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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수필집 [☆쇠똥 누가 쑤셨나☆]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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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똥 누가 쑤셨나]
조사무 수필집 / / 도서출판선우미디어(2015.08.20) / 값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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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의 글∥
성숙한 수확을
김영중
국제펜 한국본부 미주서부지역위원회 회장
조사무 선생과의 만남을 생각하면 인간의 인연은 고리의 연결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이다.
처음 조사무 선생과 인사를 나누게 된 것은 그의 아내인 수필가 조옥규 선생을 통해서였다. 그 후 나는 조사무 선생과 자주 문학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고, 그 인연으로 조사무 선생의 첫 수필집 출간에 축하의 글을 쓰게 되었으니 그 인연이 내게 있어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문학의 길이란 평탄하고 안일한 길이 아니다. 어느 시인은 절망을 부르짖기 위해 시를 쓴다고 했듯이 문학인이 가는 길은 고뇌와 아픔을 수반하는 형극의 길이다. 그러나 글쓰기가 뭐기에 작가들은 쉬지 않고 쓰고 또 쓰고를 반복하며 책을 엮어 내는지 모를 일이다. 좋은 글은 시대를 초월해서 독자들 가슴에 감동을 주며 정신세계를 채워 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내재해 있는 창작욕을 북돋워준다.
사람마다 글쓰기를 시작한 동기는 구구할 것이다. 혹자는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 싶어서, 작가가 되고 싶어서, 보다 순수한 동기라면 무엇인가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서, 누구 말대로 와락 토해버리고 싶어서 등등이 있겠으나 글쓰기를 시작하면 사람이 달라진다. 글을 통해서 창작에 참여한다고 자각하면 보람은 더 클 것이며 문학적 문화를 고양하는 것은 가장 값지고 복된 일이 될 것이다.
조사무 선생은 많은 우회를 거쳐 뒤늦게 글쓰기에 입문한 수필가이며 시인이다. 그는 바람의 친구이고 구름의 친구이자 나무와 비의 친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의 친구인 그는 참으로 부지런한 사람이다. 그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창작을 불태우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는 물리적 연령과 상관없이 영원한 청년이다.
조사무 선생은 풍부한 상상력과 인간을 꿰뚫어 보는 통찰의 눈으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보고 듣고 느낀 대로 자신의 진실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할 말을 차분히 하는 삶의 달관된 모습을 보여주는 작가이고, 노자의 도덕경에서 나오는 ‘상선약수’와 같이 순리를 따르는 자연성을 예찬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축적되는 작가의 감성을 분화구로 삼아 마치 마그마처럼 솟아오르는 불물로 작품을 구워내는 불의 미학을 연출하는 작가라고 높이 평가한다.
출판되는 조사무 선생의 첫 수필집에 영광과 축복이 있기를 바라며 삶에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청청한 건강을 위해 드리는 사랑의 기도와 축하의 마음을 한 아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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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똥 누가 쑤셨나
조사무
그리움이 녹아 사랑
그마저 마르면
미움이라던데
녹지도 마르지도 못해
속병 앓는 쇠똥
누가 쑤셨나
짝 짓던 쇠똥구리 커플
허둥지둥
피난길 떠나네
나도 가야지
조사무
비둘기들이 종종걸음 친다. 분수가 시원스레 솟구친다. 세월 땟국에 절은 청동 조상彫像이 물놀이에 신나 깔깔대는 아이들을 그윽하게 내려다본다. 동상이 드리운 자투리 그늘에 망연히 앉아 있는 노인도 풍상에 녹슨 조각 같다.
안내원이 관광객들 앞에서 무언가 열심히 설명한다. 만국기가 부채꼴 나래를 펼쳐 감싸 안은 돌계단 중간쯤에 남녀 한 쌍이 부둥켜안은 채 꼼짝도 않는다. 젊은이 둘이서 발랄하게 브레이크댄스를 춘다. 히피 차림의 청년이 어깨 비스듬히 기타를 메고 어슬렁어슬렁 광장으로 들어선다.
편견일지도 모른다. 통념의 덫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왠지 ‘광장’하면 낭만과 사랑과 평화가 깃든 곳이어야 마땅할 것 같다. 젊어 한때 살던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나 콩코드 광장이 그랬다. 지구를 반 바퀴 더 돌아 노년을 견디고 있는 이곳에도 크고 작은 광장들이 많다. 새해맞이를 한다고 밤새도록 쏘다니던 뉴욕의 타임스 스퀘어가 생각난다. 가족과 재회하고 삶터를 마련했던 샌프란시스코 유니언 광장도 그립다.
그 옛날 통금 시간이 임박해 소주에 오징어와 땅콩을 싸 들고 광화문 세종대왕 슬하로 기어들어 친구와 날밤을 지새우는 짓을 낭만이라 여겼다. 딱따기 순찰한테 들킬세라 무릎은 맞대고 쪼그려 앉아 담뱃불을 붙였다. 광화문은 풍만한 여인의 품처럼 언제나 넉넉하고 포근한 공간이었다.
광장이 허구한 날 몸살을 앓는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사람들이 광장을 점거하고 북악을 향해 연신 주먹감자를 먹인다. 핏발 선 눈알을 부라리며 악다구니 친다. 넋놓고 바라보던 관광객들이 희한한 볼거리에 희희덕대며 너도나도 카메라를 들이댄다.
사람 똥은 고사하고 쇠똥말똥도 없다던데
도대체 무슨 볼일 있는 걸까
똥파리들 떼거리 지어
우르르 우르릉
광장으로 모여든다
대관적 그곳엔 무슨 먹잇감이 있는 걸까
조갈증 같은 궁금증 참지 못해
안달방아 헛바퀴 헛딛다가
문득 깨닫는다
개똥이구나
그래 그래 왜 아니 그렇겠어
광장 곳곳엔 애완견 강똥이 구른다더니
한밑천 챙기려는 게지
개똥도 약이라잖아
나도 가야지
밤이 깊어 간다. 늦은 밤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나도 가야지’를 열창한다. 도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것일까. 그녀가 태어난 미시시피일까. 성장했다는 루이지애나일까. 그도 아니면 첫사랑의 추억이 배어 있는 어느 광장일까.
태어난 곳이든, 자란 곳이든, 추억이 배인 곳이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곳이 있다는 것은 복 중의 복이다. 그곳이 고향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한가위가 코앞이다. 사람들 등쌀에 밀려난 비둘기들이 올리브잎사귀를 물고 광화문으로, 광화문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날은 언제쯤일까.
그날이 오면, 나도 가야지.
나이를 헛먹다
조사무
‘나잇값’과 ‘꼴값’은 비아냥조가 짙고 값어치가 처지는 낱말이다. 그래서 ‘나잇값도 못 한다’며 손가락질을 하던가, ‘꼴값 떨고 있네’라며 야유도 한다.
‘꼴’이란 단어에는 원래 ‘속되다’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으니 ‘꼴값’이 수모를 좀 당한다 해도 억울할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나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꽁무니에 ‘값’이란 꼬리표를 매달아 ‘나잇값’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한단 말인가.
‘나잇값’이란 단어를 설령 좋은 의미로 사용해도 적극적인 칭찬은 못 된다. ‘나잇값 하네’라는 말은 적극적 표현이기보다는 ‘제법’ 또는 ‘뜻밖에’라는 조건적, 소극적 겉치레 칭찬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청춘이니까 아픈 것이 당연하고, 중년이니까 아무리 아파도 울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노인이니까 아픈 내색도 못 하고 신음을 뼛속 깊이 갈무리하고 몸살차살이나 하다가 때 이르면 말없이 떠나야 하나. 청춘 나잇값은 금값이고, 중년 나잇값은 은값이고, 노년 나잇값은 동값도 못 되고 똥값이란 뜻인가.
영국의 낭만파 시인 조지 고던 바이런이 서른세 번째 생일에 단시檀施를 남겼다.
어둡고 지저분하고 따분한 인생길 걸어
서른셋 이 나이에 이르렀건만
내게 남은 건 무엇인가
서른셋, 나이뿐일세
서른셋 나이에 문명文名으로도 혁명 전사로도 그 이름을 떨치고, 내로라하는 귀부인들과 숱한 염문을 뿌리던 한창나이에 무슨 여한이 그리도 많았을까. 혹시 선견지명이라도 있어 죽음의 그림자라도 읽었단 말인가. 그래서 3년 후, 서른 여섯 나이에 홀연히 세상을 떠났을까. 아니면 사랑도 명성도 한갓 물거품이라는 깨달음이었을까.
남아 이십에 미평국未平國하면 대장부가 아니라 호기 부리던 남이 장군도 스물일곱 나이에 사형장의 원혼이 되었다. 두 사람 다 일찍 갔지만 나잇값으로 치면 아무나 넘볼 수도 없는 상한가가 아닌가. 그러니 나이와 나잇값이 비례한다고 볼 수 없다.
은퇴 후, 마누라의 고집을 꺾지 못해 깊고 깊은 산속, 7에이커가 넘는 대지에 방 여섯 개를 들인 저택을 짓고 우물물 마셔 가면서 단 둘이 살고 있는 친구가 있다.
궤이커Quaker나 아미쉬Amish 교도도 아니면서 하루에 두 끼, 그것도 텃밭에서 가꾼 소채류에 콩가루나 쌀가루를 곁들여 소식한단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엔 기껏해야 고구마나 감자 몇 알을 삶아 특식처럼 호식한다니, 대단하다 칭찬해야 하나, 아니면 꼴값한다고 흉보아야 하나, 게다가 사는 곳이 경관이라도 빼어나면 신선놀음한다고 부러울 테지만 시냇물을 커녕 제대로 자란 나무 한두 그루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허허벌판이다.
술과 담배를 나만큼이나 즐기고, 육류하면 소고기든 양고기든 개고기든 마다 않던 친구인데 딱하다 못해 안쓰러울 지경이다.
지난 주말에 산행을 마치고 친구 집엘 잠시 들렀다.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아내는 교회에서 주관하는 봉사활동에 나갔노라 했다. 요즘 사는 재미가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렁저렁 견디며 산다고 했다.
