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37
7월30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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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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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e5lpfC-UV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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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특별한 기적을 청하지 않으시고, 매일 인내와 기도 속에 살아가신 우리의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의 동정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오늘 복음 구절을 즐겨 애용하곤 합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신 후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감동적인 설교 말씀을 펼치시자, 듣고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이렇게 외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마태오 복음 13장 55~56절)
논리인즉슨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출산하신 후 4명의 형제들,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를 낳으셨고, 적어도 누이들 2명해서 총 7명을 출산하셨다는 황당한 주장입니다.
그들은 뭔가 착각해도 크게 착각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 문학 안에서 ‘형제’란 용어는 무척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음을 간과한 것입니다. 친형제뿐만 아니라 사촌, 육촌, 팔촌까지 형제라는 용어 안에 포함시키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저희 수도자들 사이에서도 유사한 전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저희는 서로를 향해 형제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을 바라본다면 충분이 이해가 가시리라 생각합니다.
성모신심, 특별히 성모님 발현에 대해서 깊이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성모신심은 마치 깨지기 쉬운 보물 단지, 혹은 날카로운 양날의 검 같아서 신중 또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더군요.
다른 무엇에 앞서 성모 신심은 철저하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성모 신심이어야 마땅합니다. 혹시라도 과도한 성모 신심으로 인해 모든 그리스도 신심의 원천이자 기초이신 예수님을 향한 신앙에 누가 된다면, 그 신심은 100퍼센트 그릇된 신심입니다.
오랜 교회 역사 안에서 성모 신심은 부침을 거듭했습니다. 과도하게 남용될 때, 대혼란이 야기되었고, 수많은 여린 신앙인들이 고초를 겪었습니다. 성모 신심과 관련해 그릇된 지도자들로 인해 많은 신앙인들의 이단으로 빠지고 단죄를 받았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 교도권은 성모님 관련 사적 계시 앞에서 놀라울 정도로 냉정하고 차분합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신비로운 현상 앞에서 절대로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기도 안에서 이성적으로 접근합니다.
뿐만 아니라 보편 교회는 비록 공식적으로 공인된 성모 성지, 예를 들면 루르드나 파티마 성지라 할지라도 꼭 거기 가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가도 좋지만 굳이 막대한 돈과 시간을 투자해 순례하지 않아도 절대 야단치지 않습니다.
유명 성모 성지 순례를 가서 큰 은총과 축복을 체험하는 것도 좋지만, 매일의 삶 속에서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모범으로 남겨주신 위대한 신앙, 한결같은 겸손과 순명, 불굴의 인내와 극진한 이웃 사랑을 각자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찰라의 기적보다는 일상의 기적을 더 높이 평가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한국 가톨릭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각 교구 주교님들께서 참여 즉시 자동 파문이라며, 그리도 강하게 당부하고 계시건만, 아직도 어떤 신자들은 보란 듯이 그곳을 드나들고 있습니다.
드나들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애꿎은 주변 사람들, 특히 성직자·수도자들에까지 접근해서 미끼를 던지고 있습니다. 대체 거기 가셔서 무엇을 보고자 하십니까? 거기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황금향유’입니까? 입에 담기도 민망스러운‘성모님의 참젖’입니까? 유치찬란의 끝판왕인 ‘율신액’입니까? 끝도 없이 계속되는 치유와 기적입니까?
이런 어색한 신심은 성모님께서 가장 꺼려하시는 요소입니다. 이런 그릇된 신심을 추종하고 동조하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보신다면 크게 진노하시리라 확신합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요 하늘의 여왕이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상 따뜻하고 편안하신 자상한 어머니 같은 분이십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됨으로 인해 겪으셔야 했던 그 숱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특별한 기적을 청하지 않으시고, 매일 인내와 기도 속에 살아가신 우리의 성모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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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0_vup1H8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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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대신 챙기는 자존심, 그 가치는 얼마일까?>
오늘 복음은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여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복음 내용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 관해 증언하는 것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이 말씀대로라면 기적은 믿음이 있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일단 믿고 기도를 할 줄 아는 사람에게 기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자렛 사람들은 처음부터 마음의 문을 닫고 믿어보려고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적이나 해 보라는 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한 번 믿어보려는 열린 마음, 이것이 구원의 첫걸음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믿음’ 대신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자존심’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었는데 소문대로 예수님께서 사기꾼으로 드러나게 되면 사기꾼을 메시아로 여긴 자신들의 자존심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지만 자존심이 얼마나 가치가 큰 것이기에 영원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모험까지 감행하며 지키는 것일까요?
어떤 무신론자인 기자가 봉쇄 수도원에 와서 원장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봉쇄 수도원에서 밖에도 못 나가고 고생만 하는 것 같은 수도자들을 안쓰럽게 여기며 원장에서 말했습니다. “만약 죽었는데 하느님이 없다면 여러분들이 하는 고생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수도원 원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행복해서 여기 있는 것입니다. 믿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억지로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밖에서 사는 것보다 더 좋아서 여기 머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 하느님이 없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 하느님이 계신다면 진짜 놀랄 사람은 당신일 것입니다.” 무신론자 기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 고귀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정말 자존심의 가치는 얼마일까요? 영화 ‘친구’에서 보면 자신이 친구를 죽이지 않았음에도 건달이 건달다워야 한다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무기징역을 선택합니다.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무기징역을 선택합니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은 아무리 계산해도 이 세상에서 주님을 믿고 사는 것이 훨씬 더 이익임을 밝혀냈습니다. 이 세상에서 믿고 사는데도 별 지장이 없지만, 만약 믿는 분이 계실 때는 믿지 않은 사람은 지옥이고 믿은 사람은 천국이 됩니다.
