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 12,1-4ㄱ; 2티모 1,8ㄴ-10; 마태 17,1-9
+ 찬미 예수님
지난 한 주간 안녕하셨어요?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오늘 미사의 본기도 라틴어 원문과 우리 말 번역이 차이가 있는데요, 라틴어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 저희에게 사랑하시는 아드님 말씀을 들으라고 명하셨으니, 저희 내면을 당신 말씀으로 길러주시어, 영적인 눈이 정화되어 당신 영광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Deus, qui nobis diléctum Fílium tuum audíre præcepísti,
verbo tuo intérius nos páscere dignéris,
ut, spiritáli purificáto intúitu,
glóriæ tuæ lætémur aspéctu.
우리는 두 가지 은총을 청했는데요, “우리 영적인 눈이 정화되게 하소서.”와 사랑하시는 아드님 말씀을 듣게 하소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우리와 늘 가까이 계신 분이 계십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우리는 이분을 마주하고, 잠자기 전 마지막에 만나는 분도 이분입니다. 내가 혼자 있거나 외로울 때도 늘 나와 함께 계시고,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새로운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내 옆에 계십니다. 이분은 누구실까요?
스마트폰님이시죠? 우리는 스마트폰 알람이 일어나라고 하면 일어나고, 잠자기 전에도 알람을 맞춰드리고 잠이 듭니다. 혼자 있거나 외로울 때면 내 손에 들려 있고, 나에게 끊임없이 누군가의 소식이나 새로운 영상을 보여주십니다. 많은 학생들은 횡단보도를 건너면서조차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데요, 아마 외계인이 지구에 오면 ‘아, 지구인들은 저것을 숭배하나보다, 저렇게 길을 가면서도 그분께 예배 드리고 있구나’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청년성서연수 강의할 때 ‘스마트폰의 기도’라는 것을 만들었는데요, 들어보실래요?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신 스마트폰님
액정이 더 밝게 빛나시며
5G의 나라가 오시며
와이파이가 실내에서와 같이 길에서도 터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쇼츠를 주시고
카톡에 제때 답하지 않는 이들을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배터리의 방전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번호 이동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스팸 문자에서 구하소서.
까똑.”
우리는 하루에 얼마나 스마트폰을 사용할까요? 처음에는 하루 사용 시간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이제는 무덤덤해져 있지는 않은지요? 스마트폰에 쏟는 시간보다 하느님과 보내는 시간을 1분이라도 더 길게 갖는다면 우리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교회는 전통적으로 사순시기 동안 단식과 기도와 자선을 강조해왔는데요, 오늘날 음식 뿐만 아니라 귀의 단식, 눈의 단식, 말의 단식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첫째 귀의 단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너무나 많은 것을 듣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 필요한 소식도 있지만 몰라도 되는 이야기,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과 근거 없는 소문에도 쉽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사랑하시는 아드님 말씀을 듣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레오 교황님은 올해 사순시기 담화문에서 탈출기에 나오는 하느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탈출 3,7). 교황님께서는 하느님께서 경청의 모범이라고 하시며,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경청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경청은 상대방의 말과 마음에 집중하여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귀 기울이시듯 우리 또한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 성경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 고통받는 이웃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 이것이 귀의 단식입니다.
둘째, 눈의 단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이미지와 영상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눈도 피로하게 하지만 우리의 정신과 영을 흐려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루 동안 주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살펴야겠습니다.
그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대상을 갈망하고, 닮고 싶어 하게 됩니다. 예수님 성화, 성모님과 성인들의 성화가 우리 집에서 눈에 잘 띄는 곳에 걸려 있는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가려서 들을 뿐 아니라 가려서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눈의 단식입니다.
셋째, 말의 단식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 사람을 죽이는 말’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는데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사람을 살리는 말인지, 죽이는 말인지 늘 살피며 말해야겠습니다. 마태오 복음 1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껄인 쓸데없는 모든 말에 대해서 심판 날에 해명해야 할 것이다.”(마태 12,36) 하루를 마감하면서 오늘 하루 내가 한 말이 주님 앞에서 해명할 수 있는 말들이었는지 성찰해야겠습니다. 이것이 말의 단식입니다.
귀의 단식, 눈의 단식, 말의 단식은 적게 보고, 적게 듣고, 적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것을 보고, 중요한 것에 귀 기울이며, 남을 살리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오늘 독서에는 ‘복’이라는 단어가 다섯 차례 나옵니다. “내가 너에게 복을 내리며”라는 말씀은 히브리어로 “아브레케카”인데, ‘아브람’과 발음이 비슷합니다. ‘아브람’이라는 단어에 ‘복’이라는 뜻의 단어(버라카)가 이미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 내리신 복은 무엇일까요? 지난주 제1독서에서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기 전, 하느님과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서로와도 조화로운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통해 이 조화로운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은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서로의 관계가 조화롭게 회복되는 것으로서, 이로부터 영적, 정서적, 심리적, 물질적 풍요로움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복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너를 큰 민족(나라*)이 되게 하겠다.”라고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시는데, 이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통해 구체화됩니다.
지난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또 “여기서 뛰어내려 보시오”는 악마의 유혹을 하느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기적적인 행위를 통해서 증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들으십니다.
오늘 복음에 함께 등장한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서 즉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백성들로부터 버림받고 반대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버림받음과 반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수난의 길을 앞두고 제자들 마음속에서 걸림돌을 치워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산에서 당신의 거룩한 변모을 보여주십니다. 그들은 마침내 깨달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할 것이고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들에게 높은 자리를 달라고 예수님께 요구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약함을 알고 계셨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지금 겪는 고난과 시련이 잠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너머에 주님과 함께 누리는 영광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이 거룩한 변모는 미사 중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는 성변화가 바로 거룩한 변모입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으면서도 우리 눈이 가리워져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본기도에서 “우리 영적인 눈이 정화되어 당신 영광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귀의 단식, 눈의 단식, 말의 단식을 통해 우리가 정화되어 주님께서 우리 옆에 있는 형제자매의 모습으로 변모해 계심을 알아 뵈올 수 있기를, 우리가 영성체를 하며 주님의 몸을 영할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기를 청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딸, 내 마음에 드는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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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큰 민족(나라*)이 되게 하겠다."(창세 12,2)
* NAB, NRSV, JB 등 거의 모든 영어 성경이 nation(나라)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독일어 역본 Einheitsuebersetzung은 Volk(민족)로 번역하는가 하면, 이탈리아 역본 CEI 1974년판은 popolo(민족)로 번역했다가 CEI 2008년판에서 nazione(나라)로 번역했습니다. - Victor P. Hamilton에 의하면, 여기에 쓰인 단어 goy는 주로 이방 국가들을 지칭할 때 사용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이 큰 민족(am)이 되리라고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은 이미 롯과 함께 민족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축복은 이스라엘이 아브람을 통하여 여러 나라(goyim) 중에서 큰 나라(goy)가 되리라는 축복입니다. 아브람에게서 왕들이 나올 것이라는 약속(창세 17,6)이나 사라 역시 왕들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약속(창세 17,16), 그리고 히타이트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하느님의 제후’(창세 23,6)라 부르는 구절 등이 이를 반증합니다(Hamilton, 371-373).
주님의 거룩한 변모, 타볼산 거룩한 변모 성당, 이스라엘
출처: Transfiguration on Mount Tabor | Israel To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