“그래도 이렇게 살다 보면 100살은 문제없을 거야.”
“100살을 살면 뭣 하나, 하루 종일 흘러간 영화나 보면서.”
“그러지 말고 여기다 수련원인가, 기도원인가를 차리면 어때? 심심치는 않을 게야 혹시 아나, 잘 하면 휴 헤프너처럼 노욕을 달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도 생길지.”
“제대로 먹기나 해야 노욕인가 나발인가도 생기지, 가당키나 한 소린가.”
생각 같아서는 안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함께하고 싶었지만, 괜스레 미적대다가 저녁 식사 준비에 부담스럽고 번거로울 것 같아 서둘러 일어났다. 막 시동을 걸고 떠나려는데 친구가 말했다.
“담배 있으면 몇 개비 주고 가”
“마누라한테 혼나려고.”
“걱정 마, 샤워하고 양치질하면 감쪽같아.”
흙먼지를 일으키며 귀갓길을 서둘렀다. 비포장 도로를 덜커덩 덜커덩 달리다가 생각해 보니 괜히 허튼짓을 했구나 싶었다. 담배 몇 개비를 달라는 친구가 하도 딱해 같잖게 호의를 베푼답시고 한 갑을 통째로 주고 왔으니 말이다. 이러니 걸핏하면 “나잇값도 못 한다.”고 마누라한테 핀잔을 받는가 보다.
“나이를 헛먹었군.”
산등성이에서 뉘엿대던 해가 들으라는 듯 종알거리는 것 같았다.
노욕老慾
조사무
하룻밤 만리장성도
요 한 장이면 쌓는다던데
우리도
그런 성城하나
쌓자구나
가을 숲에서
널 기다리는 늙은이
갈퀴손으로 낙엽 긁어모아
바스락바스락
자리 펴는
속내
몸이야 비록
고목 등걸로 잘려 나가고
검버섯투성이지만
까짓 한 송이
꽃쯤이야
기러기 아저씨
조사무
오랫동안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더니 기러기 아저씨가 돌아가셨단다. 작년 이맘때까지만 해도 바로 앞 동에서 세라믹 조립공장을 운영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의 동생에게 들었다.
하도 보이지 않기에 은퇴를 했거니 믿었다. 그래서 근래에 재혼한 젊고 예쁜 재취 자리와 여행이나 골프를 즐기며 노년을 유유자적하시려니 여겼는데 칠십 초반에 벌써 가다니, 요새 나이로는 좀 요절한 듯싶다.
그의 사망 소식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비즈니스 몰을 오가다 만나 시시콜콜한 세상사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면 마무리는 언제나 골프 이야기였다.
“요즘도 골프 자주 나가십니까?”
내 가 흘리듯 끝맺음으로 던지는 인사가 ‘당신과는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소. 이제 각자 제 일이나 봅시다.’라는 속내임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또한 내가 익히 예지하고 있는 인사말로 대답하곤 했다.
“영 살맛이 없어요. 골프도 시들해졌고, 매일같이 늙다리끼리 라운딩하자니 원.”
하고는 잊지 않고 ‘다음에 또 봅시다’라는 의미의 마무리 인사를 덧붙이곤 했다.
“어디 예쁜 기러기 엄마 없나?”
그때마다 ‘별 실없는 분도 다 있군’속으로 고소苦笑하며 귓등으로 흘려보냈다.
그는 앞모습보다 헤어질 때의 뒷모습이 훨씬 멋있었다. 오랜 습관일까. 오른손은 바지 뒷주머니에 지르고 왼손을 서서히 올려 백발이 성성한 머리카락을 여유롭게 쓸어 올리며 특유의 팔자걸음으로 유유히 사라지곤 했다. 악당 두목과 일대일 맞장 결투를 끝장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표현히 떠나가는 서부의 사나이를 연상시켰다.
생각해보니 성도 이름도 모른 채 사오 년을 지냈다. 어쩌면 첫 대면에 통성명 정도는 있었을 성싶지만 그 후로 일부러 애써가며 피차에 호칭할 필요 없이 지냈기에 지금껏 나와 집사람은 그를 지칭할 때 그냥 ‘기러기 아저씨’라 불러왔다.
고등학교 시절 또래 친구들과 군산 앞바다에 있는 비안도飛雁島로 캠핑을 갔었다.
날아가는 기러기를 빼닮았다 하여 붙여진 듯싶은데 모양새가 제법 그럴싸한 데다 섬 이름치고는 꽤나 예쁘다고 감탄했다. 군산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새벽에 출어하는 조그만 어선을 어렵사리 빌어 타고서야 비안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담청홍색 노을이 수채화처럼 번지는 저녁 하늘을 학의 진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본적이 있어 그 생생한 모습이 아직까지도 눈에 선하다. 올굵은 청실홍실이 겹실로 뒤엉킨 듯 바다와 하늘이 경계마저 허무는 한 폭의 커다란 풍광이 화폭처럼 펼쳐 있었다. 너무나 아름답고 적막하여 달콤한 무상감에라도 젖었을까. 아예 학업을 포기하고 눌러앉아 고기잡이나 하며 살면 어떨까. 같지 않은 고민도 해 보았다. 한때 꿈꾸어 봄직한 사춘기의 치기였으리라.
기러기들이 질서 정연한 비상, 실은 멀고 먼 다음 서식처로 떠나는 고난의 여정이겠지만 겉보기에는 무척 평화롭다. 특히 해는 지고 황혼기 잔영이 눈부시게 서려 있는 일몰 후 저녁 하늘에서 “끼룩끼룩”동료를 격려하며 나는 기러기의 대오를 바라보고 있자면 그 정경을 처연한 평화라 해도 될지, 내 표현력이 참으로 부실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기러기도 한 번 짝짓기에 해로동혈한다던데, 사람들은 가족과 생이별하고 집 떠나 짝 잃은 기러기 되어 동서남북, 산지사방으로 날아간다. 아빠기러기 또는 엄마기러기가 되어 일정한 대오도, 함께할 동행도, 확실한 길잡이도 없는 막막하고 고달픈 선택일 듯싶다.
오직 ‘자식 교육열’이라는 미증유의 열대성 난기류를 타고 구라파로, 미국으로, 캐나다로, 일본으로, 호주로, 뉴질랜드로, 중국으로, 소련으로…. 그렇게 길 떠나는 험난한 행보가 이어지고 있다.
핵가족이 또다시 핵분열하는가. 대가족제도가 무너지고 핵가족 시대로 접어든다 싶더니 어느새 그나마 온전치 못하다. 가족이 헤어져 먼 이웃되고 가정은 산산이 쪼개진다.
가족구성원으로 가정이 성립되고, 가정이란 생존 울타리가 온전함으로써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 인식이 가능하다.
요즈음 젊은 세대 사이에 신사조처럼 파고드는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가치 전도 현상도 결코 바람직하다 할 수 없지만, 지나친 자식 사랑과 교육열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가정의 화평에 치유키 어려운 골 깊은 생채기를 자초하는 과욕 현상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게다가 심심풀이 읽을거리 되어 매스컴 가십난에 올라 호사가의 입방아에 까불리는 기러기 가족 뒷이야기도 가슴 아프다.
엉뚱스레 바다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들어 앞 동 지붕 위를 몇 바퀴 선회하더니 상큼 내려앉아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서성거린다. 생전에 기러기 아저씨가 어슬렁대며 걸어가던 뒷모습이 아닌가. 노회한 총잡이, 기러기 아저씨의 혼백이 해구로 되돌아와 예쁜 기러기 엄마 찾아 배회하는 것일까.
사랑은
조사무
사랑은
줄다리기야
티격태격할지라도
금 그어 놓고 다퉈야지
사랑 싸움은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이야
힘겨우면 질질 끌려가
안기면 되지
정녕 사랑이 식었다 싶으면
아예 줄을 놓아 버려
손바닥 마르면
아귀힘도 빠지거든
그래도 그렇지
잘 가라기엔 너무 이르잖아
맨땅에 벌렁 누워
오 분만 참아
행여 그녀가 성큼 달려들어
보듬어 안아 준다면
금방 젖어 들 게야
손뼉이
이날
이때까지
번번히 그래왔던 것처럼
그렇게 말이야
Love is
Love is
Tug of war
It′s better to squabble over
A ruled line.
In lovers′ quarrel
Nobody can get spolia opima
Be dragged if so hard
And be hugged
If it seems love became cold
Let the rope loose;
With dried palms
You can′t hold it anymore
But it′s not the right time
Still early to say goodbye
Lie down on your back
And wait for a few minutes
Let her come along
And embrace you
Then the dried palms
Should be wet again shortly
Keep going as
You′ve done many times
Until now
From the beginning of your love.
나도 마냥 웃습니다
조사무
두엄 더미에 핀 꽃도 함초롬하듯이
길가에 핀 꽃도 의젓하듯이
무덤에 핀 꽃도 곱듯이
꽃은 다 꽃답습니다
배우지는 못했어도 참사람답듯이
가진 건 없어도 풍족하듯이
힘은 없어도 살아지듯이
가욋사람은 없답니다
대학물 마셨다고 누구나 당당한가요
시인이라고 다 떳떳한가요
그게 아닐 테지요
겉욕심 없어서 어엿할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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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US-708이라 불리는 별
초신성超新星이 폭발하면서 튕겨 나갔다는 별
지금 이 순간에도 초속 1,200킬로미터로 항진航進한다는 별
2,500만 년 후가 되면 은하계를 벗어나
우주에서 고아가 되리라는 별
그 별이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은하계 테두리를 벗어나 진입한다는 우주
거기 많고 많고 또 많은 은하계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는데
우주라는 공간에도 과연 안팎이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안은 얼마큼 넓고 밖은 또 얼마나 멀까
사람들이 광대무변廣大無邊의 우주 공간이라 하는데
그 말은 곧 우주에는 끝이 아예 없다는 뜻일까
아니면 있긴 있으되 하도 멀어
그 끝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일까
모를 일이다
우주 공간 한 구석에 빌붙어 기숙한다는
우리 은하계Our Galaxy
그 한 끝자락에 녹두알보다 작고 아름다운 별 하나가
떠돌이별로 떠돈다는데
그 요철세상凹凸世上을 살아가는 인간사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설화屑話라 합니다
떠돌이 이방인으로 하릴없이 들리는
캘리포니아의 클리블랜드Cleveland 산맥
그 산줄기 엉치에 부스럼으로 돋아
뾰루지 같은 팔로마Palomar산
그 메 높은 철철봉凸凸峯과 골 깊은 요요곡凹凹谷이
오늘도 어우러져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저들이
무심無心 결에
그 자잘한 이야기 꽃잎 한 줌 모아 수필집으로 엮습니다
고마운 분들이 참 많습니다. 부족한 글을 평해 주시느라 애쓰신 김태준 교수님, 문학의 길을 밝혀 주시는 영원한 멘토 김영중 선생님, 글 친구이자 아내 조옥규 수필가. 정성껏 마름하여 책으로 꾸며 주신 선우미디어 이선우 대표님, 그밖에 좌절과 회의에 빠져 허우적일 적마다 손 내밀어 주시는 문우님들께 두루두루 감사드립니다.
