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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크도다(마 15:21-28)
우리는 몇 주에 걸쳐서 믿음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나의 의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이 아니하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운데 성령이 임재하시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참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깨닫고 변화되어지고 능력을 힘입어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뿐 만 아니라 참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었다면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믿음의 증거입니다. 또 참믿음은 겸손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역사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 모든 역사도 주관하시고 나도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상황이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을 믿기에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크게 칭찬하고 큰 믿음이라고 인정하신 이야기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 땅에 사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큰 믿음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양문교회 모든 성도들이 큰 믿음의 사람이 세워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팔레스틴 북부에 있는 지중해 해안 도시국가였습니다. 그곳은 주님이 주로 활동하시던 갈릴리와 멀지 않아서, 주님이 가끔 그곳에 가서 전도하셨는데, 거기서 가나안 여인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 여인이 주님을 향해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다며 부르짖은 겁니다.
가나안은 원래 이스라엘 땅의 원주민이었으나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쫓겨난 이방인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은 감정이 험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8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세상에 이런 찬사는 없습니다. 제자들도 들어보지 못한 말입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무엇이든 네 소원대로 되리라.” 제자들은 믿음이 크다는 칭찬은 커녕 툭하면 믿음이 없거나 작다는 책망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방여인은 주님으로부터 극찬을 듣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이 여인이 어찌하여 예수님께 큰 믿음이라고 칭찬받았는지를 살펴보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큰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가나안 여인은 큰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본문 22절에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라고 하였습니다. 메시야를 고대하던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경멸하였지만 이 이방 여인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야라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조차도 부정한 메시야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함으로써 바른 신앙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완악한 모습과는 달리 여기 가나안 여인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그녀는 이방 종교의 환경 속에 있었음으로 진리에 대한 지식은 빈약했을지라도 그 진리되신 예수님을 만나자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고 자신의 문제를 내어놓고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여기 '흉악히'는 '위험할 만큼 해로운'의 뜻으로 그녀의 딸의 흉악한 귀신이 사로잡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자녀의 고통은 부모의 괴로움입니다. 특히 자녀가 귀신이 들려 미쳤다는 것보다 더 큰 괴로움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이 영적인 문제 앞에 딸이 온전해지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그녀는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간구입니다. 그녀는 자기의 인간적인 어떤 공로에 호소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자비하심에 의존하였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내 딸의 문제를, 내가 안고 있는 이 슬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세주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 체면을 가리지 않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녀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만이 내 딸을 고칠 수 있는 권세있는 메시야이심을 확신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부를 때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막연히 기대하는 외침이나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 가운데도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가 아니라고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여인의 입에서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선지자가 예언했던 구원자로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사람으로 부르느냐 하는데에 믿음의 본질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구약전제의 핵심은 바로 메시야가 오심으로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해 확실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자, 내 딸을 흉악한 귀신에서 자유케하실 유일하신 메시야라고 믿었습니다. 오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십니다.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 유일하신 메시야이십니다. 이 고백을 믿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주라는 고백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여자가 행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십시오. 정말 예수를 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박대를 해도 당신을 개로 취급을 하여도 모욕을 주어도 종된 나는 주인의 처분대로 순종하겠다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진정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나의 주인인가를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분을 정말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우리 믿음이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보면 예수님이 주인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개 취급을 받으면 절대로 그냥 가만 안 있습니다. 주인에게 대듭니다. '은혜를 안주시면 안주시지. 나보고 개라고요?' 그런데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모욕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묵묵히 그분의 처분대로 끝까지 기다리는 이 여인의 태도를 보십시오. 구약의 욥이 그랬습니다. 엄청난 환란을 당하였습니다.
그 많던 재산도, 자식도 건강도 다 하루 아침에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 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참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우리가 있어야 할 주되심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누가 뭐라해도 예수님은 나의 주되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상심할 때도 있고 시험들 때도 있고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주인의 자리에서 끄집어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주인된 자리를 침범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겁도 없이 침범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믿음은 예수님의 메시야되심과 주되심을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저와 여러분도 다 가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난관을 극복하는 믿음입니다.
