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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믿나이다] (56·끝)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부활을 믿나이다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마지막 고백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을 하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경은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원한 삶에 대한 선언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교회가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처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내용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질타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코린 15,12-14. 20)
예수님께서는 죽은 모든 이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9)
죽은 이들은 어떻게 부활할 것인가요?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죽은 이들이 어떻게 되살아나는가? 그들이 어떤 몸으로 되돌아오는가? 하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체가 아니라 밀이든 다른 종류든 씨앗일 따름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35-37.42. 52-53)
교회는 모두가 이해하도록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육신을 지니고 부활하셨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루카 24,39)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로 돌아오셨다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지금 가지고 있는 자신의 육신을 지니고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이 육신은 ‘영적인 몸’(1코린 15,44)으로,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필리 3,21 참조)(「가톨릭교회 교리서」 999)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고,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살기’(2코린 5,8) 위하여 떠나야 한다. 죽음이라는 이 ‘떠남’에서 영혼은 육신과 분리된다. 그 영혼은 죽은 이들이 부활하는 날 육체와 다시 합쳐질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05)
그러면 언제 죽은 이들이 부활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요한 6,39-40), “세상 끝 날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죽은 이들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가톨릭교회는 모든 사람은 죽자마자 그 불멸의 영혼 안에서 산 이와 죽은 이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의 ‘개별 심판’으로 영원한 갚음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대가는 연옥에서 정화를 거치거나, 곧바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거나, 곧바로 지옥에서 영원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 지옥의 주된 고통은, 하느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새겨야 할 교회 가르침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자유 의사로 하느님께 반항하고 죽을 죄를 짓고 끝까지 그것을 고집하는 사람만이 지옥에 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에 교회는 미사와 일상 기도를 통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2베드 3,9) 바라며 하느님의 자비를 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최후의 심판을 하시는 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이라고 신약 성경은 말합니다. 이날 모든 것이 변화할 것입니다. 모든 이가 부활할 뿐 아니라 교회 역시 천상 영광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이날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통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1코린 15,28) 것입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신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묵시록과 마찬가지로 “아멘”으로 끝맺습니다. 히브리말 ‘아멘’은 견고함, 신뢰, 성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멘’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성실과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의미합니다.
“신경 끝의 ‘아멘’은 첫머리의 ‘저는 믿나이다’라고 하는 말마디를 되풀이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과 계명에 대하여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무한한 사랑과 완전한 성실성의 ‘아멘’이신 분께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매일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례 때 ‘저는 믿나이다’라고 한 신앙 고백에 대한 ‘아멘’이 될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64)
부족한 긴 연재 글을 인내로이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신경은 여러분에게 거울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믿는다고 고백한 모든 것을 정말 여러분이 믿고 있는지 그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여러분의 믿음 안에서 기뻐하십시오.”(「설교집」 58,11,13)
[성탄 특집] 성탄 장식의 상징과 유래
다양한 상징과 장식 통해 '빛으로 오신 예수님' 맞이
12월이 되면 성당은 물론 거리와 공원까지 트리 불빛으로 반짝이고, 성당마다 구유가 차려지며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기쁨이 깊어진다. 종종 이러한 장식들을 단순한 ‘성탄 분위기’로만 여기지만, 각각에는 오랜 전통과 신학적 의미, 그리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성탄을 알리는 트리와 꽃, 구유가 지닌 상징과 유래, 그리고 세계 각지의 이색적인 구유 문화를 소개한다.
2023년 10월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이후 중단됐던 성지 베들레헴의 성탄 행사가 2년 만에 다시 열렸다. 전쟁의 여파로 어둠이 드리웠던 구유 광장 중앙에는 다시 붉은빛과 금빛 장식의 대형 트리가 세워졌고, 광장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찼다. 한동안 빛마저 사라졌던 광장이 다시 환히 밝아진 그 순간, 많은 이는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새롭게 떠올렸다.
