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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요계의 엘레지의 여왕, 살아있는 전설, 노래를 너무 편히 부르는 세계 최강의 가창력.
1941년 10월 30일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문성여자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58년 노래자랑 프로그램에 출연해 1등을 한 뒤, 이듬해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하였습니다. 이어 1964년 <동백아가씨>를 발표해 35주동안 가요 순위 1위를 차지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받았습니다.
이듬해 말 창법이 왜색조라는 이유로 <동백아가씨>는 방송
금지곡이 되고, 뒤따라 발표한 <섬마을 선생님>과 <기러기 아빠>도 방송금지곡으로 묶인 뒤, 음반제작과 판매까지 금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타고난 목소리와 특유의 고음, 뛰어난 가창력과 무대 매너를 바탕으로 이후에도 계속 수많은 노래를 히트시키면서 한국 대중가요를 대표하는 여성 가수로 인기를 모았습니다.
대표적인 히트곡으로는 <황포돗대>,<울어라 열풍아>, <여자의 일생>,<황혼의 블루스>,<흑산도 아가씨>등이 있고, 2004년
까지 총 2,100여 곡에 달하는 곡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한국 가요 사상 가장 많은 취입곡 기록입니다. 이 밖에도 500여 장의 음반을 발표해 최다 음반 판매기록은 물론, 45년에 달하는 최장 기간 가수활동 기록 등 여러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1999년에는 가수 데뷔 40주년 기념음반 발표와 함께 자전
수필집 [인생, 나의 40년]을 출간하였고, 2002년에는 평양에서 남북 동시 텔레비전 생중계로 특별공연을 열기도 하였습니다. 1995년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대상과 함께 화관문화훈장을 받았고, 대한민국 가수왕 3회, MBC 10대가수상 10회를 받았습니다. 2004년에는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민족문학
작가회의 우정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트로트의 여왕, 엘레지의 여왕으로 불리웁니다.
2.《미소라 히바리》
(한국계이지만) 일본 최고의 전설적 가수, 매력적인 호소력 짙은 목소리, 역도산과의 격정적 사랑.
일본 최고의 엔카 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의 본명은
가토 히바리(加藤 和枝)이며, 그녀는 1938년에 아버지 가토 마스키츠(加藤 增吉 : 김해 출신본명:장근석)와 어머니 기미에
(喜美枝) 사이에서 태어나 9세 때 데뷔하여 몇 편의 영화 출연
과 함께 40년을 엔카와 함께 한 가수입니다.
그녀의 사후, 일본 여성으로서 최초로 ‘일본 국민 영예상’을 수상
하여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조’ 라는 별칭을 얻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트롯의 여왕이 이미자라고 한다면 일본 엔카(演歌)의 여왕이 미소라 히바리라고 보면 됩니다.
미소라 히바리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말들이 많습니다. 이에 일본에서 활약하다가 돌아온 작곡가 손목인씨가, 어느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미소라 히바리’, ‘미야코 하루미’ 등의 유명 엔카 가수가 한국계라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술회
했으며 우에다(植田 剛彦)씨가 쓴 책, <재일(在日)한국인의 실력>에서도 미소라 히바리가 한국계라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소라 히바리의 어머니와 이웃에 살았고, 미소라의 한국 공연을 추진한 스즈키 마사부미(鈴木 正文)씨는, 미소라는 아버지의 고향 한국에서 노래하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증언
하였으며, 그 꿈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에 대해 애통해 했다고 합니다.
도쿄에서 발행되는 교포 월간지 ‘아리랑’에서는, 미소라 히바리
가 어린시절 일본인 작곡가 고가 마사오(古賀 正男)씨 앞에서
‘아리랑’을 불렀고, 사후에 나온 ‘히바리 세계의 노래를 부르다’ 앨범에 도라지 타령이 수록 되어 있으며, 후렴 부분인 ‘에헤야’ 는 또렷한 한국어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미소라 히바리가 한국계라는 것은 이제는 유명한 사실로 아버지
가 김해출신이고, 생선가계집 딸로 태어나 9세 때 데뷔했고 천재소녀란 명성을 얻었습니다.
한편, 그녀는 죽기 전까지도 한국을 아주 그리워했으며 또한 부친의 한을 풀기위해 필사적으로 한국 공연을 위해 노력
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음반을내고 공연을 하고 싶었지만 당시는 수입 금지된 시기라 항상 아쉬워 했고, 일본어로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해서 영어로 곡을 불러 공연하는 것까지 검토했을 정도였습니다.
