 진한 분홍 빛 카펫을 곱게 깔아놓은 듯한 꽃길이 됩니다. '대관절 이 나무의 꽃잎이 몇 장이나 되길래?'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하지요. 한두 그루의 나무에서 그 많은 꽃잎이 달려있었던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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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어나는 모습이 아름다운 건 두 말 할 필요가 없겠지만, 나무의 한해 살이 가운데에 처음 새 잎 돋울 때의 모습은 더 없이 예쁩니다. 특히 큰 나무의 가늣한 가지 위에서 형광 빛 연초록으로 돋아나는 새 잎은 그야말로 생명의 환희를 느끼게 하는 상큼한 아름다움입니다. 갓 태어난 아가들을 바라보는 심정이 그럴까요? 아니면 티 없이 맑은 어린이들의 발그레한 낯빛이 그리 아름다울까요?
마을 사람들은 무려 천 살이 넘은 나무라고 하고, 문화재청의 식물 전문가들은 사백 살 정도 된 나무로 보는 경북 구미 농소리 은행나무에도 새 잎이 돋았습니다. 큰 덩치의 나뭇가지들은 멀리에서 바라보아도 벌써 나뭇가지 주위로 연두빛 아우라가 환히 감돕니다. 한 잎 한 잎, 짚어보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잎이건만 나뭇가지 전체에 돋아난 연초록 새 잎은 참 맑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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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구미의 농소리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나무를 찾아갔을 때에 길가에서 먼저 마을 할머니 세 분과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나 뵈었습니다. 할머니들은 도로변의 둔덕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봄나물을 캐고 계셨습니다. 뽀솜한 솜털을 달고 솟아난 쑥을 캐는 중이었지요. 주차할 자리가 마땅치 않아 도로 변에 자동차를 세우고 할머니들께 다가서자 할머니 한 분이 유쾌한 농담부터 던지셨습니다.
"봄처녀 보러 오시는구먼!" 한 할머니의 농에 맞춰 다른 할머니들이 싱그러운 처?퓽? 미소를 던지며, 나그네를 맞이하셨습니다. 쑥을 캐느라 바쁘신 할머니들의 한가로운 풍경 안에는 오른쪽 다리를 다쳐서 깁스를 하신 마을 할아버지 이성록 노인도 끼어 있었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나물 캐는 것도 쉽지 않으신 탓에 이성록 할아버지는 한적했죠. 그의 여유로움에 넉넉하게 끼어들어 나무 이야기를 청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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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바로 옆에 자리한 집에 사시는 이성록 할아버지는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살아오신 분이십니다. 마을의 역사는 물론이고, 나무에 대해서도 가장 많은 이야기를 이야기하실 수 있는 분이었지요. 할아버지의 나무 이야기를 듣는 동안 길가를 지나던 작업용 트럭에 타고 지나던 분들도 자동차를 멈추고 할아버지께 안부 인사를 올리고, 지나던 분들은 일부러 다가와 인사를 올리고 지나셨어요. 마을 분들의 살가운 정을 느낄 수 있는 풍경이었습니다.
[나무와 사람 이야기 (76) - 구미 농소리 은행나무] 신문 칼럼 원문 보기
할아버지께서 들려준 흥미로운 농소리 은행나무 이야기가 위에 링크한 신문 칼럼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위의 칼럼에 썼습니다만, 할아버지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이 나무가 천년이 넘은 나무라는 걸 일본의 후쿠오카에 사는 한 노인이 증명해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몇 해 째 계속해서 농소리 은행나무를 찾아오는 팔순의 일본 노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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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인에 따르면 농소리 은행나무는 천년 전에 중국의 큰 은행나무의 자손인 암수 한 쌍의 오누이 가운데 하나라는 겁니다. 그 중에 수나무는 일본으로 가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으며, 누이 뻘 되는 암나무가 바로 농소리 은행나무라는 겁니다. 후쿠오카의 노인은 그 이야기의 근거가 되는 자료를 보여주거나, 또 그를 증명하기 위해 무언가를 애써 하신 것도 아니랍니다.
