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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란과 시련의 은혜
(시 119:71-72)
오늘은 6.25 기념주일입니다. 6.25가 금년으로 64주년을 맞이했습니다. 6.25는 저도 너무 어렸을 때 일어난 사건이라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다만 6.25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역사이고 참상의 역사이고 비극의 역사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6.25는 전 세계 전쟁의 역사 속에서도 가장 비참한 전쟁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자손대에는 또 다시 이런 불행한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삶은 평생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항상 평지만 있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넘어지며 깨지며 부러지며 자라듯이 항상 굴곡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예상치도 못한 어려움들을 당하기도 합니다.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하여 수백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런 불행이 일어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 주변을 보면 매일같이 사건 사고들이 끊이질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에게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늘 조심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이런 환란과 어려움들은 우리의 삶에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환란과 시련은 두가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하나는 환란과 시련가운데 주저앉고 꺾이고 기회를 잃고 재기 불가능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사업하던 분들이 한번 크게 꺾이면 재기가 어렵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고는 또 하나의 기회이자 발판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 이런 어려운 일들이나 사건 사고가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좋은 결과를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태풍이나 큰 홍수는 가깝게 보면 모두 재앙으로 불행한 일로 보입니다. 그런데 좀 멀리 보면 이 같은 사건 사고들은 모두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환란과 시련의 때에 사람들이 이 사고는 어쩌면 하늘의 섭리일지 모른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런 점을 말씀하는 메시지입니다. 본문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장입니다. 이 장에는 아주 장엄한 말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찬양시답게 탁월한 명구들이 가득 들어 있고 시문학의 백미라고 할 만큼 수려한 문구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또 내용을 보면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내면적인 울림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규례와 말씀에 순종하려는 헌신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이 기록한 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 망명생활을 하며 아주 위험한 환경에 처해 있을 때 기록한 시라고 합니다. 내용을 보면 다윗은 고난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다.”(71절) 고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것을 알고 깨닫게 해 줍니다. 고난 전에는 많은 것을 깊이 깨닫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난은 다윗으로 하여금 성숙하게 만들었고 하나님 중심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다윗은 누구보다 고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생사의 고비도 많이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갔다(시 23:4)고 고백합니다. 또한 다윗은 거기서 말씀의 힘을 발견하게 되었고 영적 세계를 보았고 하나님의 율례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다윗은 그 깨달음이 “천천금은보다 좋으니이다”(72절)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경험한 역사적인 아픔 중 가장 큰 아픔은 6.25의 아픔일 것입니다. 외국인들은 6.25전쟁을 보며 한국이 다시 얼어나기 어렵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그 때는 그렇잖아도 우리나라가 가난하고 무지했을 때입니다. 해방 후라 혼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다 전례 없는 전쟁까지 일어났습니다. 그나마 있던 것들도 다 파괴되었습니다. 온 나라가 회복 불능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모두 우리나라가 회복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 60년이 지난 오늘 이 땅에 지금의 나라를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적이 아니고 우리 민족이 그만큼 피나는 노력을 한 결과입니다. 이것은 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고난은 그 후에 어떤 유익을 주었을까요? 본문은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 말은 지난날의 고난은 오늘의 나에게 엄청난 유익을 가져다주었다는 말입니다.
기도하게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하게 되면 먼저 기도하게 됩니다. 신앙이 깊지 못하던 사람들도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기도부터 하게 됩니다. 기도도 그냥 기도가 아닙니다. 아주 절박하고 간절하게 정신을 가다듬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유익입니다. 그 때 기도는 평상시의 기도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느낌과 감각과 깊이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아주 간절하게 기도를 하게 됩니다. 거짓 없이 무릎 꿇어 부르짖게 됩니다. 6.25때 우리 부모님들이 얼마나 눈물로 기도를 했습니까?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습니까? 그 기도가 형식적인 기도였겠습니까? 그 기도가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우리나라 기독교 부흥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기독교 부흥의 일등공신은 6.25전쟁이고 김일성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배부를 때 기도는 간절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때는 하품이 나고 잠이 쏟아집니다. 좀이 쑤십니다. 그런데 배고플 때나 고난이 몰려 왔을 때는 하품이나 잠이 오지 않습니다. 정신이 번쩍 듭니다. 다른 데 눈돌리지 않고 간절하게 열심히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 간절한 기도는 배고플 때 그리고 고난이 엄습했을 때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시인은 그 점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 고난을 통해서 사람들은 깊은 세계를 보고 느끼게 됩니다.
