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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우리의 구원 허락하신 하나님 앞에 저와 여러분들이 크게 기뻐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특별히 귀한 시간 주님의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데 이 예배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여서 저와 여러분들의 삶과 가정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앞뒤 좌우에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눕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지난주처럼 제가 여러분께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교회입니까?
여러분 다시 한 번 크게 외쳐주십시오. 오이코스로 함께 모이는 교회입니다. 아셨죠?
크게 어렵지 않으니까 우리 좀 힘내서 말씀을 나누자는 이러한 마음으로 큰소리로 오이코스로 함께 모이는 교회입니다. 이렇게 외쳐주십시오.
우리는 어떤 교회입니까?
네 함께 모여서 주님을 예배하는 믿음의 공동체 지난주 우리는 모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라는 그러한 제목으로 믿는 것은 혼자 버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내 주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말씀 이후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떠올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 모여서 함께하는 것 그거 참 좋은 의견인 것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보면 나는 구원을 받았는데 왜 신앙이 잘 자라는 것 같지가 않을까요?
분명 예수를 믿고 구원의 확신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삶이 크게 달라지지가 않아요. 신앙은 어느 순간 멈춰 있는 것 같습니다는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이상한 질문이 아닙니다. 어쩌면 많은 성도님들이 겪고 있는 아주 솔직한 질문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그런데 중요하게 구분해야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구원과 성장은 다르다는 것이죠. 구원과 성장을 같이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단번에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으십니까?
구원은 내가 예수를 믿으면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에요. 이거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장이라는 것은 시간을 통해서 과정을 통해서 관계 안에서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또 배우기도 하면서 나누는 상황들을 통해서 자라가게 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성장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성도님들과 함께 걸어가는 길 가운데 나타나는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한 단계 더 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이런 질문을 던져야 돼요.
왜 하나님은 우리의 성장을 혼자가 아니라 관계에 두셨는가
성장이라는 것은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닌데 왜 혼자가 아니라 관계라는 곳에서 두셨는가
이 질문을 우리는 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질문을 다시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부르실 때 혼자 부르지 않고 개인 기도하지 않고 12명을 불러서 함께 하셨을까라는 질문과도 같은 것이죠.
이걸 조금 직설적으로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겠죠. 예수님은 또 성경은 그냥 믿어라 그렇게 끝내면 좋은데 왜 서로 사랑하라라는 명령을 주셨을까라는 것과도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부분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나눌 단어 그 질문의 답은 바로 오이코스 가족 공동체라는 것이죠.
여러분 오이코스라는 말을 이제 오래 계속 듣겠지만 처음 들었을 때는 생소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 만들어 난 말도 아니고요. 유행을 따라가는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믿음을 자라게 하실 때 사용한 성경적 언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죠. 오이코스는 헬라오로 집 가정이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오이코스가 뭐지? 자꾸 묻지 마시고 집 가정 공동체 작은 그룹 그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여러분 집이라는 공동체라는 것은 사실 사람이 혼자 버티는 공간이 아니죠. 함께 살아내는 공간이 바로 집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이코스는 어떤 모임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함께 자랄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하나의 형태인 것이죠. 말씀을 아는 것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으로 옮겨주는 현장이 바로 오이코스라는 거예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왜 구원은 개인에게 오지만 성장을 관계 속에서 묶어두셨는가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좀 같이 파헤쳐 보셨으면 좋겠고, 그것을 통해서 오이코스 가운데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우리 함께 묵상하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는요. 하나님의 신앙을 혼자 완성하게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조금 다른 각도로 좀 생각해 보면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는 보통 그렇게 말하잖아요. 믿음은 개인의 문제죠. 그렇죠 개인의 문제 내가 잘 믿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사실은 내가 잘 믿어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은 끝까지 읽어보시면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을 혼자서 완성할 수 있도록 그냥 두지 않고 함께할 수 있도록 설계해 두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6장은 빌립보 간수가 질문을 하게 되죠.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질문이에요. 여러분 이 질문은 사실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대답도 매우 간단 명료합니다. 그리고 매우 분명하죠. 주 예수를 믿어라 이게 핵심적 답이에요.
어떻게 구원을 받겠습니까?
주 예수를 믿어라 이처럼 구원은 아주 간단 명료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그 구원을 그 한 사람에게만 두지 않았다는 것이죠. 성경은 곧바로 34절에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을 해 줍니다. 우리 34절 한번 읽어보실까요?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크게 기뻐하니라
여기에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질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 본문에서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고 그치지 않고 굳이 온 집안이라는 것까지 연결해 갔을까?
