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25) ‘토마스의 예수 유년기’
[해제]
지금의 신약성서에 들어 있지 않은 복음서·사도행전·사도들의 서간과 묵시록 따위가 교부시대에 많이 나돌았는데 통칭해서 신약 외경이라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토마스의 예수 유년기」이다. 그 내용인즉, 어린 예수가 다섯 살부터 열두 살 사이에 행한 여러 가지 기행을 적은 것이다. 어린 예수는 하느님의 기운을 듬뿍 받은 신동이라 병자를 고쳐주고(8.10.15.16장), 죽은 이를 되살린다(9.17.18장). 그런가 하면 초능력으로 자연에 이변을 일으킨다. 자연이적도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한다(2.11~13장). 한마디로 예수는 자랄 때부터 지혜와 능력이 뛰어난 신동이었다는 얘기다. 우리 속담에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이 있다. 예수는 공적으로 활약하실 때 비로소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영능을 발휘하셨다는 것이다.
누가 이 소품을 썼는지 작자는 영영 알 길이 없다. 다만, 150년경에 시리아 지방의 어느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사랑하고 존경한 나머지, 공관복음서를 참고하고 거기에 상상의 날개를 펴서, 예수 소년 시절을 소재로 해서 그리스어로 예수 공상소설을 썼다고 보면 무난하겠다. 이제 「토마스의 예수 유년기」의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겠다.
“명하노라, 죽지말고 살아서…”
[내용]
예수 아기가 다섯 살 때 있었던 일이다. 안식일에 예수 아기가 냇가 얕은 여울에서 진흙을 개어 참새 열두 마리를 만들며 놀았다. 어느 유다인이 지나가다가 이를 목격하고 곧장 예수의 아버지 요셉에게 가서, 예수 아기가 참새를 열두 마리나 만들었으니 안식일법을 어겼다고 고자질 했다. 이에 요셉이 와서 보고 예수를 꾸짖으니까, 예수는 가타부타 일체 대꾸하지 않고 손뼉을 딱딱 쳤다. 그러자 진흙으로 빚은 열두 마리 참새가 모두 날개를 쫙 펴고 짹짹거리면서 훨훨 날았다(2장).
예수 아기가 여섯 살 때 있었던 일이다. 성모 마리아가 예수에게 물 항아리를 주면서 샘에 가서 물을 길어오라고 했다. 예수 아기가 물을 길어 오다가 혼잡한 군중에게 부딪쳐 그만 항아리가 박살났다. 그러자 예수는 겉옷을 벗어 땅에 펼쳐놓고 쏟아진 물을 담아서 마리아에게 갖고 왔다. 마리아는 이 기적을 목격하자 예수 아기에게 키스하고 이 신비스런 일을 마음속에 고이고이 간직했다(11장).
예수 아기가 여덟 살 때 있었던 일이다. 파종 때 요셉과 예수는 밀을 심으러 갔다. 예수는 밀알 한 개를 심었는데 이듬해에 수확해보니 밀이 백 섬이나 되었다. 그러자 예수는 나자렛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을 불러서 그 많은 밀을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요셉에게 드렸다(12장).
요셉이 아들 야고보에게, 땔감나무를 해오라고 하자 예수 아기도 따라나섰다. 야고보가 물거리 땔감나무를 모으다 그만 독사에게 물려 뻗어버렸다. 그런데 예수 아기가 야고보의 상처 자국에 입김을 불자 야고보는 깨끗이 나았고 독사는 갈기갈기 찢겨져 죽었다(16장).
옆집 머슴애가 죽자 그 어머니가 구슬피 울었다. 예수 아기가 가서 머슴애의 가슴을 만지면서 『명하노라, 죽지 말고 살아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라』하니까 머슴애는 눈을 뜨고 웃었다. 예수는 아이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이를 데려가서 우유를 먹이시오. 그리고 저를 기억하세요』(17장).
사람들이 집을 짓다 말고 몹시 소란을 피웠다. 예수께서 가까이 가서보니 일꾼 하나가 죽어 있었다. 예수는 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명하노니, 일어나서 일을 하시오』 그러자 일꾼은 벌떡 일어나서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18장).
