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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 선생의 역사관
(1)감시만어(感時漫語)
-『감시만어』라는 역사서
우리나라 사람 중에 『감시만어(感時漫語)』라는 책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감시만어』는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대통령 이승만과 함께 부통령에 당선되었던 성재 이시영
(李始榮:1869~1953) 선생의 저서다.
건국절 논란과 건국기원절
지금 일부에서 다시 대한민국 건국절을 가지고 논란하고 있다.
현 정부에서 1919년 4월 11일을 건국절로 제정하려 하자 뉴라이트 및 일부 야당·언론들에서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절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독립운동에 나섰던 선조들은 대한민국 건국절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상해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한 1919년 4월 11일이지만 이 날짜보다
보다 중요하게 여긴 것은 건국기원절이기 때문이다.
건국기원절이란 국조 단군이 민족국가를 건국한 날, 즉 지금의 개천절을 말한다.
기미독립선언서의 선언 날짜가 4252년 3월 1일인 것이 이를 말해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전부터 이미 이 나라의 건국기원은 서기전 2333년이라는 사실이 모든 독립운동가들에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상해 임정의 건국기원절 제정
1920년 3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제1회 정기총회를 열어 10월 3일을 건국기원절로 정했다.
이때 논란이 된 것은 원래 10월 3일이 음력이라는 점이었다.
대한민국은 양력을 쓰기 때문에 음력 10월 3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매년 건국기원절이 바뀌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양력 10월 3일을 건국기원절로 정해서 법제심의위원회로 넘겼다.
사실 10월 3일을 개천절이라고 하는 것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부른 것처럼 건국기원절이라고
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단군의 신하들
성재 이시영 선생은 『감시만어(感時漫語)』에서 당연히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라고 설명했다.
단군이 우나라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임금이 되었고,
그의 아들 부루(扶婁)가 하우(夏禹)와 도산(塗山)에서 회맹하고 국경을 정한 것이 한·중 두 나라가
화합하고 결합하는 시초라고 말했다.
단군 조선의 경계가 지금의 북경 지역인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였다고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이시영 선생에 따르면 단군의 조정에서는 원보(元輔:영의정) 팽우(彭虞)가 산천과 토지를 보호 관리
하는 일을 맡았고, 사관 신지(神誌)가 서계(書契)를 찬술하는 일을 맡았고, 농관(農官) 고시(高矢)가
밭농사를 주관했다는 것이다.
이시영 선생은 고시씨에 대해서는 “한민족의 풍습에 들에서 농사지으며 음식을 먹을 때 먼저 밥 한 술을
떠서 고시씨(高矢氏:고시레)하고 던지는 것은 그 근본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단군의 태자 부루가 도산에서 중국과 회맹했다는 이야기나 팽우·신지·고시에 대한 설명, 그리고
단군의 부인이 비서갑(匪西岬)이라는 내용 등은 『환단고기』의 설명과 일치한다.
『환단고기』가 진서인지 위서인지는 역사학적 방법론에 따라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환단고기』가 이땅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1979년에 위조했다는 따위의 주장은 근거가 없음이
1934년에 쓴 『감시만어』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환단고기』의 주요 내용들은 적어도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널리 공유된 내용이었다.
-이유장의 『동사절요』
그 이유는 독립운동가들의 이런 역사관이 그때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팽오, 신지, 고시 등 단군의 신하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조선총독부의 눈으로 한국사를 보는 학자들은
믿지 못하겠다고 나오겠지만 이런 내용은 독립운동가들이 만든 이야기가 아니다.
경상도 안동 출신의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1625~1701)이라는 조선 중기 학자가 쓴 『동사절요(東史
節要)』라는 책이 있다.
이유장은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공조좌랑(佐郞)까지 역임한 인물인데, 그가 쓴 『동사절요』의 1권
‘군왕본기’에 부루(扶婁)에 대한 이야기가 이미 나온다.
“부루(다른 본에는 해부루라고도 되어 있다)는 단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비서갑으로 하후씨의 딸이다.
수토를 다스리기 위해서 제후들이 도산에서 만나 옥백을 가져가 서로 만날 때 부루가 가서 회맹했다(외교의 시작이다).