2015.8
조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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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에게 띄우는 글∥
마법에 걸리다
조옥규 수필가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봄볕은 온천지에 꽃을 피우고 내 마음에서는 기쁨의 꽃봉오리가 터지려 합니다. 나는 꽃단장한 새색시가 되어 새신랑을 기다리듯 마음 설레며 당신의 수필집 출간을 고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첫 데이트를 하던 비원에는 지금쯤 모란꽃이 한창이겠지요. 고궁의 꽃길을 나란히 걸으며 당신은 내게 무슨 마법을 걸었던가요. 단발머리소녀에서 할머니가 되도록 47년이란 세월을 동행하고 있으니 지독한 미혹의 늪에 빠지는 마법이었나 봅니다.
‘나는 밭가는 농부, 너는 쇠등에 앉아 노래하는 파랑새,’ 시골에서 갓 상경한 열여덟 살 소녀는 당신의 달콤한 속삭임에 정신이 혼미해졌지요. 공부하라고 서울로 올려 보낸 부모님의 기대는 져 버리고 내 눈과 귀는 오직 당신만을 향하여 열려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질긴 인연이 시작되었지요.
나는 당신의 사변적이며 시적인 언어를 좋아했습니다. 어쩌다 내가 짜증이라도 부리면 짜증이라도 부리면 당신은 거실의 통유리 창에 빨간 입술연지로 시 한수를 써주며 내 언 가슴을 녹여주었지요. 서가에 책을 정리하다 책갈피 곳곳에 긁적여놓았던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초고시를 읽으며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했던가. 젊은 날의 추억이 아스라이 떠오릅니다.
누군가가 평생을 해로하는 부부를 ‘평생웬수’라고 했다지요. 그만큼 개성과 사고방식이 다른 남녀가 부부로 엮여 원만하게 일생을 함께하기가 수월치 않다는 뜻이 아닐까싶습니다. 생각해보면 문학의 길을 함께 걷는 우리는 참으로 다행인 것 같습니다. 한편의 작품을 탈고하기까지 피 말리는 고뇌의 과정을 서로서로 이해하고 격려해주며 창작의 기쁨도 공유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당신과 길동무이자 글동무로 두런두런 인생과 문학을 논하며 늙어갈 수 있어 행복합니다.
틈만 나면 ‘작가는 발로 글을 쓴다’는 핑계를 내세워 먼 곳 가까운 곳 가리지 않고 여행길에 나서는 즐거움 또한 큽니다. 예전처럼 자식들 문제나 사업이야기로 골치를 앓거나 아옹다옹할 필요가 없으니 오가는 길이 가뿐합니다. 문학에 대하여 논하든가, 서로의 글을 갖고 이러쿵저러쿵하다가 가끔은 의견이 엇갈릴 적도 있지만 그로해서 평생원수야 되겠습니까.
모란의 꽃말이 부귀영화라지요. 우리의 노년생활이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있지만 다행히 함께 지향하는 문학이라는 공동가치가 있어 정신세계는 어느 때보다도 풍요롭다 하겠습니다. 당신의 문학정신을 믿고 응원합니다. 당신의 수필집을 기다리며 가슴이 두근대다니 나는 아직도 그 옛날 당신이 쳐놓은 마법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수필집출간을 축하드리며 건필을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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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무 隨筆集 [※쇠똥 누가 쑤셨나※]
[ 조사무의 문학 세계 ] -
자연주의자의 이상과 서사적 서정시학
감태준
(시인, 문화예술인모임 강변클럽 공동대표)
1.
조사무는 수필가이자 시인이다. 제재에 따라 시로, 수필로-때로는 시와 수필을 동시에 쓰기도 하여 장르에 울타리를 치지 않는다. 목차의 일곱 번째 카테고리인 ‘명시연상’에서는 명시를 읽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연상하는 방법을 취한다. 그의 말을 빌리면 “추상화를 감상하듯 작가의 시적 의중에 구애받지 않고 나름대로 연상하여 쓴 명시감상문”이다. 감상문이지만 운문이다. 자신이 먼저 운을 떼고 명시를 인용한 다음 다시 자기 운문으로 마감하는 식이다. 매우 드문 일이다. 시적 감흥이 일면 수필을 쓰는 도중에도 거림낌없이 시상을 전개한다. 이런 장르의 혼용 내지 형식 허물기는 글감에 따라 최적의 형식을 선택하는 그의 생성적 개성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수필집의 표제 또한 그의 감각에 맞췄을 것이다. 표제를 처음 보고, 수필집에 걸맞지 않다 싶었으나 몇 번 되뇌다보니 그의 개성이 선뜻 다가왔다. 작가란 보통사람과 같은 위치에서 대상을 보되 보통사람 이상의 감각과 사유로 파악하는 존재라는 것을 내가 잠시 잊었던 것 같다.
그의 생성적 개성은 수필집의 차례에서도 나타난다. 차례는 ‘자연 이야기’ ‘문명이야기’ ‘인생이야기’ ‘이웃이야기’ ‘여인 이야기’ ‘명시연상’등 일곱 카테고리로 구성되어 있다. ‘명사연상’등 일곱 카테고리로 구성되어 있다. ‘명시연상’을 제외한 여섯 카테고리의 공통분모는 ‘이야기’이다. 이는 주제를 구현하는 진술 방식이나 태도를 이야기 형식에 맞추고자 하는, 그의 글쓰기의 방법론이다. 따라서 자연․문명․인생․가족이웃․여인 등은 곧 이야기의 소재인데, 얼핏 보면 우리 주위에 널린 글감을 망라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각 카테고리 안에 있는 수필들을 하나같이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내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고자 한다. 무형식의 형식을 가진 것이 수필이라고 하는 데 대해, 작가로서 생각하는 수필의 정의에 맞춰 그 방향과 방법을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 인용문은 수필에 대한 그의 흉금을 피력한 것이면서 문학적 이상을 내비친 글이다.
글, 특히 수필을 읽다보면 작가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다. 수필이란 작가의 정서적 변便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글을 찍어 맛보면 필자의 속내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수필은 아무리 맛보아도 느끼하지 않고 상큼하지 않겠나.
이상李霜의 글, 즉 그의 변에는 곰삭다 만 고단위 영양분결정체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다. 내 입맛이 까다로워서인가, 수양이 모자서인가는 몰라도 그의 작품에 혀를 대보면 속이 거북살스럽다. 짧은 생애동안 서둘러 사변적 고단백질 지식을 폭식한 변이라서 그런지 맛보기가 버거운 편이다.
고승高僧의 글에서는 은은한 향내가 난다. 심산유곡에서 채취했거나 산자락에서 손수 가꾼 채소를 고르고 아껴 소식하고 깔끔하게 소화시킨 뒷내음일 듯싶다.
경세가의 글은 사리와 뜻이 명쾌할지는 몰라도 답답증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다. 양촌 권근(1352-1409)의 응제시가 비록 명문이기는 하나 사대事大로 흘렀고, 제갈량의 출사표가 물 흐르는 듯해도 과욕이 지나치다.
탁주를 동이 채 마시고 차향 그윽한 소변을 보기는 어렵다. 삼겹살을 포식하고 꽃향내 상쾌한 대변을 기대할 수는 없다. 심화心火가득한 작자의 수필은 미사여구가 그럴싸해도 섬뜩함이 있다. 탐심에 젖은 화자의 글에서는 구린내가 진동한다. 대충 씹어 다독多讀한 수필가의 문장에서는 지린내가 풍긴다.(<처남댁과 수필>)
그는 수필의 품격에 높은 이상과 가치의 척도를 두고 있다. 인용문에내 생각까지 넣어 요약하면-‘고단백질 지식’을 담은 내용이라 해도 작가의 내면에서 발효된 것이 아니면 읽기에 ‘거북살스럽다’, 사변적인 글은 더 그렇다.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잃고 ‘탁주를 동이 채 마시면’ 눈이 멀고, ‘삼겹살을 포식하면’ 정신이 흐려지고, 마음속에서 화가 북받쳐 오르면 ‘미사여구가 그럴싸해도’ 태생이 병든 마음이니 일그러진 얼굴을 양반탈로 가린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찌 ‘섬뜩’하지 않겠는가. ‘대충 씹어 다독하고’ 설익은 지식을 펴는 수필가의 글은 겉으로는 현란할지 모르나 음미할 가치가 없다! 그는 시세와 혼탁을 경계하고 참선하여 진리를 터득한 고승의 글을 가장 높이 친다. 그가 “경세가의 글은 사리와 뜻이 명쾌할지는 몰라도 답답증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으며, 양촌권근의 응제시가 비록 명문이기는 하나 사대事大로 흘렀고, 제갈량의 출사표가 물 흐르는 듯해도 과욕이 지나치다”고 하는 이유일 것이다. 추측하건대 그가 읽은 고승의 글은 말을 아껴 쓰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선적 경륜과 이치에 비추어 찬찬히 곱씹고 사유한 끝에 나온 균형 잡힌 글일 것이다. 그러나 ‘은은한 향내가’나고 ‘아무리 맛보아도 느끼하지 않는’ 그런 이상에 부합하는 수필을 만나는 것이 쉬운 일이던가. 김영중 작가의 말대로 “인간을 이해하게 하고 사랑하게 하며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는” 글이 흔하던가. 다행히 그의 수필은 느끼하지 않거니와 인간을 이해하게 하고 사랑하게 하며, 특히 그의 주된 관심사인 자연과 문명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2.
