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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정구
정구(鄭逑)는 조선전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초에 걸쳐 살면서 조선시대 도학의 전개과정에
매우 독특한 자리를 잡고 있다. 정구는 전형적인 관인 학자로 이황과 조식의 학통을 고르게 이어 받았다. 특히
17세기 영남예학파의 종장(宗匠)으로 등장하여 예학의 영역에서 이황의 학통의 계승ㆍ발전시킨 대표적인 인물이다.
따라서 당시 경상좌우도의 학풍인 경(敬)과 의(義)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실천유학적인 사상은 뒷날
근기실학파의 연원이 되었다. 또한 정구는 남북 노선이 크게 갈리는 북인정권 시대에 동문이던 정인홍(鄭仁弘)과
갈라섬으로써 남인세력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대북정권에 의한 와해공작으로 인하여 흩어질 위기에 처하였던
퇴계학단을 수습하고 재건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점을 들어 이가원은 “공자 사후에 공자학단을 재건하였던
증자의 역할과 비교된다.”고 평하기도 하였다.(이가원, 「퇴계제자열전③」, 『퇴계학연구』, 퇴계학연구원, 1989.)
그가 13세 때 처음 지도를 받은 당시 성주향교의 교수로 있던 덕계 오건(德溪 吳健)은 남명 조식과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및 이황의 문인으로 영호남의 중요 학맥을 모두 접하고 있었다. 정구의 고향 성주는 영남 중부지역으로, 영남 동북쪽의 안동권에서 활동하던 이황과 영남 서남쪽의 진주권에서 활동하던 조식의 두 학통을 흡수하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다.
정구는 예학을 체계화하는데 평생의 학문적 정열을 쏟았으며, 16세기말에서 17세기에 새롭게 집중적으로 조명된
예학의 학풍을 일으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17세기 예학파의 종장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예학은 인간 삶의 모든 현실과 행위의 모든 절차 속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유교이념과 규범의 형식화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예학은 유교사상의 복합적 구성체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학은 성리학적 근거로서의 천리와 의리론적 근거인
인사를 표상화하고 있으며, 수양론적 실천원리인 경과 경세론적 실현과제인 교화의 방법적 체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정구는 이러한 예학의 전체적 면모를 발휘하는데 매우 중요한 성과를 거둠으로써
퇴계학파의 학문영역을 더욱 넓게 확장하고 깊이 심화시켰던 인물로 평가된다.
1) 정구의 생애
정구의 생애를 수학기, 임관활동기, 강학과 저술기, 만년기로 크게 나누어 보기로 하겠다.
수학기는 명종대와 선조초의 30세까지, 임관활동기는 선조대의 31세부터 55세까지,
강학과 저술기는 임란후의 선조 말기에 해당하는 56세부터 65세까지의 10년간,
만년기는 광해군 재위 기간인 66세부터 78세까지로 마지막 10여년간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는 연산군ㆍ중종 시대에 있었던 네 차례의 사화기가 끝날 무렵인 중종 38년(1543) 성주 사월리에서 충좌위 부사맹을 지낸
부친 청주 정씨 사중과 모친 성주 이씨 사이에 태어나서, 사림파가 정치적인 안정 기반을 구축한 뒤 차츰 자체적인
분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던 당쟁기 초기에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다.
정구의 조부 정응상(鄭應詳)은 김굉필의 사위이다. 이러한 연유로 그의 가계에서 이미 조선초기 사림파의 도통인
김굉필과 특별한 관계가 있으므로, 그의 학통은 영남사림파의 정통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정구의 부친
정은중(鄭恩中)이 현풍 솔예촌(率禮村)에 살다가 성주 이씨를 맞이하여 성주 사월촌(沙月村)에 정착하였다.
이황은 정구를 만나보고, “자질이 영민하며 학문에 뜻을 두고 선을 좋아하니,
한훤당 후손에 어찌 여운(餘韻)이 없겠는가”라고 칭찬한 것도 김굉필에서 내려오는 그의 가학을 이야기한 것이다.
정구는 9세 때 아버지를 여의였다. 7ㆍ8세 때에 벌써 『대학』과 『논어』의 대의를 통할만큼 학업의 성취가 빨랐다 한다.
12세부터는 공자의 상(像)을 벽에 걸고 매일 배례(拜禮)하면서 일찍이 학업에 뜻을 세웠다.
13세 때 덕계 오건(德溪 吳健)에게 나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그는 10세 전에 이미 『대학』과 『논어』를 독파하였는데,
오건에게 처음 배운 것은 『주역』의 건곤(乾坤) 양괘였다.
