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윤 태 열
평안감사와 애기의 슬픈 사연이 깃든 곳,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전투에 참가한 감사는 포로가 되었고 먼저 피신한 애기는 쑥대머리산이라고 불리던 이곳에서 감사를 애타게 기다리 다 죽게 되자 이웃에서 묻어주고 애기봉이라 불렀다.
그 봉우리 아래 우리 소대는 세 곳에 초소를 두고 경계임무에 임했다. 동과 서를 가로 지르는 휴전선 중 인민군과 가장 가깝게 대치하므로 항시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철 책선 아래로 한강이 서해로 흐르고, 만조시에는 백령도 돌바위에서 몸을 말리던 물범들이 들숨날숨을 내쉬며 먹이활동을 위해 빠르게 유영하고 있었다.
사계절 오후 6시가 되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부처님과 예수님이 탄생한 날에도 어김없이 경계 작전에 들어갔다. 우선 암구호를 숙지하고 개인화기와 공용화기를 둘러매고 눈 쌓인 교통로를 헤치며 초소로 향했다.
그해 겨울은 평시보다 일찍 왔고 눈이 억수로 내렸다. 하늘은 잿빛이었고 멥살을 갈아놓 은 듯한 하얀 가루가 떨어져 쌓였다. 이런 일상 속에서 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 내용은 이러했다. 그날도 선임과 후임이 한 조가 되어 경계 근무에 들어갔다.
사방은 고요했고 쌓인 눈들은 솜을 탄 것처럼 두툼하게 덮어 놓은 것 같았다. 자정이 되자 품속에 넣어둔 트랜지스트 라디오 에서는 대북방송이 흘러나왔다. 고향의 봄을 끝으 로 방송은 끝이 났고, 정적이 이어졌다. 눈좀 붙일 테니 근무 똑바로 서라 하고 선임은 이 내 잠이 들었다. 이제부터는 졸음을 뿌리치고 오감을 동원하여 전방만 주시해야 하는 자신 과의 싸움이었다.
후임은 지난날의 추억을 떠올렸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 않겠다던 애인과의 첫키스, 은하수 담배갑을 내밀던 친구들, 사랑하는 가족의 근황도 궁금했다. 아름다운 기억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나 그 한계를 다해 밀려오는 졸음을 이겨내고자 쌓인 눈을 얼굴에 비볐지만 놈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기상!" 낮은 목소리였지만 목소리 였지만 위협적이고 공포감을 느끼게 했다. 코까지 골 며 잠들었던 선임이 눈앞에 서 있었다. 후임은 어찌할 바 몰라 손사래를 쳤고 악몽을 꾼 것 같았다. 작전의 실패는 용서가 되어도 경계의 실패는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말처럼 졸음의 대가는 가혹했다.
수십 차례의 얼차려와 구타로 이어졌다. 후임은 이러다간 죽을 것 같았다. “시정하겠습니다.” 라고 사정도 해보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후임이 살고자 무의식 중에 내지른 주먹이 선임의 두툼한 입술에 적중되었고 송곳니에 맞물려 찢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서로 난투극으로 이어졌고 체력을 다하자 널브러졌다.
선임의 피범벅이 된 얼굴을 본 간부들의 추궁이 있었지만 선임은 쪽이 팔려 눈길에 미끄러져 바위에 부딪혔다는데 어쩌겠는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밤사이 내린 눈 들이 녹아내릴 즈음 나는 동절기 김치사역에 동원되어 있었다. 저 멀리 황토길 끝자락에 짚차가 보였다. 순식간에 지나간 차량의 뒤쪽에는 붉은 십자가가 선명한 군용 구급차였다. “사고다. 누굴까? 무슨 일일까?” 예측이 빗나가길 바랏지만 방금 구급차가 지나가지 않았는가? 심장이 요동치며 눈물이 났다.
예측은 적중했다. 하극상의 대가는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져 후임은 척추를 심하게 다쳐 후송되었다. 자그만 키에 동그란 얼굴 큰 눈망울을 가진 후임은 고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3년의 군복무를 마치면 행복한 가정을 꾸리겠다고 했다.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우리는 예비대로 이동했다. 약간의 여유가 있었고 그 사건은 잊혀져갔다.
지난 봄, 산악동호회에서 한라산 등반 일정이 있었다. 봄비가 내린 탓에 힘은 들었지만 다들 무사히 하산하였다. 돌아오던 중 용두암에 들렀다. 사진을 찍으며 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듣던 중 건너편에 한 무리가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무언가 지시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20년 전의 후임이었다.
그는 자판기 커피를 내주었다. 간이용 의자에 앉아 우리는 잿빛 바다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세월의 간극이 서로를 서먹하게 만들었다. 먼저 입을 떼야 될 것 같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그날 이후로 많이 힘들었어요. 다행히 실력 있는 의료진을 만나 수술도 성공적이었고 재활치료도 무사히 마쳤고요.”
“힘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했어.”
“아닙니다. 그 당시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지나간 일이기도 하고요. 다 잊었습니다.”
버스의 출발을 알리는 크랙션 소리가 들렸다.
“잘 있어.”
“안녕히 가십시오.”
비행기 창밖의 구름 아래 제주의 푸른 섬이 보였다. 그와의 짧은 대화 속에서 이미 그는 상대를 용서하고 화해했다. 그의 바람대로 공무원의 꿈이 이루어졌다. 나아가 국장이나 도지사까지 승승장구했으면 하는 바람을 진심으로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