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817호
눈사람 자살 사건
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 『눈사람 자살 사건』(달아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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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詩)-시라고 썼지만 실은 최승호 시인은 우화(寓話, allegory)로 쓴 것이요-를 읽은 후의 반응은
대개 두 가지일 겁니다.
'내 얘기야. 내 얘기' 하며 감정이입이 되어 마음이 가라앉거나
아니면
'뭐 눈사람 얘기네' 하며 별다른 감흥이 없거나
전자의 경우라면 크거나 작거나 차이는 있겠지만 우울(Depression)의 전조 혹은 우울의 징조를 가진 상태일 겁니다.
후자의 경우라면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일 테지요.
그러니까
최승호 시인의 저 시(혹은 우화)는 내 정신 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일종의 바로미터(barometer)인 셈입니다.
혹은 우울에 빠졌는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일종의 자가 진단 시트일 수도 있겠지요.
이런 얘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줬더니, 하나가 더 빠졌다고 합니다.
자기에게는 이 시가 일종의 '치유제'였다고요.
자살 충동에서 오히려 벗어나게 해주었다고 말입니다.
이 글을 읽은 당신은, 세 가지 경우 중 어느 경우에 해당하는지요?
#최승호
#눈사람자살사건
2022. 1. 24.
달아실출판사
편집장 박제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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