21세(1563년) 때 중형(仲兄) 정곤수(鄭崑壽)와 함께 이황의 문하에 급문하였다. 이때 이황은 도산정사(陶山精舍)에 물러나
있었으나, 조야(朝野)가 태두로 추앙하는 대학자였다. 그는 이황에게 『심경』과 예설을 질문하면서 그의 학문 방향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남명 조식(南冥 曺植)에 나아가 배운 시기는 24세(1566년) 때였다. 이황에게는 『심경』의 한 대목을
질정받았으며, ‘교육한 차례와 방법’(爲學次第之方)과 ‘교육하는 목적’(爲學所定之處)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식에게서는 선비의 출처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이로부터 불과 몇 해가 지나지 않아서 이황(1570년),
조식(1572년), 오건(1574년) 등 정구의 스승은 차례로 임종했으므로 정구의 수업시대는 사실상 28세에 막을 내리게 된다.
31세 때 평생의 도우(道友)인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의 천거로 예빈시참봉에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한강정사(寒岡精舍)를 세워 강학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정구는 이황의 『주자서절요』의 총목을 찬(撰)하는 한편
『가례집람보주(家禮集覽補註)』를 간행하였고(1573년), 「한훤당연보급사우록(寒喧堂年譜及師友錄)」을
찬술하였다(1575년). 또한 『혼의(昏儀)』, 『관의(冠儀)』를 저술하여 예학에 관심을 보였다.
그 뒤로 건원능참봉(健元陵參奉) 등의 관직으로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나가지 않고,
학도를 모아 『소학』을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이때가 37세(1579년)로 그의 첫 교육활동이다. 교과과정으로
『소학』을 택하게 된 것 역시 평생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자처한 김굉필의 유풍임을 짐작할 수 있다.
38세 때에 비로소 창녕현감으로 출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선조가 인견하고 이확ㅇ과 조식의 인품과 학문을 그에게 물었다.
이이(李珥)는 그의 『경연일기(經筵日記)』에서 선조와 정구와의 첫 대면을 이렇게 진술하였다. “정구로 창녕현감을 삼았다.
그는 예학에 힘써서 몸단속을 심히 엄하게 하며 의론이 영발(英發)하고 청명이 날로 드러났다. 여러 번 벼슬을 시켜도 나서지
않더니, 이번에 상경하여 배명(拜命)하였다. 상(上)이 불러 보시고 배운 것을 물어보시되 천어(天語)가 온순하시니 듣는 사람이
감격하였다. 정구는 이에 부임하였다.”
정구는 그 해 윤4월에 부임하여 사경(四境)에 서재(書齋)를 세우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문묘에 알성하는 한편 제생에게
의리를 강하고 효자 열부의 정려를 개축하였으며, 향사(鄕射), 향음(鄕飮), 양노예(養老禮)를 행하였다. 그리고 군지(郡誌)인
『창산지(昌山誌)』를 간행하였다. 이것은 이후 지방관 재임시에는 빠짐없이 수행한 향토지 발간 사업의 시발이 되는 것이었다.
그 뒤로 그는 수령으로 나갈 때마다 그 지방의 사료를 모아 『창산지(昌山誌)』, 『동복지(同福誌)』, 『함주지(咸州誌)』,
『통천지(通川誌)』, 『임영지(臨瀛誌)』, 『관동지(關東誌)』 등 지방지를 편찬하였다. 그가 지방 수령으로서 첫 번째로
착수하고 가장 중요시한 사업은 수령칠사(守令七事)에 있어서 ‘흥학’(興學)이었다.
41세 때에는 강원도, 충청도의 도사(都事)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내직으로 공조정랑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문하생들과 더불어 월삭강회계(月朔講會契)를 만들어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세워 서식(棲息)의
장소로 하였고, 유명한 백매원(百梅園)을 마련하였다. 47세 때에는 『심경』을 강하자, 학도들이 그 문하에 운집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회연초당은 40여 년 전 도산서당에서 이황이 강석(講席)을 차린 것과 비슷하게
사학 아카데미즘의 중심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50세 때에 통천현감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란을 당하자 사방에 격문을 띄워 창의(倡義)하여 왜적을
토벌하기도 하였다. 전란 중에는 외직을 통하여 국사와 민정에 진력하는 한편, 각 지방의 전망장사(戰亡將士)를 매장ㆍ
추도하고 나아가 역사상 외적을 격퇴한 최춘명(崔椿命), 원충갑(元沖甲) 등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기도 하여
군민의 사기를 고무시키기도 하였다.