예수가 열두 살 때 있었던 일이다. 과월절을 맞아 예수는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 갔다. 예루살렘에서 과월절 축제를 지내고 가족이 고향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는 홀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친척들과 동행하려니 여기고 하루 동안 길을 가다가 예수를 찾아보았으나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찾아보았다. 사흘 만에 성전에서 아들을 되찾았는데, 놀랍게도 예수는 원로들과 율사들과 더불어 율법과 예언서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었다. 성모께서 아들에게 『몹시 놀라서 너를 찾아다녔다』고 하자, 예수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제가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대꾸하였다.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마리아에게, 『당신이 이 아이의 어머니요?』라고 묻자, 마리아는 『예, 그렇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저들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부인들 가운데서 복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당신 태중의 아기에게 복을 내리셨으니까요. 이 아이에게 드러나는 영광과 영예와 지혜를 우리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예수는 일어서서 어머니를 따라가서 부모에게 순종했다. 부모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했다. 예수는 슬기와 키가 자랐다(19장).
19장 이야기는 루가 복음서 2장 41~52절에 나오는, 12세 소년 예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베끼면서 조금 변조한 것이다.
[성찰]
영웅 위인들의 잉태·탄생·성장·종생에는 으레 전설이 따르는 법이다.
예로, 석가모니의 소년 시절에 다음과 같은 자연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어느 날 석가가족의 부왕과 어린 왕자가 농사를 참관하러 갔다. 어린 왕자는 염부수라는 나무 그늘 아래서 쉬다가 그만 무아경에 빠져들었다. 한참이 지나서 보모들이 와서 보고 깜짝 놀랐다. 다른 나무들의 그늘은 다 옮겨갔지만 염부수 그늘은 여전히 어린 왕자를 가려주고 있었던 것이다(케네스 첸 지음, 길희성.윤영해 옮김, 「불교의 이해」, 분도출판사 1994, 34쪽).
멀리 갈 것 뭐 있겠나. 하찮은 내 어린 시절도 전설로 아롱져 있는데. 일례로 경북 상주 우리 집에선 어머니와 내가 성경구절로 대화했다는 얘기다. 아침에 어머니가 나를 깨우시려고 『소년아, 일어나라』라고 하면, 나는 이불 속에서 나오기 싫으니까 『여인이여, 저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라고 대꾸했다는 것이다. 누가 이런 허무맹랑한 낭설을 만들었을까, 몹시 궁금하다. 실화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게 인생인가보다. 단지 상상이 지나쳐서 공상·환상·망상으로 빠지지 않도록 조심할 일이다.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24) 대 그레고리우스의 ‘편지’에서
“성서 읽기를 간절히 권유함”
[본문]
당신께서는 영적 능력, 부유함, 자비의 선물뿐만 아니라 거룩한 삼위일체로부터 사랑의 선물을 받으셨지만, 세상사로 말미암아 늘 바쁘고 여러 가지 많은 일에 끊임없이 참여하여 당신 구원자의 말씀을 날마다 읽는 데에 소홀하였습니다.
성서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피조물에게 보내신 편지가 아닙니까? 당신께서 만약 여행 중에 세속의 황제가 보낸 편지를 받으셨다면, 세속의 황제가 쓴 편지를 읽기 전에는 쉬지도 잠자지도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들과 천사들의 주님이신 하늘의 황제께서 여러분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당신께 편지를 보내셨다면, 매우 고명하신 당신께서는 그 편지를 열심히 읽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영원한 것을 더 열망하고 당신의 영혼이 하늘의 평화를 간절히 바라면서 불타오르도록 하느님의 말씀을 알기 위해 날마다 노력하십시오.
- 대 그레고리우스의 「황제 주치의 테오도루스에게 보낸 편지」
“연인의 편지라면 보고 또 봤을텐데”
[해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그리스인들만 친구로 삼으십시오. 다른 야만인들은 짐승 다루듯 해야 합니다』라고 조언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야만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그리스어로는 「바르바로이」였다. 본디 야만인이라는 낱말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버벅거린다는 의성어였다. 이 낱말은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나온 전형적인 유물이다.
4~5세기의 교회도 제국의 경계 밖에 있는 야만인에게 그리스도교를 선교하려는 열의를 보이지 않은 것 같다. 대 그레고리우스 교황에 이르러서야 다른 민족에 대한 시야가 넓어진다. 그에게 야만족들은 제국의 적이지만 동시에 구원의 대상인 하느님의 자녀였다. 이 편지는 이러한 열린 시각을 지닌 대 그레고리우스가 쓴 857통의 편지 가운데 하나이다.