그토록 한국을 그리워했건만, 인생의 말년에 와서야 그녀는 자신이 한국 출신임을 밝힐수 있었습니다.
폐허의 잿더미 속에서 일본 주식회사를 이루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최대의 찬사와 함께 <국민영예상>을 받을만큼 일본의 국민적 사랑을 받은 그녀이기에 한국 출신임을 밝히는게 더더욱 어려워겠지요?
일본의 전 국민적 스타가 그토록 한국을 그리워 마지 않았다니 아이러니합나다.
또, 그녀는 단 한번도 해외공연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매니저는 다른 나라에서 공연을 권했으나 자신의 첫번째 공연은 반드시 한국이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에는 한일 간의 문화개방이 되기 전이어서 그녀는 소원을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녀는 죽기 2년 전인 1987년에 대퇴골골두양사(大腿骨骨頭壤死)라는 병으로 후쿠오카 재생병원(福岡再生病院)에 입원
하였고, 100일여간의 투병 생활 끝에 재기 하였으나 1989년에 간질성 폐질환으로 5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녀는 호소력 짙은 가창력에 미모까지 갖추었으며 1천4백여곡
을 발표했고, 수많은 히트곡을 남겨서 음반 판매량이 4천만 장을 넘었습니다.
3.《등려군》
성룡의 첫사랑, 중화권 가요계의 전설, 미성의 목소리로 너무 이쁜 뛰어난 가창력.
타이완에서 1953년 1월 29일에 4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
났습니다. 본명은 덩리쥔(鄧麗筠), 영문명은 테레사 텡
(Teresa Teng)입니다.
1964년 11세에 중화덴타이 라디오 방송국이 주최한 ‘황메이
(黃梅) 노래경연대회’에서 우승한 후 다음 해에 어머니가 지어준 덩리쥔(鄧麗君)이라는 예명으로 데뷔하여 밤무대를 전전하며 노래를 불러 가난한 집안을 보살폈습니다. 16세에 가수로 정식 데뷔하여 주로 드라마·영화의 주제가를 부르며 매력적인 미성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화교들이 많은 홍콩과 동남아 지역으로 활동무대를 넓히다가 1973년 일본에 데뷔하여 엔카인 ‘설화장(雪化粧)’, ‘공항(空港)’ 등의 곡을 발표하며 인기를 얻었고, 1974년 일본 신인가수상을 수상하였습니다. 1979년 위조여권 사건으로 일본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약 2년간 체류하였는데 이 무렵 중국에서 그녀가 부른 ‘언제 님이 다시 오시나(何日君再來)’가 붐을 일으키며 폭발적 인기를 얻게 됩니다.
1980년대 초 중국이 개방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을 때 ‘중국의 낮은 등소평이 통치하고, 밤은 등려군이 지배한다.’는 말이 유행
하였고, ‘등소평 대신 등려군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중국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과시하였습니다. 중국 당국으로부터 오염된 자본주의 문화의 상징으로 낙인찍혀 여러 차례 앨범 발매가 금지되었으나 앨범을 복사한 테이프가 중국 전역에 유통
되어 불티나게 팔려 나갔습니다.
1983년 데뷔 15주년 기념 동남아 순회 콘서트의 일환으로 열린 홍콩 콘서트는 사상 최대의 흥행을 기록하였고, 일본에선 ‘세월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 앨범이 200만 매 이상 팔려나갔습니다. 1989년 천안문사건이 발생
하자 천안문 민주화지원 콘서트에 참가하였고, 1992년 천안문사건 3주년 기념집회에 참석하였으며 그 후 프랑스 파리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평생 그녀를 괴롭혔던 기관지천식이 악화되자 휴양지를 옮겨 다니며 요양하다 1995년 5월 타이 치앙마이의 한 호텔에서 천식에 의한 호흡곤란으로 추정되는 사인(死因)으로 숨을 거뒀습니다. 죽음을 둘러싸고 자살설과 중국 비밀기관에 의한 암살설 등 갖가지 소문이 돌기도 하였는데, 장례식은 국장급
으로 치러졌습니다. 타이완·중국·홍콩의 많은 가수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사후 후배가수들에 의하여 그녀의 노래들이 끊임없이 리메이크되어 불리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첨밀밀(甛密密)’, ‘예라이샹(夜萊香, 야래향)’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습니다.
3명의 가왕들이 부르는 <돌아와요 부산항에>입니다
참고로 조용필씨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원곡은 김해일씨의
<돌아와요 충무항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