임란이 끝난 이후로도 부총관(副總管) 등 군직과 형조참판, 충주목사, 안동대도호부사 등의 벼슬이 제수되었지만,
그는 이 시기에 더욱 많은 시간을 강학과 저술에 힘썼다. 50대 후반에 『중화집설(中和集說)』, 『고금충모(古今忠謨)』,
『낙천한적(樂天閒適)』, 『주자시분류(朱子詩分類)』, 『성현풍범(聖賢風範)』 등을 편찬하였다.
61세 때에 정구는 정인홍과 절교를 한다. 정인홍은 강편한 성질로 벗삼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을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이언적과 이황을 저척(詆斥)하였기 때문이다.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과 「심경발휘(心經發揮)」 등의 저술을 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다.
정구는 향리에 오창정(五蒼亭), 천상정(川上亭), 무흘정사(武屹精舍) 등을 복축하였고, 「염락갱장록(濂洛羹墻錄)」,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 「경현속록(景賢續錄)」, 「와룡암지(臥龍岩誌)」, 주자의 유적에 관한
「곡산동암지(谷山洞庵志)」 등을 지었다.
이듬해에는 김굉필을 배향하던 쌍계서원(雙溪書院)이 임진왜란 때 불탔으므로, 묘소 아래로 이건 하도록 현풍 사림들에게
건의하였다. 이 서원이 뒤에 사액을 받으니 오늘날의 도동서원(道東書院)이다. 정구의 서원과 관련된 활동은
청년시절(26세)에 성주에 서원을 세울 때 그 원호(院號)를 이황에게 품정한 결과 ‘천곡’(川谷:고을에 이천(伊川)과
운곡(雲谷)이라는 지명이 있었음)이라 함이 좋을 듯하다고 하여 천곡서원 건립에 앞장선 일이 있었다.
그 후 임고서원(臨皐書院), 오천서원(烏川書院), 자천서원(紫川書院), 연경서원(硏經書院), 덕산서원(德山書院), 남계서원
(濫溪書院) 등 각 서원의 산장(山長)으로 추대되거나 사액 또는 신개축(改新築)에 앞장서서 사원교육 발전에 진력하였다.
63세 때에 회연초당 동반(東畔)에다 망운암(望雲庵)이라는 모재(茅齋) 한 칸을 지었고, 그 이듬해에는
「삭망통독지규(朔望通讀之規)」라는 학규를 제정하여 난리로 말미암아 실학(失學)한 향중 자제들의 학업을 장려하였다.
「치란제요(治亂提要)」를 지은 것도 이 때였다.
65세 때 정월에 안동대도호부사에 임명되어 부임하는 길에 동문 선배인 금계 황준량(錦溪 黃俊良)의 묘에 제사지내고
예안의 도산서원과 역동서원에 들러서 알묘하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정구는 대사헌 겸 세자보양관(世子輔養官)으로
임명되었으나 십여 차례에 걸친 사직소를 올린 끝에 4월 21일(1608년) 마침내 몽윤(蒙允)되어 도성을 떠났다.
이로써 28년에 걸친 환로(宦路)는 마무리된다. 그러나 폐모살제(廢母殺弟) 문제로 마침내 광해군과 대북정권과의
정면 충돌을 불러일으키기 되었다. 이 때 정구는 강상대의(綱常大義) 명분론으로 전은설(全恩說)을 주장,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72세 정월에 노곡정사(蘆谷精舍)가 불이나 장서 및 저서의 대부분이 불타고, 시월에는 아들 장(樟)의 참척을 당하였다.
정구는 이러한 우환 속에서도 「오선생예설」을 수습하여 개찬(改撰)하였다. 73세에『예기상례』를 편차하고,
75세 때에는 장문의 「김학봉행장(金鶴峯行狀)」을 찬 하였다. 또한 사양정사(泗陽精舍)를 짓고,
사양병수(泗陽病叟)라고 자호하였으며,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와 「일두정선생실기(一蠹鄭先生實記)」를 찬 하였다.
이듬해에는 「하락태극도(河洛太極圖)」 양병(兩屛)을 새로 만들었다. 77세 때는 김굉필을 모신 달성의 도동서원과
조식을 모신 김해의 신산(新山)서원의 사당을 찾아 참배하였다.
78세(1620년, 광해12) 때, 아침에 병이 깊은데도 『가례회통(家禮會通)』을 열어보고 벽에다 붙여둔 예설 교정한 것을 살펴
제목의 명칭이 바르지 않은 것은 시중 드는 사람에게 정돈하여 고쳐 붙이도록 하였다. 그날 저녁 자리가 바르지 않다 하여
바르게 해드리자 곧 운명하였다. 그의 사후 임금이 예관(禮官)을 보내 제사를 드렸다. 또 연경서원(硏經書院) 등에 배향되기
시작하여, 후학들이 회연서원(檜淵書院, 1627, 성주)을 비롯하여 곳곳에 많은 서원을 세워 위판은 봉안하였고,
도동서원에 배향하였다. 인조 원년에 이조판서로 증직되고, 인조 5년에 문목(文穆)이라 시호하였다.