이제는 통신수단이 너무 발달하여 편지를 이-메일로 주고받다보니 편지에도 사람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다. 가끔, 아니 일 년에 한두 번 친필로 쓴 편지를 받으면, 그 내용이 평범한 이야기일지라도 읽고 또 읽곤 한다.
그런데 그 편지가 몇 년 간 떨어져 있던 어렸을 때의 친한 벗이나 매우 보고픈 연인에게서 왔다면 상황이 또 틀려진다. 편지를 안주머니에다 넣고 다니면서 보고프면 장소와 시간에 상관없이 읽어볼 것이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내셨다. 우리 마음에 회개와 참회의 정신을 되살려 주고, 죄의 용서를 받는데 도움이 되며, 당신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라는 내용이 담긴 매우 긴 편지이다. 그 편지를 받자마자 암기할 정도까지 읽고 또 읽지 않겠는가? 사실 많은 교부가 이렇게 성서를 읽어 성서 전체를 암기하였다.
성서를 읽고,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는 편지를 보낸 하느님께 답장을 써야 한다. 이 답장이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인 기도이다.
성서 해석의 대가인 오리게네스는 성서를 읽을 때 깨달음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할 것을 권고하였다. 성서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이자 은총이기 때문이다.
그는 제자 그레고리우스 타우마투르구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무엇보다도 성서를 신앙의 원칙과 하느님 마음에 들려는 의도로 읽도록 전력을 기울이시오. 성서를 이해하고자 하는 이에게 대부분 기도가 필요합니다』(오리게네스, 「그레고리우스에게 보낸 편지」 3).
교부들은 성서를 지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으며, 감추어진 지식을 얻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성서에서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성서 읽기의 궁극적 목적을 하느님과 만나는 사랑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성서에서 『하느님을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고 이웃을 하느님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그리스도교 교양」 1, 7, 10) 단언하듯이 성서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가 사랑이다. 따라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성서를 모르는 것이며, 성서를 모르는 것은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다.
성전의 중요성
성서와 관련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성전의 중요성이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편지나 디도에게 보낸 편지의 저자가 바오로가 아니라는 사실은 학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독일의 저명한 학자는 이 편지들의 저자가 폴리카르푸스라는 가설을 폈다. 여기서는 저자가 누구냐를 밝히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경전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는 같은 저자의 작품일 수도 있는 「폴리카르푸스의 편지」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 신자들의 성전에 대한 한 단면이 아닐까?
신자들이 성전의 맨 앞자리와 맨 밑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수많은 보고를 담고 있는 교부 문헌들을 너무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교회는 성전(聖殿)을 짓는 일뿐만 아니라 성전(聖傳)을 연구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가톨릭 교회를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이 성서와 성전이기 때문이다.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23)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 서간 강해’에서
“그리스도인은 사랑하는 사람”
[본문]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식을 구별하는 것은 오직 하나, 사랑뿐입니다.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십자성호를 긋고, 모두가 『아멘』하고 대답하고, 『알렐루야』를 노래한다 할지라도, 모두가 다 세례를 받고, 교회에 다니고, 성전을 지어 올린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식을 구별하는 것은 오직 하나, 사랑뿐입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준이요, 이것이야말로 식별의 대헌장입니다.
그대, 원하는 것 다 가지십시오. 그러나 이것 하나를 지니지 못한다면, 그것들이 그대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비록 다른 것을 다 가지고 있지 않다 할지언정, 사랑을 지니고 있다면 그대는 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남을 사랑하는 이는 율법을 성취했다』고 하고, 또 『사랑은 율법의 성취』라고 하였습니다(로마 13, 8. 10).
저는 복음서에서 말하는 장사꾼이 찾는 진주가 바로 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마태 13, 46). 그렇습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값진 진주입니다. 이것 없이는 모든 것을 다 가졌다 하더라도 득 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그대, 이 사랑 하나만 지닌다면, 그것으로 넉넉합니다.
-「요한 서간 강해」 5장 7절
“사랑하라. 그리고 마음대로 하라!”
[해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는 교부들 가운데 우뚝 솟은 큰 산이다. 길고 오랜 방황 끝에 뒤늦게 그리스도교에 귀의한 그는, 남은 인생을 송두리째 교회를 위해 바쳤다.
