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유 전(金大有傳) 전 직장(直長) 김대유는 기해생이고 자(字)는 천우(天佑)이며 벼슬은 정언에 이르렀다. 김해(金海)가 본관이며 장악원 정(掌樂院正) 김준손(金駿孫)의 아들이다. 보유 : 대대로 청도(淸道)의 미곡(米谷)에서 살았다. 탁영(濯纓) 선생의 조카이다. 정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무인년에 행의(行誼) 유일(遺逸)로서 전생서 직장(典牲署直長)으로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돌아갔다. 천목에는 기우(氣宇)가 범인(凡人)보다 뛰어났고 식견이 명민하며, 효우와 재행은 고을 사람이 탄복한다는 것이었다. 발탁되어 호조 좌랑 겸춘추로 임명되었고, 정언으로 이임되어서는 또 사직하고 돌아왔다. 이에 칠원 현감(漆原縣監)으로 제수되었으나 석 달 만에 천과가 파방되어서 돌아왔다. 고을 동쪽 운문산(雲門山) 우연(愚淵)에다가 별업(別業 별장)을 지었다. 을사년에 천과가 회복된 뒤에 전적(典籍)으로 제수되었고, 향대부(鄕大夫)가 부임하기를 권하여 세 번이나 전송을 받았다. 마지막에는 대구까지 갔다가 되돌아왔고, 우연의 삼족당(三足堂)에서 고종(考終 죽음)하였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이 70을 지났으니 수(壽)가 이미 족했다. 환난(患難) 끝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천과(薦科)에 올라 대성(臺省)을 역임하였으며, 고을살이도 하였으니 영화도 족하다. 조석의 공궤(供饋)에 술과 고기가 끊임없으니 먹는 것도 부족하다 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당(堂) 이름을 삼족(三足)이라 하고 자기의 호로 하였다. 조남명(曹南溟)조식(曹植)이 일찍이 삼족당에 시를 썼는데,
하늘 위엔 운문 곡조이고 / 天上雲門曲 인간에는 녹문 객이다 / 人間鹿門客 곁에서 보니 백 가지가 아울러 족한데 / 旁觀百俱足 자득한 세 가지를 그리는구나 / 自得三爲? 창생(백성)이 복 없는 까닭으로 / 蒼生無福故 이 사람이 황리(黃梨) 빛이 되네 / 此人黃梨色 유람하는 사람 돌아갈 줄 모르고 / 遊子不言歸 열흘 동안이나 길상한 집에 머물렀네 / 十日吉祥宅 사람은 서라벌 길로 돌아가고 / 人歸西伐路 강은 남쪽 하백으로 흐른다 / 江住南河伯 창가 나뭇잎이 미희보다 예뻐서 / 窓葉少於姬 내 방안의 허백한 분위기를 깨뜨린다 / 破我房內白 봄철은 이미 기울었는데 / 春事已非宜 이서국(청도(淸道)의 고호로 삼한 시대의 씨족군임)에는 아직도 두견이 운다 / 伊西猶蜀魄
하였다.
본 고을이 동서로 언양(彦陽)■경주(慶州)와 접경이어서 서로 거리가 1백 20여 리이며 골이 깊고 마을이 잇달아 있다. 그 사이에 관도(官道)가 운문산 골짜기를 경유하는데 한 곳의 원(院)과 두 곳의 역(驛)으로 연결된다. 긴 냇물이 굽이쳐 돌고 수석(水石)이 험하고 막혀서 비가 조금만 와도 사람이 통행하지 못했으므로, 관곡(官穀)을 출납[??]할 때마다 백성들이 매우 고통을 받았다. 공이 생원 박하담(朴河淡)과 의논하여 그 폐단을 방백(方伯)에게 진정하여 비로소 사창(社倉)을 설치하니 백성이 그 혜택을 입었다. 사창 한 모퉁이에 사당(祠堂)을 짓고 두 공(公)에게 춘추(春秋)로 제향(祭享)하여 보답하였다.