크리스마스트리는 오랜 역사와 상징을 품고 변해왔다. 트리에 장식을 다는 풍습은 16세기 상록수에 제병을 닮은 하얗고 동그란 과자를 달고 주위에 촛불을 켜며 나무를 빛냈던 데서 시작됐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트리를 ‘천국의 나무’라고 불렀다. 19세기 말부터 유리 장식과 조명이 더해지며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트리의 사철 푸른 나무는 변치 않는 생명과 부활을 드러내며, 이를 둘러싼 꽃과 장식은 성탄의 신학적 상징을 한층 풍부하게 한다. 트리 주변을 밝히는 호랑가시나무는 메시아의 ‘가시관’을 떠올리게 하고, ‘축복’, ‘축하’의 꽃말을 가진 붉은 포인세티아는 성탄의 기쁨을 전한다. 다양한 장식들도 의미를 품고 있다. 붉은 구슬은 죄와 죽음을 기억하게 하는 ‘선악과’를, 하얀 구슬은 생명의 빵, 성체를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트리 꼭대기의 별은 주님의 탄생을 알리는 표지다. 동방 박사들이 “그분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다”고 말한 복음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구유가 전하는 성탄의 신비
최근에는 전통적인 마구간 구유 외에도 다양한 의미를 담은 구유들이 눈길을 끈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을 기억하는 분유통 구유, 미혼부모의 현실을 담은 기저귀 구유, 이주노동자의 삶을 비유한 지구본 구유 등 창의적이고 상징적인 형태들이 등장하고 있다. 서강대학교가 인공지능(AI)을 활용해 만든 구유도 새로운 시도로 주목받았다.
형태는 다양해졌지만, 말구유를 중심으로 마리아와 요셉, 동물과 목자들이 둘러싼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마구간 형태 구유는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3세기 그리스도인들은 벽화, 모자이크, 대리석 부조로 예수님 탄생 장면을 표현했고, 5세기경에는 은이나 나무로 제작한 성탄 조각들이 등장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구유 전통은 1223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서 비롯됐다. 베들레헴을 순례하던 중, 예수님이 누우셨던 구유에 깊은 감명을 받은 성인은 신자들에게 그 신비를 더 생생히 전하고자 베들레헴의 외양간을 본뜬 마구간을 마련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 가난과 낮춤 속에 오셨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험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전례는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작은 모형 구유를 만드는 전통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세계의 이색 구유 문화
성탄 구유는 각국의 문화와 결합하며 고유한 전통으로 발전했다. 폴란드 크라쿠프의 ‘숍카(szopka)’는 대표적인 사례다. 다채로운 색감과 장식으로 꾸며진 이 성탄 구유는 매년 12월 첫째 주 목요일, 아담 미츠키에비츠 동상 앞 광장에서 시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선보인다.
숍카는 아기 예수의 탄생 장면과 인형극 무대, 정치·사회 풍자를 위한 유희적 공간이 결합해 만들어진 형식으로, 1937년 첫 ‘크라쿠프 구유 경연대회’ 이후 도시의 대표 문화로 자리 잡았다. 각 숍카는 크라쿠프의 건축 양식을 축소해 놓은 듯한 다층 구조를 이루는데, 1층에는 역사적 인물과 현대 정치인·예술가를 형상화한 작은 인형들이, 2층에는 베들레헴 구유가 자리한다. 반짝이는 색채와 LED 조명, 첨탑 장식으로 꾸민 숍카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구유’로도 불리며, 제작 전통은 2018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이탈리아 마테라에서는 도시 전체가 성탄 무대가 된다. 이곳 주민들은 성경 속 인물을 직접 연기하는 ‘살아 있는 구유’를 통해 예수님 탄생 장면을 재현한다. 마테라의 고대 동굴 주거지 ‘사씨(Sassi)’는 이 시기 하나의 거대한 구유 무대로 변신한다. 요셉과 마리아, 동방 박사, 목자들뿐 아니라 그 시대의 일상 풍경까지 세밀하게 재현되며, 관람객들은 마치 베들레헴 골목을 걷는 듯한 생생한 체험을 하게 된다. 밤이 되면 촛불과 랜턴이 석회암 벽을 비추며, 도시 전체가 따스한 빛으로 물든다. 베들레헴과 닮은 지형을 지닌 마테라는 성탄 시기에 특히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영광송
영광송은 삼위일체 하느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기도입니다. 영광송을 의미하는 [독솔로지아](doxologia)는 ‘영광’을 뜻하는 그리스어 [독사](δόξα)와 ‘말씀’을 뜻하는 [로고스](λόγος)가 결합한 단어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영광송이 있습니다. 짧으면서도 친숙한 소영광송(“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주일과 대축일 미사의 시작 때 바치는 대영광송(“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그리고 감사기도 끝에 바치는 마침 영광송(“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이 있습니다. 또한 사은찬미가(Te Deum)를 비롯한 여러 영광송이 있습니다.이러한 영광송은 창조와 구원 활동을 하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 영광을 드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광송의 기원은 유다인들의 찬양 기도문인 [브라카]에서 찾을 수 있는데, 여기서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찬양과 영광으로 끝납니다. 이러한 관습은 시편에도 잘 나타나, 큰 단락을 매듭짓는 41장, 72장, 89장, 106장, 150장은 모두 영광송으로 끝납니다. 유다인들의 관습은 그리스도교로 이어져서 서간과 묵시록에도 책과 주요 항목의 시작이나 끝에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영광송이 등장합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소영광송은 삼위일체적 세례 양식문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에서 비롯하였습니다. 여기에 “이제와 항상”이란 구절이 첨가되었습니다. “이제와 항상”이란 표현은 유다인들과 사도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표현이었습니다. 게다가 후대 서방 라틴 교회에서는 “처음과 같이”라는 구절을 덧붙였습니다. 이와 달리, 동방 교회에서는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와 항상 또 영원히 있나이다. 아멘.”이라는 영광송을 오늘날에도 사용합니다.