효종 8년에는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숙종 16년 회연서원이 사액되었다.
2) 정구의 사상
(1) 학문론
정구가 백매원(百梅園)에서 조직한 월삭강회계는 여씨향약과 백록동규를 기초로 계회입의(契會立議)를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독서ㆍ수행하는 학자의 근본조건으로 첫째, 반드시 의리를 바르게 하며 이익을 도모하지 말 것 둘째, 반드시 도를 밝히며 공을 헤아리지 말 것을 강조하고, 동시에 부귀에 급급하지 말며 빈천을 근심하지 말도록 요구하였다.
정구는 학문의 기본 요령으로 첫째, 분발하여 뜻을 세울 것(發憤立志) 둘째, 용맹하고 독실할 것(勇猛篤實) 셋째, 깊이 체득하여 힘써 행할 것(深體力行)의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학문의 출발에서 요구되는 조건인 입지와 학문의 수행과정에서 요구되는 자세인 독실, 그리고 학문의 완성을 위해 실천해 가야 하는 역행의 삼 단계를 의미한다. 그는 학문이란 마치 종자를 심어서 손상하지 않고 잘 기르면 반드시 익게 되는데 비유하여, ‘하고자 하는 마음’(欲爲之心)과 ‘그만두지 않는 노력’(不已之功)이 학문하는데 귀중한 것임을 지적하여 입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곧 무엇을 하고자 입지 하는 것은 군자가 상인(常人)과 다른 조건이라 확인하고, 그 입지는 바로 성현이 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정구는 독서에서도 장구(章句)를 표절하여 문장을 짓는 것은 과거(科擧)에 나가려는 것일 따름이라고 규정하고, 성현의 경전을 독서하는 참된 방법으로 체인, 체찰, 체험, 체행의 독서사법(讀書四法)을 제시하였다. ‘체’(體)하는 것은, “서자서, 아자아(書自書, 我自我)”라 지적되는 것처럼 경전과 자아가 유리되어 관념과 지식으로 이해되면서 신념과 행동을 수반하지 않는 경우와 달리, 경전과 자아가 일치하여 자신의 신념을 각성하고 행동으로 실현되는 체득과 체현(體顯)을 의미한다. 여기서 인(認), 찰(察), 험(驗), 행(行)은 학(學), 문(問), 사(思), 변(辨), 행(行)에서처럼 지식의 단계에서 행위의 단계로 실현되는 지행병존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지의 양상에서도 인(인식)→찰(관찰)→험(경험)으로 단계적 심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그가 독서에서 “반드시 소당연과 소이연을 추구하여 알게 되니, 아는 것이 곧 마음에 체인 되어 실천하는 자리가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독서에서 이론과 규범을 포괄함으로써 체인과 체행이 동시에 일어나는 독서의 경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정구는 학문과 독서의 방법으로 4체법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체인(體認)이고, 둘째는 체찰(體察)이며, 셋째는 체험(體驗)이며, 넷째는 체행(體行)이다. 따라서 이 사체(四體)를 갖추지 않는다면 이는 심신에 아무런 유익함이 없어서 이른바 앵무새의 조롱을 면치 못한다고 하였다.
(2) 예학과 수양론
정구의 학문은 관념론보다는 실제론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한강전집』에 남아 있는 그의 논저 가운데서 이기심성론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정구는 『심경발휘』라는 대저를 남겼으나, 이 또한 찬집(纂輯)에 그쳤다. 그는 주자나 이황과 같이 성즉리의 입장에서 인간의 본성을 천리와 보편이성으로 보았으며, 이존기비를 인정함으로써 윤리적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학문적 관심이 주로 예학에 쏠려 있다고 하는 말은 이에 연유한다.
정구는 이황의 문하에서 주로 예학을 토론하였고, 『심경』을 질문하면서도 성리설에 관한 관심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그 원인은 성리설의 문제에서 이황의 이론을 그대로 신봉하여 이론적 쟁점으로 문제삼지 않았던 것이기도 하지만, 예학과 수양론의 실천적 영역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성리학에서 업적을 남긴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수양론에는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15세 때 지은 「취생몽사탄(醉生夢死歎)」에서 ‘탐(貪), 잔(殘), 폭(暴), 만(慢)’을 적(賊)-사단으로, ‘식(食), 색(色), 취(臭), 미(味)’를 윤(淪)-칠정으로 제시하여 마음(靈臺)을 어지럽히는 악의 사단과 칠정을 독특하게 분석하고, 양심이 발동하는 곳에 사기(私己)가 이미 움직이고, 정념(正念)이 일어나는 때에 사(邪)가 먼저 생기는 악의 발생 원인을 주목하였다. 또한 선의 실현으로서 마음(天君)의 바른 이치를 찾기 위해서는 명(明)ㆍ성(誠)이 요구되며, 동정 사이에 경(敬)ㆍ의(義)를 협지(夾持)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일찍부터 수양론의 기본논리를 매우 치밀하게 구성하고 명석하게 제시하였다.