묘표(墓表)에는, “기재(器才)가 세상을 덮을 만하던 영웅이 이제 죽었으니, 아, 애석하여라. 노부(老夫)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보증하는 사람이 대개 적었는데, 천하의 선비라고 허여한 사람은 다만 공뿐이었다. 용용(容容)한 대아(大雅 큰 풍류)는 경사(經史)를 토로하는 큰 선비였고, 흘흘(??)한 장신(長身)은 활쏘고 말몰이가 틀림없는 호걸스런 사람이었다. 홀로 서당(書堂)에 거처하며 길게 노래하고 느리게 춤추어서 집안 사람이라도 그의 뜻을 알지 못한 것은 본성(本性)에 즐거움이 있어 영가 무도(詠歌舞蹈)할 때였다. 임천(林泉)에 숨어서 낚시질하고 사냥하는데 당시 사람들이 오히려 방랑자라고 인정한 것은 세상을 피해 살아도 번민함이 없이 재덕을 숨기고 감추는 일이었다. 우리네 덕이 같은 자로서 본다면 판국(辦局)이 크고 깊어 그 인에 힘썼고, 언론에 격앙(激仰)하여 그 굳셈이 한한(?? 굳센 모양)하였다. 착함을 좋아하면서도 홀로 착한 데에만 그치고, 널리 구제하려 했으나 자신을 구제하는 데에만 그친 것은, 때를 만나지 못함에서인가, 운명이었던가.” 하였다. 남명(南溟)이 지었다.
[주D-001]운문 곡조 : “악(樂)과 춤으로써 국자(國子 : 국자감 학생)에게 가르쳐서 운문을 춤춘다.” 하였다. 《周禮》〈春官大司樂〉 [주D-002]녹문 객 : 동한(東漢) 말기 사람인 방덕공(龐德公)은 사마덕조(司馬德操)?제갈량(諸葛亮)과 벗하던 사람인데, 유표(劉表)가 예(禮)로써 여러 번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녹문산에 숨어 살면서 나오지 않았다는 고사이다. [주D-003]황리빛 : 굶주린 빛이니, 벼슬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삼족이 정자는 조선 중종14년(1519년)에 삼족당 김대유(三足堂 金大有,1479∼1552년)선생이 후진을 교육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그는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의 문인으로 1507년(중종2년) 정시(庭試)에 장원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호조정랑 겸 춘추관 기사관, 정언(正言), 칠원(漆原)현감을 지내고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때 직을 사임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조식(曺植), 박하담(朴河淡), 주세붕(周世鵬), 김응조(金應祖), 김극일(金克一), 신계승(申季誠) 등 제현들과 도의지교를 맺고 이곳에서 강론하였는데, 그의 호를 따서 삼족대(三足臺)라 하였다. 삼족대(三足臺)는 학일산(鶴日山)의 지맥이 동창천(東倉川)으로 숙으려드는 기슭 절벽위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북쪽평지에서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방형일곽의 토석담장은 동쪽으로 싸고돌며 북동쪽으로 사주문이 나있다. 건물은 정면3칸 중 좌측 협칸은 전면이 개방된 2간통(間通) 마루이고 우측 2칸은 전면에 반칸 퇴를 물려 마루를 깔고 그 뒤쪽에 온돌방을 들였다. 마루의 측면과 배면에는 각 칸에 양개띠장널문을 내었고 온돌방의 전면에도 각 칸에 양개살문을 달았다. 온돌방의 천장은 종이반자로 마감하였고 마루 쪽으로는 두 짝의 열개팔모 불발기문을 달았다. 