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호 목사
한국기독공보 목양칼럼/
/창조적 파트너십/
사람이 성공하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좋은 동역자를
만나는 것이다.
성공적인 결혼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고
성공적인 목회를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좋은 사람(협력자)
을 만나는 것이다.
새로운 세기에 하나님께서
교회와 교인에게 요구
하시는 지도력은 무엇인가?
과거 우리 사회와 교회는
개인의 지도력에 의하여
전체가 지배받고 이끌림을
받는 형태였다면,
미래 사회와 교회는 다수가
능동적으로 함께 참여하고
개별화된 개인이 존중되는
체제로 점점 변모되어 갈 것이다.
따라서 미래 교회가 요구하는
지도력은 다수의 훈련된 평신도에
의하여 자발적이며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공동체적
지도력을 필요로 한다.
평신도 지도자의 활용을 극
대화하는 교회가 미래교회
의 자화상이 될 것이다.
아마도 미래교회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평신도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교회일 것이다.
경험적이고 참여적이며 상호 활동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방관자가 아니라 참여자요,
관중이 아니라 선수가 되어야 한다.
또한 군림하고 평가만 하고
감독만 하고 제약을 가하는
평신도 지도자가 아니라
목회 동역자로서의 섬김의
인격적 지도자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할 것이고,
일단 신도들에게 잘 협조할
수 있고 따르고 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허락하신
성령의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하여
전문성을 가지고 권위 있고
능력 있게 맡은 바 책임
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평신도 지도자가 참여하는 교회는
목회자의 탈진을 막아주고,
평신도 지도자 자신들을 위해
서는 무력감을 극복하는
좋은 처방이 될 것이다.
목회자 입장에서 보면
간접 목회를 하는 것이다.
즉 목사가 직접 사역하기보다는
성숙하게 훈련 된 평신도
지도자에게 사역을 위임하여
함께 공동 사역하여 나가는
창조적 파트너십을 가지고
힘차게 전진해 나가는
목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
(장로, 안수집사, 권사)이
파트너십을 가지고
지체들을 도와주고,
지원해 주고, 격려해 주고,
자문해 주며, 교회의 지체들이
책임 있게 행동할 수 있도록
충실하게 지도자의
역할을 다할 때
몸은 건강하게 되고
모든 지체가 활성화 될 것이다.
이런 목적을 성취하는 길은
목회자 단독 리더십을 과감하게
벗어나 평신도 지도자들을
목회활동에 적극 참여시키고
동력화 시키는 새로운
목회구조가 필요하다.
미래의 세대의 교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영성적 성숙을
인정받는 지도력과 함께
또한 여기서 요구되는
지도력은 공동 분담된
소명이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 밀접하게 협력함
으로써 발전해 가는
것을 추구하는 지도력이다.
필자는 얼마 전(2006년10월15일)
사고로 세 차례의 뇌수술을
받았고 머리뼈(두개골)를
냉동실에 3 개월 동안
보관한 상태에서 식물
인간으로 중환자실에서
어렵게 투병했으며
6개월 동안 강단을
지키지 못하고 목회를
전혀 감당하지 못하는
목회자의 큰 위기에
직면하였음에도
교회의 장로님들이 중심이 된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이 뜨거운
기도로 지혜롭게 대처한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섬김과
협력관계를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와의 창조적 파트너십
이라도 말하고 싶다.
병약한 목회자를 위한 부임
15주년 축하 및 회복 감사예배를
정성을 다해 준비하고 진행할 수
있는 마음의 선물은 눈물겹게
감사할 부분이며 목회의 빈자리를
구석구석 잘 채워준 아름다운
흔적이 이제 회복이 다 되어
건강한 목회를 하게 된
이후에 확인해 보니
그대로 훈훈하게 남아있는 셈이다.
그동안 수많은 한국교회
목회 현장에서 볼 수 있었던
목회에 대한 판단, 분석과
평가와 견제 그리고 이에 대해
변호와 변론 및 맞대응의 논리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제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가
교회의 아름다운 창조적
파트너가 되어 교회의 새로운
지도자로서의 영향력과
지도자로서의 헌신과 아름다운
협력적 사역으로 앞으로의
교회가 한 단계 도약하고
발전하며 부흥하는 역사가
나타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는 바가 사뭇 크다.