수필은 문학의 어떤 장르보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한다. 언어의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을 자신의 언어와 목소리로 직접 이야기하고, 수필을 읽는 사람은, 때로 그 이야기에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포함시켜 작가와 만나려고 한다. 나도 이 글에서 내 경험과 견해를 포함시켜 작가 조사무를 만난다.
1) 자연에 주는 그의 눈길에서 그 모든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을 읽는다.
젊은이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새 모터사이클경주라도 벌렸나, 야산공터가 말채찍에 상처 입은 노예 등짝 같아 보기에 안쓰럽다. 소인국小人國 영토를 무지막지하게 짓밟고 떠난 걸리버의 구둣발자국처럼 흉측스레 파인 모터사이클 바퀴흔적이 끔찍하다. 주변으로 맥주병, 깡통, 담배꽁초, 비닐봉지, 휴지 등이 흩어져 난장판이다.
오래전 다큐멘터리에서 본 아마존 밀림의 불법벌목현장이 생각난다. 불도저가 매타작하듯 난도질하고 나면 목재운반차량들이 마구잡이로 밀어붙인 시뻘건 흙길, 벌목꾼들에게 집단유린당한 대지의 은밀한 고샅이 저랬다.(<풍뎅이와 거미>)
사람과 자연은 서로 베풀며 평생을 함께 가야 하는 동반자 관계이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이 일방적으로 자연의 세례를 받기만 하는 이기적인 존재이고, 자연은 항시 본연의 자리에 있으면서 말 그대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다. 지구 한편에서는 자연보호다 환경보호다 야단들인데 다른 한편에서는 개발남용과 벌목으로 평원과 밀림을 마구 파헤치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빙원이 녹고 해수면이 올라가도 온실가스를 줄이는 대책은 여전히 미흡하기만 하다. 그가 사는 동네에서 가까운 호수 주변의 야산 공터만 해도 사람들한테 몸살을 앓는다. 마치 “소인국 영토를 무지막지하게 짓밟고 떠난 걸리버의 구둣발자국처럼 흉측스레 파인 모터사이클 바퀴흔적이 끔찍하고” 주변에는 온갖 쓰레기가 흩어져 난장판이다. 증오심을 불태우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증오심을 불태우거나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다. 난장판이 된 현장을 묘사하고, 여기에 얼마 전 기록영화에서 본 ‘아마존 밀림의 끔찍한 벌목현장’을 결합시켜, 눈앞에 벌어진 자연훼손의 참상을 극대화한다. 자연훼손의 참상을 묘사하면서 사람을 매개로 하는 비유들을 원용하는 것도 그런 극대화 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말채찍에 상처 입은 노예 등짝-소인국 영토를 무지막지하게 짓밟고 떠난 걸리버의 구둣발자국-벌목꾼들에게 집단 유린당한 대지의 은밀한 고샅” 등의 생생한 비유는 자연의 아픔이 바로 사람의 아픔과 직결되는 것임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 아픔이 쌓여 결국은 지구 전체를 병들게 할 것이라는 우려를 시에 담아 한 번 더 자연훼손에 대한 심각성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그에게 자연은 어떤 존재일까?
공원 끝자락에 고목이 모로 누워 길을 막는다 와선臥禪 중인 노승처럼 엄숙하고 경견하다. 조심스레 숨을 죽이고 걸터앉는다.(<팔로마에서>)
땅거미가 꼬리를 감출 즈음, 모하비사막에서 하늘을 쳐다보면 말 그대로 별바다다.
먹물을 통째로 뒤집어쓴 것 같은 시에라 산맥을 배경으로 의연하게 버티고 서서 밤하늘을 우러르는 죠수아나무는 성자聖者의 모습을 연상시킨다.(<모하비로 가는 까닭>)
야산이나 들녘에서 개구쟁이 숨바꼭질 하듯 얼굴 살짝 내미는 자잘한 들장미는 생동감 있고 아름답다. 들장미의 그 천진스런 몸짓이, 그 풍요로운 존재방식이, 그 밝고 싱싱한 생명력이 바로 ‘자유로움’이요 ‘자연스러움’ 아닌가.(<파키라 한 그루>)
안개장막 한 귀퉁이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숲의 정령들이 새벽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켠다. 안개구름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멧부리와 심연을 가늠할 수 없는 골짝들이 어우러진다. 안개가 흐물흐물 계곡으로 빠져든다. 골짜기들이 은근슬쩍 불두덩을 드러내고 교태를 부린다. 백두건을 뒤집어쓴 산봉우리들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무심無心일까 유심有心일까.
요즘 무심無心이 만인의 화두다. 마음 비움이 곧 행복의 지름길이라는데 그게 맞는 걸까. 무심이란 도대체 어떤 마음의 상태를 이름일까. 마음을 온전히 비운다는 것이 정녕 가능한 일일까. 모를 일이다. 행복을 위해 무심에 들려는 시도試圖역시 유심이 아닌가. 무심경지에 이르려는 적극적인 유심이 없고서야 어찌 무심에 들 수 있단 말인가.(<팔로마에서>)
그에게 있어 자연은 외경의 총화이다. 인간존재의 유한성 동물성을 넘어선 신성의 요체이고 이상향이며, 원초적 본능을 비추는 거울이자 형이상적 사유의 원천이다. 이른 아침 공원을 산책하는데 “공원 끝자락에 고목이 모로 누워 길을 막”고 있지만 그의 눈길에는 고목이 “와선 중인 노승처럼 엄숙하고 경건”한 존재로 비친다. “산맥을 배경으로 의연하게 버티고 서서” 밤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는 죠수아나무는 성자의 모습이며, “야산이나 들녘에서” 자라는 들장미는 사람의 힘을 들이지 않은 순수와 자유로움, 자연스러움의 표상이다. 어디 그뿐인가. 안개 밖으로 얼굴을 내민 산봉우리와 그 밑에서 “은근슬쩍 불두덩을 드러내고 교태를” 부리는 골짜기는 아담과 이브의 다른 모습이다. 산의 형상, 사람의 정신을 사로잡는 기운은 철학적 화두를 던지고 성차를 이끄는 스승이다.
자연에서, 자연의 조건을 뛰어넘는 자연을 만나는 그는 자연과 어떤 관계인가? 여기에 대한 해명은 자연과 그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 모든 대상을 인식하고 파악하는 그의 눈길을 이해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삼베를 둘둘 말아 염殮한 듯, 거미줄에 칭칭 감긴 풍뎅이가 꼼짝도 않는다. 상엿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왕거미 혼자 능글능글 입맛을 다셔가며 느긋하게 상여를 끌고 간다.(<풍뎅이와 거미>)
라는 표현에 비추면 그는 분명히 자연과 추상적 동반자 이상의 관계이다. 앞에서 ‘자연 훼손의 현장’을 인체에 비유하며 객관적 관찰자의 눈길로 보고, <팔로마에서><모하비로 가는 까닭>등에서도 자연과 자아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었으나, 이 표현에서는 그의 자연인식이 한층 심화된 양상을 띤다. 미물의 죽음이 사람의 일로 전이되고 있는 것이다. 거미줄에 감겨 꼼짝 않는 풍뎅이를 먹잇감으로 가져가는 왕거미가 상여를 끌고 가다니, 이 표현은 자연을 보는 그의 눈길이 사물인식의 차원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말해준다. 사물인식이 보다 진전된 다음 인용문을 보자.
그가 뒤돌아서더니 성큼성큼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바위처럼 듬직한 뒷모습이 팔로마 산 같았다. 휘적휘적 앞서 걸어가는 가을을 놓칠세라, 나도 부랴부랴 하산 길을 서둘렀다.(<팔로마에서 만난 낚시꾼>)
쓰잘머리 없는 걱정으로 속을 태우고 있는데 어느새 산 그림자가 바짓가랑이를 지긋이 잡아당긴다. 그래, 그렇구나,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깜빡했구나.(<길>)
산행을 마치고 하산하는 길, 계곡 물가에서 만난 낚시꾼의 뒷모습을 두고 “바위처럼 듬직하고 팔로마 산 같다”고 한다. 이 표현은 사람을 묘사한 것이지만 한 문장이 두 개의 비유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양상이 매우 특이하다. “바위처럼 듬직한 뒷모습”은 그 자체로 직유인데, 이것을 다시 ‘팔로마 산 같다’고 하면, 비유된 것을 다시 비유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바위처럼 듬직한 뒷모습’이라는 도치된 직유가, ‘뒷모습이 산 같다’고 하는 또 하나의 비유를 거느리는 것이다. 또한 “뒷모습이 팔로마 산 같다”는 표현은 형용사를 지우면 ‘뒷모습=팔로마 산’이라는 은유가 된다. ‘∼같다’를 지우지 않아도 직유의 전형인 ‘∼같이, ∼처럼’등의 연결어를 뒤따르는 술어가 없고,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유사성도 매우 적기 때문에 은유로 봐야 한다. 이렇게 작은 비유에서 큰 비유로, 바위에서 산으로 ‘뒷모습’을 확대하는 눈길은 사람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마음의 강도를 드러낸다. 자연은 이제 자연이 아니다. “산 그림자가 바짓가랑이를 지긋이 잡아당”기고, “가을이 휘적휘적 앞서 걸어가는”존재이다. 그와 능동적으로 교류하는 상대이고, 정신적 깨달음을 주는 인격체이다. 산 그림자와 가을을 의인화하고, “앞서 걸어가는 가을을 놓칠세라, 나도 부랴부랴 하산 길을” 서두르는 행위에 대한 이와 같은 묘사는 수사적 관심 이상의 의의를 가진다. 물아일체物我一體라 해야 하나, 자연(物)과 나(我)를 분리하지 않는 그의 정신세계를 반영하고, 동시에 그와 자연과의 관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연과 나를 분리하지 않는 마음, 그래서 그의 상상세계에 나타나는 자연은 언제나 평화롭고 따뜻하다. 삶의 유한성을 넘어 변증법적 상상력을 수놓고 마음껏 여행하게 하는 열린 세계이다.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향수병이라도 재발하면 만사 제쳐놓고 성묘 다녀오듯” 찾아가 “응석을 부리고 싶은” 공간, 어머니의 품과 같은 거기서 그는 고단한 세상사를 잊은 심안으로 밤하늘을 쳐다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큰별자리가 밤새 우짖는 소리도 들어보고, 날갯짓하는 독수리성좌도 만나보고, 물독별자리에 물이 얼마나 차있나 확인도 해보자”고 한다. 이런 그의 초월적 상상력과 태도를 바탕으로 자연과 그이 관계를 정리하면, 자연만이 자연의 조건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그도 사람의 조건을 뛰어넘어 자연을 만나는 사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종종걸음 치는’ 세상에 돌아오면 그 어디에도 밤새 우짖는 큰개별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독소리성좌도 물독별자리도 그냥 별일 뿐이다. 그나마 공해에 가려 어렴풋이 보이거나 안 보이는 날이 많다. 다음 인용문은 현실에 발목 잡혀 그런 아름다운 세계를 잃은 나무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무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실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사무실을 옮길 때마다 차마 버리지 못하고 십오륙 년 동안 달고 다니는 파키라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오늘도 작고 비좁은 화분에서 연초록 잎사귀를 벌리고 나를 쳐다본다.