구조는 방형의 자연석 덤벙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주두 아래에는 초각 된 앙설형(仰舌形)의 촛 가지를 한 개 뽑아놓았고 그 내면은 직절(直截) 하여 퇴보를 받치고 있으며 퇴량의 외단에는 봉두(鳳頭)가 새겨져 있으나 후대에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는 동안 형상이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변모했지만 동창천 암벽 위 숲 속에 둘러 쌓인 삼족대는 아름다운 한국적인 정자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삼족대 밑에는 1973년 세운 김대유선생의 신도비가 있고 참봉 김용희(金容禧)의 중수기문(重修記文)이 있다. 김대유 전(金大有傳) 전 직장(直長) 김대유는 기해생이고 자(字)는 천우(天佑)이며 벼슬은 정언에 이르렀다. 김해(金海)가 본관이며 장악원 정(掌樂院正) 김준손(金駿孫)의 아들이다. 보유 : 대대로 청도(淸道)의 미곡(米谷)에서 살았다. 탁영(濯纓) 선생의 조카이다. 정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무인년에 행의(行誼) 유일(遺逸)로서 전생서 직장(典牲署直長)으로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돌아갔다. 천목에는 기우(氣宇)가 범인(凡人)보다 뛰어났고 식견이 명민하며, 효우와 재행은 고을 사람이 탄복한다는 것이었다. 발탁되어 호조 좌랑 겸춘추로 임명되었고, 정언으로 이임되어서는 또 사직하고 돌아왔다. 이에 칠원 현감(漆原縣監)으로 제수되었으나 석 달 만에 천과가 파방되어서 돌아왔다. 고을 동쪽 운문산(雲門山) 우연(愚淵)에다가 별업(別業 별장)을 지었다. 을사년에 천과가 회복된 뒤에 전적(典籍)으로 제수되었고, 향대부(鄕大夫)가 부임하기를 권하여 세 번이나 전송을 받았다. 마지막에는 대구까지 갔다가 되돌아왔고, 우연의 삼족당(三足堂)에서 고종(考終 죽음)하였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이 70을 지났으니 수(壽)가 이미 족했다. 환난(患難) 끝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천과(薦科)에 올라 대성(臺省)을 역임하였으며, 고을살이도 하였으니 영화도 족하다. 조석의 공궤(供饋)에 술과 고기가 끊임없으니 먹는 것도 부족하다 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당(堂) 이름을 삼족(三足)이라 하고 자기의 호로 하였다. 조남명(曹南溟)조식(曹植)이 일찍이 삼족당에 시를 썼는데,
하늘 위엔 운문 곡조이고 / 天上雲門曲 인간에는 녹문 객이다 / 人間鹿門客 곁에서 보니 백 가지가 아울러 족한데 / 旁觀百俱足 자득한 세 가지를 그리는구나 / 自得三爲? 창생(백성)이 복 없는 까닭으로 / 蒼生無福故 이 사람이 황리(黃梨) 빛이 되네 / 此人黃梨色 유람하는 사람 돌아갈 줄 모르고 / 遊子不言歸 열흘 동안이나 길상한 집에 머물렀네 / 十日吉祥宅 사람은 서라벌 길로 돌아가고 / 人歸西伐路 강은 남쪽 하백으로 흐른다 / 江住南河伯 창가 나뭇잎이 미희보다 예뻐서 / 窓葉少於姬 내 방안의 허백한 분위기를 깨뜨린다 / 破我房內白 봄철은 이미 기울었는데 / 春事已非宜 이서국(청도(淸道)의 고호로 삼한 시대의 씨족군임)에는 아직도 두견이 운다 / 伊西猶蜀魄
하였다.
본 고을이 동서로 언양(彦陽)■경주(慶州)와 접경이어서 서로 거리가 1백 20여 리이며 골이 깊고 마을이 잇달아 있다. 그 사이에 관도(官道)가 운문산 골짜기를 경유하는데 한 곳의 원(院)과 두 곳의 역(驛)으로 연결된다. 긴 냇물이 굽이쳐 돌고 수석(水石)이 험하고 막혀서 비가 조금만 와도 사람이 통행하지 못했으므로, 관곡(官穀)을 출납[??]할 때마다 백성들이 매우 고통을 받았다. 공이 생원 박하담(朴河淡)과 의논하여 그 폐단을 방백(方伯)에게 진정하여 비로소 사창(社倉)을 설치하니 백성이 그 혜택을 입었다. 사창 한 모퉁이에 사당(祠堂)을 짓고 두 공(公)에게 춘추(春秋)로 제향(祭享)하여 보답하였다.