쉽게 이해하자면 이렇습니다. 한 사람이 차도를 건너려고 하는데 하도 차가 쌩쌩 다녀서 무단횡단을 하다가는 사고 날 확률이 50%나 됩니다. 그러나 무단횡단을 하면 10초면 끝나지만, 육교로 건너면 10분은 걸립니다. 여러분은 무단횡단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육교를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하실 확률은 50%입니다. 그러나 지옥 갈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존심을 세우며 믿지 않으려 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고일까요? 도대체 우리가 목숨까지 내걸며 지키려는 자존심의 값은 얼마일까요?
항우라는 사나이는 초나라의 명장이었습니다. 그는 7년 동안 70여 차례의 전투를 벌여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군을 몰고 오는 한나라의 유방에겐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수십 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강에 도착합니다. 배를 준비하고 있던 부하가 말합니다. “어서 강을 건너십시오. 강동 땅이 비록 좁다지만, 땅이 사방 천 리나 되며 백성은 수십만입니다. 그곳도 왕 노릇 하기에는 충분합니다.”
항우는 껄껄 웃으며 말합니다. “나는 강동의 8천여 장정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왔는데, 지금은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설령 강동의 백성들이 나를 왕으로 추대할지라도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보겠는가?”
항우의 이런 콧대 높은 자존심은 일생에 단 한 번의 패배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습니다. 70전 1패의 1패가 그를 죽음으로 몰았고, 유방은 맨날 패하다 이 1승으로 한나라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때 항우의 오른팔이 ‘한신’이란 장수였습니다. 한신은 가난한 천민 출신이라 지방 불량배 가랑이로 기어 다녀야 했습니다. 물론 실력이 안 되어서가 아니라 지금 살인을 저지르면 그의 꿈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본 구경꾼들의 조롱은 대단했습니다. 한때 귀족 출신인 항우에게 갔지만, 천민 출신인 자신을 무시하는 바람에 유방에게 갔던 것이고 결국 자신이 모셨던 전쟁의 신과 같은 사람이 자결하게 만드는 장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항우의 나이는 31세였습니다.
자존심 내려놓고 일단 한 번 믿어서 속으면 어떻습니까? 왜 자존심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길까요? 그러면 우리가 영원한 생명까지 걸고 지키려는 자존심의 가치는 얼마일까요? 가치는 누가 그것을 알아주고 사줘야 정해지는 것입니다. 금도 너무 흔해서 사주지 않는다면 그냥 돌에 불과합니다. 나의 자존심은 다른 사람에게 얼마에 팔 수 있을까요? 아무도 안 사줍니다. 자존심을 지켰다고 아무도 안 알아줍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자존심은 각자의 뱀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 자아를 귀하게 여겨 사주겠습니까? 혼자만 귀하다 여기는 것입니다. 빵 하나를 가진 거지에게 100만 원 수표를 주려고 하는데 그 빵을 놓지 못해서 그 수표를 못 받는 것과 같습니다. 자아가 자존심이 귀한 것으로 믿게 하여 이런 일을 벌이는 것입니다.
저도 어머니와 찜질방에서 누가 늦게 나가는지 시합을 해 보았습니다. 힘든데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더 오래 있으려 하는 것은, 주님께 무릎을 꿇느니 지옥을 선택하려는 자세와 같습니다. 자존심을 쓰레기로 여기십시오. 이것이 결국 믿지도 못하게 만들고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자존심이 쓰레기가 될수록 자존감은 더 높아집니다. 그래도 되는 존재가 되게 해주시는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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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54-58 : 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예수님을 고향 사람들은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 고향은 나자렛이나 베들레헴보다도 그분을 거절한 유대아 전체를 의미한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57절)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1코린 1,23)로 박해를 받으셨지만, 계약과 무관했던(에페 2,12 참조) 다른 민족에게서는 존경을 받으신다.