오래전에 첸초Chencho라는 직원이 책상 위에 올려놓고 정성들여 기르다가 회사를 떠나면서 정표로 놓고 간 나무다. 당시에 한 뼘쯤 하던 키가 이제야 겨우 두 뼘 반 정도로 자랐다.
원래가 잘 자라지 않는 수종樹種인지, 아니면 제때에 정성들여 보살피지 못해 제대로 크지 못하는지, 그 초라한 모습을 볼 때마다 항상 미안하고 안쓰럽다. 게다가 다른 나무들처럼 꽃망울도 한 번 터뜨려보지 못하고 구석빼기에 다소곳하고 있으니 청상과부 대하듯 애잔스러워 연민을 앓는다.(<파키라 한 그루>)
자연과 벗하고 살아야 할 나무가, 사무실의 비좁은 화분에서 꽃망울 한 번 터뜨려보지 못하고 있으니 볼 때마다 미안하고 안쓰럽다-이렇게 줄거리로 이해해버리면 이 글이 의미하는 바를 놓친다. 여기서는 ‘화분에 사는 나무’와 ‘꽃망울을 터뜨리는 나무’의 대립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그의 내면세계에서 화분에 사는 나무는 갇힌 존재이며, 꽃망울을 터뜨리는 나무는 자연을 누리는 행복한 존재이다. 요약하면 비본연의 삶과 본연의 삶이다. 비본연의 삶에 대해 그는 “꽃꽂이를 보고 있으면 예쁘기는커녕 가슴이 답답하다. 꽃병에 갇힌 꽃도 불쌍하고, 화분에서 비실대는 화초도 딱하고, 울안에 감금된 꽃나무들도 가련하기는 마찬가지”라고 술회한다. 수필집 곳곳에서 드러나는 그의 지향점은 언제나 사람의 힘을 들이지 않은 자연이다. 자연을 그에게 자유와 같은 의미를 가진 낱말이며, 인간다움을 상징하는 얼굴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자연을 그대로 두지 않는가. 가뭄에 타들어가는 “나팔꽃들이 안쓰러워, 집에서 챙겨온 생수 한 병을 송두리째” 부어줄 만큼 자연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그로서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놔두면 몸살해대는 사람들’의 욕망과 불화할 수밖에 없다. 불화의 첫 번째 대상이 여기서는 자연을 그대로 두지 않는 사람들이 이룩한 문명이다.
2) 그 모든 대상을 보는 눈에 어린 감정들
작가 조사무가 이야기하는 문명은, 물론 물질적 사회조직적 발전을 가리키는 문명이지만 이야기하는 방향은 대체로, 자연의 존재방식을 변질시키고 사람과 자연의 정체성을 왜곡하는 문명을 향하고 있다. 19세기말에 ‘문화’를 최초로 정의한 타일러는 문명과 문화를 동일시했다. 그 또한 같은 입장이다. 문명과 문화를 하나로 묶어 이야기해서 안 될 것이 없다는 것이 그의 논리이다. 문명은 사람이 자연을 정복하려는 욕망의 산물이고, 문화는 그 욕망과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정신적 물질적 진보의 산물이라고 하면, 결과론적으로 그의 자연지향과 상충하는 점에서는 유사한 얼굴이라 할 것이다.
북극항로 특별취재팀의 현장보도가 있었다. 동토의 땅 시베리아가 기지개를 켜고, 북극 뱃길이 열린다고 손뼉 치더니 한술 더 떠 지구온난화의 역설적 쾌거라고 사족을 달았다.
빙산을 허물고 빙하를 헤집어 뚫은 바닷길,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가장 짧고 빠른 지름길이란다. 그런데 어찌해서 내 귀청에는 북극곰 통곡소리와 물개들 울음소리뿐 아니라 크릴새우들 흐느끼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일까.
쇄빙선이 사정없이 얼음바다 명치를 쑤시더니 우적우적 갈비뼈를 부셔댔다. 가뜩이나 온난화에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생태계의 마지막 보루이자 버팀목인 북극의 빙원(氷原)이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뭉텅뭉텅 잘려나갔다.(<길>)
팔로마에서, 모하비 사막에서 그토록 서정적이고 긍정적이던 마음은 간 곳 없이 아픔이 가득 배어있다. 북극 뱃길이 열리는데 대한 반가움보다 그 때문에 ‘망가지는 자연’에 대한 염려가 앞선다. ‘환청처럼 들리는, 북극곰 물개 크릴새우들의 울음소리-얼음바다를 파헤치는 쇄빙선이 명치를 쑤시고, 갈비뼈를 부셔대며 빙원을 뭉텅뭉텅 잘라낸다.’ 비명이 가득한 학살현장을 연상시키는 이 표현은 직관적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삶의 자리를 위협받는 생명과 태고의 신비를 잃어가는 북극의 현실을 묘사하면서 얼음바다와 빙원에게 사람과 동일한 인격을 부여하고 감정까지 이입하여 잔인함과 난폭함의 세계를 확대시킨다.
‘자연과 나’를 분리하지 않던 그 부드러운 눈길은 왜 싸늘하게 굳어 있는가. 추상적 동반자 관계를 넘어선 자연이지만 그의 내면 세계에 자리 잡고 있는 평화롭고 따뜻한 그 자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와 자연과의 평화로운 교통을 가로막는 외부세계의 폭력성과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는 <풍뎅이와 거미>에서처럼 ‘눈앞에 벌어진 자연훼손의 참상을 극대화하고 객관화시키는 것이 더 절실한’ 눈길로 비판의 날을 세운다. 비판의 날을 통해 짐작되는 말은 간결하다. 근대 이후 사람이 자연으로부터 급격히 멀어진 것은 사실이며, 이것은 그러나 사람 사는 데 필요불가결한 변화이다. 그렇다고 이성까지 눈멀어서야 되겠는가. 이 말일 것이다.
제동장치가 풀린 문명의 수레바퀴는 멈출 기색이 전혀 없어 보인다. 가속에 가속을 더해가며 카타스트로프를 향해 질주한다. 수에즈운하나 케이프타운 곶(串)을 우회하는 수고로움마저도 감지덕지해야 마땅하거늘 멀쩡한 생 염통살을 도려내듯 굳이 얼음바다뱃길을 뚫어야만 속이 후련할까.
자연에도 길이 있다. 별들의 운행궤로, 지구의 공전궤도, 대기의 순환길, 내와 강이 흐르는 수로, 동물들이 오가는 짐승 길, 날짐승의 귀소길, 물고기들이 오가는 물길, 하다못해 갯지렁이가 들고나는 개펄 길 등등 온갖 헤아릴 수 없는 길들이 있다.(<길>)
그럼에도 사람들은 길을 뚫는다. 그럼에도 상생과 공존의 논리에 따른다면 무슨 잘못이겠는가. 순리와 원칙을 따른다면 누가 무어라 하겠는가. 이것이 작가 조사무의 메시지이다.
1) 요즘 지구촌 도처에서 쥐불놀이가 한창이다. 논밭두렁에서 아이들이 노는 쥐불놀이가 아니다. 생사람 허리나 가슴에 폭탄을 장전하고 인파가 붐비는 곳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점화하는 쥐불놀이다. 대피명령도 없다. 아무도 신난다고 드러내놓고 떠들지 않지만 뒷전에는 어김없이 회심의 미소를 짓는 두목이 있기 마련이다. 그에게 테러는 심심풀이 쥐불놀이나 마찬가지다. 쥐불놀이에 목숨을 던진 사람들은 죽어서 열사대열에 합류한다. 그러니 억울하고 원통하기는커녕 오히려 영광이다.(<쥐불놀이>)
2) 사람들은 권리와 의무를 중요시한다. 그러나 해석은 아전인수식이다. 내 권리가 중하면 남의 권리 또한 그래야 마땅하다. 남들이 의무를 다하기 바란다면 나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남의 권리를 빼앗고 내 의무는 남에게 덤터기 씌우려 한다.
