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덕후가 영화를 구한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대중문화의 총아다. 80, 90년대 스필버그의 가족주의적 성향을 두고 할리우드의 싸구려 감상주의로 폄하하는 이도 있었고 흥행을 위해 시네마를 파괴한다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던 건 반대로 그만큼 흥행감독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다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스필버그에겐 몇 차례 변곡점이 찾아온다. 첫 번째는 <쥬라기 공원>(1993)이다. 당대 구현 가능한 기술의 집대성이랄 수 있는 이 영화는 상상한 것을 현실 이미지로 만든다는 스필버그 또는 할리우드의 기술적 정점에 해당하는 영화다. 두 번째는 <A.I.>(2001)다. 이 유장하고 아름다운 영화를 통해 스필버그는 자신 안에 시네마의 호흡이 자리잡고 있음을 증명했다. 대중문화의 모험자에서 영화의 순례자로 전환. 블록버스터의 상징이 할리우드 클래식 최후의 수호자로 변모한 아이러니. 하지만 실은 스필버그는 처음부터 그랬다. <E.T.>와 <환상특급>(1983)을 만들면서 <컬러 퍼플>(1985)과 <태양의 제국>(1987)을 만들던 연출가. 달라진 게 있다면 속도와 호흡이다. 대중적인 평균율에 맞추던 그의 호흡은 점차 느리고 완만해져 장면들을 꼼꼼히 탐구한다. 영화의 밀도가 급격히 올라간 것도 <A.I.>부터다. 그리고 느리게 (혹은 장중하게) 속도를 조절할 줄 알게 되자 보이지 않던 것들, 이를테면 인간의 어둠과 트라우마(<캐치 미 이프 유 캔>(2002)), 현실의 더러움(<링컨>(2012)), 공동체의 두려움(<우주전쟁>(2005)) 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극적인 변화의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단언할 순 없다. 혹자는 <후크>(1991)의 실패 이후 피터팬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게 됐다고 평가하고, 누군가는 칸국제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던 <슈가랜드 특급>(1974)을 예로 들며 시적이면서도 친절하고 탄탄한 서사가 그의 본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을 보면서 새삼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다름 아닌 아이의 시선이다. 영화가 꿈을 현실로 만드는 매체라면 최적의 자리는 어린아이의 눈이다. 스티븐 스필버그로 다다르는 경로는 다양하겠지만 결국 도달하게 되는 장소는 어린아이의 상상력이다. 꿈을 현실로 만드는 원더랜드. 할리우드가 원했던 것이라 해도 좋겠다. 70년대 스필버그는 쇼크와 혁신으로 그 비전을 열었고, 80년대는 가족드라마와 보편타당한 감성의 평균점에 맞추었으며, 90년대는 기술의 힘을 빌려 구상했던 것들을 현실로 만들었다. 달리 표현하자면 80년대의 스필버그는 스스로 아이가 되고자 했고, 90년대의 스필버그는 어둠을 통해 일련의 성장통을 겪었으며 2000년대의 스필버그는 이제 아이였던 시절을 회상한다. 뒤돌아보는 자가 상상한 세계. 스필버그의 원더랜드는 이제 일종의 회고담처럼 보인다. 다만 그 회고담을 최적의 현재진행형의 형태로 포장하는 것이 스필버그가 도약을 멈추지 않는 비결이다.
어니스트 클라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레디 플레이어 원>은 80년대 대중문화의 향수를 응축시킨 영화다. 2045년, 경제 붕괴로 인해 암울해진 미래 사람들은 가상현실 게임 오아시스(OASIS)에서 위안을 얻는다. 뭐든지 할 수 있는 오아시스를 창조한 천재 개발자 제임스 할리데이(마크 라일런스)는 게임 속에 숨겨진 3가지 미션을 달성하고 우승하는 사람에게 오아시스의 소유권과 막대한 유산을 상속할 것이라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모험을 꿈꾸던 사람들은 열광했지만 동시에 부작용도 발생했다. 거대 기업 IOI가 막대한 자본과 노동력을 바탕으로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 있는 빈민가 이모의 트레일러에 더부살이를 하던 소년 웨이드 와츠(타이 셰리던)는 성배의 기사 퍼시발이란 아이디로 활약 중인 유명 플레이어다.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그는 80년대 대중문화와 제임스 할리데이에 흠뻑 빠진 진정한 게이머다. 제임스 할리데이의 인생에 녹아든 80년대 문화들을 분석해 나가던 웨이드는 모두가 놓친 힌트를 발견하고 첫 번째 미션을 해결한다. 이후 웨이드의 동료들과 이를 방해하려는 IOI의 본격적인 대결이 펼쳐진다.