묘표(墓表)에는, “기재(器才)가 세상을 덮을 만하던 영웅이 이제 죽었으니, 아, 애석하여라. 노부(老夫)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보증하는 사람이 대개 적었는데, 천하의 선비라고 허여한 사람은 다만 공뿐이었다. 용용(容容)한 대아(大雅 큰 풍류)는 경사(經史)를 토로하는 큰 선비였고, 흘흘(??)한 장신(長身)은 활쏘고 말몰이가 틀림없는 호걸스런 사람이었다. 홀로 서당(書堂)에 거처하며 길게 노래하고 느리게 춤추어서 집안 사람이라도 그의 뜻을 알지 못한 것은 본성(本性)에 즐거움이 있어 영가 무도(詠歌舞蹈)할 때였다. 임천(林泉)에 숨어서 낚시질하고 사냥하는데 당시 사람들이 오히려 방랑자라고 인정한 것은 세상을 피해 살아도 번민함이 없이 재덕을 숨기고 감추는 일이었다. 우리네 덕이 같은 자로서 본다면 판국(辦局)이 크고 깊어 그 인에 힘썼고, 언론에 격앙(激仰)하여 그 굳셈이 한한(?? 굳센 모양)하였다. 착함을 좋아하면서도 홀로 착한 데에만 그치고, 널리 구제하려 했으나 자신을 구제하는 데에만 그친 것은, 때를 만나지 못함에서인가, 운명이었던가.” 하였다. 남명(南溟)이 지었다.
[주D-001]운문 곡조 : “악(樂)과 춤으로써 국자(國子 : 국자감 학생)에게 가르쳐서 운문을 춤춘다.” 하였다. 《周禮》〈春官大司樂〉 [주D-002]녹문 객 : 동한(東漢) 말기 사람인 방덕공(龐德公)은 사마덕조(司馬德操)?제갈량(諸葛亮)과 벗하던 사람인데, 유표(劉表)가 예(禮)로써 여러 번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녹문산에 숨어 살면서 나오지 않았다는 고사이다. [주D-003]황리빛 : 굶주린 빛이니, 벼슬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삼족대이 정자는 조선 중종14년(1519년)에 삼족당 김대유(三足堂 金大有,1479∼1552년)선생이 후진을 교육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그는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의 문인으로 1507년(중종2년) 정시(庭試)에 장원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호조정랑 겸 춘추관 기사관, 정언(正言), 칠원(漆原)현감을 지내고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때 직을 사임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조식(曺植), 박하담(朴河淡), 주세붕(周世鵬), 김응조(金應祖), 김극일(金克一), 신계승(申季誠) 등 제현들과 도의지교를 맺고 이곳에서 강론하였는데, 그의 호를 따서 삼족대(三足臺)라 하였다. 삼족대(三足臺)는 학일산(鶴日山)의 지맥이 동창천(東倉川)으로 숙으려드는 기슭 절벽위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북쪽평지에서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방형일곽의 토석담장은 동쪽으로 싸고돌며 북동쪽으로 사주문이 나있다. 건물은 정면3칸 중 좌측 협칸은 전면이 개방된 2간통(間通) 마루이고 우측 2칸은 전면에 반칸 퇴를 물려 마루를 깔고 그 뒤쪽에 온돌방을 들였다. 마루의 측면과 배면에는 각 칸에 양개띠장널문을 내었고 온돌방의 전면에도 각 칸에 양개살문을 달았다. 온돌방의 천장은 종이반자로 마감하였고 마루 쪽으로는 두 짝의 열개팔모 불발기문을 달았다. 