바로잡게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는 말은 “나의 자세를 바로잡았다”는 말입니다. 또한 “나의 흐트러진 태도를 바로잡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잃었던 길을 되찾았다는 말입니다.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하여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참 불행한 사고입니다.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사고입니다. 그런데 이 희생은 많은 사람들이 잃었던 길을 되찾게 되는 계기가 되고 많은 부조리들이 바뀌고 바로잡힐 것입니다. 그럼에도 길을 찾지 못하고 바로잡히는 일이 없다면 이 희생은 헛된 희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1945년도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벗어나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사람들은 자유가 뭔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자유를 오용했습니다. 그 결과 정치가 난리였고 세상에 무질서가 극에 달했습니다. 술과 노름과 싸움이 절정에 이르렀고 우리사회가 극심한 무질서에 무너지게 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제일 먼저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무지, 무질서, 미성숙, 부족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잡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로잡힘이 오늘 이 나라를 건설하게 만든 것입니다. 본문에서 시인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아서 “주의 입의 법이 내게 천천금은보다 좋으니이다” 하고 고백을 했습니다. 고난을 통해 알고 보니 더 소중한 것을 깨달아 알았다는 말입니다.
어떤 아들이 어머니의 고지식한 신앙이 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무식해서 그렇다고 치부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아들이 전쟁에 징집되어 전선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군인들을 싣고 떠나려는 기차 앞에서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렇게 당부를 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거든 저 위를 보고 기도하거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를 지켜 주실것이다.” 아들은 그 말을 귓전으로 흘려 보내고 전선으로 떠났습니다. 전선에 가보니 거기는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총알이 날아다니고 생사가 교차되는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그 순간 아들에게는 어머니의 말씀이 번뜩이며 스쳐갔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위력있게 다가왔습니다. 그것이 시인이 고백한 “주의 말씀이 내게 천천금은보다 좋으니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비로소 알고 보니 하나님 말씀이 이토록 실감날 수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에 고난을 주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평상시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발견하지 못합니다. 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난은 닫혔던 눈을 열게 해서 보게 하고 알게 하고 발견하게 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삶을 단단하게 만들고 연단합니다. 유약한 아들이 군대에 다녀오면 단단해집니다. 정신과 육신과 생각이 건강해집니다. 연단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그 연단을 통해서 단단해지고 적응을 하고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약소국입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주변 강국들에 둘러싸여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전쟁과 침략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약소국은 그래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서쪽에는 러시아가 있고, 북쪽에는 북한과 중국이 있고, 동쪽에는 아주 교활한 일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런 강국의 틈새에 끼어서 살아가는 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수출로 먹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약자에게는 이 지혜가 필요합니다. 고난은 이런 지혜를 우리에게 줍니다. 바다에서는 성게가 지혜롭다고 합니다. 성게는 가시 돋친 공 같이 생긴 바다생물입니다. 낮에는 빛없는 바위틈에 숨어 살고 밤이 되면 슬그머니 나와 미역이나 해조류를 먹고 살아갑니다. 온 몸에 가시를 돋게 해서 자신을 보호하고 때로는 위장을 해서 살아갑니다. 잠잘 때는 자기들끼리 촘촘히 모여 함께 잠을 잡니다. 외부공격을 막기 위함입니다. 아주 영리한 모습입니다. 이동할 때에는 해조류들을 머리에 이고 그 밑에 숨어서 다닙니다. 위장을 군인처럼 잘합니다. 해조류가 없을 때는 조개껍질을 짊어지고 다닙니다. 보잘 것 없는 성게도 스스로를 잘 보호하고 살도록 지혜가 주어졌습니다. 그 지혜는 고난을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 섭리입니다.
