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9일 목요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여자에게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고 준비한 위대한 예언자다. 이러한 요한은 헤로데 임금의 불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였다(마르 6,17-29 참조).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4세기 무렵 그의 유해가 있던 사마리아의 지하 경당에서 시작되었다.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7-29 그때에 17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용감하게 선포하십시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는 말은 어느 고을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사람과 가축을 물어 죽이고 잡아먹어서 집집마다 방벽을 쌓고 저녁이 되면 거동하지 않으며, 매일 불안에 떨고 있었는데 다들 호랑이가 없는 다른 고을로 이사를 가지 않느냐고 하였더니 그곳엔 포악한 관리가 있어서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고 하더랍니다. 이는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이지만 그만큼 하느님과 백성을 섬기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자세로 어려운 것이 정치를 하는 것입니다. 권력과 힘으로 다스리면 선량한 사람이 고통을 받고 권모술수로 정치를 하면 서로 다투어 권력을 잡으려고 백성을 사랑하는 일은 뒷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정치를 싫어합니다. 그들의 권모술수와 권력으로 세상을 보는 눈도 싫어하고, 허언(虛言)으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싫어하고, 상대방을 비방하고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그 태도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정치를 바르게 한다면 국민이 편안하고 사리사욕이 없다면 모든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고 국민들을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는 정치가가 있다면 얼마나 존경스럽고 국민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겠습니까? 그래서 정치가들을 위해서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올바르게 열려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국민을 사랑하고, 섬김의 자세로 낮추어 국민들의 소리를 들으며, 옳게 처신하고 생활해서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청렴결백하게 정치하도록 말입니다.
오늘은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닦으며, 회개하고 메시아를 맞아들여야 한다고 세례를 베풀었던 성 요한의 순교기념일입니다. 요한 성인은 헤로데 왕에게 잘못한다고 단호하게 바른 말을 합니다. '충언역이'(忠言逆耳)라는 말은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 거슬린다>는 말이지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런 용기가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특별히 용감함도 은혜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언어와 행실을 잘 인도하고 다스리는 덕행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옛 요리강령(要理綱領 : 옛 교리책)에는 지덕(智德), 의덕(義德), 절덕(節德), 용덕(勇德)이라는 덕행을 사추덕(四樞德)이라고 하였습니다. 추덕(樞德)이란 말은 하늘나라의 대문을 열고 닫는데 문지도리(경첩)와 같이 문을 열리게 하는 덕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천국의 문을 지키고 있고, 그 문을 여시는 분은 추기경님 이라고 하여 우리는 '추기경'(樞機卿)이라고 씁니다. 여기서 사추덕의 용덕은 바로 용감함이며, 하느님의 무한하신 권능에 의지한 용기를 말합니다.
우리가 용감함은 두 가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내 말과 생각과 행동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자 할 때 용기가 필요합니다. 오늘 요한과 같이 왕에게 죽을 수 있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충언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른 말로 다른 사람들을 옳게 인도하기 위해서 옳게 행동해야 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용감하게 일을 수행하고 복음을 전하는데도 예언직(豫言職, 預言職)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용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생활할 때에도 험악한 세상을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 모든 어려움을 견디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실천하는 용기와 참고 견디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충언과 올바른 말을 들을 때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충고를 하면 그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하여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즉시 고치는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덕목입니다. 오늘 헤로데는 요한을 의인으로 생각하였고, 거룩한 사람으로 판단하고 있었지만 그 잘못을 고칠 줄 모르는 용기 없는 사람으로 자신이 약속하였으나 그 약속이 잘못되었다면 솔직하게 시인하고 바르게 처신했어야 했습니다. 우리도 바로 헤로데와 같이 용기 없는 사람은 아닌지 반성하면서 세례자 요한의 순교를 기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