부루의 자손이 기자를 피해 북부여를 세웠다(영토를 양보한 시작이다) 환인(桓因)의 신시(神市)의 시대에
대해서는 상고하지 못했다(이유장, 『동사절요』)”
“扶屢(一作解夫婁) 檀君之子 母非西岬女夏后氏 平水土會諸侯於塗山 相見以玉帛 扶屢往會(外交之始)
扶屢之子孫避箕子立爲北扶餘(讓土之始) 桓因神市之世 無所攷(『東史節要』 卷1 君王紀 第1 扶屢)”
-조선 학자들의 고대사관
17세기 때 학자 이유장은 『동사절요』에 단군의 왕후가 비서갑이며 그 아들 부루가 도산회맹에 참석
했다고 썼다.
이때 (고)조선과 중국이 처음 외교관계를 맺었는데, 이는 이시영 선생이 부루가 도산에서 회맹하고 한·중 두 나라의 국경선을 획정했다고 쓴 것과 일치한다.
또한 이유장은 부루의 자손이 기자를 피해서 북부여를 세운 것이 영토를 양보한 시초라고 썼다.
그러면서 환인의 신시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서 상고하지 못했다’라고 썼으니 위의 내용들은 모두
사료적 근거를 가지고 썼다는 뜻이다.
이는 비단 이유장 뿐만 아니라 소론계 학자인 이종휘(李鍾徽:1731~1797)도 『수산집(修山集)』에서
“단군이 비서갑 신녀를 취했다(檀君娶匪西岬神女)”라고 써서 단군의 부인이 비서갑이라는 사실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조선 학자들 사이에 꽤 알려진 이야기였음을 말해준다.
이 외에도 우리가 조선시대 선비들의 문적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서 그렇지 성재 이시영 선생이
1934년에 쓴 『감시만어』나 『환단고기』에만 나오는 것 같은 이야기들을 조선 시대 선비들의 문적
에서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세조 때의 서적 수압령
세조는 재위 3년(1457) 5월 26일 서적 수압령을 내려서 고조선 및 우리 민족정신과 관련된 책들을 관에
바치라고 명령했다.
그중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조대기(朝代記)』 및 두 종류의 『삼성기(三聖記)』 등도 들어 있는데, 『고조선비사』나 『조대기』는 고조선의 비사와 고조선의 연대기일 것이 분명하다.
또한 『삼성기(三聖記)』는 환인·환웅·단군의 삼성에 관한 서적이 분명하다.
나는 이때 관에 바치지 않은 서적들이 일부 사대부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전해지다가 이유장이나 이종휘의 글 등에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이종휘가 소론계 인사이고, 이시영도 소론계 집안이라는 점에서 이런 추론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을 것
이다.
평안도 관찰사까지 역임했던 성재 이시영 선생이 나라가 망하자 만주로 망명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독립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배경은 바로 우리 역사의 뿌리부터 바로 세운 역사관에 있었다.
지금 내외우환에 시달리는 우리나라가 나아갈 길 또한 우리 역사의 뿌리부터 바로 세우는 바른역사관
수립에 있다는 점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현실은 정권이 바뀐 후에도 국립박물관 등에서 “삼국사기는 가짜”, “가야는 임나” 따위의 강연을
하는데 국고가 지원되는 형편이니 이시영 선생께서 부통령으로 계신다면 지팡이 들고 쫓아가 “이 역적놈들!”이라고 강사들과 관계공무원들을 내려쳤을 것이다.
(3)훈민정음 이전의 고유 문자
-우리 고유의 문자가 있었다.
지금 우리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우리 최초의 문자라고 보고 있거나 혹은 삼국 때 사용했던 이두
(吏讀)를 우리 역사상 최초의 문자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은 『감시만어』에서 그 훨씬 이전에 우리 고유의 문자가 있었다고 말
했다.
성재는 “우리 한국은 나라를 향유한지 4천여년이고, 삼한시대 이후부터는 신빙성 있는 역사가 시작되
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하고는 수많은 역사서와 경적(經籍), 그리고 고유한 문자 등이 있었는데,
네 번에 걸친 외국의 침략과 한 번의 내란으로 대부분 불타거나 사라졌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연(燕)나라 노관이 난을 일으키면서 위만이 들어와 ‘기자조선’의 역사기록이 모두 불탄 것이며, 두 번째는 당나라의 침략이고, 세 번째는 후백제 견훤이 신라의 구사(舊史:옛 역사서)와 경적을
불태운 것이며, 네 번째는 몽골의 침략이며 다섯 번째는 일제의 침략이다.
-『신지비사』와 「구변진단도」
성재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문예품이 단군시대 글을 관장하던 신지(神誌)가 쓴 『비사(秘詞)』라는
것이다.