/감동을 주는 사람들/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은 물질이 넉넉해서나 보이는 것이 다채로워서가 아니라 감동케 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물론 감동은 인위적이거나 작위적인 것이 아닌 것은 바로 감동이 선동과 다른 점이다. 그러기에 타인을 감동시키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닌 것은 감동은 강요로 생겨나는 게 아니기에 그렇다. 감동은 인위적인 향수처럼 풍기는 게 아니라 자연적인 향기처럼 그렇게 우러나는 것이며 두 사람의 가슴과 가슴이 열려 공감의 아름다움이 일어날 때 피어나는 꽃과 같은 것인데 그런 감동이 있는 인생이 바로 복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로 인하여 누군가가 감동한다고 하는 것,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며 목회의 기쁨도 바로 이런 것이다. 많은 교우들 속에서 감동을 주는 교우들을 만난다. 그 기쁨, 그 즐거움을 무엇으로 맛볼 수 있겠는가? 군에서 수천 명의 병사를 거느린 지휘관을 경험했던 분이 교회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모범적으로 잘 감당해서 중직자로 임직 받은 후 틈틈이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중 조심스럽게 교회 구석구석 섬김을 목소 실천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다. 목회자에게 감동을 주는 교인들이 그밖에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또한 목회자는 누구 못지않게 교인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인 것은 사실이지만 필자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무렵 하루 이틀도 아닌 수개월 동안 수많은 교인들이 새벽은 물론 아침과 저녁 목회자의 건강 회복을 위한 긴급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큰 힘을 얻었고 절망의 순간에서 희망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교인들의 기도현장의 분위기를 전하는 어느 성도의 이야기이다. “한국의 어느 대기업 회장이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한들 그렇게까지 온 회사원들이 안타깝게 한마음이 되어서 울면서 부르짖는 기도를 정성껏 할 수 있겠습니까?”참으로 목회자를 감동케 하는 성도들의 모습이라고 자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말 감동은 아무나 끼칠 수도 없고 아무나 경험할 수도 없는 하늘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감동을 주는 것이 어렵고 감동을 받는 것 또한 어려운 것이다.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시대는 점점 감동은 없고 자극만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감동을 주는 일인데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없는 것이 저주인 셈이다. 특히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을 읽어도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 않으면 무언가 하나님과 관계에 장애가 있는 것이며 이 자체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괴로운 일이다. 감동은 은총이고 축복이다.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있고 말씀에 마음이 깨달음이 있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나고, 가슴이 벅차다면 이것이 곧 은혜이다. 사실 진정한 감동은 순수함에서 나오고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며잔잔함에서 우러나온다.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창조력을 잃어버린 사람이요,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더 이상 영적 성장이 멈춰버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감동을 잃어버린 시대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나를 감동시켜 달라!’ 외쳐보지만 정작 감동할 줄을 모른다. 그래서 창조력을 잃어버리고 영적 성장이 멈춰버린 시대이다.
그동안 인간 세상을 지배해온 큰 권력은 한 때 무력(군사력), 경제력(돈), 지식의 힘(정보)였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와 같은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이 큰 힘이요 영원한 힘, 위대한 힘은 감동이라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감동은 하나님의 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감동이란 감동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뜻한다. 감동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고 감동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감동의 내용은 하나님의 숨입니다. 하나님의 숨은 생명이다. 하나님의 감동이 있으면 날마다 기뻐 뛰면서 살 수 있다. 감동은 하나님의 숨에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감동을 얻는 것이다.
/초심을 잃지 않는 마음/
필자가 영암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한 것은 17년 전인데 2년 전 큰 사고로 세 차례의 뇌수술을 받기도 했고 중환자실에서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했으며 6개월 동안 강단을 지키지 못하면서 목회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본인은 부임한 날을 기억하면서 날을 세보지 않았는데 당회에서 부임 15주년 감사 및 건강회복 축하 예배를 성대하게 준비하여 범교회적으로 드려주어 큰 감동과 함께 감격을 받으면서 그 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변치 않아야 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다짐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초심을 잃지 않는 마음이다. 우리가 아껴야 할 마음은 초심이다. 훌륭한 인물이 되고, 중요한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마음이 필요하다고 한다.
첫째는 초심, 둘째는 열심,셋째는 뒷심이다.