구조는 방형의 자연석 덤벙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주두 아래에는 초각 된 앙설형(仰舌形)의 촛 가지를 한 개 뽑아놓았고 그 내면은 직절(直截) 하여 퇴보를 받치고 있으며 퇴량의 외단에는 봉두(鳳頭)가 새겨져 있으나 후대에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는 동안 형상이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변모했지만 동창천 암벽 위 숲 속에 둘러 쌓인 삼족대는 아름다운 한국적인 정자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삼족대 밑에는 1973년 세운 김대유선생의 신도비가 있고 참봉 김용희(金容禧)의 중수기문(重修記文)이 있다. 전 직장(直長) 김대유는 기해생이고 자(字)는 천우(天佑)이며 벼슬은 정언에 이르렀다. 김해(金海)가 본관이며 장악원 정(掌樂院正) 김준손(金駿孫)의 아들이다. 보유 : 대대로 청도(淸道)의 미곡(米谷)에서 살았다. 탁영(濯纓) 선생의 조카이다. 정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무인년에 행의(行誼) 유일(遺逸)로서 전생서 직장(典牲署直長)으로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돌아갔다. 천목에는 기우(氣宇)가 범인(凡人)보다 뛰어났고 식견이 명민하며, 효우와 재행은 고을 사람이 탄복한다는 것이었다. 발탁되어 호조 좌랑 겸춘추로 임명되었고, 정언으로 이임되어서는 또 사직하고 돌아왔다. 이에 칠원 현감(漆原縣監)으로 제수되었으나 석 달 만에 천과가 파방되어서 돌아왔다. 고을 동쪽 운문산(雲門山) 우연(愚淵)에다가 별업(別業 별장)을 지었다. 을사년에 천과가 회복된 뒤에 전적(典籍)으로 제수되었고, 향대부(鄕大夫)가 부임하기를 권하여 세 번이나 전송을 받았다. 마지막에는 대구까지 갔다가 되돌아왔고, 우연의 삼족당(三足堂)에서 고종(考終 죽음)하였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이 70을 지났으니 수(壽)가 이미 족했다. 환난(患難) 끝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천과(薦科)에 올라 대성(臺省)을 역임하였으며, 고을살이도 하였으니 영화도 족하다. 조석의 공궤(供饋)에 술과 고기가 끊임없으니 먹는 것도 부족하다 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당(堂) 이름을 삼족(三足)이라 하고 자기의 호로 하였다. 조남명(曹南溟)조식(曹植)이 일찍이 삼족당에 시를 썼는데,
하늘 위엔 운문 곡조이고 / 天上雲門曲 인간에는 녹문 객이다 / 人間鹿門客 곁에서 보니 백 가지가 아울러 족한데 / 旁觀百俱足 자득한 세 가지를 그리는구나 / 自得三爲? 창생(백성)이 복 없는 까닭으로 / 蒼生無福故 이 사람이 황리(黃梨) 빛이 되네 / 此人黃梨色 유람하는 사람 돌아갈 줄 모르고 / 遊子不言歸 열흘 동안이나 길상한 집에 머물렀네 / 十日吉祥宅 사람은 서라벌 길로 돌아가고 / 人歸西伐路 강은 남쪽 하백으로 흐른다 / 江住南河伯 창가 나뭇잎이 미희보다 예뻐서 / 窓葉少於姬 내 방안의 허백한 분위기를 깨뜨린다 / 破我房內白 봄철은 이미 기울었는데 / 春事已非宜 이서국(청도(淸道)의 고호로 삼한 시대의 씨족군임)에는 아직도 두견이 운다 / 伊西猶蜀魄
하였다.
본 고을이 동서로 언양(彦陽)■경주(慶州)와 접경이어서 서로 거리가 1백 20여 리이며 골이 깊고 마을이 잇달아 있다. 그 사이에 관도(官道)가 운문산 골짜기를 경유하는데 한 곳의 원(院)과 두 곳의 역(驛)으로 연결된다. 긴 냇물이 굽이쳐 돌고 수석(水石)이 험하고 막혀서 비가 조금만 와도 사람이 통행하지 못했으므로, 관곡(官穀)을 출납[??]할 때마다 백성들이 매우 고통을 받았다. 공이 생원 박하담(朴河淡)과 의논하여 그 폐단을 방백(方伯)에게 진정하여 비로소 사창(社倉)을 설치하니 백성이 그 혜택을 입었다. 사창 한 모퉁이에 사당(祠堂)을 짓고 두 공(公)에게 춘추(春秋)로 제향(祭享)하여 보답하였다.