이시영 선생은 ‘『비사』는 그 글씨의 모양이 기이하고 의미가 심오해서 해득하기가 쉽지 않은데,
고구려 대홍영(大弘英)이 한문(漢文)으로 번역하고 서문에 주석을 붙인 것이 「구변진단도(九變震檀圖)」
’라고 썼다.
그러면서 “우리 한인(韓人)은 상고시대부터 우리 고유의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우리 옛 선비들이 어떤 주장을 할 때는 반드시 근거를 가지고 말한다.
고구려 대홍영이 『신지비사』의 내용을 한문으로 번역했다는 「구변진단도」는 고려 말 조선 초기
학자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의 「태조 이성계 신도비명」에도 나오는 책이다.
권근은 고려 서운관(書雲觀:천체 관측을 관장하던 관서)에 예부터 비장해오던 『비기(秘記)』 중에
「구변진단도」가 있었는데, 여기에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 란 말이 쓰여 있었다는
것이다.
건목득자(建木得子)란 이(李)씨가 나라를 얻는다는 뜻으로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말한다.
성재는 진단(震檀)이란 우리나라를 뜻하고, 9변이란 나라 도읍이 아홉 번 변한다는 뜻이라고 부연 설명
하고 있다.
-『신지비사』라는 책
『신지비사』라는 책을 근거로 삼으면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는 학자들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책 이름이라고 거품을 물겠지만 이 책은 『삼국유사』의 「흥법(興法)」조에도 나온다.
『삼국유사』 흥법조의 ‘양명(羊皿)이 개금으로 환생했다’는 대목이 그것인데, 여기에서 일연은 『고려
고기(高麗古記)』라는 책을 인용해 재미있는 일화를 적어놓고 있다.
수 양제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하던 영양왕 25년(614)에 고구려 왕이 거짓으로 글을 올려
항복을 청했다.
이때 고구려 한 무사가 작은 화살을 품에 감추고 사신을 따라 양제가 탄 배에 올랐다가 양제가 표문을
읽을 때 활을 쏘아 가슴에 맞췄다.
양제가 “내가 천하의 주인으로 작은 나라를 친히 정벌하다가 이기지 못했으니 만대의 웃음거리가 되었
구나!”라고 한탄하자 우상(右相) 양명이 “신이 죽어 고구려의 대신이 되어서 반드시 그 나라를 멸망시켜
황제의 원수를 갚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수 양제가 죽은 후 고구려에 환생한 이가 바로 연개소문이라는 것이다.
『고려고기』라는 책은 지금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일연 때만 해도 전해지고 있었던 고구려의 역사서였다.
-역사상의 여러 고문자들
일연은 이외에도 연개소문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실으면서 「『신지비사』의 서문에는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이 서문을 아울러 주석했다”고 했으니 소문(蘇文)이 곧 벼슬의 이름인 것은 문헌으로
증명되지만, 「전기」에는 “문인(文人) 소영홍(蘇英弘)이 서문을 썼다”고 했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라고 덧붙였다.
일연은 연개소문의 ‘소문’은 벼슬의 이름이 맞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 「전기」에는 ‘문인 소영홍이
서문을 썼다’고 되어 있으니 어느 문헌이 맞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재 이시영이 본 문헌에는 ‘고구려 대홍영이 『비사』를 한문(漢文)으로 번역하고 서문에 주석을
붙인 「구변진단도」를 썼다’라고 나와 있었다는 것이다.
성재는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 글자가 있었다는 여러 사례를 들고 있는데, 이를테면 문화 유씨 족보에
쓰여진 왕문(王文)의 서법이 전자(篆字) 같기도 하고 부적(符籍) 같기도 하다는 것이며, 평양 법수교
(法首橋)의 고비(古碑)나 남해도 암벽의 글자 등도 모두 고대 한인이 사용하던 고대문자라고 보고 있다.
-국어학자 김윤경도 마찬가지 주장
그런데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 고문자가 있었다는 주장은 성재가 『감시만어』에서 처음 한 것이 아니다.
국어학자 주시경(周時經)의 제자로서 일제강점기 여러 학교에서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던 한결 김윤경
(金允經:1894~1969)도 마찬가지 주장을 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김윤경은 1931년 경 『동광』에 「정음(正音) 이전의 조선글…」 등 여러 편의 논문을 실어,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 고유문자가 있었다”고 논증했다.
