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현실이라고 믿어왔던 그 세계가 사실은 대체된 이미지에 불과하다면?" 영화는 이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관객을 매트릭스 세계에 끌어들였다.
그곳은 독서과 사유로 가득찬, 어케보면 현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고리타분한 코드더미. 하지만 화려한 액션과 뭔가 심오한 듯한 대사로 꾸며진 영상복합물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이 코드는 매니아란 명목으로 끈질기게 다뤄졌다.
영화 매트릭스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은연중에 -의도적이라면 노자(老子)가 말하는 위무위(爲無爲)의 경지? ㅋㅋ- 철학을 대중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연유로 인했건 당신도 매트릭스 세계에 관심을 갖고 열광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코드를 찾아보길 바란다. 한명의 네오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각자의 네오를 일깨워가는 것이다.
매트릭스에서 성경의 코드를 발견했다면 이해와 설명을 위해 그 코드를 다시 검색할 것을 권한다. 딴모일보의 김모총수의 글처럼 말이다. 불경을 찾았다해도 마찬가지다. 종교가 아닌 철학도 당근이다.
자신의 연에 따라 필요한 코드를 검색하고 학습해가는 것, 여기까지 왔다면 당신은 이미 매트릭스 세계에 빠진 것이다. (the Matrix has you !!) 영화를 즐기고, 그 속에 숨겨진 자신만의 코드를 찾고, 무엇에 열광하는지 생각하지 말고 인식하도록, 마음을 열고..
what is a real, how do you define a real ?
현실의 범위를 생각해보자. 몸 밖에서 현실의 범위는 주의가 머무르는 곳이다. 주의를 기울이면(정확한 묘사인듯) 기울일수록 그곳은 더욱 생생한 현실이 된다. 의지는 주의를 기울이거나 거두는 자신의 결정,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현실은 자신이 만드는 공간이다.
몸 안에서 보는 현실의 범위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식현상을 의미한다. 모피어스가 지적한 것처럼 오감에 의지한 현실 인식은 뇌에서 받아들이고 해석한 전자신호에 불과하다. 병속의 뇌로 대표되는 사유실험에서처럼 인식되어진 이 세계가 실은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그래서 충분히 조작될 수 있는 정보의 총합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정신만을 위한 노예상태로(듀라셀) 양육되고 있어도 자신은 2003년 지구의 어느 곳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셈이다. 아니면 어느 외계인의 방학숙제로 설치된 전뇌 하나가 그려낸 상상일수도..(암울해~ T^T)
불경의 유식설은 인식주관의 작용과 현상을 설명한다. 현대철학의 이마쥬와 현상학과 닿아있는 이것을 통해 외부음모론(ㅋㅋ) 이전에 육신에 근(根)을 둔 인식작용 자체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감각기관(전오식)이 정보를 수집하고 판독하는 과정 모두에서 정보의 왜곡이 이뤄지는 것이다. 불안정한 인식작용으로 이해하는 이 세계 또한 얼마나 불확실하겠는가, 거기다 무뎌진 의식은 종종 멍청해지기까지 한다.
부언; 인식주관의 인식작용의 인식현상의 한계라는 점에서 나는 모피어스의 대사 "Don't think you are, Know you are."를 "생각하지 말고 인식하도록 해"라고 번역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땅한 번역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다 ㅠ.ㅠ 의미전달에 충실한 번역을 갖고 계시면 올려주시길~
참고; 1600년대 북아메리카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숲이 얼마나 광활했던지 다람쥐가 한번도 땅에 닿지 않고 버지니아에서 일리노이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은, 대중매체들이 살판난 자유시장 덕분에, 한 사람이 가공된 메시지들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독창적인 생각을 한번도 떠올리지 않고 한 주(周)에서 다음주까지 여행하는 것이 가능하리 모른다! 현재 우리의 뇌는 많은 부분이 상업적으로 "식민지화" 되어있다. -존더그라프, 데이비드왠, 토머스네일러 지음, <<어플루엔자(affluenza)>> (한숲, 2003년) 206쪽
참고자료
후설의 지향성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미다 (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사상, 개마고원, 2002년)
병속의 뇌 -사유실험 (철학읽어주는남자, 명진출판, 2003년)
물질과 생명 (마음의 여행, 정신세계사, 2001년)
Lucid Dream
뇌가 해석하는 전자 신호의 문제일 뿐이라면, 가상 현실도 현실만큼 실제적이다. 마우스와 사이퍼를 놓고 본다면 이 현실과 저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어쩌면 매트릭스에서 바라본 저항 세력은 부르주아의 유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잠시 자각몽을 생각해보자.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과 여운은 사뭇 다르지만 영화 바닐라 스카이는 매트릭스와 유사한 세계관을 보여준다. 자신이 결정한 시나리오대로 경험하는 것과 세계의 코드를 읽어내고 변화시키는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을 다룬다는 점(try to realize the truth; there is no spoon..)에서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 네오가 깨어난 현실(zion)이 보다 큰 개념의 매트릭스라는 추측처럼(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ㅋㅋ) 데이빗이 마지막에 눈을 뜬 곳이 또다른 자각몽의 연속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각몽, 이것은 억겁의 윤회를 떠올리게 한다.