이 회당은 악의에 찬 믿지 않는 사람들, 사랑이 아니라 미움으로 가득 찬, 못되고 버릇없는 사람들이 모였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54절) 그러자 그들은 놀랐다. 그들이 놀랐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놀란 것이 아니라, 무시와 분노로 끓었기 때문이다. 그 놀람은 찬양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시샘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54절)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지혜를 주시고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솔로몬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하여 하느님께 지혜를 청했고 그것을 받았다. 그것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오만이 아니라, 덕으로, 교만이 아니라, 지혜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을 예수님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55절) 이 말은 예수님을 폄하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인간보다 더 거룩한 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분의 가족들과 친척들을 보면서 그러한 능력이 나올만한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그분을 믿지 않고 못마땅해 하기만 하였다. 또한 그들의 불신은 진실을 보는 눈을 막아버렸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느님께서 사람 안에서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기적에 그리 마음을 쓰지 않으신다. 그분은 기적만큼이나 놀라운 가르침을 주셨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들은 그 말씀의 권능에 놀라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를 안다는 이유로 그분을 무시했다. “개천에서 용났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별 볼일 없다고 여기는 가정에서 훌륭한 자녀가 나온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나자렛에서도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흠을 잡지 못하고 그분의 가족들만 들먹이며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 가장 잘 안다고 하는 고향사람들처럼 우리도 우리의 잘못된 삶으로 주님을 배척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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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우리는 모두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국어사전의 정의와는 차이가 있지만, 예언자는 미래의 일을 미리 알려 주는 사람(미리 예: 豫)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고(맡길 예: 預) 그 뜻에 따라 살아가면서 그것이 행복임을 주위에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로서 살아가려면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과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만나려고 기도하고 성사 생활을 하며, 이를 추억하고 점차 깊은 관계를 맺어 갑니다. 성경과 교리의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의 방법과 하느님의 뜻을 깨달으려고 노력합니다. 이처럼 예언자로서 하느님과 만나고 그분의 뜻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예언 직무를 완성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언자는 현실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적용하고 설명해야 할지를 정확하게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특히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문제들을 바르게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의함과 불공정, 인권 침해와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오만함을 용기 있게 지적해야 합니다. 이 일은 예언자로서 선택이 아닌 의무입니다.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특히 사제로서 예언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첫 번째 역할만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와 성사 생활만 열심히 하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일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제는 예언자로서 세상의 정의와 공정, 평화와 평등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때로는 시대에 대한 비판과 쓴소리를 해야 하고,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외면하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언자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시대의 징표를 바라보고, 그 징표를 하느님의 뜻과 가치로 해석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 때문에,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느님의 뜻을 멀리하고 외면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의 안위만을 바라보는, 그래서 마침내 예수님을 외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나자렛 사람들이며 유다인들입니다. 때로는 고향 사람들이나 친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면서도 “예.”가 아닌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있는 예언자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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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4-58)
1)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집안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작은 시골 마을이었으니,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고향 마을에 계실 때에는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마르코복음에 “저 사람은 목수로서” 라는 말이 나옵니다.(마르 6,3) 당시 상황을 나자렛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렇게 재구성해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며 목수인 예수가 어느 날 갑자기 세례를 받겠다면서 세례자 요한에게 갔다. 그리고 몇 달 뒤에 랍비의 모습으로 제자들을 거느리고 고향에 나타났다. 나자렛 사람들은 목수 일을 하던 사람이 랍비 행세를 하는 것도 못마땅했고, 예수가 다른 랍비들보다 더 ‘권위 있는’ 설교를 하는 것도, 또 기적의 힘으로 병자들을 고쳐 주는 것도 못마땅했다.> 아마도 나자렛 사람들은 그 전부터(예수님의 어린 시절 때부터) 예수님과 예수님의 집안을 무시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목수라는 직업 때문에, 또 가난했기 때문에 무시했을 텐데, 요셉이 세상을 떠난 뒤에 젊은 과부 마리아와 그의 외아들만 남은 상황에서는 더욱 무시했을 것입니다.
2) 나자렛의 상황을 조선시대의 상황으로 바꿔서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만 하던 가난한 목수 예수가 어느 날 갑자기 과거 시험에 장원급제를 하고 금의환향했다면, 고향 사람들은 놀라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하면서 예수를 열렬히 환영했을 텐데, 예수는 과거 시험을 본 적도 없으면서, 또 유명한 대학자 밑에서 공부한 적도 없으면서, 갑자기 고향에 돌아와서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무시하고 비웃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사람들 중에는 그를 미쳤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마르코복음 3장 21절에,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한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다는 말이 나옵니다.)> 춘향전에서, 장원급제를 하고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은 거지 모습으로 남원에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만 보고 그를 거지로 대했습니다. 만일에 이몽룡이 처음부터 암행어사의 신분을 드러내고 포졸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면, 변사또를 비롯한 탐관오리들은 자기들의 부정부패를 모두 감추고 이몽룡을 열렬히 환영하고 섬겼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이몽룡은 암행어사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은, 예수님께서 일부러 당신의 신원을 감추셨다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고, 어떤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서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사람들의 위선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낮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예수님의 ‘낮춤’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 일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마태 18,1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과 같아지셨습니다. (무시당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같아지셨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무시한 나자렛 사람들은, 평소에 ‘작은 이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교만한 자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만 무시한 것은 아니고, 자기들보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늘 무시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회개하지 않고, 그런 교만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면, 즉 ‘작은 이들’과 같은 위치에서 사랑을 실천하기를 끝까지 거부한다면, 최후의 심판 때에 ‘영원한 벌’을 선고받게 될 것입니다.(마태 25,41-46)