본문 23절에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여인이 주님의 뒤를 따라가며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아무리 큰소리로 외쳐도 주님은 한 말씀도 안 했다는 겁니다. 이보다 더 답답한 경우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늘 우리가 기도하며 겪는 가장 일반적인 시험입니다.
나는 지금 절박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주님께 부르짖지만, 주님은 아무 반응도 없이 침묵하고 계십니다. 응답이 없습니다. 이것처럼 힘들고 외롭고 절망스런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 많은 사람이 이 첫 번째 단계에서 나가떨어집니다. 70-80%는 다 여기에서 실패합니다. 우리는 다들 조급해서 참거나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응답이 없으면 쉽게 체념하고 포기하여 기도를 접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르면 주님이 당장 응답하셔야 하는데, 실제로 그런 경우는 많치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과 진정성을 확인하시려고 언제나 최대한 침묵하십니다. 우리의 인내심, 진정성을 시험해 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거기서 걸립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인을 보십시오. 그녀는 주님의 침묵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포기하거나 낙담하여 기도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소리로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며 기도합니다.
이게 맞습니다. 주님의 기대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커다란 난관이었습니다. 그녀는 순간 이러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즉각적인 응답을 받았는데 나는 왜 거절을 당해야만 하는가? 이런 분이 정말 인자하고 사랑이 많다고 하는 분이신가? 왜 나에게만 이렇게 냉정하시는가? 그러나 예수님이 한 말씀도 대답지 않으신 것은 그녀로 하여금 더욱 열심히 기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그녀가 당한 어려운 난관은 제자들의 거절이었습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23절). 그런데 제자들의 이 말은 가나안 여인에 대한 동정심에서가 아니라 시끄럽게하는 그 여인을 빨리 쫓아버리기 위한 이기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이 여인의 태도를 보니까 포기하지 않고 가는 곳마다 따라 다니며 계속하여 소리를 지르면 시끄러워서 견딜 수 없을 것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평안을 위하여 예수님께 이 끈질긴 여인의 간구를 허락하시도록 간청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불쌍한 여인의 문제 해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평안을 추구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비쳐주고 있습니다. 이 때 주님은 다시한번 거절하십니다. (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이러한 끊임없는 거절앞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5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예수님의 무시와 냉대 그리고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욱 가까이 접근하여 무릎을 끓고 예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냉대와 예수님의 무관심도 이 여인의 열심을 꺾지 못하였습니다. 여기 '절하다'는 말은 미완료형으로 그녀가 예수님의 발 앞에서 계속 연이어 절하고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 '저를 도우소서'라는 말은 긴급한 구조를 요청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흉악히 귀신들린 딸의 문제로 예수님께 거듭거듭 절하며 긴급구조요청을 하는 끈질긴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그녀는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기도응답이 없어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합니다.
이 여인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흉악한 귀신에 사로잡혀 고통하는 딸을 예수님이 아니면 희망이 없다, 예수님만이 내 딸을 고칠 수 있다는 절대 믿음과 이제 내 딸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이것 뿐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가나안여인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난관이 있다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가로막혔습니다. 뒤에는 애굽군대가 수많은 철병거를 이끌고 쫓아옵니다.