북아프리카 히포의 사제요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40여 년의 사목 기간 동안 민중들과 더불어 동고동락하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수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요한 서간 강해」는 가장 아름다운 교부 문헌으로 손꼽힌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요한의 말씀보다 더 큰 사랑의 찬가를 성서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7장 4절), 요한의 첫째 편지는 하느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노래하고 있다.
요한의 편지가 우리 가슴에 사랑의 불을 놓았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 서간 강해」는 그 사랑의 불길에 끼얹는 기름이다(머리말). 아우구스티누스 주교가 자신의 신자들을 위해서 행한 이 「설교식 성서 풀이」(講解, tractatus)는 어떻게 성서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기도하고, 실천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는 415년경 부활 축제 시기에 신자들에게 열 차례에 걸쳐 요한의 첫째 편지를 풀이해 주었다. 전례 도중에 제법 길게 행해진 이 강해는 열 권으로 엮어져 그 필사본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을 읽노라면, 민중들 앞에서 열정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숨결마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듯하다. 신구약성서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성서의 핵심을 꿰뚫을 때면, 청중들은 종종 뜨거운 박수와 환호성으로 화답하며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사랑은 처음과 마지막 말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몸은 비록 교회 안에 있을지라도, 영으로는 이미 교회 바깥에 있다. 사랑이 없는 그곳에서는 심지어 성사마저도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세례론」 1권 9장 12절).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반문한다. 『그대가 행동으로써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모두가 그대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한들 그 이름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름만 있지 실상은 없는데 말입니다』(「요한 서간 강해」 5장 12절).
『의사라고 불리지만 치료할 줄 모르는 의사가 얼마나 많습니까? 파수꾼이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긴 밤을 잠만 자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들은 삶과 행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서 그들이 불리는 이름대로 살지 못합니다』(4장 4절).
그렇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십자성호를 긋고, 『아멘』하며 기도하고, 꼬박꼬박 성당에 다닌다고 해서 저절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참으로 그리스도인이게 하는 것은 오직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명함만 지닌 채,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안주하여 사랑을 하찮게 여기며 살아간다면, 더 이상 주님의 제자라 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만은 하느님을 알진대』(1요한 4, 7 참조), 우리 생애의 마지막 날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에 과연 우리는 하느님을 알아 뵐 수 있을까? 『너 얼마나 사랑했느냐』고 물어 오실 그분 앞에 초라한 사랑의 빈털터리로 서게 되지는 않을까?
모든 것은 다 사라질지라도 사랑은 영원히 남고, 사랑만이 우리 삶의 유일한 원칙이요 기준임을 꿰뚫어 본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다음과 같이 우리를 사랑의 삶에 초대하고 있다.
『사랑하라. 그리고 마음대로 하라!』(7장 8절).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22) 테르툴리아누스의 ‘호교론’에서
측정할 수 없는 하느님
[본문]
그리스도인들에게 흠숭의 대상은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다. …
하느님께서 인간의 눈에 보여질지라도, 인간은 하느님을 눈으로 볼 수 없다. 또한 하느님께서 은총에 의해 드러날지라도, 인간은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인간의 감각에 의해 측정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하느님을 측정할 수 없다. 하느님은 가장 진실하시고 위대하시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감각으로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은 볼 수 있는 눈과 만질 수 있는 손과 발견할 수 있는 감각들이 있다는 것인데 하느님은 이런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분이 결코 아니다. 무한한 것은 단지 알려진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든 측정 한계를 넘어서 있다고 할지라도 하느님은 측정될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위대하심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게도 하고, 여전히 모르게도 한다. …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 의해 억눌려지고, 기본적인 제도에 의해 제한되고, 강한 욕망과 색욕으로 약해지고, 거짓된 신들에게 노예가 될지라도, 영혼은 다른 아무런 이유 없이, 오로지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 도취.마비 또는 어떤 병의 상태로부터 회복된다. 그리고 영혼은 활력을 다시 갖게 된다. 하느님 홀로 참되기 때문이다. 「좋으신 하느님!」, 「전능하신 하느님」, 그리고 「하느님! 이루어 주소서」라는 말은 모든 인류에 의해 사용되어 온 표현들이다.
또한 하느님께서 재판관이라는 사실은 다음의 간결한 구절들로 증명된다.