4) 예수님께서 당하신 일을 사도들도 당했습니다. 유대 최고의회 의원들은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를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사도 4,13) 그들은 바로 그 생각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니 들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실 ‘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하면 그는 몸이 약하고 말도 보잘것없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2코린 10,10) 바오로 사도의 외모는 별로 볼품이 없었던 것 같고, 직접 말로 하는 설교도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 가운에는 바오로 사도의 외모와 말주변만 보고 바오로 사도를 무시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메시아(구세주)로 믿지는 않고 그저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 정도로만 생각하거나, 자신의 종교를 세우려다가 실패하고 십자가형으로 처형당하고 죽은 불쌍한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것은, 보아야 할 진리를 못 보고 있다는 점에서도 어리석은 일이고,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5)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은 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다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느냐?”라고 유대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라는 말은, 대부분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안 믿어서 병자 치유를 청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몇 명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청해서 치유의 은총을 얻었음을 나타냅니다.(마르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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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집안의 대소사(大小事)를 기록하고, 기억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자식들의 생일을 기억하셨습니다. 음력이라서 양력으로 다시 계산하셨습니다. 특히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일이었습니다. 그분들의 기일에는 시골에서 친척들도 오셨습니다. 어머니는 음식도 장만하였고, 잠자리도 새롭게 준비하였습니다. 꼭 잊지 않고 챙기는 것은 성당에 ‘연미사’를 신청하는 것입니다. 부활과 성탄은 가족들에게는 큰 축일이었습니다. 사순시기와 대림시기에는 판공성사를 보아야 했습니다. 어머니 생활의 중심은 신앙이었습니다. 성무일도를 빠짐없이 하였고, 늘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시간이 나면 대녀들과 연락하였고, 대녀들 모임에는 항상 갔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도 대녀가 아프면 기도를 부탁하였고, 대녀의 자식들의 혼배성사를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재물 그리고 명예를 얻기 위해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기러기 엄마와 아빠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의 공부를 위해서는 기꺼이 부부가 떨어져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학교공부만으로는 불안하기에 좋은 학원을 찾아서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도 합니다. 한 가지 악기는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일에는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생일 축하를 해 주기도 합니다. 아이가 대학을 가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 이상으로 부모님들도 함께 노력하고 준비합니다. ‘4당5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4시간 자고 공부하면 합격하고, 5시간 자고 공부하면 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졸업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부유하게 사는 것도 축복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부모와 자식이 혼연일체가 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좋은 책을 읽고 그 속에 묻혀있는 보물을 발견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축제와 축일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끄신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축제와 축일을 지키면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기준과 가치로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삶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었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셨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 신자들도 ‘첨례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첨례표를 따라서 축일을 지킬 수 있었고, 함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첨례표의 기준은 예수님의 성탄과 부활입니다. 성탄 앞에는 대림시기가 있고, 부활 앞에는 사순시기가 있습니다. 주일 미사가 있고, 의무 대축일이 있습니다. 첨례표는 바로 전례력입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전례력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징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문, 예수님의 학력, 예수님의 재산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성공했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시메온과 한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매일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고,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시다. 바로 이 말씀이 너희에게 전해진 복음이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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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영훈 알렉산드로 신부님]
하느님께서 만드신 창조물 중에 끊임없이 질문하는 존재는 무엇일까? 그것은 당연 우리 인간들이다.
인간은 수 만 년 전부터 세상은 무엇이고, 인간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나름대로의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가 바로 철학이고 과학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런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세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까지 그 사색을 넓혀 나간다.
그러나 철학과 과학은 아직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인간에 대해 완전히 알지도 그리고 말하지도 못한다.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라고 말하는 순간에 그 앎이 넓은 바다의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음을 곧장 깨닫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안다는 것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둠이 찾아오면 거리의 가로등이 하나 둘씩 켜진다. 그러나 가로등이 비추고 있는 곳은 가로등 아랫니지, 세상 전체를 비추지는 못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볼 수 있는 범위는 가로등 아래일 뿐, 그 외에는 우리가 볼 수 없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고향으로 가신다. 그러나 고향에서의 반응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고향 사람들이 평소에 알고 있던 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의 모든 것 뿐 아니라, 그분의 가족에 대해서도 훤히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과 다름없는 나자렛 촌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 대단한 능력을 보이고 있으니 그들에게는 너무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분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예언자, 구세주로 외쳤지만 그들의 눈에는 그저 30여년을 함께 산 동네청년에 불과했다.
그렇게도 예수님을 잘 아는 그들이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왜 그들은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던 걸까?
우리는, 다 아는 것처럼 살면서 오직 자신만이 정답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오만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세상 진리를 다 안다고 하지만 실상 그들은 아는 것이 없다.
물론 학문적인 이론은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따뜻한 마음이 뭔지를 모른다. 많은 지식이 오히려 스스로를 오만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 소리를 보고 듣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닫아놓았기에 더 이상의 다른 것을 찾을 수도 없고, 찾을 마음도 없다. 이미 그 사람에게는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그러나 정말 안다는 것은 자신이 모르고 있음을 인정할 때, 참된 앎이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음에서부터 이제 새로운 앎으로 넘어 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더 크고 새로운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앎을 추구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선입견과 편견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과 역사와 인간 안에서 말이다.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가? 예수님의 모든 삶의 의미, 십자가 죽음, 부활, 사랑, 용서 그리고 우리에게 하신 말 한 마디 한 마디, 수 없이 듣고 또 들었던 그 모든 것의 숨은 의미를 알고 있는가?