물론 그 가운데는 복음을 전하고 모두가 복음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집안을 등장시킨 이유 그것은요. 구원은 개인이지만 성장은 개인만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야 하는 그러한 상황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한 것이죠. 왜냐하면 혼자서는 스스로 잘 속이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 기준으로 신앙을 재단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성장이라는 것이 쉽사리 멈춰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 여정 가운데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끼워 넣어 놓으신 것이죠.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셨던 제자 훈련의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만 부르지 않으셨어요?
그렇죠 요한을 따로 불러서 개인 과외 지도한 것도 아닙니다. 12명의 제자를 부르셔서 한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베드로가 성급한 사람이구나라는 걸 느끼게 하셨고요. 요한이라는 사람은 섬세한 부분이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이죠. 즉 제자들은 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 쉬기도 했습니다. 질투도 했습니다. 다투기도 했어요.
여러분 아시잖아요 내가 더 높은 자리에 앉겠다고 예수님께 서로 다투는 그러한 장면들도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서로를 통해서 다양성을 알게 되었고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도 열린 것이죠. 그래서 만들어져 가는 공동체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시기 미움 다툼, 질투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장의 성장을 이루는 시간들을 만들어 갔던 것이죠.
여러분 혼자 신앙생활할 수 있다 그거 맞는 말인데 때로는 그게 불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관계 안에 들어가면 이런 질문이 있어요. 사실 개인적으로 신앙생활하면 그래 말씀 듣고 살면 되지요.
그런데 관계 안에 들어가면 여러분 목장 모임이나 이런 모임을 통해서 이런 질문하잖아요
이번 주에 어떻게 사셨습니까?
그 상황에서 어떤 기도를 하셨습니까?
런 말들을 주고받게 되죠. 그런데 사실은 이 질문을 마주할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거죠. 내가 지식적으로는 아는데 삶과는 좀 동떨어진 신앙의 길을 걸었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그 질문이 아 맞아 내가 그것 가지고 고민하며 살았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했네. 그래 이것 가지고 기도하면서 살았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했네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말씀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살아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게 공동체라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을 보면 삶의 원리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서로 권면하라 서로 사랑하라 서로 가르치라 서로 지도하라 서로 돌아보라.
여기에서 강조하는 건 뭐예요? 서로라는 거 성경은 서로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사용하면서 공동체 안에서 서로 세워야 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 주고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서로라는 단어가 언제 불가능한 겁니까?
나 혼자 있을 때 불가능한 거죠. 둘 이상 있으면 이 서로라는 것은 분명히 가능한 단어가 돼요. 그러나 나 혼자서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 서로라는 거예요. 따라서 서로라는 삶의 자리는 바로 오이코스라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나게 되는 것이죠. 오이코스는 신앙이 잘 드러나는 자리, 동시에 신앙이 다듬어져 가는 자리, 말씀을 들은 사람이 거기에서만 머무는 자리가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래 우리 함께 말씀을 실천해 보자. 공동체가 서로 나누면서 달려가는 자리 그래서 말씀이 살아나는 자리, 말씀을 살아내는 자리가 바로 공동체 오이코스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장을 그냥 우연에게 맡겨놓지 않았습니다. 관계 안에서 의도적으로 서로 섬기라 서로 세워가라고 서로 깨닫게 하라고 만들어 주신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오이코스는 어떤 선택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하나님의 설계 방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구원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내 믿음의 고백으로 받는 거예요 누가 대신해 주지 않아요. 서로 응원해 준다고 그 응원으로 내가 구원받는 거 아니에요?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해 주겠다 해서 그게 구원되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잘 믿는다고 내 자식이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죠 내가 잘 믿는다고 해서 내 가족들이 다 구원받는다. 그랬으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거 절대적으로 구원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장은 혼자 완성되지 않도록 설계되어졌다. 따라서 저와 여러분들 오이코스 안에서 서로 성장해 가는 믿음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두 번째는요. 성장은 예배를 드리는 자리가 아니라 말씀이 드러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거예요. 신앙의 성장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자꾸 헷갈려 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말씀을 듣기만 하면 성장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런데 잘 들으십시오. 말씀만 들어도 성장은 돼요. 여러분 콩나물 시루에 대한 이야기 많이 들어보셨잖아요. 물을 붓습니다. 그런데 물이 자꾸 빠져나갑니다.