선택한 현실이 역시나 자각몽이고 깨어난 현실이 여전히 매트릭스라면, 진짜 세계를 찾기 위해 바둥거릴 필요가 뭘까 한느 의문이 떠오른다. 비록 여기가 꿈속이라고 할지라도 충분히 현실적이라면 나름의 현실일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것인가?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모피어스를 찾아 세계의 실상을 깨닫기 위한 수행을 하고 수퍼맨 놀이를 할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여기가 어디든간에) 되고자 하는 자신을 결정하고 경험하는 놀이를 할 것인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포스가 함께 하기를..)
처음 매트릭스가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영화를 성경 이외의 코드로 읽는 사람이 드물었다. 눈이 어두워서인지 언론이나 통신에서 드러난 글을 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름의 관점에서(불경) 영화의 코드를 찾고 그것을 표현하겠다고 바둥거린지 벌써 몇년이 지났다. 아직도 배울게 많고 다듬어져야할 논리들이기에 쓸때마다 불만족스러웠고 막상 써보니 맘에 안든다 ^^a 다행인 것은 그동안 매트릭스를 해석하는 다양한 코드가 책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나돌았고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거나 나름의 코드를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접해보고 다시 영화를 감상하기를 추천하는바다.
슬라보예 지젝 등저/이운경 역,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한문화, 2003년)
글렌 예페스 편/이수영, 민병직 공역,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나>> (굿모닝미디어, 2003년)
[잡상] what is a real ?
매트릭스는 해커 영화다 - 진짜가 뭐라는 게 중요할까? - 매트릭스는 온라인 게임이다 - 아키텍쳐와 오라클의 차이 - 완벽한 세계란 뭘까? - 왜 매트릭스의 치트키는 믿음일까? - 운명이란 뭘까? - 선택이 운명을 만든다. - 영화는 영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http://www.ddanzi.com/ddanziilbo/116/116cl_052.asp
<매트릭스 리로디드> 짝퉁 감상법
우리의 쥔공 '네오'도 시스템의 일부인가? - 인간의 도시 '시온'도 매트릭스의 일부인가? - 오라클의 목적 - 매트릭스 설계자(architect)의 목적은 무엇인가?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네오가 심장 소생술로 트리니티를 살린 건 억지 아니냐? - 네오의 '슈퍼맨 놀이' 이거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나? - 키메이커, 왜 동네 열쇠집 아저씨 같은 후줄구래한 컨셉으로 등장하나? - 스미스의 존재, 그리고 네오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 왜 네오는 6번째 '그'인가?
http://www.ddanzi.com/ddanziilbo/111/111cl_052.asp
그리고 딴지일보 게시판에 올라왔다고 누가 펀 글인데 확인하지는 못한 글의 전문을 여기 싣는다.
그동안 안돌아가는 머리로 온갖것 갖다 붙여 멋진 리뷰만들기에 여념없었던 우리네 꼴통들에게 이 한편 던져주며 마무리를 하겠다. 아울러 뮝기적 이라는 시대의 오류를 저지른 철없는 딴지에 이글을 던진다.
1편‥'더 원'이 세계를 구할것이다
종교는 때때로 위험하다. 진실한 믿음은 마음을 해방시키는 혁명이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에게 이러한 혁명은 종파에 상관없이 매우, 매우 위험한 것이다. 혁명을 두려워하는 종교적 도그마 자체가 매트릭스이고, 우리는 그 매트릭스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한다.