스필버그가 이 이야기에 끌린 건 너무 당연해 보인다. 게임을 중심축으로 하고 있지만 <레디 플레이어 원>의 핵심은 게임 속 이스터에그로 숨겨져 있는 80년대 대중문화다. 게임 속 가상세계에 대한 애정 없이 착취와 돈벌이 수단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IOI 사장을 향해 “속으로는 대중문화를 비웃고 있잖아!”라고 일갈을 날리는 웨이드의 모습은 스필버그의 내심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고 즐겼던 대중문화, 그 자체를 사랑하고 존중받길 바랐던 스필버그의 바람과 달리 당대 스필버그에 대한 평가에는 다소의 조롱과 가치 폄하가 담겨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성공한 덕후가 시도할 수 있는 최상의 덕질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다만 쿠엔틴 타란티노나 기예르모 델 토로 등 B무비의 쾌감을 대중문화 중심으로 끌고들어온 것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당대 대중문화의 정수들을 한껏 탐닉하되 이를 구성하고 포장하는 방식은 철저히 안전한 고전 할리우드 드라마를 따르기 때문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에는 최신 게임의 캐릭터, 다수의 아이콘이 등장하지만 그건 흥미를 돋우는 양념 정도의 기능에 그친다. VR, 3D 등 현란한 시각효과로 장식된 듯 보여도 기술을 한겹 벗기고 보면 <구니스>나 <E.T.> 혹은 의 감성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어쩌면 이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황금률이 어디까지나 소년의 시선에 맞춰져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스필버그가 서 있는 위치가 바뀐 만큼 고개를 돌려 그 시절을 되돌아보는 향수에 가까운 작업이지만 이것을 다시금 현재화하고야 만다.
대립항의 합으로서의 스티븐 스필버그
2000년 이후의 스필버그의 행보는 얼핏 자기 분열적으로 보인다. 한쪽에는 대중문화의 첨병으로서 기술을 자랑하며 이야기를 쉽고 친절하게 전달하는 블록버스터 감독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이제는 스크린에서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할리우드 고전영화들의 우아한 속도에 도취된 장인이 있다. 스필버그가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를 만들고 <뮌헨>(2005)을 선보였을 때 사람들은 그 거리감에 당황했다. 동시에 전장 한복판에서도 가족주의를 신봉하던(<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 감독이 어느새 미국 중산층의 해체와 공포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때 일단의 평론가들은 낯선 가운데에서도 환호했다(<우주전쟁>). 게다가 그는 동시대 인정받던 여타 감독들이 그 자리에 머무른 채 도돌이표를 찍는 사이 홀로 유유히 도약하지 않았던가. 최대 다수의 대중을 만족시킬 줄 아는 빼어난 감각의 장사꾼인 동시에 묵직한 걸음으로 시대를 조망하는 작가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유일하다. 대중과 예술, 좁힐 수 없는 간극이라고 여겼기에 모순된 요소들의 총합을 그저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고유명사로 이해하고 넘어간 게 사실이다. 이 시점에 다시금 좋아하는 것을 만끽하는 쪽으로 돌아간 <레디 플레이어 원>은 일견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흔적들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하나로 묶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늠자처럼 보인다.