어쩌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내 자신이 만들어 낸 박제된 예수님은 아닌가? 우주보다 더 넓으신 예수님을 완전히 알고 있다고 자신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분을 더욱 사랑하는데 소홀하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며 끝없는 새로움이시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그 속에 숨겨진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는 어느 사제의 말이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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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작은 시골에서 위대한 인물이 탄생하면 마을 사람들은 커다란 자긍심을 갖게 됩니다. 그 위인이 고향을 방문하면 모두 모여 환영하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자 마을 사람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사람들은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이 어디서 기적의 힘과 신적 지혜를 얻었는지 궁금해 합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와 친척들을 떠올리며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여 하느님을 배척하였습니다.
나자렛 마을 사람들은 육적인 기준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 상황과 성장 배경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업적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영적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은 하느님의 말씀을 보았음에도 영적으로 눈이 멀었으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들었으나 제대로 듣지 못하였습니다. 영적으로 새로워지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귀는 성경 말씀을 들어도 공허한 메아리처럼 듣고 망각해 버립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새로운 은총을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육적인 기준에 머물면 나자렛 마을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홀대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기준으로 사물을 보는 사람의 영혼은 하느님의 방문을 알아채며 기뻐합니다. 비안네 성인처럼 그 사람의 영혼은 ‘하느님을 사랑하다 죽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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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의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라워했습니다.’(마태 13,54).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태 13,57).
그런데 왜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일까? 대체, 왜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놀라워하면서도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긴 것일까?
사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 13,54) 하고,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마태 13,56)라고 하며,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앎’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고, 자신들의 ‘모름’, 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마태 13,55-56)
이처럼, 그들은 ‘나는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 곧 자신들의 고정관념, 선입관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곧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이 생각이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아는 것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 곧 ‘자신이 안다.’는 사실로부터 벗어나고, 또한 ‘자신의 무지’에 대한 어리석음, 곧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는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은 불신의 씨요,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그러기에,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일, 나아가 개방을 넘어서 ‘타인을 수용’하는 일, 수용을 넘어서 타인으로 하여 ‘자신의 변형’을 이루는 일, 그것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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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57)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않는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겸손으로 존경하고, 응답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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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13,57)
우리 모두는 예언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예언자'는 이미 여러 번 언급해 드린대로, 미래의 일어날 어떤 일을 미리 알려주는 사람으로서의 예언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신탁, 곧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으로서의 예언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엘리야에서 세례자 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많은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눈물의 예언자로 불리는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참예언자로 오신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사람들로부터.
그러고 보니,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삶, 하느님의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삶이, 예언자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왜, 그럴까?
예언자는 항상 역설이신 하느님의 뜻을 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의 뜻과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예언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내가 먼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야하는 '사제직'과 예수님처럼 너를 위한 희생이 되어야하는 '왕직'과 함께, 너에게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전해야 하는 '예언직의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은 미사나 드리시고, 기도방에서 기도나 하시지 왜, 세상일에 걱정하시면서 이래라 저래라 하십니까?"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져 있는 예언직의 사명을 망각한 말입니다. 우리 모두 정신 차리고, 예언직의 소명에 충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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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지혜와 힘>
마태오 13,54-58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지혜와 힘>
품는 사람은
모두에게서
얻지만
내치는 사람은
아무에게서도
얻을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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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긴 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의 직업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의 이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이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알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압니다. 그 사람의 직업을 압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이처럼 그 사람에게 속한 무엇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고 정작 그 사람 자신만이 남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 사람 자신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그 사람 자신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비단 누군가 나를 제외한 다른 상대방에 대한 것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바로 나에 대해서도 해당됩니다.
과연 나는 나를 알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껍데기들을 바라 보면서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쉽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 자기 편한 식대로 사람들을 만나고, 이 만남을 통해 얻어진 상대방에 대한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그 사람을 자기 틀에 맞추기 쉽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더 잦은 만남을 갖는 사람에게 이러한 모습으로 다가가기가 오히려 쉽습니다. 자기 식대로 사랑하고 자기 식대로 미워하며, 자기 식대로 믿고 자기 식대로 불신합니다.
만남이란 관계맺음입니다. 나와 나와의 만남, 나와 남과의 만남을 통해서 관계를 맺습니다. 참된 관계라면, 믿음의 관계라면 만남의 당사자인 나 뿐만 아니라 만남의 또 다른 당사자인 또 하나의 나와 남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지닌 무엇을 아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틀을 고집한다면, 상대방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매여 있다면, 상대방을 알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지닌 무엇을 알려고 끊임없는 노력을 할 수 있겠지만, 상대방 자신을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하는 벗들을 생각해봅니다. 가족일수도 있고, 형제 자매일수도 있고, 친구나 동료일수도 있습니다. 과연 내가 그들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지 생각해봅니다. 과연 내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들 자신을 보고 그들 자신에 대해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나를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 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그마한 앎이라는 두꺼운 틀을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 그들을 내 안에, 내 관념에 가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고, 자유로워진 그들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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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부 생활을 20년 넘게 하다 보니, 어느새 후배의 숫자가 많이 늘었고 그러다 보니 이름을 잘 모르는 후배 신부님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피부의 주름과 흰 머리카락을 보면서, 오십이 넘는 중년의 나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논어 위정편에 보면, 나이 오십을 하늘의 명을 알았다는 ‘지천명’으로 비유하지요. 그런데 저의 모습을 보면, 겸손보다는 교만의 모습이 더 많지 않았나 반성하게 됩니다. 대접받고 인정받으려는 모습은 분명히 ‘지천명’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고등학교 동창 중에 지금도 변함없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주변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친구가 있습니다. 어느 날 동창들과 함께 식사하던 중에, 한 친구가 주변을 즐겁게 해주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너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어. 그렇게 경박하게 굴다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쩌려고 그래? 이제 체통 좀 지켜라.”