김윤경도 그 근거에 대해서 『문헌비고』, 『용비어천가』 등 여러 문헌을 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조선
초기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에 “신지(神誌), 단군 때 사람으로 스스로 선인(仙人)이라고 하였다”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김윤경은 이 글에서 성재 이시영처럼 문화 유씨 족보의 왕문과 평양 법수교, 남해도 암각 문자 등을 인용해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 고유의 문자가 있었다고 주장해서 이런 인식이 당시 독립운동가 겸 역사
학자 및 국어학자들 사이에서는 널리 통용되었던 인식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일제가 조선어학회를 탄압한 것이 국어와 역사가 결합한 이런 움직임을 식민지배 통치의 근본적
위협으로 보았기 때문임을 말해준다.
-해방 후 사라진 우리 전통의 사유체계
김윤경은 또한 “일본 하이(蝦夷)땅의 수궁(手宮)문자라는 것도 아마 북부 대륙조선에서 행하던 고대문자
라고 추단”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고대 일본의 야마토왜가 고대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세웠다는
‘임나=가야설’이 헛소리이며, 거꾸로 고대 일본은 한국인들이 세운 나라라는 사실을 언어학적으로 입증
하는 것이었다.
성재 이시영과 한결 김윤경 선생의 글들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일제강점기 때 지식인들이 가졌던 우리
역사, 언어에 대한 이런 광대한 생각이 해방 후 모두 삭제된 데 대한 깊은 아쉬움이다.
해방 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만든 학제 및 교육사상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우리 전통의 교육사상과
교육체계의 토대 위에서 서구의 것을 선별적으로 수용했어야 하지만 일본인들이 만든 교육시스템이
지금까지 거의 그대로 내려온 것이 현재 한국 사회 학문이 겪고 있는 위기의 본질이란 생각이다.
우리 고유의 사상체계는 학문의 대상에서조차 제외되면서 우리 얼이 없는 껍데기 학문이 판치다 보니
OECD 국가 중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수상한 평화상 외에 노벨상 수상자 한 명 없는 부끄러운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성재 이시영의 『감시만어』를 읽으면서 해방 후 친일세력이 청산되어 성재같은 이들의 역사관과 학문
관이 우리 사회의 정상적인 역사관과 학문관이 되었다면 지금의 모습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아직까지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는 이들이 목청 높일 수 있는 사회는 되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 사회의 정신세계가 지금처럼 황폐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4)깊고도 넓은 역사의 세계
-장도빈과 고대사
1920년대 독립운동가들이 지금 『환단고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을 보면 혀를 끌끌 찰 것이 틀림
없다.
『환단고기』가 위서인지 진서인지는 둘째로 치더라도 위서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의 수준이 너무 낮기
때문이다.
1948년 단국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역임한 산운(汕耘) 장도빈(張道斌:1888~1963) 선생도
『환단고기』의 내용들을 대체로 알고 있었다.
1908년 20대 초반의 나이에 신채호 선생과 함께 『대한매일신보』의 필진으로 활약한 장도빈은 1928년에 『조선역사대전(朝鮮歷史大全)』을 쓴 역사학자다.
그가 『동광』 제7호(1926년 11월 1일)에 쓴 「단군사료」라는 논문에는 ‘작은 발견〔小發見〕과 나의
희열, 조선고대사 연구의 일단’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이 글에서 장도빈은 “개천(開天) 125년 무진 10월 3일에 국인(國人)이 단군을 추대해서 임검(壬儉:임금)
으로 삼았고, 단군은 하백의 딸인 비서갑을 왕후로 취하고, 태자 부루를 낳았다”고 썼다.
또한 “팽우(彭虞)에게 산천을 다스리게 하고, 신지(神誌)에게 서계(書契)를 관장하게 하고, 고시(高矢)
에게 농사를 관장하게 했다”고 썼고, “태자 부루(扶婁)를 보내 도산(塗山)에서 우왕과 회합했는데,
이것이 중국과 교제한 첫 시작”이라고 썼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나 「태백일사」의 내용 등과 대체로 일치하는 내용들이다.
장도빈은 또 “단군이 다른 아들 부여를 봉하셨다(封支子于扶餘)”라고 써서 부여를 단군의 아들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단군의 아들 부여
그런데 부여를 단군의 아들로 보는 것은 성재 이시영도 마찬가지다.
성재는 『감시만어』에서 단군은 아들이 넷 있었는데, 첫째가 태자 부루, 둘째가 부소(扶蘇), 셋째가
부우(扶虞), 넷째가 부여(扶餘)라고 보았다.
백범 김구 등이 1935년 항주(抗州)에서 결성한 한국국민당에서 발간하던 『한민』이란 잡지가 있다.