먼저 사욕의 악을 억제하는 소극적 방법으로서, “예가 아니면 시(視), 청(聽), 언(言), 동(動)을 하지 말라.”는 것(四勿)은 사욕을 이기는(勝私欲) 방법이요, “큰손님을 보듯 큰제사를 받들 듯하라”(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는 것은 사욕이 없는(無私欲) 상태이며, “밝게 살피고 굳세게 제어하며 항상 깨어 있는 것”은 사욕을 다스려 천리를 순수하게 하는(治私欲而令純乎其天理) 방법이라 구별하였다. 또한 본심을 간직하는 적극적 방법은 신독(愼獨)으로 파악하며, 그 요령은 생각(思)이라 제시하였다. 사욕이 처음 생길 때 생각하고 깨달아서 성찰하여 이겨내고 다스리는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구는 진덕수의 『심경』을 ‘심학(심성수양론)의 대본’이라고 규정하여, 이황에게 『심경』을 질의함으로써 심학을 전수 받았으며, 나아가 주석을 모아 『심경발휘(心經發揮)』를 저술함으로써 수양론의 표준을 세운 것이라 평가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일심이 천지에 참여하고 만물의 화육도 도울 수 있지만 초목과 금수로 떨어질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이 마음을 다스리는 요령은 경(敬) 1자에 있음을 역설하면서, 수양론의 중심개념으로 경을 성학의 강령이라고 하였다.
(3) 실질적 학풍과 경세론
정구의 독서범위는 다른 성리학자들 보다 광범위하였으며, 남은 저술 또한 실용적이고 일상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문인들이 “읽지 않은 책이 없고, 힘쓰지 않은 바가 없고, 익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탐구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고 평가한대로 그는 천문, 지리, 의방(醫方), 복서, 병서, 풍수설, 의제(儀制) 및 심지어 이단의 책까지 섭렵하였다.
정구의 박학은 일용후생을 위한 애민사상의 결과였다. 그가 예학을 집대성하여 체계화 한 것 역시 당시 퇴폐한 시속을 교정하려는 것이었고, 사회 기강의 준거를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릴 때마다 빠짐없이 엮은 지방지는 민족문화의 보전과 사회교육의 실효를 위한 저술 활동이었다. 정구는 지식을 위한 지식은 선비의 기미(氣味)를 잃게 하는 것이니, 선비는 재주를 드러내지 말고 마땅히 도회(韜晦)해야 한다고 하였다.
정구는 여러 관직을 지내면서 자신의 도학적 경세론을 지방행정에 실제로 시행하였다. 그는 선조 앞에서 자신이 가장 힘쓰는 『대학』 공부의 요령은 ‘근독’(謹獨)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였다. 근독에 근본한 그의 경세론은 곧 자신의 수양론과 일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구는 행정의 가장 급선무로 학교를 일으킬 것(興學)을 강조하여, 학교를 일으킴으로써 풍속의 교화를 추구하였다. 또한 그는 시민여상(視民如傷) 네 글자를 벽에 붙이고 민본 행정을 실천하여, 학교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양노연(養老宴)을 열어 노인을 공경하며, 간교한 서리를 엄중히 단속하며, 백성을 구휼하며, 생리(生利)를 일으키고 해독을 제거하여 풍속을 바로잡았다.
정구는 천하와 국가의 가장 큰 임무는 백성의 구휼(恤民)이라는 민본원리에 따른 인식을 제시하였다. 동시에 그의 도학적 경세론이 기초한 본말론의 논리에 따르면, 이 제도적 관심의 근본은 “임금이 심술(心術)을 바르게 하여 기강을 세우는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천하국가의 큰 임무를 위해 근본이 되는 것은 기강이며, 기강의 근본은 임금의 바른 마음이라 하였다. 그는 기강이란 “현부(賢否)를 분변하여 상하를 결정하며, 공죄(功罪)를 밝혀 상벌을 공정히 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이 기강을 떨치는 역할로써 재상은 잡고서 감히 잃지 않으며, 대간은 살펴서 사사롭게 하지 않으며, 임금은 대공지정(大公至正)한 마음으로 공손히 위에서 아래를 비쳐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인주(人主)의 일심(一心)이 가장 깊은 바닥의 뿌리가 되며, 그 위에 기강이 있고, 기강의 위에 지표면으로 올라와 나무둥치가 되는 휼민이 있고, 휼민은 성부(省賦)로 가지를 뻗고 다시 치군(治軍)으로 구체화되어 가는 본말론의 나무 구조는 도학적 경세론의 가장 보편적 논리인 것이다.