이 말에 별일 아니란 듯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지. 나와는 상관없어. 게다가 남들의 웃음거리를 면한다고 해서 내가 고상해지는 것도 아니잖아.”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친구의 모습입니다. 남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않는 삶이 자기 고유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말을 했나요? 사람들은 당시에 많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예수님을 보면서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부정적인 말을 하면서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향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의 추억이 간직된 곳이 고향이니까요. 따라서 예수님도 고향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간직하고 계셨을 것이고,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더 좋은 말씀과 놀라운 행적으로 고향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예수님보다 더 낫다면서 드러내려는 욕심과 이기심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게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체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대접받고 인정받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만이 주님의 모습 역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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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준비>
“당신의 수명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 질문은 실제 미국의 한 신문에 실린 것입니다. 이에 사람들은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부동산, 주식 투자 등으로 돈을 더 벌겠다는 물질적인 희망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신 이런 응답이 대다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겠습니다. 그동안 못 해본 일들을 도전해보고 싶어요. 안타까운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우리는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물질적 희망에 중심을 두는 것이 아닌, 하늘 나라에서의 희망을 채워줄 것에 중심을 맞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준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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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선입견과 편견의 벽을 넘어라>
미움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상대방에게서 꼬투리 잡을 허물만이 보이지만 사랑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는 법입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이 마음이 비딱하면 나오는 것도 비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굽은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13,54)하고 말하였습니다. 지혜의 출처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지혜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지혜는 너무나 풍요롭고 깊어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로마11,3)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신비한 비밀을 믿는 이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1코린1,24.2,7)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시어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며 날로 지혜가 성장하였으며 당신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루카2,40.콜로2,3) 그리고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한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9,10)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 판단력입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른 것과 그른 것,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아는 것, 어떤 상황 안에서 그때그때 무슨 말과 행동을 할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올바른 방향감각입니다. 한 번 뿐인 나의 인생여정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지인 하느님의 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는 균형감각, 조화 감각입니다.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불행해집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불행합니다. 하느님과 세상,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말씀 안에서 균형과 조화의 올바르고 절대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스스로 똑똑하고 잘났다고 내세우는 지식의 소유자 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헤아리는 지혜로운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지혜로운 삶 안에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소위 가문도 별로이고 배움도 많지 않은, 엘리트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저런 가르침을? 잘난 척 하지마라!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그들의 뿌리 깊은 선입견이 진실을 왜곡하고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만들었으며 결국은 믿음이 없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못마땅하게 여기는지요? 혹 내 뜻에 맞지 않는다고 무조건 불평불만 하는 것은 아닌지요?
내 마음의 옹졸함이 불평을 키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문에는 '불평금지' 스티커가 붙여있답니다. 내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살펴야 하겠습니다.
자기정보가 다 인양, 그리고 확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섣부른 앎이 병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입니다. 사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을 바꾸면 변화가 옵니다. 문제만 바라보고 부정적인 생각에 골몰하면 모두가 피곤하지만 그 생각을 바꾸면 자신도 바뀌고 세상도 바뀝니다.
“뿌리 깊은 선입견은 대상을 왜곡되게 보게 하는 색안경이 되어 진실을 가립니다.”(함께야) 내면을 모른 체 외면만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거두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선입견과 고정관념뿐 아니라 편견의 시선도 바로잡아주시길 청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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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전례와 삶>
-무지에 대한 답은 전례 은총뿐이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자랑은 전례입니다. 교회의 영성은 전례 영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제 교회공동체의 특징에 대해 밝힌 바와 같이 전례 영성에 전례 공동체입니다. 아마 기존의 종교중 가장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는 종교가 가톨릭 교회일 것입니다. 전례를 통해 그대로 살아있는 전통이 계승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의 힘은 그대로 전례의 힘이 됩니다.
참 좋은 전례는 단순하고 깊고 아름답습니다. 전례의 아름다움은 교회의 아름다움을,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합니다. 참으로 교회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전례를 사랑합니다. 그리하여 전례학을 공부한 분들 중에서 주교들이 많이 배출되는 것 같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이 대체적으로 깊고 고요하고 순수한 것도 전례은총이 아닌가 싶습니다. 언젠가 불암산을 보며 써놓은 짧은 시도 생각납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참으로 신자들이 주님을 닮아 영적으로 크고 깊고 고요하게 만드는 전례은총입니다. 사람과 일반 동물과의 차이를 결정짓는 결정적 요소도 전례입니다. 사람만이 전례를 거행합니다. 참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 전례이며 전례를 통해 참 사람이 되어갑니다.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도 전례 축제 은총입니다.