한국국민당은 임시정부 내의 여당이었는데, 『한민』 9호(1936. 11. 30)에 「건국기원절 후 느낌을
말함〔感言〕」이란 논설이 실렸다.
이글은, “망국노의 탈을 쓴 채 적의 말굽 밑에서 또다시 건국기원절을 맞은 우리는 뜨거운 눈물이 피
묻은 옷깃을 적실뿐이다”로 시작한다.
-비열한 사상을 퇴치하자
「건국기원절 후 느낌을 말함」은 나라가 망한 이유가 남의 것을 높이는 사대주의라면서 “건국기원절을
맞을 때 먼저 이 따위 비열한 사상을 퇴치하자”고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우리의 자손은 우리의 역사를 아라사(러시아)나 일본 문헌에서 찾게 되지 않게 만들어 주자”라고
다짐하면서 한국고대사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글에서도 단군에게는 ‘부루·부소·부우·부여’의 네 아들이 있었다면서 단군조선의 서쪽 강역을
란주(灤州)라고 말하고 있다.
난주는 근처에 난하가 있는 지금의 하북성 난현(灤縣) 부근이다.
북한의 리지린이나 남한의 윤내현 등이 처음으로 난하를 고조선과 진·한의 국경으로 본 것 같지만 그보다
몇십 년 전에 성재가 이미 난하를 단군조선의 서쪽 국경으로 보았던 것이다.
반면 성재 당시 조선총독부는 고조선을 평안남도 일대에 있었던 작은 소국이라고 주장했다.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
내가 역사를 공부하다가 놀라는 것은 내가 고민했던 이런 내용들이 알고 보면 이미 독립운동가들이 다
밝혀놓은 사실들이란 점을 거듭 확인할 때다.
우리나라는 독립운동가들의 이런 역사관을 가르치는 역사학과는 전무한 반면 조선총독부가 왜곡한 역사
관을 ‘정설, 통설’로 가르치는 대학 역사학과들은 득실거린다.
이들의 공통적 특징은 관점이 맞고 그르고를 떠나서 무식하다는 점이다.
성재는 물론 백암 박은식, 석주 이상룡 같은 독립운동가들은 한국과 중국의 고전에 능통했다.
무원 김교헌은 당대 최고의 학자만이 역임할 수 있던 규장각 부제학 출신이니 더 말할 것이 없다.
한국과 중국의 수많은 경적(經籍)들을 대부분 외우거나 옥편 없이 술술 읽는 실력으로 한중 고대사의
진실을 이미 밝혔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이분들의 역사관은 모두 사장되고, 조선총독부에서 왜곡한 무식한 역사관만 횡행
하는 것이 21세기 우리의 현실이다.
-『감시만어』의 넓고 깊은 고대사관
성재가 『감시만어』에서 밝힌 단군의 아들 부여의 후손들에 대한 계보는 고대사를 보는 우리의 눈을
활짝 뜨게 한다.
“그 후 (단군의) 자손들이 분거(分居)하여 번성하였는데, 부여는 다시 갈라져서 동부여·북부여·졸본부여·
서원(徐菀)부여·남부여가 되고 그 지파가 예·맥(濊貊), 옥저(沃沮), 숙신(肅愼)이 되었다.
서원부여는 그 후에 신라·고려·조선·한(韓:대한제국)으로 이어진다(『감시만어』)”
부여는 다섯 갈래로 나뉘어 번성하는데, 부여에서 동이족 역사의 여러 물줄기가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졸본부여는 그 후 고구려, 발해, 여진(동서〔東西〕여진이 있다)이 되는데, 동여진의 후손이 금(金),
만청(滿淸:청나라)이고, 남부여의 후예가 백제이고, 기씨 조선의 후예들이 마한이며, 예(濊)의 후손은
서예(徐濊), 동예(東濊), 불내예(不耐濊)이고, 서예의 후손이 서국(徐國)이다(『감시만어』)”
- 단군 후예 및 부여족 제국들의 갈래
성재는 부여에서 갈라진 동이족 제국의 갈래를 이렇게 정리했다.
①서원부여→신라→고려→조선→대한제국
②남부여→백제
③졸본부여→고구려→발해→여진
④졸본부여 중 동여진→금→청
⑤기씨 조선→마한
⑥예(濊)의 후손 중의 서예(徐濊)→서국(徐國)
성재는 고구려·백제·신라·발해·고려·조선뿐만 아니라 만주족의 금나라, 청나라까지 우리 역사의 갈래로
바라보는 광대한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
-서국과 서원왕
이중 예(濊)에서 갈라진 서국(徐國)에 대해서는 한중고대사에 아주 깊은 지식이 있지 않다면 이름조차
처음 들어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성재는 초기 서국의 위치를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사현(泗縣) 북쪽으로 보고 있는데, 주(周)나라 목왕
(穆王:재위 서기전 1023~서기전 982) 때 주나라 군사를 크게 파하고는 중원의 서쪽은 주나라가 다스
리고 동쪽은 서국이 다스렸다고 썼다.