3) 정구의 예학
1) 예학의 탐구
정구가 예학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이황의 문하에 나간 이후이다. 그가 이황에게 올린 서한의 대부분이 예학에 관한 것이고, 그 토론의 쟁점이 매우 치밀하였다. 특히 26세 때 성주에 천곡서원(川谷書院)을 설립하는 일과 그 해에 모친상을 당한 일로 제복(祭服), 제주(祭主), 신주(神主) 등 의례문제를 이황에게 질문하는 편지에서 더욱 심화시켜 갔다.
예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정구가 30대에 『가례집람보주(家禮輯覽補註)』(1573년), 『혼의(昏儀)』(1579년), 『관의(冠儀)』(1582년)를 저술한 것으로 보아, 『주자가례』를 중심으로 사례(관, 혼, 상, 제)의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정구는 61세 때 충청도 목천(木川)에 있으면서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前集 8권 後集 12권)를 편찬하였다. 이 책은 화재를 당해 76세 때(1618) 다시 완성한 것으로, 이정자, 사마광, 장횡거, 주자의 송대 유학자들의 예설을 정리한 것이다. 전집에서는 천자제후례를, 후집에서는 사대부례를 체계적으로 분류한 것으로서, 정구 예학의 대표작이다. 여기서 정구는 『주자가례』를 조술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예학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독자적인 예학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또한 정구는 가정의례의 범위를 넘어서 국가의례에 대한 이해를 체계화하였다.
실제로 국가의례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는 그 당시에 이미 인정을 받았다. 이러한 점은 정구가 61세 때(1602년) 선조의 승하로 국상을 맞게되자, 예조판서 박홍노(朴弘老)는 그에게 국상복제를 물어와 절목(節目) 18조를 강정(講定)하고 답장을 쓰기도한 것에서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정구는 만년에 예학 연구에 더욱 힘썻다. 『심의제조법(深衣製造法)』(1610년),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1617년)의 저술을 통해서 의례의 일반적 절차보다 복제의 특수문제에 대한 정밀한 분석과 해명을 한 것이다. 나아가 『예기상례분류(禮記喪禮分類)』(1615년)의 저술은 상례를 『예기』를 통해 체계화함으로써 경학적 연구로 근원을 소급한 것이다. 이같은 그의 예학은『주자가례』에만 의존하여, 말절만 따지는 수준을 넘어서서 예학의 학문적 기초를 확립하고 체계적으로 구성하므로써, 예학을 독립된 학문영역의 궤도에 올려놓은 것이다.
(2) 정구 예학의 기본구조
정구의 예학은 중국의 삼대의 경전과 『역대제유(歷代諸儒)』, 『송대군현』, 『대명전례(大明典禮)』와 우리나라의 『국조오례의』, 『대전(경국대전)』에 걸쳐, 당시에 수집할 수 있는 예학 문헌을 광범하게 포괄하고, 예학의 방법으로서 문헌의 정밀한 구명(究明), 고증, 정정(訂正), 호증(互證)을 통한 비교 고증의 방법을 취하고, 의례절차와 제도의 표준은 『의례』에 근본을 하면서 당시의 제도를 참고한 것이다. 그는 관, 혼, 상, 제의 의례절차를 각각 독립적으로 편찬할 계획을 세웠지만, 상례(初喪儀)를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정구의 예학저술체계는 중국 송대 유학자들의 예설을 분류하여 『오선생예설분류』를 편찬하였고, 복제문제에 대한 보완으로 『오복연혁도』를 저술하였으며, 스승 이황이 예문제를 토론한 서한을 유별(類別)하여 두 권의 책으로 편집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도학자들의 예설과 병행하여, 예경의 분석작업으로서 『예기상례분류』를 편찬하였다. 이와 같은 정구 예학의 구성체계는 중국과 한국의 도학자들에 의한 예설을 정리하고 『예기』를 경전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 구성체계의 의의를 찾아 볼 수 있다.