지금의 스필버그를 이해하기 위해선 할리우드의 맥락부터 간략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2015년 87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오프닝 공연은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했다. 뮤지컬 형식으로 진행된 닐 패트릭의 공연은 21세기를 맞이한 할리우드의 고민과 해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 모든 건 다 무빙 픽처 덕분이죠. 그림자와 속임수, 눈앞에서 벌어지는 마술쇼 같죠. 우린 왜 영화를 사랑할까요. 영화는 다 허구인데 말이죠. (중략) 스크린의 수많은 픽셀들. 영화는 허구일지 몰라도 인생의 진짜 의미를 보여주죠. 한장의 이미지보다 더, 한명의 유명인보다 진심으로 영화는 우리가 누구인지 보여줍니다.” 허구의 이야기와 가상의 이미지를 조각해 도달하는 즐거움 혹은 진심. 할리우드가 영화를 통해 추구한 궁극의 목표는 바로 거기 있다.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왜 필름(Film)이나 무비(Movie)가 아니라 무빙 픽처(Moving Pictures)인가 하는 점이다. 나는 그것이야말로 21세기의 할리우드가 영화에 대해 내놓은 답이라고 생각한다. 여기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필름에 빛을 찍어낸 물질로서의 영화와 움직이는 이미지, 다시 말해 환영으로서의 영화다. 하나는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는 현실의 지표이자 리얼리즘의 형식으로서의 영화, 사실주의의 영화들이다. 다른 하나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도구로서 무엇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담아낼 수 있다고 믿는 영화들, 표현주의에 속하는 영화들이다. 물론 두 가지 사이(혹은 바깥)에는 무수한 영화들이 놓여 있지만 큰 줄기로 보자면 영화를 떠받치는 가장 거대한 두개의 기둥임에 분명하다. 할리우드는 시작부터 표현주의를 표방해왔다.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안을 궁리하며 숱한 문법들을 창조해온 것이다. 이 시점에 무빙 픽처, 움직이는 그림이라는 선언은 영화의 경계를 한겹 확장시키려는 시도로 읽힌다. 필름, 질료, 고전적인 영화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본질로 돌아가겠다는 선언. 중요한 건 환영을 어떻게 현실처럼 느끼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 방식은 중요치 않다. 굳이 필름이 아니라도 좋다. 필름시대에 체득한 연출문법을 활용할 수도 있고 CG, 게임 등 다른 매체로부터 특징을 일부 흡수해올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움직이는 그림’으로 진심을 움직일 허구를 창조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허구가 진실 이상의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리얼리티 이즈 리얼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모든 경계를 허무는 과정이 그와 같다. 2000년 이후 그의 행보는 좁혀지지 않는 평행우주를 넘나드는 것처럼 보였다. 가족용 오락영화와 클래식한 시대극, 상상의 극단인 SF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스필버그의 필모그래피는 자기 안에서 대립한다. 마치 사실주의와 표현주의처럼 따로 계보를 짤 수밖에 없는 두 기둥이 한 사람의 창작력 안에서 뽑아져나오는 모순. <레디 플레이어 원>은 겹쳐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속성이 어떻게 하나의 우물에서 뿜어져나올 수 있었는지를 증명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가상현실인 오아시스와 트레일러 빈민촌을 중심으로 한 현실세계가 대략 6:4 정도의 분량으로 펼쳐진다. 현실과 가상의 공간을 구축하고 있지만 실상 영화 속 모든 공간은 실제 지역성이 지워진 일종의 무대에 가깝다. 오하이오주 콜럼버스나 IOI 회사는 미래라는 시점을 제공할 뿐 복합한 정체성이나 역사를 보여주지 않는다. 특히 공간 디자인마저 포화상태에 이른 인구밀집도를 반영하여 위로만 확장되고 포개어져 있는 상태다. 반면 가상공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계로 무한히 펼쳐져 있다. 얼핏 가상이 실재 같고 실재가 가짜 같은 공간 구성. 하지만 스필버그는 진짜같이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아시스의 공간은 매우 사실적으로 구현되어 있지만 아바타들의 디자인은 어디까지나 인공적인 느낌을 지우지 않는다. 단지 실재와 가상을 구분하기 위한 장치라고 여기면 단순하겠지만 지금의 CG 기술은 그 경계를 지우기 충분한 수준에 와 있다. 스필버그가 여기서 일부러 다시금 가상을 환기시키는 건 게임의 본질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라고 믿는다. 게임의 그래픽을 높여서 시각적 쾌감의 극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 플레이 자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시스템, 이른바 ‘게임성’의 복귀다.