지난 주, 이집트 정부는 <매트릭스 2 리로디드>(이하 <리로디드>)의 상영을 전면금지했다. 금지된 이유는 폭력이나 선정성 때문이 아니라, 인류창조에 대한 전통적 종교관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과연 이것이 중동지역 특정종교 하나의 편견에만 국한된 문제일까 아니다. 이집트 문화검열국장이 밝혔듯, “이 영화가 금지된 이유는 인간의 실존과 창조같은 주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존중하고 신봉하는 3대 유일신 종교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 모두와 관련된다.”
2003년 현재의 “현실세계”에서조차 이처럼 곤란한 질문은 위험하다. 실존의 본질 자체에 대한 질문은 기존 종교체제를 전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또 왜 창조되었는지 묻는 것은 위험하다. 종교의 권위자들은 말한다. “시스템이 만들어졌고, 우리는 단지 거기 놓였을 뿐이다. 시스템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자유는 우리에게 없다. 당신은 매트릭스를 믿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실한 믿음을 위해 매트릭스에 도전해야만 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내가 여기까지 왔는가” “맹목적 신앙은 진실한 길인가 아니면 거짓인가” “이 방대한 시스템의 설계자 내지 프로그래머는 선한가, 악한가”
<리로디드>는 매우 변혁적인 영화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주해온 맹목적인 종교적 믿음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서 놓지 못하는 믿음을 뿌리부터 뒤흔든다. 내가 접한 대중문화 가운데 이만큼 멋진 통찰을 보여준 영화는 드물다. 인간 밖의 유일한 권력을 믿는 제도화된 종교들은 또다른 형태의 통제와 지배, 즉 인간의식을 지배하는 매트릭스에 불과하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종교 자체가 일종의 매트릭스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2편‥구원자 '더 원'은 없다
<매트릭스> 1편은 스스로 깨달은 니오가 인간의식을 지배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인 매트릭스에 승리하는 것으로 끝난다. 초영웅적 존재인 니오가 인류를 구원하러 옴으로써 선지자의 예언이 실현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겉으로 보면 감독들이 이런 생각을 은근히 유도하면서 관객이 모피어스처럼 맹목적으로 생각하도록 유혹한다 - 우리가 예언을 따르기만 하면 초인적인 ‘더 원’(The One)이 세계를 구원할 것이다. 이야기 끝.
그러나 <리로디드>는 이런 생각을 완전히 전복시켜 버린다. 모피어스가 절대적 신념을 가지고 떠받드는 예언자 오러클은 매트릭스의 권력에 봉사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일 뿐이다. 오러클은 매트릭스의 “어머니”이고 시스템의 완전통제를 돕는다. 니오가 모피어스에게 말하듯 “예언은 거짓이었다. ‘더 원’의 목적은 그 어떤 것도 끝내는 게 아니야. 그건 또 다른 통제 시스템에 불과했어.” 바로 이런 전복성이 이 영화의 뛰어난 면이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 용어와 상징만 보고 이 영화가 자신들의 종파적 종교관을 입증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1편에선 세계를 구원하는 ‘더 원’이 단순한 정답인 듯도 하다. 그러나 2편은 “정답” 대신 모든 위대한 종교들이 가르쳐온 일, 즉 질문을 제시한다. 사람들이 안주해온 신앙체계를 전복하고 무너뜨린 다음, 우리 실존의 본질 자체에 대한 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맹목적 신앙은 정답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니오는 오러클로부터 모피어스에게 전해진 맹목적 신앙을 이제 버려야 한다고 깨닫는다.
따라서 <리로디드>는 종교적 확실성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어떤 도그마나 예언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쉬운 신앙을 주창하는 영화도 아니다. 쉬운 정답 대신 위험하고 심오한 질문을 제시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상영금지된 것이다. 정치적이건 민족적이건 종교적이건 아무리 확실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맹목적으로 따르는 대신 질문해야 한다.