묘표(墓表)에는, “기재(器才)가 세상을 덮을 만하던 영웅이 이제 죽었으니, 아, 애석하여라. 노부(老夫)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보증하는 사람이 대개 적었는데, 천하의 선비라고 허여한 사람은 다만 공뿐이었다. 용용(容容)한 대아(大雅 큰 풍류)는 경사(經史)를 토로하는 큰 선비였고, 흘흘(??)한 장신(長身)은 활쏘고 말몰이가 틀림없는 호걸스런 사람이었다. 홀로 서당(書堂)에 거처하며 길게 노래하고 느리게 춤추어서 집안 사람이라도 그의 뜻을 알지 못한 것은 본성(本性)에 즐거움이 있어 영가 무도(詠歌舞蹈)할 때였다. 임천(林泉)에 숨어서 낚시질하고 사냥하는데 당시 사람들이 오히려 방랑자라고 인정한 것은 세상을 피해 살아도 번민함이 없이 재덕을 숨기고 감추는 일이었다. 우리네 덕이 같은 자로서 본다면 판국(辦局)이 크고 깊어 그 인에 힘썼고, 언론에 격앙(激仰)하여 그 굳셈이 한한(?? 굳센 모양)하였다. 착함을 좋아하면서도 홀로 착한 데에만 그치고, 널리 구제하려 했으나 자신을 구제하는 데에만 그친 것은, 때를 만나지 못함에서인가, 운명이었던가.” 하였다. 남명(南溟)이 지었다.
[주D-001]운문 곡조 : “악(樂)과 춤으로써 국자(國子 : 국자감 학생)에게 가르쳐서 운문을 춤춘다.” 하였다. 《周禮》〈春官大司樂〉 [주D-002]녹문 객 : 동한(東漢) 말기 사람인 방덕공(龐德公)은 사마덕조(司馬德操)?제갈량(諸葛亮)과 벗하던 사람인데, 유표(劉表)가 예(禮)로써 여러 번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녹문산에 숨어 살면서 나오지 않았다는 고사이다. [주D-003]황리빛 : 굶주린 빛이니, 벼슬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9삼족대이 정자는 조선 중종14년(1519년)에 삼족당 김대유(三足堂 金大有,1479∼1552년)선생이 후진을 교육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그는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의 문인으로 1507년(중종2년) 정시(庭試)에 장원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호조정랑 겸 춘추관 기사관, 정언(正言), 칠원(漆原)현감을 지내고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때 직을 사임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조식(曺植), 박하담(朴河淡), 주세붕(周世鵬), 김응조(金應祖), 김극일(金克一), 신계승(申季誠) 등 제현들과 도의지교를 맺고 이곳에서 강론하였는데, 그의 호를 따서 삼족대(三足臺)라 하였다. 삼족대(三足臺)는 학일산(鶴日山)의 지맥이 동창천(東倉川)으로 숙으려드는 기슭 절벽위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북쪽평지에서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방형일곽의 토석담장은 동쪽으로 싸고돌며 북동쪽으로 사주문이 나있다. 건물은 정면3칸 중 좌측 협칸은 전면이 개방된 2간통(間通) 마루이고 우측 2칸은 전면에 반칸 퇴를 물려 마루를 깔고 그 뒤쪽에 온돌방을 들였다. 마루의 측면과 배면에는 각 칸에 양개띠장널문을 내었고 온돌방의 전면에도 각 칸에 양개살문을 달았다. 온돌방의 천장은 종이반자로 마감하였고 마루 쪽으로는 두 짝의 열개팔모 불발기문을 달았다. 구조는 방형의 자연석 덤벙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주두 아래에는 초각 된 앙설형(仰舌形)의 촛 가지를 한 개 뽑아놓았고 그 내면은 직절(直截) 하여 퇴보를 받치고 있으며 퇴량의 외단에는 봉두(鳳頭)가 새겨져 있으나 후대에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는 동안 형상이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변모했지만 동창천 암벽 위 숲 속에 둘러 쌓인 삼족대는 아름다운 한국적인 정자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삼족대 밑에는 1973년 세운 김대유선생의 신도비가 있고 참봉 김용희(金容禧)의 중수기문(重修記文)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