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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에 어떤 장애물이 있어 풍경을 망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높은 산에 올랐는데 안개와 구름이 너무나 많이 껴서 제대로 풍경을 눈이나 사진에 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구름이나 안개가 자옥한 멋진 산을 찍기는 하지만 산세나 능선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뭔가 가리고 있어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하면 갑갑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길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한 발짝 앞으로 가는 것도 걱정되거나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눈을 막고 있거나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는 상태에는 정말 앞이 막막하기도 합니다. 육적인 눈도 이런데 영적인 눈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잘못된 길을 걸어가거나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고 두려움과 걱정으로 살아가게 되며 인생의 결과가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 다니엘기도회 강사로 나온 찬양인도학 교수인 지선 전도사님의 집회영상을 보았습니다. 이 지선전도사님의 아들이 어렸을 때 목욕탕에서 젓가락으로 전기 콘센트를 찔러 온 몸이 감전되었습니다. 사지가 마비되었고 중환자실에서 치료받게 되었습니다. 여러 번 수술을 통해 다 타버린 손가락은 잘라내고 피부도 시커멓게 되어 회복불가능한 상태였는데 하나님 은혜로 살아나서 지금 은혜중에 지내고 있다고 간증했습니다. 이 일 이후 전도사님은 수시로 “주님이 함께 하셨다”고 고백하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아들이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당했는데 그 아기가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주님이 계시니 안심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수술실에 들어갈 때까지 의사들은 도저히 확신이 없었는데 수술이 너무 잘되었고 퇴원해서 건강하게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완전 타버린 손가락 하나를 잘랐는데 그 손가락은 약지였고 다른 손가락은 완전히 신경이 회복되어 군대도 갈 수 있는 정상인이 되었습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잘 자라게 되는 것을 보며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아들을 살려주셨다고 간증하는 영상을 보며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우리 주님은 안 되는 것 같은 것 가운데서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병들어 죽은 소녀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찾아와 딸을 죽음에서 건져 부활시켜달라고 말합니다. 죽었지만 다시 살려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요청을 허락하며 그 집으로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의 겉옷을 만졌습니다. 이 들은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며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예수님의 만지심을 통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치유해 주시고 새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무엇보다 오늘 본문에 치유를 기대하며 간절히 예수님을 찾았던 사람이 경험한 기적이 저와 여러분의 기적이 될 수 있도록 예수님을 간절히 찾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하기 위해 첫째로 자존심도 내려놓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9장 1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오늘 본문에서 죽은 딸아이를 살려달라는 한 관리가 등장합니다. 이 관리는 이미 죽은 딸을 살려달라는 엄청난 기적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미 죽었는데 살라달라니 이건 말이 되지 않는 요청입니다. 하지만, 이 관리의 간절한 호소를 듣고 예수님은 관리의 집을 향해 함께 걸어 가십니다. 이 관리가 누구인가? 오늘 본문과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 5장과 누가복음 8장에는 이 관리의 정확한 직업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직업은 회당을 책임지는 회당장이고 그의 이름은 야이로입니다. ‘회당’이란 바벨론 포로 이후에 세계 각처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그 지역에서 함께 모여 예배도 드리고 경전도 읽고 함께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며 신앙을 굳건히 다졌던 장소였습니다. 야이로는 유대종교의 집회장소, 유대인들의 민족교육장소인 회당의 대표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몰아 강하게 탄압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유대종교의 대표적 지도자부류중 한 부류인 회당장이 지금 죽은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아마 이 회당장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말씀을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회당장 야이로는 혹 예수님께서 자신의 딸로 죽은 자 가운데 살려주실 수 있는 분이겠다는 확신을 갖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야이로의 결단이 자신이 그간 가졌던 직위에 대한 내려놓음과 아울러 그가 가진 가치관, 종교적 신념의 포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이로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죽은 아이의 몸에 손을 얹어 달라” 요청합니다. 그러면 살아나겠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큰 가치관 충돌인지 아십니까? 이스라엘 종교와 이스라엘문화속에서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는 ‘정결의식’, ‘정결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상생활에서 거룩하게 살도록 하는 생활법입니다. 히브리어로 ‘카도쉬’ 헬라어로 ‘하기오스’라고 불리는 ‘정결’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기 위해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구별되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거룩함의 규칙을 더 세분화하여 완전히 율법적 규정으로 만들어 정결과 부정을 일상생활속에서 나눠놓았습니다. 이런 정결법은 종교적 활동과 일상적 활동을 통해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나 구체적으로 삶을 제약하는 규정이 되었습니다. 이 정결규례중 하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 죽은 사람의 몸에 접촉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부정한 일이었습니다.
