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서 함께
요즘 일상생활 중 가장 큰 즐거움의 하나는 한 달에 한두 번 가족과 함께 서울로 여행을 다녀오는 일이다. 내가 주관하는, 일종의 가족 단위 패키지여행이라고나 할까. 최근 몇 달 동안에 걸쳐 서울의 고궁 및 관광 명소 투어를 했는데, 내가 가이드가 되어 목적지를 정하고 찾아가 둘러보며 해설도 해주고, 더불어 근처의 맛집 탐방 및 쇼핑도 함께 하면서 무박 1일 일정의 재미있는 시간을 여러 차례 가졌다.
그동안 경복궁-덕수궁-창경궁-창덕궁-종묘와 서대문독립공원, 남대문시장-동대문시장-광장시장-인사동 등지를 다녀왔는데, 아직도 운현궁, 한옥마을, 한강공원, 남산 등 가서 볼만한 곳이 몇 군데 더 남아 있다. 여기서 범위를 좀 더 확대하면 서울 주변의 가까운 수도권 관광 명소도 얼마든지 있으니, 앞으로도 한참은 더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차 막히는 도로에서 운전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고, 식사 때마다 빠짐없이 반주를 곁들이다 보니 음주운전이 걱정되기도 해서, 그동안 여행의 목적지를 서울로 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내도 운전을 잘하는 편이어서 이제 경기도 일대로 대상을 확대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듯하다.
서울로 갈 때는 가능하면 휴일이 아닌 평일 오전 10시쯤 수원역에서 기차 타고 서울역까지 간다. 마주 보고 같이 앉아서 이야기도 나누고 군것질도 하다 보면 금방 30분이 지나간다. 고궁은 대부분 종로 근처에 모여 있으므로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일이십 분만 가면 되는, 아무런 부담 없는 이동 거리라서 처음부터 쉽게 함께 가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다. 물론 기차표 예매나 여행 일정 짜기, 관광지 안내 및 해설, 맛집이나 쇼핑 장소 선별 등 세부적인 일은 모두 내 몫이었지만, 가족을 위해 기꺼이 가이드가 되어 주기로 했다.
내가 처음 이 여행을 제안했을 때 누구보다도 아내가 가장 즐거워하면서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내는 연년생인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휴일도 없이(명절 때 이삼일 쉰 것을 제외하곤) 장사를 하느라고 바빠서 나와 함께 문화생활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아들과 딸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나 혼자 두세 번 애들을 데리고 서울의 고궁이나 미술관에 나들이했던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아내는 결혼 후 30년 가까이 수도권에 살면서도 고궁에 한 번 와 본 적이 없었으므로, 고궁 나들이를 할 때면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고 감탄하면서 부지런히 사진을 찍고 어린 아이처럼 마냥 즐거워 했다. 어쩌다 같은 모임에 있는 친구나 동창생들과 해외 패키지여행을 몇 번 갔다 온 적이 있는데, 거기서 다른 나라 궁전이나 관광 명소는 더러 가 보았지만, 정작 우리나라 고궁엔 와 볼 기회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주변 산세나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조선 궁전 건축의 아름다움과 고즈녁한 고궁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궁궐의 모습은 역사 드라마나 사극 영화를 통해서 수없이 많이 봤지만, 실제 와 보지 않고서는 그 건축미와 분위기는 도저히 체감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편 생각해 보면, 올해 와서 우리가 이렇게 함께 하는 여유를 갖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와야만 했다. 나는 3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다가 작년 여름 퇴직했고, 아내도 꼬박 20년 동안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장사를 하다가 금년 봄 가게 일을 완전히 정리하고 다시 전업 가정주부의 몸으로 돌아왔다. 딸도 대학교 졸업 후 4번이나 직장을 옮긴 후, 올해 들어서야 비로소 마음에 드는 일자리를 갖게 되었다. 평소 휴일도 없이 근무하지만 한 달에 평균 10일 이상 휴일을 포함하여 평일에도 휴무일을 갖게 되어서, 비로소 우리 세 식구가 시간을 맞춰 같이 오붓하게 가족여행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아들은 특수한 분야에서 일하면서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으므로, 전 가족이 함께하는 여행에 대부분 동참 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부득이 당분간 열외로 하고, 우리 가족 여행은 주로 세 사람이 하기로 했다.)