그런데 콩나물은 자라고 있죠. 말씀은요 들음으로 말미암아 성장하는 거 맞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많이 듣는 것 매우 중요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안 된다고 말해요. 더 나아가서 잘하는 것에 중점적으로 우리도 생각해 봐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 씨 뿌리는 비유로 한번 좀 생각해 보실까요?
같은 씨가 뿌려졌어요. 씨 뿌리는 비유에 씨를 구분해서 뿌린 건 아닙니다. 동일한 씨를 뿌렸어요. 말씀이 동일하게 뿌려졌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결과는 달랐습니다.
왜일까요?
토양이 달랐기 때문이죠. 그뿐만 아니라 환경이 또 달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말씀은 언제나 동일하게 뿌려지지만 성장은 다르다는 거예요. 어떤 토양에 떨어졌느냐라는 것이 어떤 환경에 떨어졌느냐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통해서 말씀의 씨앗이 뿌려집니다. 그래서 그것이 자라는데 문제는 어떤 밭은 길가 밭이고 어떤 밭은 돌작 밭이고 어떤 밭은 가시 덤불로 인해서 자라는 것을 막아버리는 그러한 환경에 놓여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또 어떤 밭은 잘 뿌려져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것이죠. 씨앗은 좋은 토양과 환경 속에서 다듬어지고 보호되어지며 양분을 통해서 공급받아 자라는 것 이거 분명하죠. 그리고 그 토양과 환경을 세워가는 곳이 바로 오이코스가 되어야 된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오이코스 때 함께 모여서 기도할 때 새 형을 부어주시는 거죠. 같은 마음으로 기도할 때 길가 같은 굳은 마음, 돌밭 같은 딱딱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바꿔주시는 우리의 마음이 서로 관계 속에서 회복되어지는 것이죠.
또한 함께 모여 기도할 때 우리의 염려, 근심 걱정 이 가시덤불 같은 것들을 주께 맡길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좋은 밭도 되고요. 또한 가시덤불도 벗겨지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관계가 무너지면 사실 말씀이 들어오기가 어렵죠. 그렇죠 그래서 좋은 관계 속에서 내 마음 밭이 준비되어질 때 그 마음 밭에 떨어질 때 아름다운 열심 아름다운 결실이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 간에 모여서 기쁘고 즐거워 보세요. 행복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 안에 말씀이요. 공동체 안에 쫙쫙 뿌려질 때마다 뿌리가 쭉 내리고 성장하게 되는 것이 그러한 영적 분위기가 바로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는 이렇게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 한번 읽어보실까요? 에베소서 4장 13절 시작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
여기 보시면 장성한 분량 중앙한 데까지 이르는 것 이것은요 무엇을 지금 얘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자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사실 여기서 하나가 되자는 것은 아는 것과 믿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자세히 보면 누구에게 하신 말씀이에요?
앞에 보니까 우리가 다라는 표현이 있어요. 여기 우리가 다는 누굴까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겠죠. 그리고 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이 주신 말씀을 앞뒤로 찾아보니까 이것을 한 이야기는 서로 세워가는 그리스도 안의 공동체성을 이야기합니다. 즉 각자의 은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세워가라는 그런 말씀이 있음 해 주신 것이죠. 따라서 여러분 이것은 함께 서로가 세워갈 때 우리가 다 장성한 분량, 누구만 장성한 분량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동체가 함께 예수를 아는 것 그리고 믿는 것에 하나가 되어서 다 같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소망한다는 그런 메시지인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장은 그래서 혼자 책 읽듯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어져 갈 때 일어나는 것이다.
사실 혼자 있으면 그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좋은 말씀이다. 은혜 받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머물 가능성이 매우 높죠.
그런데 그것이 공동체 안에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그 말씀 한 주 동안 어떻게 적용했습니까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되는 것이죠. 그 상황 앞에 어떤 기도로 살아냈습니까라는 물음 앞에 대답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즉 이 질문 앞에서 말씀은 더 이상 지식이 아니라 삶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들려진 말씀이 그냥 지식적 기준이 아니라 삶의 기준, 나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래서 성장이라는 것은 바로 말씀이 실제로 공개될 때 일어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자 묵상만 하면 묵상으로 끝날 경우가 많아요.