민수기 19장 11절입니다.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회당장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예수님께 뭐라고 요청하고 있습니까?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주십시오. 그러면 살아날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믿음, 엄청난 용기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의 모든 자존심과 자신의 모든 종교적 가치관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만 믿는 것입니다, 부정한 것을 멀리하는 습관은 내가 그것에 의해서 오염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근거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혹 질병이 있는 사람과 가까이 있어 내가 질병에 걸리지 않을까? 죽은 시신에 가까이 있으면 내가 그 죽음의 공포속에 휩쓸리지 않을까? 육적으로 영적으로나 내가 영향을 받아 공포와 두려움으로 무너지지나 않을까? 그렇습니다. 그럴 수 있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유대인들이 그렇게 살았고 지금도 여전히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그런 영향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수 많은 규정과 관습을 만들고 그것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님은 변화의 능력을 지니셨기에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금기조항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어두움속에 찾아가서 그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과 소금의 역할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한 관리라고 쓰여진 회당장 야이로는 자신의 지위와 자신의 종교적 신념, 자신의 모든 유대인적 가치관까지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앞에 나와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을 표현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내 인격적 자존심, 내 민족적 가치관, 내 전통적 신념이 아닌 예수님만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내려놓는 믿음이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하기 위해 둘째로 부끄러움도 내려놓는 적극성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9장 20,21절입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기 위해 가시는 길에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혈루증(血漏症)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하이마’와 ‘레오’의 합성어인데 ‘피의 유출’이라는 뜻입니다. 이 질병은 월경시기와는 상관없이 생리기관에서 생기는 불규칙하게 출혈입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생리불순’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그 당시 이 혈루증은 부정한 질병으로 취급되었습니다. 혈루증을 앓는 여인의 주변 사람들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며 어느 누구도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병이 12년이나 지속되었다는 것은 질병에 대한 아픔뿐 아니라 인간관계의 고립으로 인해 말못할 고통이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그녀와 말도 섞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녀를 피해 다녔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주변에는 친구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아무리 자신의 문제가 급하다 할지라도 예수님 면전에 불쑥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던 그녀가 주님앞에 나와서 간청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직접 대화할 기회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었을까요? 이 여인은 예수님앞에 직접 자신의 상황을 말할 용기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냥 예수님의 옷자락이라고 만지기만 하면 나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21절입니다.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21절을 보니 이 여자는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이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졌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돌이켜 그녀를 보시며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9장 2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은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텐데” 그저 이런 생각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리고 그 옷자락을 만진 것을 느끼신 예수님께서 그 마음을 다 아시고 구원을 선포하시고 치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손을 댄 이 여인은 12년 동안 앓던 혈루증을 고침받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주눅들어 있고 사회적 분위기에 짓눌려 있고 결국 의기소침하여 무슨 말을 쉽게 할 수 없는 상황의 여인이 예수님앞에 나와 여전히 쉽게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는데 “대화보다 더 중요한 것, 내 현실에 대한 하소연보다 더 중요한 것, 그것은 바로 믿음대로 예수님을 붙드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이 여인이 보여준 것입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오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피하는 삶을 살아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를 치료해 주실 예수님이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 계시니 나는 그 시선을 무시하고 그 핍박을 무시하고 예수님 계신 곳에 가야만 해결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의 이 행동을 보면 예수님께 나오는 것이 대단한 용기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질병, 우리의 모든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 우리 주 예수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그 예수님께 문제를 들고 아픔을 들고 나와야 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스스로 구원받을 자 없습니다. 어떤 인간이 세상을 멀리하며 심신수양을 쌓고 초인간적 해탈을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보여져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오직 주님을 찾아와 예수님을 만나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기 위한 간절함, 예수님을 찾을 때 우리를 알아봐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는 구원을 얻고 세상의 모든 짐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질병과 아픔과 고난과 고독과 모든 세상의 어려움을 예수님을 통해 해결받게 됩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요한복음 14장 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6장 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든 문제, 우리의 모든 어려움, 우리의 모든 걱정거리를 내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역량에 도전하며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해결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인간 문제의 완전한 해결자는 우리 주 예수님, 우리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 주변의 시선과 우리 생활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만 바라보며 예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기적을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하기 위해 셋째로 환경을 보는 눈이 아닌 믿음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9장 23,24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시기 위해 야이로의 집으로 가다가 혈루증을 앓은 여인증을 고쳐주시고 다시 본래의 목적지인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신 이후의 기록이 지금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어떻게 해서 살아나게 되었습니까? 야이로의 딸은 열 두 살 된 무남독녀였습니다. 얼마나 애지중지키웠을까요? 얼마나 목숨처럼 아꼈을까요? 우리가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야이로는 이런 딸이 죽은 것을 안타까워해서 예수님께 다시 살려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당시에도 죽기 전에 병든 자에 대해 안수하고 치유하는 관례는 있었지만 죽은 자를 살려달라는 요청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요청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 아이를 살리시기 위해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집에 도착했을 때 피리 소리와 조문객의 떠들썩한 소리로 온 집안이 요란했습니다. 죽은 아이를 장례치르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여기서 ‘피리 부는 자’라는 말은 당시 사람이 죽으면 피리 부는 자를 청하여 애도를 표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피리를 슬프게 불게했는데 요즘 시대로 따지면 장례지도사같은, 혹은 요즘 장례식장에서 장례음악을 틀어놓는데 그 음악연주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런 분위기를 잡지 않아도 장례식장은 원래 우울하고 슬픈 분위기인데 피리연주자가 슬픈 곡을 연주하며 피리를 불고 있으면 장례식을 찾아온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침울할까요? 그리고 여기서는 ‘떠드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는데 성경 다른 곳에는 ‘훤화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애곡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장례가 났으니 사람들이 곡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호통치십니다.