꽃은 꽃다워야 꽃이다. 혁명전선에 꽃들을 앞세우다니 몰염치의 극치 아닌가.(<꽃과 혁명>)
두 인용문은 문명이야기에서 가려 뽑은 것이다. 문명과 문화를 동일시하는 타일러의 시각으로 보자. 1)은 어렸을 때 시골 논밭에서 못 구멍을 숭숭 뚫은 깡통에 숯불을 넣고 빙빙 돌리며 못 구멍에서 빠져나오는 빨간 불꽃이 원을 그리는 것을 보고 재미있어했던, 그런 쥐불놀이를 하듯 아무런 죄책감 없이 테러를 조종하는 자들과 그들의 복면 속에 숨은 이중성, 야만성을 꼬집은 것이고, 2)는 권리와 의무를 중요시해야 할 사람들이 삶이나 세계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외면하고 개인이기주의가 되어가는 세태를 비판한 것이다. 각기 다른 내용이지만, 손가락 끝은 삶의 존재방식을 변질시키고 개인의 정체성을 왜곡하는 존재들을 가리킨다. “공권에 맞서다 맞아죽거나, 제 분을 못 참아 홧김에 스스로 몸에 불을 지르거나” 배후에서 꾸민 대로 “울며 겨자 먹기로 자폭하거나, 제삼의 행동대원이 성냥불을 그어대 얼떨결에 타죽어도 영원한 열사로 다시” 태어나고 영웅 대접을 받는 시대, 장미혁명이니 튤립혁명이니,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 해야 할 꽃을 어찌 혁명전선에 앞세우는가.” 자연을 사랑하는 만큼 세상을 사랑하지만 잡다한 세상사로 이리저리 꼬이고 상처 받은 그의 굳은 옆얼굴이 보인다.
그를 직접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의 정면얼굴을 그리는 것은 어려우나 앞의 이야기에 기초해 세 가지 얼굴을-이 역시 옆얼굴에 지나지 않겠지만, 다시 정리해본다. 첫째는 사람과 자연이 한 몸을 이루어 공존함으로써 자아와 세계가 평형상태를 잃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얼굴이고, 둘째는 문명이 발전하는 것과 비례해 사람들의 가치관 세계관적 기초도 높고 강건해져야 하건만 오히려 역행하고 있는 것을 우려하는 얼굴이고, 셋째는 이념을 가장 해 생명의 존엄성 고귀성을 망가뜨리며 뒷전에서 잇속을 챙기는 세력에 낙담하는 얼굴이다.
1) 이민 온 후 학생이던 아이들과 한 지붕아래 살 때 우리 집엔 검은 고양이 장군이와 흰 고양이 구슬이가 있었다. 온 가족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과 귀여움을 받으며 오순도순 사이좋게 지냈다. 그러나 두 놈 다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 무색하게도 쥐 한 마리 잡아본 적 없다. 종일토록 온 집안구석을 쏘다니며 화병을 부수고 가구에 여기저기 생채기를 내더니 어느 날 새로 장만한 진공청소기 전선줄을 씹어 동강내버렸다. 그렇지만 저들끼리 흑백논쟁 하느라 분탕질 치며 속 썩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보수 대 진보인가. 좌익 대 우익인가. 이념분쟁이 끝날 기미가 전혀 없어 보인다.
자나 깨나 흑백논리에 좌충우돌이요, 제제갈등에다 노사대립이다. 게다가 중도까지 어정쩡하게 끼어들어 혼란에 혼란을 부채질하는데다가 여야극한대치에 지역이기주의와 세대갈등까지 뒤범벅되어 나라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어 보인다.
하는 짓이 장군이와 구슬이보다 못하다.(<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2) 청문회가 가관이다. 인신공격에 사생활 까발리기 난장판이다. 한 사람을 둘러싸고 저마다 날 빠진 부엌칼을 용천보검인양 휘둘러댄다. 그곳엔 연좌제가 버젓하다. 그것도 사돈에 팔촌까지 사정권에 포함된다. 아무리 눈여겨보아도 당사자의 정책집행능력을 점검하고, 공인으로서의 포부나 소신을 청취하는 자리가 아니라 막말, 헛말, 재담, 악담, 악다구니경연장 같다. 뉴욕외환거래소나 증권거래소도 그보다는 질서 있고 조용할 게다.
그리스도나 석가모니도 청문회에 서면 배겨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설령 을파소乙巴素나 황희黃喜가 살아 돌아온들 무슨 소용이랴. 그들이야말로 요즈음 돌아가는 사회분위기로는 반장자리는 고사하고 가장자리도 제대로 지켜나가기 어려울 게다. 두 분 다 성품이나 이재능력으로 보아 지아비구실조차 버거울 테니 말이다.(<여보, 정말 미안해>)
모름지기 작가란 보다 나은 세계를 추구하는 한편 자신의 개인적인 삶은 물론 타인의 삶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하며, 다양한 안목과 방법으로 당대 사회현실을 성찰해야 한다. 그는 이러한 책무를 수행하면서, 많이도 웃고 슬퍼하고 괴로워했다. 그럴 때마다 늘 아련한 그리움을 동반하고 불쑥 찾아오는- 유년과 청년시절을 고스란히 두고 온 한국과 한국의 현실에 절로 눈길이 간다. 미국에 이민 간 이후에도 고국 현실을 총체적으로 보아온 그의 눈에 실망의 빛이 역력하다. 저 한창 때 “통금시간이 임박해 소주에 오징어와 땅콩을 싸들고 광화문 세종대왕 슬하로 기어들어 친구와 날밤을 지새우기도 했던”(<나도 가야지>) 그 “광화문은 풍만한 여인의 품처럼 언제나 넉넉하고 포근한 공간”이었건만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사람들이 광장을 점거하고 북악을 향해 연신 주먹감자를 먹인다.”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넋놓고 바라보던 관광객들이 희한한 볼거리에 희희덕대며 너도나도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을 보면 참기 어렵다. “여야 극한 대치에 지역이기주의와 세대갈등까지 뒤범벅되어 나라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어 보”이는 것은 더 참기 어렵다. 신문에서 보고 텔레비전에도 나오는 청문회 광경은 또 어떤가.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가관이다. “인신공격에 사생활 까발리기 난장판이다. 한 사람을 둘러싸고 저마다 날 빠진 부엌칼을 용천보검인양 휘둘러댄다.” 나라 일꾼을 선보는 자리가 아니라 “막말, 헛말, 재담, 악담, 악다구니 경연장 같다.” 정치가로서 갖춰야 할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식견도 품격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나라의 장래를 맡기고 있는 현실을 보는 것은 더더욱 참기 어렵다. 그래서 그런가, 세월을 의식하는 그의 모습이 무척 고적해 보인다.
한 달 지나면 또다시 새해를 맞는다. 오는 해는 어디에서 오고 가는 해는 어디로 가는 걸까. 해마다 반복되는 춘하추동은 전혀 새로운 사계일까. 해마다 반복되는 춘하추동은 전혀 새로운 사계일까. 풍상에 낡고 헐어 헐거워진 쳇바퀴가 삐거덕삐거덕 소리 지르며 돌고 도는 것은 아닐까.
세월여류歲月如流라던데 정녕 우리는 세월에 몸을 맡긴 채 세월과 더불어 하염없이 흘러가는 걸까. 그게 아니면 세월이 우리 곁을 무심히 흘러가는 것일까.
어쩌면 세월이 흐른다는 발상도 부질없는 망상일지 모른다. 고임도 흐름도 없고 실체마저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 세월일지 모른다.(<엊그제>)
그의 인생에도 가을이 왔나보다. 젊은 날 “참새 방앗간 드나들듯하던 카페 이름이 감감하다”(<인생 이야기>)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다던데,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일까. “술자리 분위기가 어지간히 달아오르면 흥을 못 이겨 놋젓가락을 두드리며 한두 가락 뽑아야만 직성이 풀리던 홍어 집 홍여인, 그녀도 지금쯤이면 타향살이를 접고 향도 유달산자락 어디쯤에서 육자배기를 흥얼대고 있지 않을까.”(<홍어 집 홍여인>) “오늘 아침 거무튀튀한 반점과 주름투성이 얼굴에 머리마저 허연 노인이 나를 멀거니 쳐다보는 거울 앞에 서서 뜬금없이 그녀를 생각했다. 육십 여 년 세월이 흘러서야 그 정겨운 이름이 떠오르다니”(<허풍엄마>) “마음 한 구석에 동공이 하나 둘 늘어간다.”(<하빠의 하루>). 그래도 춘하추동이 때에 맞춰 얼굴을 하고 찾아오는 걸 보면 세월은 “풍상에 낡고 헐어 헐거워진 쳇바퀴”를 돌리며 그 자리에 있는데 인생만 덧없이 흘러가는 듯하다-이야기가 이 지경에 이르면 목소리 어디에선가 물기가 배일 법도 한데 시종일관 건조하다. 시종일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인생과 세월의 실상實相을 조명한다. 그리하여 “세월이 흐른다는 발상도 부질없는 망상일지 모른다. 고임도 흐름도 없고 실체마저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 세월일지 모른다”는 경계境界에 이른다. 경계란 인생과 세월에 대한 그의 개인적 사색이나 성찰이 도달한 경지를 의미하며, 거기에 담긴, 깨달음의 정도가 높고 깊은 것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경계는 지금까지 그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또 진지하게 듣게 하는 중요한 동력이었다.