그러니 전례와 삶은 하나입니다. 전례와 삶은 함께 갑니다. 감히 ‘전례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전례는 맹목이다’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전례를 통해 삶의 꼴도 잡혀 갑니다. ‘삶의 전례화’요 ‘전례의 삶화’입니다. 무엇보다 날마다의 미사 전례은총이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꿉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미사전례를 목말라 하는지요! 좀 더 자세히 전례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나눕니다.
“전례는 온전한 그리스도의 행위이다, 이 세상에서 표징들이 암시하는 전례를 거행하는 사람들은 이미 천상전례에 참석하고 있다. 그곳의 전례는 충만한 친교와 축제의 거행이다.”(가톨릭 교리서1136)
“어머니인 교회는 모든 신자들이 전례 거행에 의식적이고 능동적으로 완전히 참여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와 같은 참여는 바로 전례의 본질이 요구하는 것이며, 또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1베드2,9) 그리스도인은 세례의 힘으로 그 참여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전례헌장14항)
“말씀전례는 성사거행의 필수부분이다. 신자들의 신앙을 키우기 위해서는 말씀의 책, 말씀에 대한 존경(행렬, 향, 촛불), 말씀을 선포하는 장소(독서대),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성경봉독, 말씀선포의 연장인 사제의 강론, 회중의 응답(환호송, 화답송, 연도, 신앙고백) 등 하느님 말씀의 표징들이 부각되어야 한다.”(가톨릭 교회서 1154항)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기념하는 기도중에 두드러지는 단어 하나는 바로 ”오늘!“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와 성령의 초대를 그대로 반향하고 있다.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이 ”오늘“에 들어오도록 초대하시며, 이는 바로 역사 전체를 관통하고 이끌어 가시는 예수님의 파스카의 ‘시간’이다.”(가톨릭 교리서 1165항).
교회의 전례에 대한 주옥같은 가르침을 일부 공부하는 마음으로 나눴습니다. 왜 이렇게 전례로 강론을 시작했을까요? 바로 오늘부터 시작된 제1독서 레위기가 이스라엘의 전례 축일들에 대해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축일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본디 ‘만남’을 뜻하며, 정해진 때에 정해진 장소에서 축제 의식이 거행되는 동안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의 전례 축일들이 정말 많습니다. 축일들의 종교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안식일, 파스카와 무교절, 햇곡식을 바치는 축일, 주간절, 칠월 초하루, 속죄일, 초막절’등입니다. 얼마나 끊임없이 하느님과의 만남을 시도한 모세요 이스라엘 백성이었는지 절절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반복되는 세 말마디가 의미심장합니다. 오로지 갈림없는 마음으로 하느님께만 집중하여 온 정성을 다해 축일 전례를 거행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
참으로 우리의 전례 참여 자세를 성찰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떠나선 살 수 없는 인간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떠나 살기에 무수한 폐인에 괴물들이요 무수한 정신질환자들입니다.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마지막 결론 말씀은 거룩한 모임인 미사전례에 충실히 참여하라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는 너희가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하는 주님의 축일들로서, 이때 너희는 그날그날에 맞는 번제물과 곡식 제물과 희생제물과 제주를 주님에게 화제물로 바쳐야 한다.”
과연 우리는 미사전례때 주님에게 무슨 제물을 봉헌하는 지 묻게 됩니다. 살아 계신 주님과의 구체적 만남 시간이 바로 미사 전례시간이요, 주님의 현존안에서 영원한 오늘을 살게 하는 미사 전례은총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미사 전례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복음에 대한 답이 독서의 전례 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스라엘의 축일들’에 대한 소개이고 복음은 예수님이 나자렛에서 무시, 배척당하는 사실을 전합니다. 바로 편견과 선입견, 질투심의 무지로 눈이 가린 불신의 고향 사람들이요, 바로 무지한 우리 인간의 근본적이자 보편적 모습입니다.
“저 사람은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끝없는 질문을 제기하며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마음을 닫아 버립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해 믿음과 겸손으로 마음이 활짝 열린 사람들이었다면 하느님으로부터 온 지혜와 기적임을 담박 깨달았을 것입니다. 정말 편견과 선입견의 무지에 눈먼 사람들입니다. 전례 축일들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체험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유래한 오늘 강론 제목이 “전례와 삶-무지에 대한 답은 전례 은총뿐이다-”입니다.
“에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예수님의 깊은 좌절감을 엿볼수 있게 합니다. 이와 더불어 가까이 있는 형제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데 극히 인색한, 편견과 선입견, 질투의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개방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믿음의 빛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아예 마음을 닫아 버림으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합니다. 아마 거의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개방이 전제되지 않는 한 주님의 일방적 기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전례은총으로 우리의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시고 참 좋은 믿음을 선사하시며 우리 모두 당신 생명과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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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축제를 대하는 자세를 이야기하십니다.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레위 23,7.8.35.36)
제1독서인 레위기의 대목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거룩한 모임, 곧 주님의 축일들이 나열됩니다. 대부분의 축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시어 자유를 선사하시고 약속의 땅에 자리잡도록 이끄신 구체적 역사를 기억하고 경축하며 계승하려는 기능이 있습니다.
