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은 인생(人生)의 낭비(浪費)/
미국(美國)의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Ernie J. Zelinski)는
우리 걱정거리의 96%는
하지 않아도 될 불
필요한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사건(事件)이 40퍼센트,
이미 일어난 사건이 30퍼센트,
사소한 고민이 22퍼센트,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이 4퍼센트
우리가 바꿀 수 있을만한
것은 고작 4퍼센트라고 했습니다.
정말 걱정이란 백해무익
(百害無益)한 것입니다.
‘백년도 못사는 인간이
천년의 근심으로 산다.’
당나라의 시인
한산(寒山)의 말입니다.
/감사(感謝)하고 감사(感謝)하라/
동안 거둔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하겠지만 특별히
사랑하는 가족(家族)이
있음에 대해 감사(感謝)하십시오.
몸과 마음을 편하게 쉴 수
있는 집이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일 할 수 있는 직장
(職場)이 있음을 감사하세요.
식사 때마다 감사하고 따뜻한
잠자리가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과거에 주어지는
덕행이아니라 미래(未來)를
살찌게 하는 덕행(德行)이다.’
영국(英國)의 격언(格言)입니다.
/돌아갈 고향 길/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셀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존경받는 지성인이
폐수종 으로 입원해
있는 한 달 동안
문자 그대로 발악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를
아내에 게도 묻지 못했고
아내조차도 그의 병명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괴로워하며 울부짖던 이 사람은
글로써 현대인에게 깊은 감동을 주며,
한 세기에 가장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였습니다.
1980년 4월 16일, 그는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사르트르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에 대해 각 언론이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떤 독자가 한 신문사에 이런 기사를 투고했다고 합니다. “그는 아마도 비 그리스도인이었는지 모릅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 던 이유는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르트르의 마지막은 돌아갈 고향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헬만 멜빌레는 “인생이란 고향집으로 향하는 여행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번 설에도 고향을 찾아가는 긴 행렬이 고속버스터미널, 역 광장, 각 항구마다 장사 진을 이뤘습니다. 가족과 고향을 향한 귀성객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궁극적 으로 돌아가야 할 고향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향은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어머니와 같이 항상 자리를 지키며 나를 받아줄 것 같은 믿음을 줍니다. 특별히 고향, 부모, 가족이 라는 단어는 위기를 당할 때, 몸이 아프거나 외로울 때 더욱 간절해집니다. ‘고향’ 이라는 단어는 그리움과 함께 우리 맘을 한 결 같이 편안하고 따뜻하게 합니다. 그러면 인생이라는 여행을 마치고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은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