서국에서 비교적 유명한 임금이 서언왕(徐偃王)인데 성재는 언왕 때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50여국에
달했다고 썼다.
서국은 초나라에 멸망하는데, 성재는 “옛부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서국은 절강성 소흥(紹興)을 중심
으로 그 주위에 3천여리의 땅을 통치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서쪽의 주나라와 동쪽의 서나라
말하자면 한족(漢族)의 주(周)나라에 맞선 동이족의 서(徐)나라가 중원을 각각 동쪽(서국)과 서쪽(주나라)
으로 나누어 통치했다는 이야기이다.
아직도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따르는 식민사학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못 믿겠다”고 거품 물겠지만
서국이 중원 상당지역을 지배했다는 기록은 중국 사료에도 무수히 나온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서문에서 “동이가 점차 강성해져서 드디어 회수(淮水)와 대산(垈山)
으로 나뉘어 옮겨오더니 점차 중원〔中土〕까지 뻗어와 살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한 예에
불과하다.
다만 『후한서』 「동이열전」 서문에는 서국의 영토가 사방 5백리에, 조공 바치는 나라가 36국이라고
성재의 기술보다 조금 작게 나온다.
-알에서 태어난 서언왕
서언왕에 대해서는 얼마 전 『매국사학의 18가지 거짓말(만권당, 2017)』을 출간한 황순종 선생이 첫
저서였던 『동북아대륙에서 펼쳐진 우리 고대사(지식산업사, 2012)』에서 자세하게 서술했다.
역사를 우리 관점으로 조금 깊게 공부하다 보면 서언왕에게 가서 닿는다는 사례다.
서언왕에 대해서는 『한비자(韓非子)』나 『회남자(淮南子)』에도 36국이 조공을 바쳤다고 나오고,
『사기』 「진(秦)본기」에도 나오는 역사적 사실이다.
『박물지(博物志)』에는 “서언왕의 궁인이 임신해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강가에
버렸더니 개가 물고 돌아와 따뜻하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서언왕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서언왕도 동이족 특유의 난생사화의 주인공이란 것이다.
-역사의 우민화
이시영 선생의 『감시만어』를 읽을 때 유감인 점은 이런 깊고도 넓은 내용들이 너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우리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면 이 정도 내용은 다 알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간략하게 서술
했을 것이다.
서언왕이란 이름을 처음 들어본 사람들이 한국고대사 교수들이란 사실을 알면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을
것이다.
식민사학은 해방 후 72년이 넘도록 역사 우민화 정책, 즉 역사와 국민들을 분리시키는 정책을 펴왔다.
“역사는 역사학자들에게 맡기라” 따위의 모토로 역사와 국민들을 분리시켜왔다.
그리고는 “한사군 한반도설”이니 “가야=임나설” 따위 무식한 이야기를 이른바 ‘정설, 통설’이라면서
전파해왔다.
어떻게 보면 그들 자신이 너무 무식하기 때문에 우민화 정책을 펼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성재 이시영의 『감시만어』는 무식한 학자들이 만든 이런 역사 우민화 정책은 일본 극우파들이나 중국
동북공정 소조에게 되돌리고 역사가 일종의 상식이었던 우리 선조들의 역사관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5)독립운동가에서 민주화 투사로-
-하루아침에 장군이 된 김윤근
국민방위군 사건이란 것이 있다.
6·25 전쟁 중에 제2국민병으로 징집된 청장년들 10만 명 이상이 얼어 죽거나 굶어죽은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의 징집명령에 따라서 입대한 10만 명 이상의 국민방위군이 정작 인민군은 구경도
못해 본 체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부패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은 1950년 12월 21일 군인과 경찰, 공무원이 아닌 만17세 이상~40세 이하 장정들을 국민
방위군으로 징집하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공포했다.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군 경력이 없는 김윤근을 하루아침에 준장으로 만들어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김윤근은 지청천이 만든 우익 반공 청년단체 대동청년단 출신이었는데, 대동청년단이 이승만의 사조직인
‘대한청년단’에 흡수 된 후 단장을 맡았다.