「하느님께서 보신다」, 「나는 하느님께 맡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보답하실 것이다」
영혼의 증명은 그리스도인의 자연적인 본능에 의해 이루어진다. …
영혼은 인간의 도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바라본다. 영혼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거처를 알고 있다. 또한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생기는 것이고, 하느님의 거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호교론」 17, 1~6
성경 안으로 들어가 그분을 만나라
[해설]
테르툴리아누스(155~220년)는 라틴어를 사용한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저술가이다. 그는 북아프리카 교회에 박해가 임박하자 카르타고의 전집정관과 지방총독에게 개인적으로 「호교론」을 저술하여 보낸다. 이 작품은 모든 이교인을 대상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관계당국에게 쓴 그리스도교 옹호서이다. 따라서 「호교론」의 주된 주제는 「보이는」 박해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될 수밖에 없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어떻게 측정할 수 없는 하느님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원천이 될 수 있는가?』란 질문을 재조명하면서 아름다운 하느님 찬미가를 제시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눈에 보여질지라도, 인간은 하느님을 눈으로 볼 수 없다. 또한 하느님께서 은총에 의해 드러날지라도, 인간은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감각에 의해 측정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하느님을 측정할 수 없다』
박해자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그리스도인에 대해, 보고 이해하고 측정한 것을 다시 한 번 더 점검해 보아야 한다. 볼 수 없는 분을 보았다고 단정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분을 이해했다고 착각하고, 이 착각을 근거로 측정할 수 없는 분을 측정했다고 오판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률가인 테르툴리아누스는 거짓된 소문이나 인간적인 오판을 근거로 자행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는 법적으로 부당함을 강조한다.
이어서 테르툴리아누스는 박해로 인해 믿음이 흔들리는 신자들을 향하여 말한다. 박해를 피하기 위해 볼 수 없는 분을 보았다거나 이해할 수 없는 분을 이해했다거나 측정할 수 없는 분을 측정했다는 잘못된 신심을 갖지 않기를 당부한다. 그리고 성경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고한다.
『성경을 듣는 사람은 하느님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은 믿음에로 이끌려지게 될 것이다』(「호교론」 18, 9).
오늘날 우리에게 피를 흘리는 순교의 박해는 없다. 그러나 해박한 인간적인 지식이나 개인적인 영적 체험이나 교회 안의 봉사직에 임명되었다는 이유로 볼 수 없는 분을 보았다거나 이해할 수 없는 분을 이해했다거나 측정할 수 없는 분을 측정했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다면, 테르툴리아누스 시대의 흔들리는 신자들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자신 안에 하느님을 가두지 말고 자신을 하느님께 맡기라고 권고한다. 하느님을 보기보다 이해하기보다 측정하기보다,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충고한다.
『하느님께서 보신다. 나는 하느님께 맡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보답하실 것이다』
이 충고는 기도가 아닐까?
결국 테르툴리아누스는 기도에 바탕을 둔 사람의 영혼이 성경 안으로 들어가 그리스도를 만날 때 하느님을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음을 힘주어 말한다.
이 영혼은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전해진다(「영혼론」 27, 7~33, 11 참조). 천국을 바라보는 이 영혼은 항상 새롭게 하느님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거처를 알고 있는 이 영혼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하느님의 거처에서 내려온 이 영혼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새로운 순교에로 모든 영혼을 초대한다.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다』(「호교론」 50, 13). 내 안에, 나의 가정에, 나의 공동체에 그리스도교의 씨앗을 뿌리자!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21)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디모테오 1서 강해’에서
당신에게는 땅이 많은데 왜 당신의 이웃은 땅이 한평도 없단 말인가!
[본문]
당신은 재산을 어떻게 모았는지 말해보시오. 조상들로부터 받았습니까? … 그렇다면 그 조상들이 재산을 정당하게 모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일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결코 증명할 수 없습니다. 부(富)의 시작과 뿌리에는 일종의 불의(不義)가 들어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땅은 공동 소유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많은 땅을 갖고 있고, 당신의 이웃은 땅이 한 평도 없습니다. 당신은 그 땅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말하고 싶겠지요. 그렇다면 당신의 아버지는 그 땅을 누구한테서 물려받았습니까?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계속해서 조상들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재산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추적해봐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결코 도둑질을 하지 않고 재산을 정직하게 모았다고 합시다. 그리고 당신의 조상들이 갖고 있던 금이 땅 속에서 치솟았다고 합시다. 그래서 어쨌단 말입니까? 당신은 부는 선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부는 악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겠지요. 그래요. 부는 결코 악한 것이 아닙니다. 부를 쌓아 두지 않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면 말입니다. 나누어주지 않는 부는 결국 악의 올가미가 됩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항변하고 싶겠지요. 선행을 베풀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악행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악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소유, 즉 공공 재산을 당신 혼자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악한 것 아닙니까? 혹시 당신은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합니까? 만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우리 모두의 한 분이신 주님의 소유라면, 그것은 또한 우리를 포함한 주님의 모든 종들의 것이 아닙니까? 주님의 것은 무엇이나 모든 사람의 것입니다.