책을 읽고 있는 할아비에게 심통이 났는지, 손녀가 손짓으로 문밖을 가리키며 칭얼대기 시작한다. 신발을 신겨 손을 잡으려 했더니 매몰차게 손을 뿌리친다. 혼자서 기우뚱기우뚱 발을 내닫으며 잔디밭에서 모이를 쪼고 있는 까마귀들에게 “하이!”하며 손을 흔든다. 까마귀들이 “까악, 까악” 소리치며 유칼립투스나무에 냉큼 올라앉아 손녀를 내려다본다. 손녀가 “압(up), 압(up)”하며 나무 위로 올려달라고 생떼를 쓴다. 그 짓이 귀엽고 깜찍해 죽겠다는 듯 까마귀들이 까만 눈을 깜박거리며 “까악, 까악” 놀려댄다.(<까마귀와 손녀>)
세월의 의미를 캐는 그에게 세월을, 문명과의 불화를, 잡다한 세상사를 불시에 잊게 하는 존재가 손자 손녀인데, 특히 손녀이야기를 하는 그의 마음은 자연과 자아를 동일시했던 거리보다 더 가까운 거리가 있다면 그 편에 있다 할 것이다. 그 모든 관계에 일정한 잣대를 대고 순리와 원칙을 중시해온 그에게도 이런 눈길이 있었는가 싶게 유순하기 이를 데 없다. 인용문에서 보는 것처럼 발걸음 뗀 지 얼마 안 되는 손녀와 까마귀 이야기는 동화 한편이다. 잔디밭에서 모이를 쪼고 있는 까마귀에게 반갑다고 “하이!” 하며 손을 흔들자 “까마귀들이 까악, 까악” 소리치며 유칼립투스나무에 냉큼 올라앉아 손녀를 내려다보고, 또 손녀가 “나무 위로 올려달라고 생떼를” 쓰자 “그 짓이 귀엽고 깜찍해 죽겠다는 듯 까마귀들이 까만 눈을 깜박거리며 “까악, 까악” 놀려댄다.”는 이런 유의 발상은 <팔로마에서 만난 낚시꾼>(송어부부), <괜찮다면>(자카란타꽃과 개미) 등에서도 만난적 있어 낯설지는 않다. 그러나 방금,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인권주의자인 엘리 위젤이 “사랑의 반대개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한 말을 소개하면서, 사랑은 관심뿐만 아니라 “배려가 동반되어야 비로소 사랑이라”고 했던 그의 자상한 마음을 집어넣고 보면-손녀의 눈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할아버지와, 까마귀를 사람인 양 착각하는 손녀와, 민화에서 호랑이를 내려다보는 까치를 연상시키는 까마귀가 한 공간에 어우러진 정경은 그야말로 이번 수필집에서 가장 즐겁고 천진난만하며 아기자기한 그림이다.
지금까지, 조사무의 수필이 가진 얼굴을 크게 ‘자연과 문명, 인생’이라는 세 특면으로 나누어 만나보았다. 자연 이야기에서는 자연과 자아를 분리하지 않는 물아일체의 세계를 지향하는 눈길에서 그의 순수자아를 확인하였으며, 문명 이야기에서는 근대 이후 사람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자연을 더 멀어지게 하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욕망이 그의 자연합일 사상과 충돌하고, 또 문명이 발전하는 것과 비례해 사람들의 가치관 세계관적 기초도 높아져야 하건만 오히려 역행하고 있는 현실에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그의 우울한 눈길을 보았다. 그러나 인생 이야기에서는 자연과 문명 두 이야기에서 볼 수 없었던 담대한 호연지기의 기상과 인간애, 생의 본질을 투시하는 정신이 충만한 눈길을 만났다. 언행일치, 자연합일의 철학적 신념을 일상에서 찾고자 하는 마음도 읽었다. 진정 의미 깊은 만남이었다.
이제 여기서 그의 수필 <파키라 한 그루>에 있는 멋진 표현을 반추하며 시편에 대한 이야기로 자리를 옮긴다. “나도 들장미처럼 자연스럽고 싶다. 파키라 한 그루, 그 연민의 고리에서도 자유롭고 싶다.”
3) 서사적 서정시학
한편 그의 수필들 사이사이에 나타나거나 독립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편들은 수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야기 현식’으로 쓴 것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서사성敍事性을 띠고 있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서사란 원래 그 기본요건으로 일정한 성격을 지닌 인물과 일정한 질서를 지닌 사건을 갖춘, 있을 수 있는 이야기가 등장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을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그의 시를 두고 일컫는 서사성이란 시에 이야기의 요소 또는 사전적인 그 어떤 화소話素를 담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서사성이란 소설 또는 소설적 수필에서와 같은 구체적인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1920년대 프로 시, 특히 임화林和나 30년대 백석白石, 이용악李庸岳의 시들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이야기의 요소가 들어있는 것을 뜻한다. 서사성이 구체적인 사건으로 전개된다면 그것은 이미 서정시가 아니라 서사시의 범주에 드는 것이다. 결국 서사성이란 서정시의 장르적 특성을 그대로 견지하면서 그 속에 서사적인 어떤 이야기의 요소를 담고 있다는 말이다. 이 점에서 시인 조사무의 시는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주제로서 충분히 드러내면서도 서정성을 강하게 드러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에라 산맥 톱날계곡으로 투신한 최후의 인디언전사들
멀쩡한 방죽이라도 들이받았나
사지 뻗고 벌렁 드러누운 모래땅 그 밑으로
봇물 질금질금 새어나오듯
짭짤한 강물 흐른다지
세월이 훌훌 털어버려 비듬처럼 겹쌓이 은사시나뭇잎들
일제히 부스스 몸 털고 일어나
해파리로 부화해 어둠속 떠돌다가
민머리로 암막暗幕 치받고 벗어나
성좌星座로 등선登仙 한다지
태곳적 내해內海에 탯줄 잇고 견딘 산호초珊瑚礁들
하나씩 둘씩 의젓한 죠수아나무로 자라나
모하비인디언들처럼 오순도순 둘러앉아
천부경天符經을 읊듯 두런두런
별을 센다지
산비둘기 두 마리 날밤 꼬박 지새워 희롱戱弄하는가
달그락달그락 키드득 키드득
뼈마디 부딪치는 교성嬌聲 하도 방자해
밤잠 끈 놓친 가을길손도
별을 센다
이 시는 수필 <모하비로 가는 까닭>속에 나오는 제목을 따로 붙이지 않은 작품이다. 화자는 문명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모하비 사막을 여행하다 시에라 산맥에 얽힌 사건과 전설을 상기하고 만감에 젖는다. 시상詩想의 전개는 최후의 인디언전사들이 시에라산맥 톱날계곡으로 투신한 비극적 사건에서 시작해, 톱날계곡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재현한다. 표면상 얼핏 보면 각 연에서 환기하는 이미지의 강렬성 때문에 서사성이 뒤로 물러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서사성이 이미지를 압도한다. ‘사지 뻗고 벌렁 드러누운 모래땅’을 비롯해 ‘은사시나뭇잎들’ ‘산호초-죠수아나무’ 등의 이미지는 제각기 톱날계곡 일대에 전해져 내려오는 옛이야기를 거느린다. ‘사지 뻗고 벌렁 드러누운 모래땅’에는 지하로 ‘짭짤한 강물이’ 흐르고, ‘은사시나무잎들’은 ‘해파리로 부화해 성좌로 등선’하고, ‘산호초’는 ‘죠수아나무’로 자라 ‘두런두런 별을 센다.’ 여기서 화자는 ‘∼다지’라는 반말 투의 종결어미를 빌려, 누구에겐가 전해들은 전설을 다시 다른 누구에겐가 다짐하거나 묻는 어투로 변주한다. 그리고는 넷째 연에서 ‘산비둘기 두 마리’의 소란스런 ‘교성’을 통해 현실세계를 환기시키며 “밤잠 끈 놓친 가을길손도/별을 센다”고 하여, 앞서의 ‘산호초들’이 ‘죠수아나무로 자라나’‘별을 센다’고 전하는 옛이야기에 사실적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그러니까 이 시는 크게 두 개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화자가 노래하는 대상은 ‘톱날계곡’이지만 그 공간은 ‘전설’을 거느린다. 말하자면 이 시는 전경前景으로서의 톱날계곡과 배경背景으로서의 전설, 즉 이미지의 세계와 서사의 세계가 서로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 긴장관계가 무카졸브스키의 이른바 전경화前景化-foregrounding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이 시의 지배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시는 수필 <날 좀 냅둬유>속에 수록된 것으로서, 앞의 시와 같은 서사적 구조화를 보여준다.
고고성 바락바락 지르며
내가 이승에 전입신고 하던 해
여기 누운 사람
이끼 낀 묘비 앞에
시들은 꽃 한 송이 보이지 않는데
비명으로 들려오는
묘비명
- Leave Me Alone!
혼자 보고 발길 돌리기 아까워
앞선 그녀 볼기 한 번
슬쩍했더니
- 날 좀 냅둬유
대중없이 던지는
절묘한 대꾸
그 한 마디
이 시는 화자가 공원묘지를 지나다 인상 깊게 본 묘비명을 기본내용으로 쓴 작품이다. 당시 신장제거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던 그는 막내딸 부부의 제안으로 롱비치 카운티에서 한집살림을 할 작정이었으나 앞으로 닥칠 변화가 염려되어 아내와 함께 현지답사를 하던 차였다. 수필에서 그는, 막상 낯선 지역에서 살려고 하니 지금 사는 곳과 비교될 뿐 아니라 ‘자식들과 뒤엉켜 사느라 불편이 따르면 그 번거로움은 고스란히 아내의 몫이 될 것만 같아 망설임이 전혀 없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시에서는 이런 심경을 내비치지 않거니와 이미지에 의한 묘사보다 묘비명에 주안점을 두고 시상을 전개한다. 줄거리는 화자가 태어나던 해 세상을 뜬 이의 ‘Leave Me Alone!(날 좀 냅두유)’란 묘비명을 “혼자 보고 발길 돌리기 아까워/앞선 그녀”를 슬쩍 건드렸더니 “날 좀 냅둬유”하고 대중없이 던지는, 그녀의 퉁명스런 대꾸가 절묘하게도 묘비명과 일치했다는 내용이다. 앞의 시보다 이미지의 활용 빈도는 약화되었으나, 전경으로서의 이미지(이끼 낀 묘비)와 배경으로서의 서사성(묘비명에 얽힌 이야기)이라는 기본구조에는 변함이 없다. 화자가 “고고성 바락바락 지르며/이승에 태어나던 해”라는 표현이 허두에 나오지만 이것은 묘비명의 주인, 즉 “여기 누운 사람”을 수식하는 이상의 기능을 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전경은 이끼 낀 묘비와 묘비명인 것이다.
표제 시 <쇠똥 누가 쑤셨나>또한 앞의 시와 동일한 구조를 보여주나 앞의 시와 다른 점은 시에서 인과관계에 의해 전경과 배경으로 나누어지는 대목이다.