부사령관 윤익헌도 대동청년단과 대한청년단 간부 출신이었다.
간부 상당수가 우익 반공 청년단체 출신들이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죽음의 행진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다시 뒤집히자 이승만 정부는 1951년 1·4 후퇴라 불리는 제2차 서울철수 작전을 감행하는데, 이때 50만여 명에 달하는 국민방위군도 남하대열에 올랐다.
혹한에 떠는 국민방위군들에게 식량도 피복도 지급되지 않았다.
‘보급이 전투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병법의 기초도 무시한 채 마구 징집한데다 이승만 정권 특유의 부패가 더해져서 그렇잖아도 부족한 보급품을 간부들이 빼돌려 착복했던 것이다.
그래서 얼어죽고, 굶어죽은 시신들이 즐비한 가운데, 해골만 남은 청장년들은 죽음의 행진을 계속해야
했고, 이를 ‘해골들의 행진’이라고 불렀다.
-공산주의자의 선전?
곳곳에서 국민방위군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제보를 받은 일부 국회의원들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졌다.
야당의원들은 1951년 1월 15일 ‘제2국민병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사건의 진상을 조사했다.
그 결과 무려 9만명에서 12만명에 달하는 청장년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내무부 장관 조병옥은 대통령 이승만에게 국방장관 신성모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으나 이승만은 거부했고,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전 서울시장 윤보선도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으나 이승만 정권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이라고 거부했다.
이 사건 와중인 1951년 2월 육군 11사단 9연대가 경남 거창 신원면 주민 719명을 마을 뒤 산골짜기로
모아 죽인 ‘거창 양민학살사건’까지 드러나면서 이승만 정권의 무능, 잔학성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이 두 사건으로 국민여론이 비등했지만 정권 담당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이승만 생일(3월 26일)이어서
“이승만 대통령 생일 기념 선물 쇄도(『부산일보』 1951년 3월 20일자)”이라는 보도가 나올 정도였다.
-식민사학자 이선근이 재판장
국회 조사위원회의 진상조사 결과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 물자를 빼돌려 10만 여 명의 죄없는 청장년들을
살해한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는데, 재판장이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이었다.
이선근 역시 지청천이 만든 대동청년단 준비위 부위원장 출신이므로 처음부터 봐주기 위해 재판장으로
선정한 것이었다.
와세다대 사학과 출신의 이선근은 식민사학자이자 만주국 협화회 협의원을 역임한 친일파였다.
이선근은 군수물자를 빼돌려 착복하고 정치권에 상납해 10만여 명을 죽게 만든 민족적 대참사에 대해
사령관 김윤근 무죄, 부사령관 윤익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해 큰 충격을 주었다.
국회는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 해체를 결의했고, 1심 선고에 대해 비판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중앙고등군법회의는 7월 19일 김윤근, 윤익헌 등 5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8월 12일 전격 집행했다.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착복한 수 십 억원 중 상당수가 이승만 계열 정치인들에게 상납되었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이들이 전격 처형되는 바람에 더 이상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시위소찬 부통령의 사임
국민방위군 사건이 드러나자 부통령 이시영은 큰 죄책감에 빠졌다.
이승만은 친일파들과 극우 반공 청년 단체를 국정의 두 동력으로 삼았기에 독립운동가 출신 부통령이
활동할 공간은 없었다.
그러나 이시영은 이 사건에 책임을 느끼고 1951년 5월 9일, 만 여든 두 살의 노구로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이시영은 「사임사」에서 3년 간의 부통령 시절 “하나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시위소찬(尸位
素餐:높은 공직에 앉아 공적도 없이 녹만 먹는다)에 지나지 못했다”면서 회한에 차서 말했다.
“이것은 그 과실이 오로지 나 한 사람의 무위무능에 있었다는 것을 국민 앞에 또한 솔직히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매양 사람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일을 하도록 해 줌으로써 사람의 직능 그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니 만약에 그렇지 못할진대 부질없이 공위(空位)에 앉아 허영에 도취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자리를 깨끗이 물러나는 것이 떳떳하고 마땅한 일일 것이다(이시영, 「부통령 사임사」)”
“그러나 내 아무리 노혼(老昏:늙고 혼미함)한 몸이라 하지만 아직도 진충보국(盡忠報國: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함)의 단심(丹心)과 성열(盛熱)은 결코 사르라지지 않았는지라 잔생(殘生:남은 인생)을 조국의
완전통일과 영구독립에 끝끝내 이바지할 것을 여기에 굳게 맹서한다(이시영, 「부통령 사임사」)”
-이승만을 살려준 6·25 남침
이시영은 그의 말대로 시위소찬했는데도 책임을 지고 사임했지만 대통령 이승만은 사임은커녕 일체의
반성도 하지 않았다.