그저 그런 연유가 있다는 이야기만 하시고는 오랫동안 나무만 바라보셨다는 거지요. 처음엔 이성록 할아버지를 비롯해 마을 분들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몇 해 째 계속 일본 노인의 방문이 되풀이되자, 점점 그 노인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거죠. 무엇보다 일본 노인이 경북의 시골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어떻게 알았고, 또 무슨 근거로 이 나무가 일본 후쿠오카의 나무와 오누이라는 것일지 놀랍다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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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록 할아버지는 자신의 증조부 때부터 이 나무는 천년이 훨씬 넘는 나무라고 이야기하셨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의 추측이나 마을 사람들의 생각이나 어느 쪽 이야기도 정확하달 수는 없습니다. 기록으로 남은 자료가 없을 뿐 아니라, 이만큼 큰 나무의 나이를 정확히 측량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거기에 매달릴 필요야 없지요. 천 살이냐, 사백 살이냐가 뭐 중요하겠습니까. 더 중요한 것은 사람과 나무가 어떤 관계로 더불어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지금 마을 사람들이 나무와 어떻게 더불어 살아가는 지를 여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해마다 시월에 올리는 동고사(洞告祀)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시월의 첫 오(午)일에 올리는 동고사는 지금도 계속된다고 합니다. 십오 년 전 쯤의 한때 동고사를 올리지 않았던 적도 있었답니다. 그때 마을에는 예상치 못했던 흉사가 연이어 벌어졌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게 바로 동고사를 올리지 않은 탓이라고 판단하고 다시 동고사를 올렸답니다. 그러자 이어지던 흉사가 사라지고, 마을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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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나무는 바로 이 마을 사람살이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주는 수호목이었던 것이지요. 과학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농소리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그러나 세상의 어떤 정밀한 과학도 이룰 수 없는 큰 힘이 담겼습니다. 사람들의 마음만이 이뤄낼 수 있는 마음의 힘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아무리 과학을 맹신하는 시대라 할지라도 과학으로 도저히 해석하지 못하는 자연의 신비는 턱없이 많습니다.
더구나 사람의 안녕과 평화를 이루기 위해 오랫동안 이뤄온 삶의 양식을 어떻게 과학의 이름으로 훼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과 나무, 혹은 자연과 사람이 더불어 아름답게 살아간다는 건, 그렇게 과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과학 그 너머의 세계로부터 얻어내는 강력한 힘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땅의 큰 나무들을 찾아다니는 나무 답사는 단순히 식물 관찰 이상의 깊이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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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소리 은행나무의 거대한 뿌리 곁에서 가만히 피어난 민들레 꽃의 수굿한 꼬물거림이 떠오릅니다. 흔한 꽃이어서 발길에 짓밟히는 풀꽃입니다. 이 꽃의 속살을 한참 들여다보면, 그 안에 담긴 생명의 신비를 생각하게 됩니다. 과학의 힘으로 무장한 현대의 우리가 여전히 알지 못하는, 그리고 앞으로도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는 생명의 신비가 담겨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리와 이웃해 사는 모든 생명을 예찬하게 되는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바쁜 와중이라 해도 곁의 작은 생명들을 한번 더 돌아보는 오월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생명을 더 아름답고 고귀하게 이어가는 첫걸음입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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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숲의 나무 편지]는 2000년 5월부터 나무와 자연과 詩를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 |
첫댓글 맞습니다. 고목에 피어나는 새싹은 참으로 어여쁘지요. 조오기 햇살 받으며 피어난 저 어린잎이 얼마나 이뻐요.^^
저는 요즈음의 은행나무 가로수길 걷는걸 너무나 좋아하지요.
아, 오월엔 봐 줘야만 하는 것도 많고...... 향긋한 냄새에도 전율이 느껴져요.**^^**
정말 그래요. 요즘은 하루하루가 달라요. 매일 피어나는 것들이 있어요. 볼 것이 많아 봄이라고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아요.
저 은행나무도 지나다니면서 더러 봤는데 다음에 지날 때는 제대로 한번 살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