마태복음 9장 24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님께서는 피리로 곡을 연주하는 사람과 장례로 인해 떠들썩 모여 온갖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물러가라”고 명하십니다. 이것은 “좀 조용히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잔다고 표현하신 것은 정말 자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시 깨어날 존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물러가라. 이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라는 말을 들으며 사람들은 모두 비웃었습니다. 아니 사람이 죽은 것과 사람이 자는 것을 분간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다고 분명 이 아이는 숨도 쉬지 않고 심장박동도 멈췄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렇게 말하는 예수님을 미치광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아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렇습니다. 보편적인 사람들이 생각할 때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의 말이 상식적으로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님은 세상의 상식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상식적인 일들, 보편적인 일들을 인정하시고 그 가운데 일하시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필요하다면 그 상식을 뛰어넘어 그 분의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25절입니다.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오늘 본문의 이 구절을 누가복음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 5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아이야 일어나라’로 번역되어 있는 아람어 원어는 ‘달리다쿰’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일어나라고 외쳤고 손을 잡고 일으켜 주시니 아이는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일어나게 된 것이 아니라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생명이 끊어졌다고 생명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숨이 멎었다가 숨을 쉬게 되었던 것입니다. 심장박동이 멈췄다고 심장이 다시 뛰게 된 것입니다. 아이는 분명히 죽었고 아버지가 확인했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모여 있었던 사람들이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했을 때 얼마나 비웃고 얼마나 비난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아이에게 명령하고 일으켜 주시니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감각으로 모든 일을 판단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보편적 가치관속에서 우리의 합리적 이성으로 상황을 판단합니다. 우리는 내가 경험한 지식의 토대로 모든 결정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앞에서 우리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기대하며 내 생각, 내 가치관, 내 경험의 기준을 내려놓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2장 9,10절입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빌립보서 4장 7절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나의 모든 경험, 나의 모든 지식, 나의 모든 합리적 이성으로 상황을 판단해서 미리 일을 결론을 내어버리고 비관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는 모든 일들속에서 항상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기대하며 맡기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건 분명 인간적 상식으로 될 수 없는 일이라도 그 상식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갈망하며 믿고 맡기고 담대히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오늘날도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마다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와 예배드리고 마치면 썰물처럼 빠져나갑니다. 그렇지만 오직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자만이 주님의 놀라운 능력과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도 죽음에서 건져주시며 살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인이신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려 주시는 능력자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겉옷만 만져도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정도의 믿음으로 주님을 붙잡은 혈루증있는 여인의 믿음은 보통믿음이 아니라 대단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아무리 누추하고 부끄럽고 직접 다가가기 마음이 무거운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경험해야겠다고 찾아온 한 사람의 믿음을 잊지 않으시고 기억해 주시며 역사해 주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누구든지 믿음의 손을 내밀어 확신있는 믿음으로 주님을 붙잡으면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우리 삶에서 우리가 뭔가를 해내려고 애쓰기보다 우리가 외쳐야 할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제가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그런 외침을 우리 주님 들으시고 우리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에게 은혜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어떻게든 주님을 만나 주님께 고백하고 주님께 손 내밀고 주님의 은혜만 사모하면 주님이 우리를 고쳐주실 것이기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 주님을 만나기를 소망하는 삶으로 믿음가운데 살아가시고 결국 주님의 능력으로 치유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