그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마음이 초심이다. 그 이유는 초심 속에 열심과 뒷심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초심에서 열심이 나오고, 초심을 잃지 않을 때 뒷심도 나오기 때문이다. 초심이란 무슨 일을 시작할 때 처음 품는 마음, 처음에 다짐하는 마음, 사랑의 마음, 겸손한 마음, 순수한 마음, 배우는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견습생이 품는 마음이며 동심이다. 초심처럼 좋은 것이 없다. 가장 지혜로운 삶은 영원한 초심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이 되고, 무엇을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한 때이다. 그때 우리가 점검해야 할 마음이 초심이다. 우리 인생의 위기는 초심을 상실할 때 찾아온다. 초심을 상실했다는 것은 교만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마음의 열정이 식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겸손히 배우려는 마음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정기적으로 마음을 관찰해야 한다. 초심과 얼마나 거리가 떨어져 있는지 초심을 상실하지는 않았는지 관찰해 보아야 한다. 초심은 사랑과 같아서 날마다 가꾸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은 전등이 아니라 촛불과 같다. 전등은 가꾸지 않아도 되지만 촛불은 가꾸지 않으면 쉽게 꺼지고 만다. 어느 작가의 글처럼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며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이 맞던 날의 떨림으로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개업 날의 첫 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는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아골 골짝 빈들 어디든지 가오리다 찬송하며 다짐하던 마음으로 일생동안 사역하며, 처음 목사안수 받던 날, 장로 임직 받던 날, 처음 교회 부임 하던 날, 일평생 교회와 주님을 위해 충성을 대해 헌신하기로 다짐했던 그 뜨겁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과 교회를 위해 일생동안 헌신적으로 목회한다면 이 사람은 그 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가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질 것이다. 축복 받는 것에 익숙하면 우리는 그 축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 감격을 상실하고. 감사를 망각한다. 그리고 불평과 원망이 쌓인다. 처음 먹은 생각을 갖고 일할 때는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기에 그 모습은 가장 순수(純粹)하고 가장 아름답다. 처음에는 누구나 활기차다. 처음이야 무슨 말을 못하겠는가. 넘치는 에너지로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초심은 흩어져 가는 것이 문제다. 일하면서 만나는 수많은 현실적인 어려움들과 적당하게 타협(妥協)하기 시작하고, 또 어느덧 자신도 그 환경에 동화(同化)되어 가면서 처음 먹었던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곤 당혹스러워 한다. 그렇다, 인생 승패는 다른 것이 아니라 여기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초심(初心)을 잃으면 자신의 길을 잃게 되면서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자멸(自滅)하지만, 첫 마음을 끝까지 붙잡고 살아간다면 자신의 꿈도 이루어지고 그리고 민심(民心)도 떠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열흘 붉은 꽃 없다고, 기대와는 다르게 그들은 처음 먹은 마음을 유지하지 못하고 민심과 멀어지면서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종교 개혁 모토도 ‘처음으로 돌아가자’였듯이, 이렇듯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과제(課題)는 처음 먹었던 마음을 유지하는 일이다.
/목회스승을 모신 자의 행복/
사람은 세상에 출생하여 죽을 때까지 배우며 가르치며 산다.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은 짐승이기를 자처하는 것이며 가르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 자이다. 원하던 원치 않던 우리 인간은 학생 아니면 선생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일평생 학생의 심정으로 살며 한평생 스승의 정신으로 후배인생들을 대하며 살자' 이것이 성경말씀이 주는 삶의 철학이요 목자로서의 좌우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리를 깨달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일평생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이요 자녀로서 살아간다. 우리는 모두 마음의 한 구석에 영원히 지을 수 없는 분들이 있다. 한평생 숫한 만남의 사람이 있고, 인연(因緣)으로 얽혀진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분은 우리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이다. 그런데 선생님이란 단순히 학교에서 지식을 가르쳐준 정도의 역할 만이 아니라 영적, 정서적, 사역적인 각 부분에 있어 스승의 역할을 하는 목회자들까지 확대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은 정말 스승이 필요한 시대이다. 이것은 우리네 현실이 참 스승을 갈구하나 만나보기 어렵고 참 교육을 희망하나 찾아보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불완전한 인간에게서 참과 완전을 기대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요, 무리일 것이나 그래도 사람들은 여기에 근접한 스승을 성직자나 교육자에게서 찾고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에는 정말 가르침을 베풀 수 있는 사람, 모든 것을 따라서 행동할 수 있는 참된 스승이 필요로 하는 시대이다. 그러면 오늘에 어떤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신가? 이런 '은인'을 만난 적이 있는가? 기나긴 삶의 여정에서 스승이나 은인의 도움은 큰 영향을 끼친다. 스승은 꼭 필요하고 기다리던 때에 우리 앞에 나타나, 함께 여정에 오르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준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결국은 모두가 스스로 성장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자신의 목적은 스승의 부축을 받으며 독립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다른 이의 스승이나 은인이 되어주어야 한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어려움에 빠진 다른 누군가에게 무한히 큰 깨우침이 될 수 있다. 자기 자신도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은인으로 남을 것이다.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교회에 나가서 교회학교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신앙적인 성장을 하여 목회자가 되었기에 신앙적 영향을 끼친 교회학교 선생님을 잊지 못하고 감사하고 있지만 부교역자 시절에 지금의 목회를 가능하게 할 수 있도록 목회 정신과 목회 철학 등 목회적 영향을 지대하게 끼쳐주신 담임목사님을 지금까지 평생 잊지 못하고 감사하면서 목회스승으로 여기면서 목회 자문도 구하고 정신적으로도 큰 힘을 얻고 있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른다.