「디모테오 1서 강해」 12장 4절
베풀지 않으면 하늘나라 갈 수 없어
[해설]
오늘은 땅 투기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대한민국은 땅 투기와 아파트 투기 등으로 열병을 앓고 있다. 아니, 열병이라는 표현보다는 오히려 망국병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이런 우리들에게 약 1500년 전에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가 경고한다. 부를 사유화하거나 독점하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고 사회에 환원하라!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가 누구인지 잠시 알아보자.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러나 워낙 강론을 잘하자 사람들은 그에게 「황금의 입」(金口)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붙여주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갑자기 서거하자,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임명된다(398년). 그러나 총대주교좌를 수락하지 않자 아르카디우스 황제(395~408년)는 요한에게 콘스탄티노플로 출두하라는 소환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제국에서 가장 화려하고 잘사는 도시, 부가 넘쳐나는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그렇게 화려하고 부자들이 넘쳐나는 도시였지만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한 끼니를 때우기 위해 거리를 헤매면서 동냥을 하고 있었다. 선임 총대주교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신임 총대주교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보다는 오히려 가난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성직자들을 개혁하고, 황실의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난하면서 부자들에게 자선을 베풀라고 강력하게 호소했다. 그러나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모함과 황실의 미움으로 결국 요한은 총대주교좌에서 물러나 유배를 가게 된다(404년).
동.서방 교회의 교부들은 재산을 올바르게 사용하라고 자주 권고하였다. 부자가 자신의 탐욕을 절제하지 못한 채 재산을 함부로 남용한다면, 부 자체가 부자들에게 악의 근원이 되고 불행의 씨앗이 된다고 말하면서 교부들은 부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태양은 가난한 자와 부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두루 비춘다. 이런 공평한 자연의 모습을 통해서, 부자들은 재산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교부들은 말한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자선을 베푸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교부들은 강조한다.
어디가 개발지역이다 하면 벌떼처럼 몰려가 각종 투기를 조장하여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온갖 부당한 방법으로 자식들에게 재산을 불법증여 해주는가 하면, 각종 편법을 다 동원해서 심지어 공적 자금까지 빼돌리는 사람들에게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말한다. 그런 모든 행위가 악행의 뿌리이고 우리를 하늘나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자선을 베푸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 부자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더 많이 더 자주 베풀어야 한다고 교부들은 말한다. 재산은 하느님의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청지기로서 잠시 그것을 보관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20) 니느웨의 이사악의 ‘제1모음집’에서
애틋함
[본문]
순결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된 모든 것에 애틋해하는 마음이다. … 그렇다면 애틋한 마음이란 또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들, 새들, 짐승들, 심지어 마귀들까지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 애틋한 나머지 불타오르는 마음이다. 크나큰 측은지심으로 말미암아 억누를 수 없는 연민의 힘에 압도된 나머지, 이 모든 피조물을 기억하거나 볼 때에 눈물을 쏟으며 녹아내리는 그런 마음이다. 그런 이는 어떤 피조물이 제 아무리 작은 상처나 아픔이라도 겪는 것을 보거나 듣게 되면 견딜 수 없어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성이 없는 존재들이나 심지어 진리에 적대하고 맞서는 자들을 위해서까지 눈물의 기도를 바치게 된다. 그는 한도 끝도 없이 샘솟는 애틋함으로 말미암아 심지어 뱀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바친다. 이렇게 그는 하느님을 닮아간다.