앞에는 큰 홍해바다가 가로 막고 있습니다. 좌우는 광야입니다. 도망갈 길이 없습니다. 그 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를 원망합니다. 출 14:10-11,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그런데 여기 믿음의 사람 모세가 있습니다. 출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은 어떤 장애가 있다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불평하거나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행하실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받았습니까? 이렇게 난관에 부딪혀도 포기하지 않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도 여기까지 나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자기십자가를 진 믿음이었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이 당한 시험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더 무서운 시험이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다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주님의 거부와 모욕이었습니다. 24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6절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사실 이 시험이 가장 무섭고 절망적이고, 난이도가 가장 높은 치명적인 시험입니다. 이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시험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씀도 안 하던 주님이 ‘나는 오직 이스라엘 사람만을 위해 보냄을 받았으니 이방인은 내 소관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여인이 나를 도와달라고 하니까, 주님은 도저히 참기 어려운 모욕적인 말을 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어찌 개에게 던지겠느냐?’ 유대인은 전통적으로 이방인을 개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나 이방인은 잡혼을 한다고 해서 개라고 불렀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원색적인 욕입니다. 이쯤 되면 극도로 맘이 상해 욕이나 저주를 퍼붓고 그냥 돌아서지 않겠습니까? 우리 같으면 펄펄 뛰며 구원이고 뭐고 다 둘러엎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누구든 내 자존심을 건드리면 못 참습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인을 보십시오.
주님으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들었으나 거기에 맞장구를 치면서, 개가 주인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듯이, 제발 이 천하고 불쌍한 저에게도 부스러기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여러분, 정말 주님의 은혜를 바라고 사모하십니까? 주님 앞에서 이 가나안 여인처럼 자신을 완벽히 내려놓으십시오. 자신을 비우십시오. 우리 주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빌립보서 2장 6절 이하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이 되신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마태복음 16:24절에서 분명하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이 완성되었지만 그 구원을 내가 온전히 이루기위해서는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죽여야 할 것은 자아(자기 교만, 자기 욕심, 자기 과시, 자기 생각, 자기 자랑)입니다. 이 일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자아가 죽지 않은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를 드러냅니다. 교만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옳은 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살펴보는 사사기가 바로 그런 사람으로 가득한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세상 물질과 세상권력을 쫓아가다가 결국 이방인의 종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땅을 정복하고 넘치는 은혜를 받았지만 하나님을 떠나고만 영적인 암흑시대를 이루고 말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 다음에 있는 것이 바로 부활의 영광입니다. 영원한 승리입니다.
왜 우리의 삶가운데 문제가 그리 많습니까? 내가 죽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내 자아가 죽지 않아서 문제가 그리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예수님의 생명과 향기가 나타나기 위해서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자아를 매순간마다 죽게 하여 주소서!”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이 큰 믿음, 어느날 갑자기 생긴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를 외면하고 자기를 무시하고 아니 자기를 개처럼 멸시하여도 주인되신 예수님앞에 자기 무릎을 꿇습니다. 엎드려 절합니다. 경배합니다. 27절 보십시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여기까지 내려갔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졌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개입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며 부디 부스러기라도 달라고 해야 주님이 감동하십니다. 이렇게 주님 발 앞에 납작 엎드려 주님 말씀하신 대로 저는 잃어버린 양이 아니라 이방의 개입니다고 하며 부스러기 은혜를 청한 그 여인에게, 주님은 지체하지 않고 ‘여자야 네 믿음이 크다. 내가 지금까지 본의 아니게 심한 말을 했다. 너야말로 위대한 믿음을 가졌다. 내가 졌다. 네가 이겼다. 무엇이든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이 여인에게 은혜를 받은 겁니다.
한 번도 그 누구도 주님을 이렇게 감동케 한 적은 없습니다. 주님의 침묵에 인내하고, 제자들의 훼방에도 굴하지 않고, 주님의 심한 모욕에도 끝까지 겸손하게 엎드린 이 모든 게 다 그녀의 믿음에서 나온 사실임을 주님이 인정하셨습니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자 그 시간에 그녀의 딸이 낫습니다. 만약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을 안고 그냥 주님을 떠났다면, 딸은 고사하고 평생 지울 수밖에 없는 상처 외에 무엇이 남겠습니까?
정말 주님의 은혜를 바라신다면, 꼭 주님의 모든 시험을 통과하십시오. 그 시험을 통해 믿음이 확인되어야,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1)큰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2)난관을 극복하는 신앙입니다. 3)십자가를 진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바라보고 절망적인 환경을 초월하게 합니다. 이 믿음은 바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나의 주인되심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큰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