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기도 들으심과 응답방식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하시는 지에 대해서도 불신하지만 기도를 과연 듣기라도 하는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이 있다면, 기도의 응답 또한 반드시 있을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점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어떤 방법으로 들으시며, 어떤 방법으로 응답하는 가에 대한 나의 생각을 여러분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자신을 부르는 자에 가까이 계신다'는 다윗의 말은 진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흔히 신학적 용어로 하나님은 무소부재라고 표현하는 데, 이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시공간이 바로 하나님의 몸이라는 뜻과 다름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를 하면 그 기도는 입자와 파동으로 하나님의 몸에 바로 접속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금방 알아 차리시는 것이다. 입자와 파동으로 변환된 우리의 기도가 우주 저너머의 안드로메다까지 갈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즉 기도를 하는 순간 바로 나와 접속된 상태로 기도가 하나님께 전달된다. 또한 기도가 입자와 파동으로 변환된다는 사실은 단순히 기도를 표현한 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 마음으로 인한 신체의 변화 등이 같이 포함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표현은 물리적으로도 참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순간에 바로 그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다. 기도의 응답방식 인간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의 응답하는 방식은 인간의 그것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격이 있으나 인격을 포함하는 신격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이 이해하는 방식, 곧 초월적인 방식으로 응답을 기대하기 때문에, 비록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지더라도 그것을 모르고 지나가는 수가 많다. 말하자면 우리가 해야 할 숙제를 도와달라고 간청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숙제를 대신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바로 초월적인 방식으로 응답을 기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이미 부여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초월적인 방식으로 기도의 응답을 주시지 않는다. 다만 격려를 통해서 또는 문제의 해결책의 지혜를 발견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스스로 해결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이 방식이 진정으로 사랑의 아버지다운 태도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을 우리가 존재하는 만유 그 자체라고 일단 가정해 보자. 그러면 만유는 스스로를 조직하고 유지하며 발전하는 하나의 유기체로 생각할 수 있다. 만유 안에 존재하는 우리는 그 일부로 존재하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바를 부르짖을 때, 그 부르짖음이 만유이신 하나님의 존재 원리와 일치한다면, 하나님은 당연히 자기 유지를 위해 그 부르짖음에 응답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면 지구가 적정 온도를 유지해야 함에도 그 온도를 벗어나 상승하게 되면 지구는 자신이 덥다고 생각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고 하나님은 땅 위에 백색 생물이 많이 존재하는 방향으로 지구의 생태계를 조정하신다. 그렇게 하여 지구상에 도달되는 태양 빛을 반사시킴으로써 온도가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다. 즉 기존하는 요소들을 적절히 조정함으로써 자기 생존을 꾀하신다. 그 대표적인 예가 노아의 대홍수라 생각한다. 지상의 인간들이 무분별한 파괴활동으로 인해 만유이신 하나님 자신의 매우 중요한 일부인 지구가 아프고 괴로우니까 그것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대기의 수증기를 지상에 모두 가라 앉게 함으로써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인간에 비유했을 때 정신에 해당되는 부분을 로고스라 한다면 만유 자체는 하나님의 몸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르짖음과 기도는 하나님 자신의 유기체적 생명에 관련되어 있어서, 그 기도를 어떤 방법으로인가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그 반응이 인간의 지각으로 얼른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많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기도를 과연 듣고 계시는지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기도로써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 쌀독에 바닥난 것을 금방 채워서 인간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과정을 거쳐서 쌀독에 쌀이 차게끔 만드시는 것이다. 그 과정이 블랙박스로 덮여진 상태라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면 블랙박스라는 덮여진 상태를 거쳐서 응답되기 때문에 그 기도의 직접적인 응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며, 기도하나마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 블랙 박스 안의 작용 상태는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관계 그리고 상황이라는 요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 그 과정을 하나님의 작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삶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겸허한 마음인 것이다. 인간이 계획하여 주위의 작용없이 순수히 자기 힘으로 결과를 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작용되는 수많은 요소들을 무시하는 태도이다. 그 많은 요소들 중에 단 하나의 요소만 잘못되어도 원하는 결과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쉽게 표현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지 않으면 결코 작은 성취도 이끌어낼 수 없다는 뜻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자연과 같은 방향으로 걸어야 하며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할 때에,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 참생명으로 거듭 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기도로 성령을 구하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여기서 성령이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가운데 흐르는 원리와 동행하려는 작용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성령을 구한다는 것은 곧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과 같은 방향으로 걷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인간과의 좋은 관계를 만드는 영적인 힘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구하고 그 성령에 의해 작용을 받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향한 바른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해주시는 방법을 설명하였는데, 그것을 다시 한번 블랙박스로 표현해 도면화 시키면 아래와 같다. 기도함ㅡ우리가 하나님의 몸과 접속된 상태로 기도를 들으심ㅡ(블랙 박스)ㅡ 응답하심 이 블랙박스 안에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다. 이를테면, 자연의 법칙, 인간관계, 성령의 작용 등의 다양한 요소들이 그 기도에 대한 결과들을 산출하여 내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볼 때는 이 블랙박스의 작용 때문에 그 결과가 하나님과 무관하게 느낄 수 있는 데, 그것은 기도자가 하나님을 우리 세계를 초월해 계시는 분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초월적 방식으로 기도의 응답을 바라기 때문이다. 다시 같은 예를 들면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블랙박스)를 통과하여 쌀독에 쌀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지, 이런 (블랙박스)의 과정이 없이, 기도하니 바로 쌀독에 묻어 있던 쌀 한톨이 기적적으로 증가하여 쌀독을 채우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도자는 그런 방식으로 기도의 응답을 바란다는 점이다. 이 과정을 블랙박스로 표현한 것은 기도의 응답 과정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지 현상이나 사실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알 수 없다는 뜻이며, 여러가지 기도의 응답방식이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 기도가 응답되었는지 인간이 분명하게 알 수 없다는 점을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묵상해 보는 것은 바로 이 블랙박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믿음으로 추론해 보는 과정이다. 맺음말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질서대로 세계에 작용하신다. 복음서의 표현을 빌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선인과 악인 모두를 차별하지 않고 자신의 질서대로 작용하신다. 하지만 동일한 작용을 하여도 반응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예컨데 비를 내리게 되면, 기상청에 근무하는 사람은 오늘은 비가 와서 별을 관찰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농부는 몹시 기다리던 비라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감사하지만, 일용직 노동자는 그날 일당을 벌지 못하므로 '하나님은 자식도 안 키우나' 라 원망하는 것이다. 기도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작용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활동에 시너지 효과를 부여하게 되며, 이 사회는 더욱 이상적인 사회를 향하여 행보를 가속화 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축복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며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게 되는 부가적 효과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늘 기도할 것을 강조하셨으며, 무엇보다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