며칠 전, 경남 창원에 사는 친구가 같이 저녁 식사 하는 자리에서, “그동안 한 번도 부부동반으로 모임이나 동창회에 나온 일이 없었는데, 이젠 농장에도 같이 나가 일하고 여행도 함께 다니고, 허구한 날 붙어 있으려면 좀 지겹지 않은가?”, 하고 물었다. “아니, 아주 편하고 좋기만 해, 내가 서툴고 잘 못 하는 부분이나 좋아하고 싫어하는 거 다 잘 알아서 맞춰 주니까.”, 라고 대답하자, 그 친구는 그동안 보았던 내 모습과 달라서 뜻밖이라는 듯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친구는 평소 아내와 더불어 해외여행도 자주 가고, 우리 모임에도 곧잘 아내를 동반하고 오곤 하더니, 최근엔 본의 아니게 별거하며 주말도 아닌 월말 부부로 살아가고 있었다. 5년 전 아내의 확실한 동의도 얻지 않고, 부모님 계시는 고향으로 내신을 내서 근무지를 옮겨갔는데, 여태 아내가 따라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신세 한탄을 했다. 더구나 지난 여름에 퇴직했는데도, 아내는 두 딸과 함께 계속 수원에서 살기를 고집하며 버티는 바람에, 여태 두 집 살림을 합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전부터 입버릇처럼 고향 근처에다 집을 짓고 한가하게 전원생활을 즐기겠다고 했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이 그는 무척 괴로운 모양이었다. 조만간 졸혼을 하거나 이혼이라도 불사하겠다고 하면서, 잘 마시지 않던 술까지 마시며 하소연하는 모습을 보니, 나하고 전도된 그의 처지가 참 딱해 보였다. “근데, 집사람이 일을 그만 두자마자, 삼차신경통에다 갱년기장애에다 관절염까지 겹쳐서 여기저기 병원 찾아다니며 치료 받고 있지만, 차도가 없고 … 나도 참 걱정이라니까.” 주변을 둘러보면 문제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으니, 너무 상심하지 말고 좀 더 생각해서 좋은 방법을 찾아보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내가 집 근처에다 농장을 마련하고 자유롭게 오고가며 살게 될 줄은 삼사 년 전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 한 일이었다. 어쩌면 아내는 내가 마음 편하게 소일할 수 있는 농장과 작업실을 마련하기 위해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건강까지도 해쳐 가면서 말이다. 그런 고마움 때문에, 내가 자진해서 우리 가족 여행 가이드가 되어 주고, 인터넷에서 음식 조리법을 찾아보고 맛있는 요리도 만들어 주는 착한 행동을 가끔씩이나마 하게 되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겠지만, 예전보다 사는 형편은 여러모로 많이 나아졌어도, 집안의 크고 작은 우환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그래도 요즘은 이따금 내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 네 식구가 늘 함께 지냈던, 옛날의 빛바랜 사진 속에서만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남들하고 어울려 다니며 취미나 여가활동을 즐기다가, 어느 날 문득 아내와 딸이 내 옆의 빈자리를 찾아 들어오면서 생활의 즐거움은 배가되었다. 실로 오랜만에 식구들과 긴 하루를 어울려 지내는 가운데 다시 한번 행복의 거처가 어디쯤인지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고락을 함께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가족의 행복은 알게 모르게 생활의 갈피마다 군데군데 스며들고 있었음을 새삼 깨달은 것이었다.
첫댓글 퇴직 후 놀거리를 못찾아서 괴로운 선배들에게 추천해야겠네요..
이거야말로 소확행이지요..
거창하게 해외여행 같은 거 준비하다가 한번 가보지도 못하느니
작은 여행을 일상화하는 게 더 행복할 거 같네요..
서울 가까운 수도권에 살면서도 뜻밖에도 고궁이나 종묘, 광장시장 같은 곳에 안 가 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 다니면서도 작은 비용으로 얼마든지 여행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게요. 서서히 본인의 색을 찾아가는 여정에 들어섰군요. 지금은 곤포사일리지에 싸여 그 모습을 볼 수 없지만, 눈 내리는 벌판에 세워진 볏단 속을 비집고 들어가는 꿈을 꾸곤 하지요. 잊혀진 보물찾기 여행을 하는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인생 후반기 가족 여행 즐겁게 봤습니다.
예전에 거기서 누렸던 행복을 훗날에 와서 깨닫거나, 미래의 어느 날 찾아올 행복만을 그리며 살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가까운 사람들과 작은 행복을 함께 나누는 생활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실천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평범한 진리를 참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으니 아쉬움이 큽니다.
부럽군요.
서울의 궁 중에서 들어가본 곳은 창경궁 딱 하나 밖에 없어요. 그것도 창경원일 때니 정상적인 궁궐은 아니었던 셈이죠.
경복궁 덕수궁 다 지나만 다녔여요 ^^
서울 가까운 곳에 계시면서도 조선시대의 궁궐에는 못 가 보셨군요. 문학기행 행사 때, 조선시대의 궁중문학이나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궁궐 탐방을 하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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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이 여건을 마련해 주다 보니까 결과적으로 좋은 가장 노릇을 가끔 하게 되었나 봅니다. 살다가 보니 이런 일도 생기네요.....
굿~라이프~^^
제 직장이 3호선 경복궁역 근처에 있는데, 고궁 오셔서 연락하시면 파전에 막걸리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회장님은 조선조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한양의 한복판, 그야말로 우리나라 정치 문화의 중심지에서 근무하시는 군요. 언제 비오는 날 광장시장 같은 데서 파전에 막걸리 한 잔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와 ~
멋지고 부럽습니다
많은이들이 꿈꾸지만 정작 실천하기 어려운 근사한 생활 실천을 하시는군요 ~
저희집도 서로 바빠서
둘이 함께하는 시간이 거의 생략된 생활인데
글을 읽는 내내 대리만족ㅎ
느끼면서
많~이 부러워하며 좋은시간 머물고 갑니다
가족의 구성원들은 가정에 당면한 어려움을 좋으나 싫으나 함께 하기 마련이지만, 정작 좋은 시간은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있다는 단순한 깨달음을 얻기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가능한 좋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많이 가져야 할텐데, 막상 그게 쉽지만은 아닌 게 사실인 것도 같습니다.
뭐 별로 멋진 생활도 아닌데 긍정적으로 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이들어 가면서는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참 편합니다.
굳이 말울 많이 안해도
눈빛으로 서로가 통하는
지금이순간이 행복이지요.
그런데 요즘 주변에는 나이 들어가면서도 서로 비난하고 미워하며 살아가는 부부들도 많이 보게 됩니다. 생활하면서 닥쳐오는 이런저런 어려움은 피할 수 없지만, 가능한 즐거운 일을 많이 만들고 서로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여행을 아주 재미있게 잘하시는군요 부럽습니다. 퇴직하시고 남는 시간을 이렇게 활용하시는 것이
참 좋아 보입니다. 앞으로도 수도권 여행 잘 하시기 바랍니다.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산마을풍경 담은 시와 산문 자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