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사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 이다. 사적기에는 527년(성왕 5) 담혜가 세운 것으로 되어 있고, 《부여읍지》에는, 백제 불교를 중흥시킨 겸익이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두 기록이 다른 까닭은 알 수 없으나 6세기 초에 건립된 것은 확인된다. 그 뒤 고려 원종 때 장로(長老)인 진전(陳田)에 의해 중창된 이래, 여러 차례 중수 개수가 이루어졌다.
전설에 따르면 한 스님이 큰 바위 아래서 수도 중에 관음조(觀音鳥) 한 마리가 날아와 그 바위 위에 앉자 놀라 잠을 깨니, 바위가 미륵보살상으로 변해 있었어, 절 이름을 대조사라 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곁의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217)은 논산 관촉사의 미륵대석불상(보물 218)과 유사한 점이 많다. 현존의 당우(堂宇)로는 대웅전 산신각, 요사 등이 있다.
대조사 입구
성흥산 정상부분에 자리한 대조사, 가파른 언덕에 돌계단이 있고
양옆으로 화단을 만들어 사찰을 한눈에 들어오게 만들어 놓은 모습이
참으로 정이 갑니다.
해우소
근심을 해소하는 곳.
가파른 언덕에 자리한 해우소, 사찰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예스러움이
너무도 빨리 변해만 가는 현실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됩니다.
대조사 석탑
충남 문화재자료 제90호
부여 성흥산(聖興山)의 대조사(大鳥寺) 경내에 있는 고려 초기의 3층석탑으로 높이 약 520㎝이다. 원래 탑신 없이 옥개석(屋蓋石) 3장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부근에서 탑신이 발견되어 보수하였다. 풍화(風化)로 인하여 전체적으로 암갈색을 띠고 있다.
지대석(址臺石)과 1층 탑신, 옥개석은 화강편마암이고 2, 3층 탑신과 상륜(相輪)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대석과 1층 탑신은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220㎝ 크기의 하대석(下臺石) 위에 4매로 된 면석을 올리고 남·북의 면석에 각기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조각한 이중기단이다. 상대갑석은 탑신받침으로 2중 각형(角形)이 있으며, 낙수면이 거의 수평에 가깝다.
탑신은 옥개석 및 옥신석이 모두 1매석으로, 2층 옥개석은 2단 받침이며 1층과 3층 옥개석은 3단의 옥개석받침으로 표현되어 있다. 옥신석에는 우주만 나타나 있다.
대조사 범종.
대조사 원통보전
원통보전 관세음보살상
대조사 미륵보전
미륵보전 내부
미륵보전 내부에는 방석만 있고 창 너머로 미륵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미륵보전
미륵전에서 바라다본 대조사 경내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보물 제217호
고려시대에 유행한 거대한 석조미륵보살의 하나로 논산에 있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과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다. 미래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높이가 10m나 되는 거구이다.
머리 위에는 이중의 보개(寶蓋)를 얹은 네모난 관(冠)을 쓰고 있으며 보개의 네 모서리에는 작은 풍경이 달려있다. 관 밑으로는 머리카락이 짧게 내려져 있는데 이와 같은 머리모양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도 마찬가지이다. 얼굴은 4각형으로 넓적하며, 양쪽 귀와 눈은 크나 코와 입이 작아서 다소 기이한 느낌을 주지만 관촉사 보살보다는 덜하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두껍고 무거워 보이는데 매우 투박한 모습이다. 팔의 윤곽은 몸통에 붙여 옷자락으로 겨우 표현되었고, 손도 간신히 나타냈는데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배에 대어 연꽃가지를 잡고 있다. 보살상 앞에는 제사 음식을 차려 놓기 위하여 판판한 돌을 마련해 놓았다.
불유정기
일찍이 이 절에 물이 귀해서 물을 찾던 중 마침 10여 년 전에 예산 성당
장끄랭깡 신부님이 물줄기를 찾아 감로수가 솟아오르게 하였다.
알칼리성분과 미네랄 성분이 다량 함유된 약수로 불은에 감사하는
뜻으로 이 샘물을 불유정이라 하였다.
대조사 명부전
명부전 지장보살상
대조사 산신각
산신각 내의 산신 탱화
대조사 찾아가는 길
서울에서→천안→공주→부여
부산에서→대전→논산→부여
광주에서→논산→부여
부여에서 임천면 군사리 성흥산 정상에 위치함.
첫댓글 정만법우님의 사찰순례글을 당분간 볼 수 없어 아쉽습니다. 변함없이 좋은 순례 사진과 글로서 불가사에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돌모퉁이를 돌아나오시는 부처님~~ 안녕하시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