니오와 설계자의 만남 역시 많은 것을 시사한다. 니오는 두개의 문 가운데 선택해야 한다 - 한쪽으로 가면 시온을 구하지만 연인은 죽는다. 다른 한쪽으로 가면 연인을 구하지만 시온주민 모두가 멸망한다. ‘더 원’의 사명은 인류의 구원이다. 예언에 따르면 그것이 니오의 목적인 것이다. 시온을 구하지 않으면 니오는 ‘더 원’이 될 수 없다.
당신 자신이 당신을 구한겁니다
그러나 니오는 예언으로부터 자유롭게 행동하기를 선택하고 트리니티를 구함으로써 설계자에 맞선다. 예언의 계획 대신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을 따름으로써, 궁극적인 힘은 설계자가 아닌 바로 인간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인과법칙을 넘어서고 매트릭스 시스템의 설계자와도 대결한 니오는 홀로 서있다. 인간의 도덕적 조건에 대한 책임은 오직 인간 자신에게 있을 뿐, 개인의 자유의지보다 더 큰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 니오의 말처럼 “선택, 문제는 선택이다.”
만일 신앙에 대한 전통적 지지를 철회했다면, <리로디드>에서 종교적 믿음이란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1999년 인터넷 채팅 인터뷰 중 “이 영화에서 신앙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감독 워쇼스키 형제 스스로 답한 바 있다. “(우리가 관심 있는 문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니오가 시온에 돌아왔을 때 한 청년이 “당신이 나를 구했어요”라고 외친다. 그러나 니오는 퉁명스럽게 답하기를 “아니요, 당신 자신이 스스로를 구한 겁니다.” 그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너를 구한 것은 네 믿음”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처럼 사람들은 누군가 “다른” 이가 “나를” 구해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더 원’이 필요한 이유이다. 허나 니오도 인간 밖의 수퍼맨이 구원자라고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우리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이뤄진 <리로디드> 비평 가운데 이 영화가 얼마나 많은 불교적 영향을 받았는지 언급한 것은 드물다. 1999년 인터뷰에서 시나리오를 쓴 워쇼스키 형제는 불교가 그들의 사상과 시나리오에 큰 영향을 끼쳤느냐는 질문을 받고 “예스!”라 대답했다. “불교와 수학, 특히 양자물리학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고 그 둘이 접합하는 지점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둘 다 오래 전부터 불교에 매혹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많은 관객이 이 점을 놓치는 것이 안타깝다. 우리는 무지와 미몽에 빠져 잠들어 있으며,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만 스스로 깨닫고 또 다른 사람들이 깨닫도록 도울 수 있다. 한편 니오가 오러클을 만나러가는 장면에선 종교물품 벼룩시장이 등장한다. 힌두교 신, 성모 마리아, 예수상 등이 보인 후 마지막으로 카메라는 불상을 비춘다. 화면 속의 부처는 명상자세로 앉아 자기 마음의 본질을 관조하고 있다. 니오가 오러클을 만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비춰진 종교의 이미지가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1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니오는 마치 최후의 초영웅 ‘더 원’처럼 보인다. 하지만 2편에서 밝혀지는 놀라운 사실에 따르면 니오는 “수학적 완성”의 여섯 번째 예외, 여섯 번째 구원자이다. 흔히 상징 기법을 사용하는 영화에서 과연 이 여섯 번째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불교에 매료된 감독들의 답은 명료하다 - 불교에서 2500년 전 나타난 석가모니 부처는 고해의 매트릭스인 이 우주에 나타난 여섯 번째 부처로 간주된다. 고전불경에 따르면, 새로운 우주가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부처가 나타나 미몽에 빠진 중생을 제도한다. 만물이 유전하므로 우주 또한 끊임없이 변하고 이윽고 쇠하여 적멸한다.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고 따라서 새로운 부처가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태어나고 다시 또 태어나고 - 나는 중생들 가운데 다시 태어날 것이다.”
<리로디드>가 던지는 화두는 바로 믿음이다. 이 영화를 감상하기에 따라서는 대중문화가 성서나 불경처럼 올바로 종교적 믿음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ps
이상입니당. 벌써 매트릭스 레볼루션 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전 언제 볼 수 있을지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는~ ^^a
첫댓글 아직 한국에 있으시죠 참... ^^;
읽다가 넘 길어서 포기...
세번에 나눠서 쓴건데 합쳐놓다보니 스크롤의 압박이 좀....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