소영광송의 문구는 4세기에 있었던 그리스도론 논쟁으로 혼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성자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문제 삼은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성자를 성부와 동등하지 않고, 하등하다는 종속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광이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라는 기도문을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과 사도로부터 이어오던 교리에 어긋나는 내용이 바탕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삼위일체 신비의 정통 교리를 보존하면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라는 기도문을 고수하였습니다.
소영광송은 일상뿐 아니라 전례, 특히 시간 전례(성무일도)에서 자주 바쳐집니다. 매 시간 기도의 도입과, 시편 및 찬가의 마무리는 소영광송으로 끝납니다. 시편 낭송 때 마지막 부분에서 소영광송을 바치는 건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확인하는 것과 초기 수도승들이 시편을 낭송하던 방법과 관련됩니다. 「성무일도 총지침」에서는 영광송이 “시편의 적절한 종결이고 구약의 기도에다 그리스도론적이고 삼위일체론적인 의미와 찬미의 의의를 부여하는 것”(123항)이라고 그 의미를 설명합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40) 주교들의 다스리는 임무, 「교회헌장」 제27항
「교회헌장」 제27항은 주교들의 세 번째 봉사 직무인 ‘다스리는 임무’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주교들은 맡겨진 개별 교회를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사절”로서 다스립니다. 보편 교회와 관련하여 교황에게 부여되는 호칭이 이번에는 개별 교회에 대해서 주교들에게 적용됩니다. 개별 교회의 다스림은 “조언과 권고와 모범”뿐만 아니라 “권위와 거룩한 권력”으로 수행됩니다. 이 권력은 양 떼를 진리와 성덕 안에서 기르는 데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공의회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라는 루카 22,26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이 통치 권력은 주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직접 행사”하는 것으로, 주교들에게 고유하고 정규적이며 직접적으로 주어집니다. 이 권력의 힘으로 주교들은 법률을 제정하고, 판결을 내리며, 예배와 사도직에 관련된 모든 것을 조정하는 권리와 의무를 지닙니다. 공의회는 주교들의 통치 권력을 설명하면서 이것이 주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맡겨진 신자들을 위하여 주어진 것임을 강조합니다.
목자로서 자신의 양 떼를 보살피는 주교들의 사목 임무가 주교들에게 “온전히” 맡겨져 있습니다. 교황의 대리자로서가 아니라 맡겨진 백성의 수장으로서, 주교들은 어떤 인간적인 권력으로부터 양도되지 않는 “자기 고유의 권력”을 행사합니다. 따라서 교황의 권력이 개별 주교들의 권력을 소멸시키지 않고 오히려 “주장하고 강화하고 옹호”합니다. 이러한 통치 형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것으로, 성령께서 확고히 보호해 줍니다.
마지막 단락은 주교들의 통치 사명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공의회는 후기 신약 성경에 영향을 준 ‘가정 신학’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가정을 다스리도록 가장이신 하느님께서 주교들을 파견하셨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주교들이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하느님의 가정을 이끌 때 필요한 것은 “착한 목자의 표양”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 떼를 섬기러 왔고, 양 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러 오셨습니다(마태 20,28; 요한 10,11 참조). 사람들 가운데 뽑힌 주교들은 자신도 약점을 짊어지고 있으므로, 무지하여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히브 5,1-2 참조).