사실 제가 원래 큐티 하자고 그래서 몇 분 이렇게 큐티 책 사신 분들이 있는데 제가 확신하건데 아직 안 펴보신 분들이 있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책을 받았지만 내가 큐티 한다고 했지만 사실 묵상하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번 주부터 일부러 한 장씩 글을 올렸습니다. 그 의도는 그거예요. 내가 그 안에서 내 삶을 한 줄 고백하고 내가 다짐했던 걸 한 줄 고백하고 내가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것들을 고백하는 한 줄을 적는 그때는 언제 적을 수 있느냐 내가 읽어보고 묵상하고 내가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할 때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방이 하나 있어요. 큐티 책을 사신 분들 제가 사실은 QT가 다음 책을 사기 위해서 만든 방인데 제가 이틀 전부터 글을 올렸어요. 묵상 같이 하면 좋겠다는 그런 거예요. 어떤 공동체든 작은 모임 가운데 여러분 그냥 세상 이야기할 수 있지만 내가 이번 주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렇게 살았습니다. 고백되어질 때 그때 그 말씀이 내 삶의 말씀이 되는 것이 내가 그 말씀 가지고 기도해서 이렇게 승리했습니다는 고백이 나올 때 실제 그 말씀이 내 말씀이 되는 것이 그런 모 모임, 이것이 바로 우리 가운데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삶을 나누기 위한 우리의 자리 이 자리가 우리 시는 공동체 가운데 풍성하게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여러분 야고보서 1장 22절에 이렇게 말씀을 주세요. 한번 읽어보실까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 되지 말라.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러면 뭐가 속이는 겁니까?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지 않을 때 속이는 자가 된다는 거죠. 듣기만 하는 자가 될 때 속이는 자가 된다는 거죠. 이 이야기는 듣기만 하지 말고 삶으로 살아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거죠.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에 꽂히지 말고 이 말씀에 주고자 하는 그 갈급한 메시지는 그 말씀이 우리의 행함 가운데 살아나기를 원한다는 그런 메시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안다고 하는 것이 뭔가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돼요. 안다는 것이 지식적으로 아는 것으로 끝나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삶으로 나타날 때 그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오이코스라는 것은 신앙을 평가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비판하는 자리도 아닙니다. 말씀이 삶에 닿았는지 서로 비춰보는 자리죠. 그래 저분은 저렇게 한 주 동안 사셨구나. 나도 다음 주에는 그렇게 살아보리라. 말씀을 비추어서 살아보리라는 그러한 갈급함이 생기는 자리 그래서 여러분 누군가가 실천했으면 함께 감사하는 자리, 누군가가 실천하지 못해서 마음이 안타까웠다면 함께 기도하는 자리, 누군가가 넘어졌다면 함께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서로를 위한 자리 이 자리가 우리 공동체 가운데 있어야 된다는 거죠.
주일날 예배만 드리고 한 주 동안 살아가는데 얼마나 힘듭니까?
얼마나 부딪히는 일들이 많겠습니까?
얼마나 낙심되고 고민되는 일들이 많겠어요 그거 내 치부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러한 상황 가운데 이렇게 싸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때 나에게 이기심을 주셨습니다. 그 얘기를 들어보니 나도 이번 주에 그런 문제가 올 때 이렇게 한번 해봐야겠다. 다짐도 하고 고백도 하고 주님 날 좀 붙잡아 주십시오. 갈급한 마음으로 주님을 붙드는 것이죠.
여러분 예배는 씨앗을 뿌리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우리 오이코스는 그 씨앗이 자라게 하는 자리다. 그래서 오이쿠스는 예배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삶으로 완성시켜 나갈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어주는 자리가 될 수 있죠. 성장은 혼자 은혜받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함께 말씀을 살아낼 때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 공동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성도님이 되시지 마시고 말씀이 관계 속에서 드러남으로 서로 성장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 번째는요. 성장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열린다. 우리 한번 이거 큰소리로 읽어보실게요. 시작.
성장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 기도로 열립니다.
여러분 여기까지 오면 한 가지 자연스러운 질문이 있어요. 관계 중요합니다. 지금 계속 목사님 관계를 이야기하시는데 관계 중요합니다. 말씀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도 알겠는데 그럼 그걸 누가 가능케 하는 거냐 그거 알겠는데 누가 가능케 하는 거냐라는 질문이죠. 여기에 대한 해답을 우리가 찾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묻죠.
어떤 사람이 가능하게 합니까?
리더가 중요합니까?