목회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아직 온전한 분량에 이르지 못하여 더욱 채워 나가야 하겠다고 분발하면서 노력하는 자세를 가져볼 때에 부교역자의 위치에 있을 때에는 담임목회자를 향하여, 담임목회를 하고 계신 분들은 여러 선배 목회자들을 향하여, 그리고 교단과 교계의 여러 경륜이 많은 훌륭한 원로 목회자들을 향하여 목회 스승으로 생각하면서 그분들의 사명과 위치 및 그 역할이 얼마나 귀중하고 존귀한 것이었는가를 깨닫고 그분들의 수고와 그동안의 목회 경험을 인정하고 틈틈이 목회적인 상담과 조언을 구하면서 스승으로 모시는 것은 목회 현장을 따뜻하게 하는 것일 분만 아니라 한국교회 경륜 많은 훌륭한 목회자들의 풍성한 목회경험과 경륜의 확대 재생산이 되면서 한국교회 전체로서도 큰 소득이 될 수 있으며 목회자 자신에게도 매우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또한 목회스승으로서의 대상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장로님이나 권사님 또는 평신도 가운데도 참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교회와 주님과 목회자를 위해 정성을 다해 헌신하는 분들을 대할 때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평생 목회스승으로 여기며 존경을 보낼 수 있다면 이 또한 행복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목사와 장로의 창조적 파트너십/
/1. 들어가는 말/
사람이 성공하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좋은 동역자를 만나는 것이다. 성공적인 결혼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고 성공적인 목회를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좋은 사람(협력자)을 만나는 것이다. 두 부류의 신자가 있는데 첫째는 오늘을 바라보고 사는 신자인데 보상을 생각하다가 보상이 없고 고난이 있으면 떠나는 사람들이다. 둘째는 그 날을 바라보고 사는 신자인데 신랑 앞에 서는 그 날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다. 이 사람들은 어떤 고난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오늘만 바라보고 사는 자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이 땅의 순례자이며 자신의 참된 지위가 천국에 있다는 것을 아는 자이다. 교회가 직분 맡을 자를 세우는 일은 축복스런 일이다. 그것은 교회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이요,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교회가 확장됨에 따라 사도가 해야 할 일과 집사가 해야 할 일을 각각 분담해야 했다(행 6:1-7). 또한 안디옥 교회도 크게 성장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해외선교사로 파송하는 일에 대하여 금식하며 기도한 후 두 사람을 안수하여 파송했다. 교회 직분의 소중함: 사도 바울은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 강한 의지를 표현했고, 생명 바쳐 감당하였습니다(행 20:24). 기독교인 직업의식은 청지기 직분과 일맥상통한다. 세계2차 대전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진주만을 폭격한 비행단들을 보라. 이처럼 국가의 명령도 생명 바쳐 감당하거늘 하늘이 내리는 직분이야 얼마나 황송하고 귀한 것인가? 그래서 바울은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라며 감사하였다.
/사모해야 할 직분/: 어떤 분은 하나님이 맡기신 직분을 소홀히 여기고 직분을 감당치 않으려고 내놓는 것을 큰 양보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디모데전서 3장 1절을 보면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간절히 바란다면 그것은 좋은 욕망이다”(새번역)라고 했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 일에 “나를 보내주소서”라고 외쳤습니다(사 6:8). 하나님이 허락하신 직분으로서의 좋은 항존직분자가 되시기를 사모하시고 기도하시며 가장 모범적인 항존직분자의 모델이 되신다면 이 모든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다.