이어서 공의회는 주교들이 신자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협력을 권고하며, 귀를 기울이고, 기도와 설교와 사랑으로 돌보며, 예비신자들도 그렇게 돌볼 것을 권고합니다. 주교들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며 신자들이 사도직 활동과 선교 활동을 하도록 권장하고, 신자들이 주교들과 일치를 이루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교회의 언어] Abide with me (저와 함께 하소서)
천사가 요셉에게 알려준 아기의 이름은 임마누엘(Emmanuel)이며, 그 뜻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이 이름은 그 옛날 이사야의 이야기를 반향합니다. 유다 임금 아하즈는 전쟁 중에 불리한 형국에서 강대국 아시리아에 의지하려 합니다.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일 때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위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임마누엘의 하느님이 우리 곁에 계심을 느끼고, 곁에 있어 달라고 자주 청해야 하겠습니다.
미국 신학교에서 끝기도 때 즐겨 부르던 성가가 기억납니다. Abide with me 영국교회의 찬송가인데, 죽음을 앞두고 덤덤히 하느님께 곁에 있어 달라는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이 곡은 종파와 관계없이 사랑받는, 마하트마 간디도 즐겨 부르던 성가였다고 합니다. 곁에 있어 달라는 기도는 인생의 변곡점에서 큰 위로를 줍니다.
참 사람이시며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희로애락과 생로병사에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느님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탄을 준비하며 강생하시는 성자께서(Incarnated Son) 늘 우리 곁에 머무시길 청해봅시다.
[가톨릭 교리 상식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대림과 성탄 시기,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교회의 한 해는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년 맞이하는 대림과 성탄 시기를 어떻게 준비하고 맞이해야 할까요? 오늘은 이 시기의 의미를 살펴보며 보다 뜻깊게 보낼 수 있도록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파스카를 준비하는 사순처럼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그 기원은 4-6세기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님의 탄생인 성탄은 재림의 순간 맞이할 십자가 구원의 승리와도 연결되는데 여기서 대림은 두 가지 전망, 곧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기다림’과 ‘우리 구원을 위해 처음 육신을 취해 오시는 주님에 대한 기다림’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주일 독서는 이러한 특성을 살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깨어 있음’(첫째 주일), ‘회개로의 초대’(둘째 주일), ‘세례자 요한의 예수님에 관한 증언’(셋째 주일), ‘예수님 탄생의 알림’(넷째 주일)의 주제를 드러냅니다. 평일은 대림 주일들을 보완하며 12월 16일까지의 대림 첫 시기에는 이사야 예언서와 주님 탄생 및 재림의 약속과 관련된 복음을, 대림 두 번째 시기인 12월 17일부터는 구약의 메시아적 신탁의 말씀들과 예수님의 소년기에 대한 복음이 선포됩니다.
성탄은 로마 교회의 ‘순교자 달력’과 ‘주교 달력’을 통해 이미 336년부터 기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2월 25일로 정해진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무적의 태양신 탄생’이라는 이교도 축제를 대체하려는 의도, 예수님의 죽음과 잉태가 같은 날(3월 25일)에 이루어졌다는 믿음, 그리고 ‘아리우스’, ‘네스토리우스’, ‘에우티케스’ 등의 이단에 맞서 참된 믿음을 확인하려는 목적 등이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 레오 교황님(440-461)은 성탄을 ‘놀라운 성사’라 부르며, 육신을 취하신 구원의 출발점으로 파스카와 긴밀히 연결된 참된 구원의 축일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자정에 성모 마리아대성당(구유 곁), 동틀 무렵에 성 아나스타시아성당, 낮에 성 베드로대성당에서 전례를 거행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성탄에 거행하는 세 대의 미사와도 연결됩니다. 이러한 성탄을 시작으로 성탄 팔일 축제를 보내는 동안 ‘성 스테파노 축일’(12/26),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12/27),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12/28, 올해는 주일과 겹치므로 전례 중 기념이 없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1/1)을 기념합니다. 성탄 다음 주일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그다음 주일은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드러남을 강조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 이어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며 성탄 시기를 마무리합니다.
성탄은 곧 죽음과 부활을 위한 조건인 구원의 시작이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보이는 인간으로 오셔서 온 만물을 당신 안에서 회복시키시는 신비입니다. 이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역사적 사건 앞에서 기다림과 만남을 준비하여, 모두에게 기쁨의 성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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