게임은 재밌어야 한다. 게임 스토리텔링은 긴 체험 시간을 목적으로 이 감각을 달성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다. 그래픽, 사운드 등 기술적인 구현은 그 일부 요소일 뿐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세 가지 미션이 점점 예전 게임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스필버그는 게임의 본질, 영화의 본질, 즐거움의 본질에 집중한다. 아마도 최근 스필버그의 호흡이 유달리 유장하고 우아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그가 새로운 호흡을 익혔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 호흡이 자신이 믿는 영화적 진실을 알리는 데 가장 적절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이야기에 휩쓸리지 않고 잠시 느리게 걷는 사이 새겨지는 표정과 스며드는 진실들. 스필버그의 실화영화에서 고전 할리우드영화의 향수가 느껴지는 건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이야기에 가장 적절한 속도를 찾아낸 결과물이다. 재미있는 게임이 게임성에 집중하는 것처럼 스필버그는 영화적인 것에 집중하는 중이다. 그리하여 기술을 자랑하지 않고 현실인 척 모방하지도 않으며 눈앞에 있는 영화 그 자체를 즐기도록 문을 열어둔다.
현재 할리우드가 선택한 길은 필름도, 디지털도 아닌 ‘무빙 픽처’다. 한때 할리우드는 리얼리티를 리얼로 만들기 위해 소모적인 방식으로 기술을 갈고닦아왔다. 환상의 힘이 현실을 압도하고 보는 이가 허구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마술은 성공 직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엔 넘어설 수 없는 마지막 장벽이 있다. 영화는 극장을 벗어나는 순간 깨어나는 약속된 오락이라는 사실. 말하자면 무엇을 하건 영화는 영화다. 반대로 극장을 벗어나는 순간 그것은 더이상 영화가 아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웨이드는 모험의 끝에서 동경하던 할리데이를 만난 뒤 깨닫는다. “리얼리티 이즈 리얼.” 가상의 리얼리티는 현실에 대한 모방이나 흉내와는 다르다. 현실을 압도하고자 욕망하는 대립적인 관계도 아니다. 리얼리티 역시 어엿한 또 하나의 사실이라는 단순 명료한 체감. 그 사실을 자각하고 인정할 때 우리는(영화로 대표되는) 가상의 환영을 순수하게 즐길 수 있다.
다시, 스필버그의 근간은 무엇인가. 어떻게든 즐거움을 발견하고야 마는 아이의 시선으로 지금 이 자리에 놓인 것을 즐기는 것이다. 허무할 정도로 단순 명쾌한 답변. 역사를 현재화하고(<더 포스트>(2017)), 지금 이 자리의 현실정치를 투영하며(<링컨>), 즐거운 환상을 직접 눈으로 만끽하고자 하는 고집(<레디 플레이어 원>). 즐거움의 현재화라고 할까. 그것을 위해서라면 손안에 쥔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사용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게다가 서사의 조율에 관한 한 스필버그는 최상의 기능인이 아닌가. <레디 플레이어 원>이 새로운 장을 개척하는 영화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를 본다는 즐거움을 이만큼 제대로 환기시키는 영화도 드물 것이다. 마치 최신 그래픽으로 리메이크한 고전 명작 게임을 플레이하는 기분, 심지어 초월 이식됐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다. 80년대 대중문화를 만끽했던 사람은 향수에 젖어, 처음 접한다면 익숙한 스토리라인을 따라, 게이머라면 이스터에그를 찾는 재미와 함께 각자의 방식으로 즐기면 족하다. 어떤 구태의연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오직 영화를 본다는 (만든다는) 행위, 그 즐거움에 몰두하는 <레디 플레이어 원>은 <A.I.> 이후 스필버그의 세 번째 변곡점, 아니 원점이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