새로운 세기에 하나님께서 교회와 교인에게 요구하시는 지도력은 무엇인가? 과거 우리 사회와 교회는 개인의 지도력에 의하여 전체가 지배받고 이끌림을 받는 형태였다면, 미래 사회와 교회는 다수가 능동적으로 함께 참여하고 개별화된 개인이 존중되는 체제로 점점 변모되어 갈 것이다. 따라서 미래 교회가 요구하는 지도력은 다수의 훈련된 평신도에 의하여 자발적이며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공동체적 지도력을 필요로 한다. 평신도 지도자의 활용을 극대화하는 교회가 미래교회의 자화상이 될 것이다. 아마도 미래교회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평신도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교회일 것이다. 경험적이고 참여적이며 상호 활동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방관자가 아니라 참여자요, 관중이 아니라 선수가 되어야 한다. 또한 군림하고 평가만 하고 감독만 하고 제약을 가하는 평신도 지도자가 아니라 목회 동역자로서의 섬김의 인격적 지도자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할 것이고, 일단 평신도들에게 잘 협조할 수 있고 따르고 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허락하신 성령의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하여 전문성을 가지고 권위 있고 능력 있게 맡은 바 책임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평신도 지도자가 참여하는 교회는 목회자의 탈진을 막아주고, 평신도 지도자 자신들을 위해서는 무력감을 극복하는 좋은 처방이 될 것이다. 목회자 입장에서 보면 간접 목회를 하는 것이다. 즉 목사가 직접 사역하기보다는 성숙하게 훈련 된 평신도 지도자에게 사역을 위임하여 함께 공동사역하여 나가는 창조적 파트너십을 가지고 힘차게 전진해 나가는 목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평신도 영적 지도자들의 대푱성을 가진 장로들이 파트너십을 가지고 지체들을 도와주고, 지원해 주고, 격려해 주고, 자문해 주며, 교회의 지체들이 책임 있게 행동할 수 있도록 충실하게 지도자의 역할을 다할 때 몸은 건강하게 되고 모든 지체가 활성화 될 것이다. 이런 목적을 성취하는 길은 목회자 단독 리더십을 과감하게 벗어나 항존 직분자들을 목회활동에 적극 참여시키고 동력화 시키는 새로운 목회구조가 필요하다. 미래의 세대의 교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영성적 성숙을 인정받는 지도력과 함께 또한 여기서 요구되는 지도력은 공동 분담된 소명이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 밀접하게 협력함으로써 발전해 가는 것을 추구하는 지도력이다. 개인의 특성과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하며, 평신도 지도자 훈련의 목표는 훈련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훈련 이후의 교회의 생활에 있으며 교회는 성장하고 변화하는 유기체처럼 자연스럽게 생성과 멸종하는 다양한 사역 프로그램이 준비하게 되었다. 훈련된 평신도 지도자 그룹이 전체교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훨씬 다양하고 효과적이며 교회 활성화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 선교적인 삶에 있음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제 교회의 일은 어느 교역자나 교회 직원만이 성취하려고 시도하기에는 너무나 광범위해졌다. 따라서 미래 시대의 선교를 지향하는 건전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선 평신도가 교회 일과 교회 생활에 그들의 재능을 활용하도록 자극 받고 훈련되어야 하는 기본 원칙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 사명을 성취하는 데 진정으로 관심이 있다면 교회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의 하나로서 평신도 지도력 개발을 위한 훈련을 포함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목표를 성취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전체 교회의 평신도 지도력을 개발해야겠지만 그 중에서도 지도자 그룹이 되는 장로님들에게 중점을 두어야 하며, 바람직한 영향력이 교회의 활성화로 나타나게 해야 한다.
그동안 한국교회 안에
목사와 장로 간에 있었던 어려움
가운데에는 목회에 대한 판단,
분석과 평가와 견제
그리고 이에 대해 변호와 변론 및
맞대응의 논리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제 목사와 장로가 교회의
창조적 파트너가 되어
교회의 새로운 지도자로서의
영향력과 지도자로서의
헌신과 아름다운 협력적
사역으로 앞으로의 교회가
한 단계 도약하고 발전하며
부흥하는 역사가 나타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는 바가 사뭇 크다.
(예, 목회자의 큰 위기에
직면하여 지혜롭게 대처한
영암교회 당로님들의
헌신적이고 희생적
인 섬김과 협력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