정구의 예학관계 저술을 통하여 그의 예학적 관심과 성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구는 자신의 독자적인 예설을 체계화하기보다는 기존의 예학적 성과를 분류, 유별하는 분류화 작업을 수행하였으며, 이러한 분류작업을 통하여 사전적(事典的), 교과서적 분류체계의 정밀성을 제시한다.
둘째, 송대 도학자의 예설과 경학의 의례를 양면적으로 접근함으로써, 그의 예학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았다. 한편으로 예경을 통한 의례의 원형을 확인하고, 다른 한편으로 송대도학의 예설이 보여 주는 이론적 해석을 인식하는 것은 그의 예학이 내포하는 두 방향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예경이 없이는 특정한 이론체계에 폐쇄될 위험이 있고, 송대도학의 이론적 해석이 없으면 경전적 의례가 일관된 의미를 확보하기 어려움이 있음을 통찰한 것이라 하겠다.
셋째, 『오복연혁도』, 『심의제조법』에서 복제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여준다. 복제는 의례의 문채로서 가장 기본적 조건이면서 특히 공동체의 통합성을 확보하는 기본도구라 할 수 있다. 복제의 정립과 실용화의 추구는 유교사회의 의례적 확립을 위한 절실한 방법으로서 효용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넷째, 국가의례와 가정의례의 양면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사례(士禮)인 『의례』를 기준으로 삼으면서, 왕조례(王朝禮)를 광범하게 수록하고 있는 『예기』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데서도 나타난다. 조선초 양촌 권근이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을 저술하면서 보인 『예기』에 대한 관심은 곧 조선초기 국가의례연구의 발전과 연결되고 있으며, 17세기 가정의례 문제의 발전은 『의례』에 대한 관심과 연결되었다.
(3) 정구 예학의 쟁점
예학의 쟁점은 국가의례, 향촌의례, 가정의례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국가의례는 첫째, 국상에서 세자의 초상성복(初喪成服) 때 관(冠)ㆍ장(杖)하게 한 사실에 대한 예조판서의 질문에 답하면서, 정구는 구경산(丘瓊山)의 의절(儀節)에서 효건(孝巾)을 쓴다는 주장이 있지만, 고경(古經)을 따라 수경(首經)만 하며 효건을 하지 말 것을 제시함으로써 그는 고경을 근본으로 삼아야 함을 강조하고 변경이나 첨가를 신중히 하는 입장을 보여준다.
둘째, 정구는 사직에서 모시는 신(五土之神과 原隰之祗)을 확인하며, “신이 의지하는 바는 백성이요, 백성이 의탁하는 바는 신이라”는 인식에 따라 “백성은 춘추로 제향을 정성스럽게 해야 하며, 신도 비내리고 볕들기를 적절하게 하여 가을걷이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언명한다. 곧 신과 백성의 상호 의존관계와 상호 의무를 지적한 것이다. 여기서 정구는 제사의례의 본질로서 신존재의 성격과 신과 인간의 관계를 주목한 것이며, 그 신인관계의 실현을 위한 도구인 제의(祭儀) 절차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정구예학은 구체적 의절(儀節)과 근본원리를 포괄함으로써 체용일원의 성리학적 원칙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정구는 주자가 백록동서원이 사액 받자 서원을 국상(國庠, 國學)으로 보았던 사실에 따라 서원에서 선현의 배향, 종향은 반드시 조정에 계품(啓稟)한 다음에 봉안할 것이요, 사림들이 임의로 경정하지 못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향교의 문묘제도에서 ‘배향’의 경우는 공자에 배향된 안자, 증자의 경우처럼 제품(祭品)의 수효가 같으나, ‘종향’(從享)의 경우는 향교의 네 선생, 구현(九賢)의 경우와 같도록 하여 구별함으로써, 제향되는 선현의 위격(位格)에 따른 명분을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향촌의례로서, 정구는 지방수령에 나가서 당시에 아직 확산되고 있지 않은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의 의절을 직접 고증하여 시행하였다. 정구는 제도와 의기(儀器)를 고예서에서 고증하여 제작함으로써 제도의 엄격함을 향촌의례를 통해 구현하고 있다. 그의 향음주례와 향사례에 관한 의례제도를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향촌의례를 통한 지역 사림의 의례적 결집은 조선후기 향촌사회에서 사대부문화의 의례적 성격과 사회적 기능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가정의례로서 첫째, 시제(時祭) 때의 성복(成服)으로, 회재(晦齋)는 무관자(無官者)의 경우 흑단령(黑團領)을 주장한 데 대해 정구는 유관(有官)ㆍ무관 모두 흑단령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여 이황의 동의를 받고 있다. 여기서 예제를 벗어난 신분적 특정화를 억제하는 정구의 태도를 볼 수 있다.