어느 전도사가 결혼할 때가 되었습니다. 선배 전도사가 조언하기를 고집 쎈 최씨와 뻐드렁니와 곱슬머리만 조심하면 되다고 했습니다. 이 존도사는 그 말을 무심히 듣고 있다가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너무 강성이었습니다. 왜 여자가 저렇게 강한가하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잠을 자다가 옆에 누운 아내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선배의 충고가 갑자기 생각났던 것입니다. 아내를 보니 고집 쎈 최씨에 뻐드렁니에 곱슬머리였습니다. 완벽하게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절로 놀랍고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는 생각을 바꿨습니다. ‘내가 이런 아내에게 연단을 잘 받아서 이렇게 어려운 목회를 잘하게 되었구나.’ 연단은 사람을 강하고 단단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지혜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열린 눈
본문은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시인은 고난을 통해 평소 알지 못하고 소중함을 모르던 새 보화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평소 신앙인들은 주일의 의미도 잘 모른 채 주일을 지킵니다. 그러니까 바쁘면 주일을 잊고 엉뚱한 일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의미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은 말씀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을 손에 들면 잠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의미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위기를 겪고 고난을 경험하게 되면 모든 것이 절절해집니다. 깊이를 알게 되고 감추인 보화를 되찾게 됩니다. 그 깊은 의미를 알고 깨닫게 됩니다. 우리나라에 6.25가 없었더라면 오늘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2차 대전 후에 유독 발전한 나라가 셋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독일, 일본, 한국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 나라가 모두 혹독한 전쟁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전쟁은 그 민족으로 하여금 절박한 데서만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하는 보상이 주어집니다.
어느 대기업 회장이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축사가 이례적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사회로 나가는 여러분에게 한가지 바램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실패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나가서 상당히 중요한 일에 실패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젊은 때에 실패하면 이 실패가 거울이 되어 반드시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의 성공은 긴 성공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뉴욕 부룩클린에 윌리엄 리바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정육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사이에 권총강도를 네 번이나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중에는 방탄조끼를 입고 장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생각 끝에 장사를 그만두고 방탄복 제조회사 차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국 40개 도시에 지점을 개설하게 되었습니다.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누군가 성공비결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성공한 것은 강도를 네 번이나 만났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아픔을 많이 당해 보십시오. 그 아픔은 새로운 생각을 하게 만들 것입니다. 새로운 길을 보게 만들고 새로운 자세를 갖게 만들고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아픔이 온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축복입니다.
또한 아픔을 당해본 사람이 남의 아픔을 알고 치유할 수가 있습니다. 아픔을 당해 보면 눈도 열리고 길도 보여서 깊은 곳을 보게 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글렌데일 시에서는 2013년 7월에 위안부 소녀상을 세웠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일본 정치인들이 몰려가 반발을 했습니다. 그때 주민들이 그들을 향해서 “세상에 부끄러운 줄 알라”고 쏘아붙였습니다. 그 곳에 한국인이 많아서 그 소녀상을 세운 것이 아닙니다. 글렌데일은 20만 명이 살고 있는 도시입니다. 그 중 절반이 아르메니아인들입니다. 시의원 5명 중 4명이 소녀상 건립을 찬성했는데 그 4명 중 2명이 아르메니아 출신이었습니다. 아르메니아는 터키와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1차 대전 때 터키의 전신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부터 침입을 당했습니다. 오스만투르크는 회교도 국가였는데 기독교 민족이었던 아르메니아인을 100만 명이나 학살했습니다. 특히 아르메니아 여성들은 처참하게 능욕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아르메니아인들이 살 길을 찾아 세계 각국으로 흩어져서 살게 되었고 미국 글렌데일에까지 와서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한국에서 들려오는 위안부 소식을 들게 되었습니다. 듣는 순간 같은 아픔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소녀상을 건립키로 했습니다. 그때 일본인들이 반대를 했습니다. 그 모습에 아르메니아인들의 눈에서는 불이 났을 것입니다. 그들은 2차 대전 때 성 노예로 끌려가 능욕당한 우리나라 소녀들을 눈물로 이해하고 함께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소녀상 건립에 찬성하고 후원하며 자발적으로 그것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당해 보아야 남의 아픔을 이해하고 치유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해 보아야 삶의 깊은 이유와 의미를 알고 살 수 있습니다.
본문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하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내 눈을 열게 만듭니다. 깊은 곳을 보게 만듭니다. 성숙하게 만들고 남의 아픔을 헤아리게 만듭니다. 오늘 고난 중에 계신 분이 계십니까? 이 고난이 나에게 무슨 메시지를 줄 것인가를 기대하십시오.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