축제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일상성을 잠시 멈추고 역사적 의미를 지금 여기, 현재로 끌어와서 그 안에 들어가 즐기는 시간이지요. 평소에는 일상의 생활과 의무 등을 충실히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했다면, 축제의 시간에는 나름의 의미와 기억, 몰입과 참여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일탈과 예외성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축제의 시간에 들어서면 평범히 살아오던 시간과 공간 에서 분리되어 "거룩한 모임" 즉 거룩한 시공간으로 들어갑니다. 그 안에서는 일상성이 정지되고 의미 위주의 특수성이 지배하지요. 그래서 주님은 반복해서 누누히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것입니다.
평소에는 장려되는 노동이지만, 일정 시간 일손을 놓고 축제에 참여하면서 기억의 정화와 새로운 경험을 통해 구성원들 간의 결속과 소통이 강화되고 축제의 주인이신 하느님과도 더욱 친밀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축제는 기쁨의 시간이고 기쁨의 공간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고향 방문기를 들려 줍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마태 13,55)
고향에 오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께 못마땅한 눈초리들이 꽂힙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과거를 너무 잘 알아서 그분 입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이 오히려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이 일상성 안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출생부터 부모, 형제자매, 직업과 생활 형편, 학력과 자격, 가문과 신분 등 모든 걸 섭렵하고 있습니다. 기저귀 차던 시절, 코흘리개 시절, 성장기와 청년기 등 그들 눈에 감추어진 것은 하나도 없지요. 누군가의 일상적 정보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 사람은 편견의 늪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모든 존재 안에는 일상성과 예외성(특수성)이 함께 혼재하기 때문에 본질을 놓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신원은 고향 사람들의 육적인 눈에 드러나지 않았지요. 그분은 죄악에 묶인 이들을 자유와 해방으로 이끄실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하느님과 함께 모든 축제의 주인이시지만, 놀라운 예언과 기적의 능력조차 고향 사람들이 안다고 자부하는 일상성과 배치되면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편협하고 선입견에 지배를 받는 이들은 예외성과 특수성에 경탄하며 축제를 즐길 개방성이 고갈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미태 13,58)
기적은 일상성을 초월하는 대표적 표징입니다. 믿음 역시 논리와 계산으로 점철된 일상의 질서를 넘어서는 모험이며 투신이고요. 그러니 믿음이 없는 곳에 기적이 있기 어렵겠지요. 역으로, 예수님도 누차 말씀하셨듯이, 기적과 믿음은 서로 호응합니다.
우리에게는 주일과 축일, 대축일이라는 교회의 공적 축제의 시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개별적으로는 각자의 생일과 영명 축일, 세례와 견진, 서원이나 서품, 혼인 등의 각종 기념일 또한 주어졌지요.
그러고 보니 우리는 영육으로 풍요로운 존재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일상의 평범하고 단순한 순례길 구비마다 기쁨과 활력이 되는 축제의 장이 마련되어 있고 우리는 그때마다 각자의 파스카 구원 여정을 되새기며 주님과 한층 더 친밀하고 뜨거운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 축제를 즐기고 그 열매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일상에 매몰되어 다가오신 주님을 놓치지 않도록, "내가 다 아는데~, 원래~, 그럴 리 없지~" 하는 편협한 자의식을 훌훌 털어버려야 하지요. 열린 마음이 꼭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일상과 축제의 리듬 안에서 열린 믿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축제의 주인이신 주님을 더욱 신명나게 해드릴 것이고, 주님께서도 그 안에서 당신 사랑의 기적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은총 가득한 축제들을 마음껏 기뻐하며 즐기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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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Wx_utV5ITaQ&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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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 55)
목수의 아들이
부활할 것이다.
인신공격을
멈추고
삶의 존엄함을
되찾을 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문을 여시듯
편견의 문을
여신다.
너무나 쉽게
우리는 우리
이웃의 삶을
평가하며
살아왔다.
평가하는
이웃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자신의
실체를 다시금
보게 된다.
편견의 중심에는
우리의 이기적인
무지(無知)가 있다.
편견을 부수면
세상과 사람이
달리 보인다.
복음은
다름아닌
편견을
부수는
인격의 참된
기쁨이다.
인관관계의
재조명이
필요하다.
존중이
필요한
나와 너의
관계이다.
우리 모두는
같은
사람들이다.
아무런
생각없이
받아들인
선입견에
많은 상처를
받는 우리들이다.
공동체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
곳이다.
그러기에
존중과 배려
대화와 인정이
필요한 곳이다.
공동체는
편견에 의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께서
이끌어가시는
선물이다.
낮아지신
하느님의
삶이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존중과 감사로
바꾸어 놓는다.
저마다의 삶은
하느님 안에서
존중받아야 한다.
복음은
존중의
실천이다.
목수의 아들이
복음이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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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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