니느웨의 이사악, 「제 1 모음집 74」
“창조된 만물은 우리의 피붙이”
[해설]
근자에 시리아 교부들의 중요성이 재발견되고 있는 가운데, 니느웨의 이사악의 깊이있고 아름다운 가르침도 속속 현대어로 소개되고 있는 추세다. 대체로 고대 시리아어권 교부들은 중동 지방 특유의 비 서구적 체질과 사유로 말미암아 특히 우리 아시아 사람들에게 큰 매력을 행사한다. 7세기에 살았던 니느웨의 이사악의 음성 역시 엄청난 깊이와 감동의 힘으로 오늘날 사람들에게 큰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는 한없는 연민과 자비로 끓어오르는 하느님의 밑모를 자비의 심연에 깊이 잠긴 나머지, 한 평생 하느님 사랑의 애틋함을 노래했던 뛰어난 스승이다. 그래서 그는 비단 당대에 그를 따르던 소수의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깊은 의미에서 「영적 아버지」였다.
사막 교부들의 전통을 서방으로 옮겨 심었다는 평가를 받는 요한 카시아누스(360~435)를 위시하여 보통으로 교부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마음의 순결」(puritas cordis)이란 일편단심으로 하느님을 찾는 통합되고 단순한 마음, 즉 내적 지향의 순수함을 뜻한다. 이것은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가 말한 「아파테이아」와 종국에는 같은 뜻이고, 후대에 로욜라의 이냐시오에게 가면 어디 한 군데에 특별히 애착하지 않는다 하여 이른바 「불편심(不偏心)」으로 불리게 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니느웨의 이사악은 이 대목에서 「순결함」이 바로 연민의 마음, 다시 말해 애틋해 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풀고 있다. 얼핏 보기에 이사악이 선배들의 전통에서 좀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 하느님은 오직 한 마음으로 찾을 때에만 스스로를 드러내신다. 두 마음을 품은 이는 하느님을 뵙지 못한다. 모든 욕심과 충동들로부터 내적으로 자유로워진 사람만이 깨끗해진 마음 자리에 도달하게 되고, 그제야 비로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느님을 뵈올 것이다』는 말씀대로 하느님을 뵈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교부들은 순결한 처녀의 몸이 첫날 밤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듯이, 순결한 마음도 하느님에게서 이른바 「사랑의 상처」를 입는다고 본다.
니느웨의 이사악이 말한 「애틋함」으로서의 마음의 순결이 이전의 수도승 체험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유는, 순결한 마음이 하느님에게서 사랑의 상처를 입으면 그 첫째 결과가 사람에 대해 애틋해하는 마음을 품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당신을 찾는 순간에는 거개 크나큰 측은지심에 마음이 움직이셨다고 기록하고 있거니와, 보는 인생들마다 애틋해서 눈에 눈물이 마르는 날이 없었던 성인들은 그 후에도 허다했다. 그래서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던 또 다른 시리아 교부 요셉 하자이는, 사람의 마음 안에 성령께서 계실 때 생기는 일곱 가지 열매 중 하나로 「형형한 눈빛」과 함께 「애틋함」(혹은 연민)을 꼽은 바 있다.
그런데 니느웨의 이사악은 이 대목에서 얼핏 과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실상에 있어서는 참으로 예언적인, 다시 말해 자기 시대를 훨씬 앞지르는 생태학적 통찰을 남겼다. 자식 걱정으로 늘 애틋할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애틋한 마음에 감염된 사람은 단지 사람들에게만 애틋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 심지어 상처 입은 뱀들에게도 애틋한 마음이 된다는 것이다. 고대의 동방 교부들에 따르면 온 창조계는 성령의 깊은 흔적과 표징으로 각인된 나머지 결국 하느님과 그분의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돈만 된다면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님도 팔아먹고 불자들은 부처님도 팔아먹는』 세대라고 한다. 참으로 그렇다. 돈 몇 푼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 겨레에 주신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산하가 개발 논리의 무서운 대세에 밀려 형편없이 살이 뜯기고 형체도 없이 잔인하게 파괴되어 가고 있다. 몇 년 지나지 않으면 이 땅에 도로와 골프장밖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겠다는 우려가 과장만은 아니다.
이사악 압바께, 창조된 만물이 성령 안에서 우리 모두의 형제요 피붙이임을 깨닫도록 전구해 주십사 청하고 싶다. 그분은 이 땅과 하늘과 바다에, 그리고 그 안에 사는 모든 것에, 우리가 얼마나 깊이 이어진 「피붙이」인지 느낄 줄 아는 감각을 지니고 계셨던 것이다. 이사악 압바는, 신음하는 산하의 아픔에 애틋해 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한낱 환경론자들의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임을 상기시켜주고 계시다. 나아가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하느님이 되어가는」 표지 중 하나임을 일러주고 계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