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의 수락산/靑石 전성훈
11월 중순이 되니 깊어가는 가을을 만나고 싶어 수락산을 찾는다. 산행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생각해본다. 어디에서 출발할까 고민하다가 아주 오랜만에 벽운계곡으로 정한다. 이 코스로 올라가는 게 거의 20년은 되는 것 같다. 40대 초반 젊은 시절 수락산을 처음 찾을 때 즐겨 이용하던 계곡이다. 7호선 수락산 전철역에 내려서 수락산 입구까지는 그다지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수락산 입구로 들어서니 이 지역 관할 노원구청에서 주변 경관에 신경을 쓰면서 산행하기 편하게 바꿔 놓고 있다. 숲으로 들어서 처음 만나는 다리, 장낙교(長樂橋)를 지나면서 그 옛날 어느 해 겨울, 온통 얼음으로 꽁꽁 얼어버렸던 계곡 모습이 떠오른다. 이곳에는 샘물이 있어서 물을 받으려는 생수통이 줄을 이었던 곳이다. 장낙교를 지나서 부담 없이 걸어가면 만나는 벽운교(碧雲橋) 부근에는 예전처럼 배드민턴 동호회 사람들이 모여서 열심히 운동을 즐기고 있다. 벽운교를 지나서 신선교(神仙橋)를 건너서 올라가니 마지막 휴게소였던 터만 있을 뿐, 가게는 사라지고 없다. 오랫동안 무허가 장사였기에 수락산 정비 사업을 하면서 철거되었나 보다. 수락산에도 단풍이 물들었지만, 예년처럼 울긋불긋한 모습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누렇게 변한 나뭇잎이 대부분이고, 간혹가다 붉게 예쁜 모습을 한 단풍나무가 보이기도 한다. 이 모두가 인간이 저지른 기후 변화의 탓인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주위를 둘러보며 느긋하게 걷다가 눈에 들어오는 게 보여서 사진을 찍는다. 수락산 초록 숲길의 참나무에 관한 이야기다. 다람쥐 밥으로 알려진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를 참나무라고 하는데, 참나무는 여러 종류가 있어 구별하기 쉽지 않다고 한다. 수락산에서 자라는 참나무는 갈참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그리고 떡갈나무가 있다고 한다. 나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자라지 못한 탓에 꽃과 나물 그리고 나무에 대하여 아는 게 거의 없다. 자연과 더불어 자란 사람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기가 죽고 부러운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땅에 떨어진 도토리 열매를 보다가 생각나는 게 있다. 도토리로 만든 음식인 도토리묵, 콩나물 그리고 참외는 지구상에서 우리나라 사람들만 먹는다고 한다.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바다의 보물인 김도 서양사람들이 먹기 시작한 게 불과 얼마 전이라고 한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시작한 산행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오늘따라 수락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혼자 온 여성, 남녀가 다정히 걷는 커플, 일행과 함께한 사람, 가슴에 이름표를 달고 무리를 지어 찾아온 사람 등, 많은 사람이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가을 산을 찾고 있다. 깊어가는 가을 산을 즐기려는 마음으로 산을 찾아 나섰는지 모른다. 그렇게 한참 올라가니 어디선가 딱딱 나무 파는 소리가 들린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다. 수락산에는 청딱따구리, 쇠딱따구리, 큰오색딱따구리, 오색딱따구리가 살고 있다고 한다. 나무 파는 새는 다 딱따구리인 줄 알았더니 그 종류가 다양하다. 딱따구리는 병들어 죽은 나무에 기생하는 벌레들을 잡아먹기에 숲속의 치유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다. 산속이라 그런지 찬 기운도 느끼지만 땀이 많이 나서 겉저고리를 벗어서 배낭에 집어넣고 걷는다. 이제 수락산의 그 유명한 깔딱고개를 앞두고 있다. 어느 산이나 깔딱고개는 있지만, 수락산은 급경사 바위를 밧줄을 잡고 올라가야 한다. 깔딱고개는 수락산 정상, 장암역, 그리고 수락산역 방향으로 갈라지는 곳에서 시작한다. 30분에서 40분 정도 정말 숨을 헐떡거리며 올라가야 하는 어렵고 힘든 곳이다. 젊은 그 시절에도 힘들고 땀을 많이 흘렸던 기억이 난다. 이제 칠십 대 중반을 향하는 나이에 이 길은 위험하고 무리인듯하다. 내 앞을 스쳐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중간에 포기하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기에 여하튼 그냥 올라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코스는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헐떡거리며 ‘마의 계단’을 올라서니 마음이 뻥 뚫리는 듯하고 뿌듯하다. 하늘도 푸르고 날씨도 화창하고 맑아 도봉산 3형제 자운봉, 성인봉, 만장봉과 북한산 인수봉과 백운대가 바로 눈앞에 보인다. 정상 부근 햇살이 잘 비치는 넓은 바위에 앉아서 심호흡하면서 쉰다. 이제는 하산길이다. 올라오느라고 고생한 다리에 신경을 쓰면서 천천히 내려간다. 조선왕조 말기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잠시 피신하였던 용굴암을 거쳐서, 원효 스님이 지은 천년 고찰 학림사로 내려가는 데 기분이 좋다. 조금은 피곤한 느낌도 들지만, 가을 경치를 만끽하니 정말 기쁘다. 학림사를 지나서 4호선 종점인 당고개역으로 향한다. 이 동네 오래된 맛집인 ‘엄마손칼국수’ 집에 들러 육수와 생 만두를 사서 집으로 간다. 거의 25년 가까이 다니는 단골집으로, 이 집 만두전골은 그야말로 맛이 끝내준다. (2024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