분위기가 중요합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성장은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한 겁니다. 그러나 성장은 하나님께서 열어주실 때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이코스의 중심은 반드시 기도가 되어야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6절에 이렇게 말씀을 주시죠. 고린도전서 3장 6절 말씀 우리 한번 읽어보실까요? 이겨주시니 같이 읽어봅시다. 시작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랑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생겼어요. 아볼로파 바울파 예수파 지금 우리가 진짜다. 서로 우리파가 진짜라고 막 이렇게 다툼이 일어나요. 그때 바울이 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면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나도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아볼로도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심을 수 있어요. 그리고 물을 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심는 역할을 하고요. 누군가는 물을 주는 역할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장은 우리의 열심의 문제가 아니라 기도의 문제 예수님도 제자들을 변화시킬 때 설명만 하지 않고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넘어지기 전에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해 주셨어요. 그를 위해서 우리 누가복음 22장 32절에 보면 이제 예수님께서 마지막 가시기 전에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세요. 같이 읽어볼까요?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내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내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이 뭘 아셨어요? 세 번 부인할 걸 아셨죠? 그래서 그것 때문에 너 믿음 떨어지지 않기를 내가 기도한다. 나중에 돌이킨 후에 한계를 부려라. 나중에 다시 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그때 다시 한 번 힘을 얻어서 이제는 형제들을 돌이키는, 그래서 그들을 죽게 하는 일을 감당해야 된다. 그렇게 기도하겠다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한 것이죠. 따라서 여러분 베드로가 회복된 이유는 의지가 강해서 아니야. 예수님께서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셨어.
그래서 오이코스는 말 잘하는 사람이 이끄는 공동체가 아니고요. 분위기 좋은 사람이 만드는 공동체도 아니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 기도가 중심이 되면 사람을 바꾸려 하는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모임이 됩니다. 하나님 우리 작은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을 구합니다.
우리 귀한 집사님, 우리 귀한 성도님, 우리 귀한 장모님 분주한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힘 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각자 떨어져 살지만 흩어져 있지만 같은 마음으로 서로 공부하게 하시고 서로 신이 나게 하시고 그래서 믿음으로 한 주 더 잘 살아가서 한 주 후에 만났을 때 우리 안에 풍성함을 주십시오.
이 기도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다음 주에 모여서 나눌 때
지난주에 나에게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헤이 볼 때 내가 옆에서 기도했던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도했다. 나 혼자 스스로 만족하는 거죠. 내가 그렇게 기도했구나. 그럼 여러분 그 안에 얼마나 기쁨이 있겠어 우리가 서로 기도하니까 사실 어려운 문제였는데 그걸 돌파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던 그러면서 또 느낄 거 아니에요 내가 어려움이 있을 때 그때 우리 공동체가 나를 위해서 누군가 기도해 주는구나. 그것 때문에 내가 힘을 내야지.
그런 마음이 생기는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여러분 성경에 초대교회의 힘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인데요.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썼다라고 말하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렇죠 말씀을 들은 거예요. 교육도 받았어요. 서로 교제도 하고 떡을 때입니다.
그런데 빠지지 않는 것이 있죠. 그게 뭡니까?
오로지 기도하기 위해서 그들이 모이는 공동체는 모여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교제도 있었고 말씀도 있었지만 기도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왜입니까?
기도가 있어야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모여서 성령이 오실 때 기도하라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왜 그러셨어요? 그
렇게 기도할 때 성령이 오세요.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그냥 너희들 그냥 흩어져 있지 말고 다락방에 모여서 그날이 올 때까지 기도하라. 이유는 그렇게 기도하고 부르짖을 때 성령이 오는 거예요.
우리는 그래 내가 예수 믿고 내 안에 성령이 있어요. 근데 여러분 그 성령의 역사하심과 그 일하심을 경험하려면 성령의 활동이 있으셔야 될 거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의 뜨거운 기도 가운데 하는 겁니다. 그만큼 여러분 기도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왜 한국교회가 새벽 기도를 했다고 했을까요?
사람들이 왜 한국 교회의 기도를 사람들은 이야기할까?
여러분은 왜 과거의 기도를 이야기하는 그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경험을 보 그게 한국 교회의 실상이잖아요. 뜨겁게 기도했던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과거에 실제로 있었고 그것을 경험했던 분들일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로 지금 한국교회가 살아가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죠. 그만큼 여러분 기도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현장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모여야 됩니다. 서로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 고치게 하는 자리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하는 오토스가 아니라 서로 하나님 앞에 올려주는 거 서로를 축복하고 기도하는 자리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그렇게 작은 기도로 시작해서 풍성해질 때 성장은 서서히 가겠지만 분명한 것은 일어설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향해서 우리 함께 세워가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마지막 결론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구원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개인적인 믿음의 고백으로 구원받으십시오. 그리고 우리 성장을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좀 도와줄 수 있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