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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윤(문리대동기,영문학과)의 애국지사 아버지 모시기 2015/03/01 23:21 | 추천 0 스크랩 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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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윤은 나의 문리대 동기생이다. 그러나 전공은 다르다. 나는 불문학이고 그는 영문학이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소설쓰기와 대학강단에서 일생을 살았고, 안광윤은 전공을 바꾸어 모교 경영대학원을 나와서 산업계로 뛰어들었다. L/G에 들어가 회사의 별이라는 이사를 지내고 정년하였고, 이어서 자기 사업(식당)을 펼쳐 크게 성공하였다. 그는 부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안광윤의 아버님은 독립유공자이신 안병구 선생이다.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모셔져 있다. 안병구 지사는, 당시 광화문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한 서울 조선문화학원 중등부에 재학하고 있었다. 이 학교는 인문학교지만, 같은 재단의 조선부기학원, 조선공학학원등은 해방후에 오늘날의 한양대학교로 발전하는 모태가 된다. 당시 동아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중학생 안병구의사는 시골인 충북 괴산에서 유학온 학생으로서, 늘 조국을 무력지배하는 일제의 압제에 저항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동료학생들의 반일감정 고취에 앞장섰다. 그러한 반일적인 생각과 행동은 학교당국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1940년,학교 근처에 있는 사직공원의 공원정문에 걸려 있는,일제의 국세조사선전 입간판에 "대한독립만세"라는 커다란 먹물글씨가 써붙여지게 된다. 일경의 조사에서 글씨를 써붙인 학생이 안병구 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경은 안병구 학생을 심하게 고문하였고, 기소하여 결국 여러 차례 공판 끝에 징역 2년의 선고를 받았다. 안병구 옹은 유관순 열사가 투옥되었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일제의 혹독한 2년간의 옥살이를 용케 견디어 만기 출소하였다. 출소 후 해방될 때까지 숨어서 줄기찬 반일운동을 하였다. 안병구 옹의 이런 항일경력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아들 안광윤은 2000 년까지 어른께서 독립유공자라는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 사실을 전해들은 동기생 고혜령 박사가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으로 재직하였기에, 관련 자료를 찾아냈다. 문서로 된 재판과정과 재판결과, 그리고 결정적으로 동아일보에서 수형복을 입은 안의사의 사진을 찾아낸 것이다. 안병구 옹은 생시에 자신이 조국광복을 위한 애국지사로 추앙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고, 당국의 상당한 우대를 받으셨다. 그후 돌아가셔서, 대전국립묘지의 애국지사 묘역에 이장되었고, 모친과 합장되었다. 친구로 옆에서 보건데, 광윤의 아버님에 대한 존경과 자부심 그리고 효성은 대단한 바가 있다. 광윤은 살고 있는 아파트릐 방한칸을 추모의 방이라 하여 아버님 추모의 공간을 만들었다.그는 그후 광복단체에 자동 가입되어 각종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기부도 하고 있다. 작년 가을에는 광복단체의 문경 이강년 의병장과 박달 지사의 묘역방문에 필자를 초청하여 같이 갔다온 적도 있다. 사람의 일생은 공적인 면과 사적인 면이 있다. 공적인 면이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고, 사적인 면은 개인적으로 혹은 개인단체를 위해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적인 일을 하면 배가 고프다.나라에서 주는 댓가란 쇄미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치부가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생계의 지속을 위한 월단위의 녹봉 즉 월급이기 때문이다. 좀 풍족하게 살려면 사적으로 일해야 한다. 그러나 사후에 영광은 이 가난한 공직자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진다. 사람은 결국 어느 한 나라의 단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31절을 맞아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울분을 저항으로 몸부림쳤던 어린 안병구 학생의 투혼이 새삼 되새겨진다. 그래서 친구 안광윤이 성공한 사업가로서가 아니라, 애국지사의 아들로서 그가 우럴러 보이는 것이다. 필자는 광윤에게 고향 괴산에 안병구 지사 기념관같은 것을 지으라고 말한 적이있다. 안 지사가 거창한 무기와 병력을 지닌 의병장이나 독립군이 아니라, 어린 중학생이었기에 후세 어린 학생들의 애국교육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의견을 말한 적이 있다. 며칠 전, 광윤의 초청으로 자신의 아버님이 수형생활을 하셨던 서대문형무소를 같이 방문하였다. 36년간 일제가 자행한 잔혹함이란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을 지경이었다. 일본도로 한국인을 끓어 앉혀놓고 생으로 목을 치는 것은 다반사였다. 형무소 감방 벽면에 걸려 있는, 수형을 산 애국지사들의 수많은 사진 중에서 안의사의 사진을 찾아내어 같이 묵념하였다. 대한민국이 지상에 존재하는 한, 이 사진은 영구히 보관될 것이다. 이것이 남자의 일생이다. 사람은 자기 개인을 위해서만 살아서는 아무것도 안된다. 남을 위해서, 나아가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민족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사람은 민족과 나라라는 단위에 의해서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것같다. 이름을 남겨봐야 뭐하나 하지만, 그것도 하지 않으면 한 사람의 일생은 너무나 허무하다. 일생을 살았다는 어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존재가 인생이다.
서재필등 개화파들이 고종을 설득하여 청나라 사신들을 환영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그 뒷에 구 서대문 형무소의 유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서대문역사문화관으로 바뀌어 전시되고 있다. 정소성과 안광윤이 서 있다. 독립문 앞에 두개의 커다른 초석이 헐린 영은문의 초석이었다.
제일 위줄 가운데가 중학생신분으로 일제에 항거하다 서대문 형무소 투옥되어 2년의 형을 산 안병구의사이다.
31 절을 맞아 아버지의 수형생활을 추모하기 위해 서대문역사문화공원(구 서대문형무소)을 찾아 묵념하는 안광윤문 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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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교수님 건안하시지요. 3월 1일,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미제가 많은 나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에게 이 날이 오면, 우리는 무엇한 사람인가 반문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