둘째, 적자(嫡子)가 서모(庶母)를 위한 복에 대해 경전인 『의례』와 『가례』에서는 시마(緦麻) 3월로, 법전인 『대명률』과 『경국대전』에서는 장기(杖期) 1년으로 경전과 법전 사이에 의례가 다르다. 여기서 정구는 후세에 추가된 법전보다 경전을 따르는데 동의하면서도, 소생모(所生母)를 위해 참쇠복(斬衰服)을 마친 경우라면 서모를 위해 장기(杖期)도 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곧 고례와 경전을 기준으로 삼고 후대의 의례를 참작하려는 그의 예학적 입장을 말해준다.
셋째,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를 위해 입는 상복의 경우에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그는 『가례』에서 제쇠(齊衰) 3년을 제시한 것은 ‘시왕(時王)의 제(祭)’요, 11월에 연(練)하고 13월에 상(祥)하는 것은 ‘선왕의 정제(正祭)’라 분석하였다. 곧 복제의 판정에서 시왕과 선왕의 두 기준을 구분하여, 시왕과 선왕의 의례에 차이가 있을 때 선왕을 앞세우면서도 시왕의 권위를 병행시켜 절충함으로써, 예학의 중용을 추구하고 있다.
넷째, 주자는 속제(俗制)의 상복을 입다가 중도에 고례에 맞게 바꾸는 것은 미안하니 그대로 두는 것만 못하다고 지적한 일이 있지만, 정구는 속제와 고례를 넘어서 마땅한 복을 입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것은 주자의 예제에 영합하기 보다 정당성을 표준으로 하는 정구예학의 일관된 입장이다.
다섯째, 정구는 거상중(居喪中)의 출입복제로서 옛사람의 흑립(黑笠)에 비해 포심의(布深衣)를 입고 삼국시대 평상복제인 방립(方笠)을 쓰는 우리나라의 제도를 대비시킨다. 그는 전통복제의 사용을 지지함으로써 우리의 전통복제에 긍정적 관심을 밝히면서, 동시에 당시 사람들이 천인(賤人)의 복색인 패랭이를 쓰는 것은 거상 중에 신분의 경계를 혼동시키는 복색의 착용이라 경계함으로써 복제의 신분적 기능을 중요시하였다.
4) 정구 사상의 의의와 영향
정구의 학문적 연원은 이황을 계승하면서, 한편으로는 조선전기 사림파의 핵심인물인 김굉필에 연결되고, 다른 한편 당시 이황과 더불어 영남도학을 주도하던 조식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영남도학의 다양한 학맥을 융합하게 되었다. 그가 실천적 성격이 강한 수양론과 예학에 관심을 집약하고 있는 사실도 바로 이 학맥과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사림파의 실천적 전통인 천리지학(踐履之學)의 관심에 따라 이황의 다양한 학문적 폭에서 수양론과 예학을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실천적 관심은 조선초기 사림파의 경우가 첫 단계라 한다면, 정구의 경우는 이황을 중심으로한 성리설의 논쟁을 거치고 난 다음의 둘째 단계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조선초기 사림파의 실천체계와 조선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등장한 정구의 실천체계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며, 그 차이가 바로 한국사상사의 발전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곧 사림파의 김굉필이 추구한 『소학』 중심의 소박한 도덕적 실천에 비하여 정구는 ‘수양론-예학’ 중심의 정교한 방법적 이론과 제도적 절차를 갖춘 실천체계로 구별된다.
특히 정구는 예학을 경전적 근거와 실천적 형식에 이르기까지 학문적으로 검토하고 정립시킨 이 시대의 대표적 예학자로서 위치를 확고하게 지니고 있다. 그의 예학은 당시에서 사회적 현실과 깊은 연관을 가지며 성장하였고, 자신의 현실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실천함으로써 현실성과 더불어 사회적 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예학은 허목 등 문인들과 후학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정구의 예학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경전과 후유(後儒)의 학설을 포함하고, 국가의례와 가정의례를 균형 있게 접근하는 예학체계의 폭넓고 방대한 규모 둘째, 경전과 송대 도학자의 저술에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기존의 예설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분류체계의 구조적 치밀성 셋째, 고례를 통한 의례의 원리와 구체적 형식을 상응시켜며, 동시에 고례와 시의(時宜)를 조화시킴으로써 종횡으로 구성한 논리적 종합성이라는 세 가지 특성을 들 수 있다.
그의 학문은 장현광, 정경세, 장흥효 등을 통하여 영남 지방에도 퍼졌고,
허목과 같은 기호 출신의 학자들에게도 전해져 그 실질적 학문의 전통이 전국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출처 :청주정씨 원문보기 글쓴이 : 정재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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