반성은 커녕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직을 연임하려 시도했다.
1948년의 제헌국회 선거에서 총 200석 중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중앙회는 55석, 득표율은 24%에 불과
했다.
이승만은 한민당 세력을 끌어들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거듭된 실정으로 국민들이 등을 돌렸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총선거에서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회는 득표율 6.8%로 14석으로 줄어
들었다.
한민당 후신인 민주국민당도 참패했고 승자는 전체 210석 중 126석으로, 득표율 62%를 달성한 무소속
이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게 되어 있으므로 이승만 정권의 몰락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총선을 치른지 불과 한 달 남짓만에 북한군이 전면 남침하면서 이승만 정권은 기사회생했다.
-5·26 정치파동과 국제구락부 사건
부산으로 쫓겨 온 이승만은 국회의 간선제로는 대통령에 연임될 가망이 없다고 보고 직선제로 바꾸려
했다.
이에 맞선 야당 의원 123명이 1952년 4월 17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자 이승만은 1952년 5월
25일 부산과 경상남도, 전라남북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다음날 50여명의 국회의원들을 헌병대로
끌고 갔다.
이것이 ‘5·26 정치파동’ 혹은 ‘부산 정치파동’이다.
이때 부통령직을 사임한 성재 이시영은 만 83세의 노구였다.
이시영은 이승만의 무능과 독재를 방치했다가는 나라가 망하겠다는 생각에 조병옥 등과 함께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
6월 20일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 호헌구국선언」을 발표하기로 한 것이다.
정권의 감시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문화동지간담회’란 이름을 내걸었는데, 이시영과 조병옥을 필두로
심산 김창숙, 이동하, 서상일, 전진한 등의 독립운동가들과 유진산, 장면 등의 정치가 등 77명의 정당,
사회·문화단체 지도자들이 위원으로 포진했다.
그러나 선언은 예정대로 발표되지 못했다.
선언 발표 당일의 사건을 여기 참석했던 정치인 고흥문 ( (전 국회부의장)의 회고에서 보자.
“사회를 맡은 유진산 씨가 등단하여 막 개회선언을 마치는 순간 또다시 민주주의의 새싹은 짓밟혀지고
말았다. 와지끈! 출입문이 박살나면서 수많은 괴한들이 대회장 안으로 난입해 들어왔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의자·화분 등을 뒤엎고 대회에 참석 중인 1백여 인사와 40여 명의 국내외 기자들을
향해 무차별로 돌멩이, 부숴진 의자, 깨어진 화분을 집어 던졌다.
심지어는 발길질, 주먹질을 해댔다. 대회장은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었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당시 대회장에 참석해 유석(조병옥)과 진산을 거들어 주고 있던 나는 의자로 머리를 가리고 황급히
조병옥 박사와 이시영 씨 등을 감싸고 피신했다.
그때 조 박사는 화분을 뒤집어 써 타박상을 입었고 김창숙·서상일 씨 등도 부상을 당했다.
현장에서 유진산·김동명·이정래……등이 헌병에게 체포되어 경남 도경찰국에 구금되었다
(고흥문, 『못 다 이룬 민주의 꿈』)”
-이후에 발생한 일
이승만은 그해 7월 4일 야당 의원들의 참석을 저지한 채 직선제 개헌을 밀어붙였고 부정선거 끝에 대통령에 연임되었다.
10만 명 이상을 죽게 만든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에게 무죄를 선고한 이선근은 이후 서울대 교수,
문교부장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성균관대·영남대·동국대 총장,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
연구원)초대 원장 등으로 승승장구하면서 이승만 정권은 물론 유신체제 찬양에도 앞장섰다.
한국현대사의 뒤틀린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반면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성재 이시영은 해방 후 팔순이 넘은 노구로 이승만 독재에 맞서는 민주화 인사의 삶을 살아야 했다.
몸으로는 평생 독립전쟁과 민주화투쟁에 나서면서 정신으로는 단군부터 시작하는 우리 역사의 정통성을
굳게 견지했던 성재 이시영, 그의 삶은 일제강점기가 좋았다는 뉴라이트들이나, 이승만은 비판하면서도
한국 고대사는 조선총독부의 역사관을 추종하는 짝퉁 진보 모두에게 반성의 자료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