그리움이 녹아 사랑
그마저 마르면
미움이라던데
녹지도 마르지도 못해
속병 앓는 쇠똥
누가 쑤셨나
짝짓던 쇠똥구리 커플
허둥지둥
피난길 떠나네
첫 연의 “그리움이 녹아 사랑/그마저 마르면/미움이라던데”라는 표현은 독립된 연을 구성하고 있고, 그 자체로 의미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서사성이 전경에 나타나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시행은 둘째 연의 “녹지도 마르지도 못해/속병 앓는 쇠똥”과 종속적 관계이며, 그 의미도 “속병 앓는 쇠똥”이미지를 수식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 연의 ‘누가 쑤신 쇠똥’과 셋째 연의 ‘피난길 가는 쇠똥구리 커플’과의 사이가 인과관계에 있는 것을 보면 ‘누가 쑤신 쇠똥’이미지는 원인이고, ‘피난길 가는 쇠똥구리 커플’이야기는 그 결과이다. 그러니까 이 시는 ‘누가 쑤신 쇠똥’과 ‘피난길 가는 쇠똥구리 커플’이란 두 이미지가 인과관계에 의해 전경으로서의 이미지와 배경으로서의 서사성으로 나우어지는 구조를 가진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특별하다.
또 다른 서사적 특성으로는 문명비판을 주제로 한 시 <풍뎅이와 거미>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시는 전경으로서의 이미지가 ‘하나의 사건’으로 나타나고, 이것이 화자의 내면세계와 접목되어 서사성으로 흐르는 점이 특징이다.
풍뎅이 한 마리 거미줄에 매달려
바동바동 몸부림치더니
왕거미 침 한 방에
부르르
몸서리친다
한 번만 더 용 썼어도
벗어날 수 있었을 터인데
마른 혀 끌끌 차며 돌아서다말고
은근히
지구가 걱정이다
뉴 호라이즌스에 올라 뒤돌아보면
지구도 문명의 덫에 걸려
저리 안간힘쓰다
파르르
자지러지려나
주) 뉴 호라이즌스(New Horizons):명왕성탐사선
이 시에서 화자는 거미줄에 걸린 풍뎅이를 약자로, 왕거미를 강자로 비유하고 있다. 거미줄을 벗어나려고 “바동바동 몸부림치”던 풍뎅이가 “왕거미 침 한 방에” 꼼짝없이 당하는 광경(사건)을 보고 “한 번만 더 용 썼어도/벗어날 수 있었을 터인데” 아쉬워하다 문득 풍뎅이가 왕거미에게 잡아먹히듯 “지구도 문명의 덫에 걸려/안간힘쓰다”끝내 자지러지는 것이 아닐까 염려하는 내용이다.
이 시의 첫 연은 얼핏 독립된 알레고리로 보인다. ‘풍뎅이와 왕거미’의 대립구조가 둘째 연에서 지구와 연관되는 것임을 암시하고, 셋째 연에서는 그것이 곧 ‘지구와 문명’의 대립구조와 유사한 것임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레고리한 추상적 개념을 드러내지 않고 구체적 이미지로 표현하되 끝까지 사실을 위장해야 하는데, 이 시는 셋째 연에서 그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완전한 알레고리 기법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드물게 전경으로서의 이미지-이례적이지만 하나의 독립된 알레고리로 보이는 사건이 나타나고 이것이 배경의 서사성을 구체화시키는 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점에서 방법론적 의의를 갖는다 할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특성은, 전경과 배경을 분리하지 않는 점이다. 작품 <처녀 소가 새끼를 낳았다>는 이미지가 전경에 나타나지만 동시에 서사를 거느리며 서사성이 시 전체를 지배하는 구조이다.
이웃집 처녀소가 새끼를 낳았다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친정엄마도
산파할멈도 없이
고무장갑이 겁탈해 낳은 송아지
이리 뒤뚱 저리 뒤뚱
젖꼭지 찾느라
안간힘 쓴다
아비는 누굴까 성은 무어라 할까
핏덩이 바라보는 처녀어미 소
겁먹은 눈언저리엔
슬픔이 흥건한데
조반도 잊고 싱글벙글대는 주인
저렇게도 좋을까
저러다가
입 찢어질라
이야기는 정상적인 교배를 하지 않고 인공수정으로 송아지를 낳은 어미 소가 “이리 뒤뚱 저리 뒤뚱/젖꼭지 찾느라/안간힘” 쓰는 새끼를 “겁먹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건만 주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송아지 불어난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는 내용이다. 사실주의적 기법과 선명한 이미지를 거느린 서사구조를 통해 현실사회의 물질화 비인간화, 생존방식을 왜곡하는 행위를 꼬집고 있다. 새끼의 아비가 누군지, 성은 무언지, 갑작스런 강제 수정으로 낳은 새끼를 쳐다보는 “처녀 어미 소”는 물질문명의 희생물이자 그 상징이고, “조반도 잊고 싱글벙글대는 주인”은 물질문명과 연장선상에 있는 비인간화의 상징이다. <풍뎅이와 거미>에서 나오는 거미가 ‘싱글벙글대는 주인’이라면, 풍뎅이는 처녀어미 소인 것이다. “고무장갑이 겁탈해 낳은 송아지”는 주인의 태도로 보아 물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시는 본디 그대로의 자연을 옹호하는 그의 정신세계에 반하는 문명을 비꼬는 작품이며, 그 때문인지, 이미지와 서사를 동시에 구사하는 특성을 띤다.
이미지와 서사, 또는 서사와 이미지를 동시에 구사하는 이런 형식적 특성을 가진 시는-제재와 표현 내용은 다르지만 <엑스엑스엑스><느낌표><노욕><사랑은>등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 살핀 서사적 특성을 요약하면 그의 시는 대체로 전경으로서의 이미지와 배경으로서의 서사성이라는 구조를 가진다. 시에 따라 주제를 구체화하기 위해 인과관계를 활용하기도 하고, 특정 사건을 전경의 이미지로 제시하여 서사성을 돕고 주제를 구체화시키는 기능을 추구하기도 하며, 또 전경과 배경을 분리하지 않고 이미지와 서사를 동시에 구사하는 것 등으로 정리된다. 이밖에 은유나 상징 등 수사적 방법을 비롯해 역설과 아이러니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기회를 마련하기로 하고, 이제 그의 해학諧謔이 넘치는 작품 <맹견주의>를 읽으며 시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다.
맹견주의!
으스스 시뻘건 팻말 떨떠름해
까치발 딛고 슬그머니 지나려는데
다람쥐만한 개새끼 한 마리
쪼르르 달려들며
바락바락한다
꼴같잖은 꼬락서니에 하도 기막혀
종주먹 한 대 먹이는 척했더니
불도그 닮은 여인
현관문에 기대
철책鐵柵 두른 이齒 드러내고
날 노려본다
무엇인가 설핏 집히는 것이 있어
-굿모닝!
떨디떫은 인사 옛다 던지고
골목길 꺾어들어
끼득끼득 웃다보니
배꼽 빠진다
3.
인생의 가을 길을 걷고 있으나 아직 푸른 잎을 싱싱히 달고 있는 사무엘 조사무는 시인으로 수필가로 생의 의미에 의미를 더한다. 수필에서는 자연의 순수를 사랑하고, 그처럼 손녀를 사랑하며, 남다른 감수성과 인문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대상을 깔끔하게 구체화시키고, 시에서는 자연이 간직한 신비를 노래하고, 서사적 구조화를 통해, 자연으로부터 날로 멀어지는 문명사회의 폭력성 비인간성을 표백하고 있다. 그의 문학적 성취는 문학으로서의 수필이고자 하는 욕망을 과감히 떨쳐버린 데에서 얻어진다. 문학으로서의 수필이고자 하는 노력은 제재를 실제보다 확대하거나 축소하기 마련인데, 그런 굴레로부터 자유로운 그는 일체의 관념과 추상에서도 자유로이 경쾌한 문장을 얻고, 군더더기 없는 시를 얻는다.
그가 자연과의 평화로운 교통을 가로막는 문명세계의 폭력성과 대립할 때, 그리고 자아와 세계가 평형상태를 잃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때, 그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하다. 그가 그럴수록 더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또 자연과 같이 순수한 존재에 대한 사랑을 아끼지 않는 것은 아직도 현실사회의 물질화 비인간화를 넘어서고자 하는 꿈을 잃지 않은 자연주의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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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사무엘 조사무는 시인으로 수필가로 생의 의미에 의미를 더한다. 수필에서는 자연의 순수를 사랑하고, 그처럼 손녀를 사랑하며, 남다른 감수성과 인문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대상을 깔끔하게 구체화시키고, 시에서는 자연이 간직한 신비를 노래하고, 서사적 구조화를 통해, 자연으로부터 날로 멀어지는 문명사회의 폭력성 비인간성을 표백하고 있다. 그의 문학적 성취는 문학으로서의 수필이고자 하는 욕망을 과감히 떨쳐버린 데에서 얻어진다. 문학으로서의 수필이고자 하는 노력은 제재를 실제보다 확대하거나 축소하기 마련인데, 그런 굴레로부터 자유로운 그는 일체의 관념과 추상에서도 자유로이 경쾌한 문장을 얻고, 군더더기 없는 시를 얻는다.
그가 자연과의 평화로운 교통을 가로막는 문명세계의 폭력성과 대립할 때, 그리고 자아와 세계가 평형상태를 잃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때, 그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하다. 그가 그럴수록 더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또 자연과 같이 순수한 존재에 대한 사랑을 아끼지 않는 것은 아직도 현실사회의 물질화 비인간화를 넘어서고자 하는 꿈을 잃지 않은 자연주의자이기 때문이다.
― 감태준 시인. 문화예술인모임 <강변마을클럽> 공동대표
조사무 선생은 바람의 친구이고 구름의 친구이자 나무와 비의 친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의 친구인 그는 참으로 부지런한 사람이다. 그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창작을 불태우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는 물리적 연령과 상관없이 영원한 청년이다.
또한 풍부한 상상력과 인간을 꿰뚫어 보는 통찰의 눈으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보고 듣고 느낀 대로 자신의 진실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할 말을 차분히 하는 삶의 달관된 모습을 보여주는 작가이다.
― 김영중 시수필가. 국제펜 미주서부지역 위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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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사무 시인. 수필가∥
∙ 본명 조흥원, 실명 조사무엘
∙ 필명 조사무
∙ 황해도 평산군 출생(1940)
∙ 서울중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 <한국수필> 등단(수필, 2011)
∙ <문학시대> 등단(시,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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