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朴趾源) 수필
마음의 눈을 뜨고 보는 심안(心眼)
전일환
『열하일기』는 정조 4년(1708) 박지원이 청나라 건륭제의 고희연을 축하하기 위해 사행(使行)하는 삼종형 박명원을
수행하여 청나라 고종의 피서지인 열하(熱河)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청나라 치하의 북중국과 남만주 일대를 견문하면서
그곳의 문인 명사들과의 교유(交遊)와 문물제도를 접한 결과를 소상하게 기록한 『연행일기』다. 필사본 26권 10책이며,
간본(刊本)으로는 1901년 김택영의 『연암집』과 속집 권1, 2가 있고, 1911년 광문회의 활판본, 1932년 박영철의
신활자본 『연암집』 별집 권11~15권에 전편이 수록되었다. 그리고 1956년 대만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을
영인한 것도 있다.
박지원은 영조 13년(1737)에 반남 박필균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벼슬을 싫어하여 황해도 금천(金川) 산속에서
경제, 군사, 문학을 공부하고 실학자 홍대용과 함께 자연과학에 열중한 나머지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기도 했다.
50세에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한성부판관, 안의현감 등을 역임했다. 자(字)는
중미(仲美)이고, 호는 연암(燕巖)이며, 시호는 문도공(文度公)이다.
농정(農政)에 관한 정조의 요청을 받고 『과농소초(課農小抄)』에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1편을 붙여
토지소유의 제한과 농정개혁을 강조하는 선각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문학으로는 「호질(虎叱)」, 「양반전」, 「허생전」 등 단편 한문소설을 써서 양반계급의 부패와 허실을
예리하게 풍자(諷刺)하기도 했다. 또한 노론파의 홍대용, 박제가 등과 북학파의 일원으로 선진 외국문물의
도입을 강조하는 한편, 정약용 등과 실학연구에 전력한 실학자로 유명하다.
『열하일기』 중 「일야구도하기」는 청나라 고종의 피서지인 열하를 여행하는 도중 칠흑 같은 밤에 요하를 아홉
차례나 건너면서 사람의 눈과 귀로 듣는 것들이 본 대로 듣는 대로가 모두 참이 아니라는 철학적인 깨달음에
다다른 명수필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가 보고 느낀 것이 바르고 옳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들었던 것이 참 사실이라고 믿고 또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나 박지원은 하룻밤에 요하를 아홉 번이나 건너면서 이러한 사실이 참이 아니라
거짓이라는 차원에 이르며 깊은 깨달음에 도달한다.
사실 난 34, 5년 전,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3년간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몇 학년 국어 교과서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교과서에 이 작품이 실려 있었다.
도무지 칠흑 같이 캄캄한 밤에 왜 강물을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건넜는지 그땐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선배선생님께 물어보아도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참으로 답답했다. 혹 학생 가운데 이런 질문을
해온다면 뭐라고 답변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질문을 하는 학생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러한 오랜 의문을 푼 것은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1999년이었다.
내가 베이징 어언대학 한국어과 초빙교수로 재직할 때였다. 중국대학들은 외국인 교수들을 위한 국내관광 투어
서비스로 중국의 역사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었다. 그때 북경에서 약 100㎞ 남쪽
난위엔(南苑)에 있는 주구점(周口店)동굴 박물관에서 북경원인(北京猿人)의 유골을 관람한 뒤 ‘스두(十渡)’를
건너 강가에서 소풍을 한 적이 있다. 내 관심은 이 ‘스두’라는 ‘십도(十渡)’에 쏠렸다.
박지원의 「일야구도하기」의 ‘구도(九渡)’가 연상되었기 때문이었다.
버스를 타고 십도를 가다가 강가에 이르렀는데, 중국인 교수가 여기가 ‘이두(一渡)’라 했다.
가만히 보니 배를 매어둔 강나루 대신에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졌고, 그 위를 배가 아닌 버스로
건너가도록 되어 있었다. 강물 따라 얼마를 그렇게 달리니 막다른 길에 이르렀는데 거기가 또
‘알두(二渡)’라 했다.
그렇게 우리들은 ‘류두(六渡)’에 이르러 바로 강가로 나가 바람을 쐬며 수석(壽石)도 주우면서 소풍을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회의에 젖어있던 일야구도하의 ‘구도(九渡)’의 진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세상을 살아가면서 배우고 또 배워도 끝이 없음을 실감했다.
그래서 평생교육이라는 제도도 생겼고, 묘표(墓表)에도 ‘학생(學生)’이라 새기는 것이리라.
박지원은 산골 집 앞에 흐르는 큰 냇물의 소리가 마음의 생각 따라 전혀 다른 소리로 들려온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요하를 아홉 번이나 건너면서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걸 「일야구도하기」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즉 산골 집 앞에는 큰 내가 흐르는데 여름철에 큰비가 쏟아지기라도 하면 홍수가 진다.
그 물 흐르는 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마치 전차나 말발굽 소리, 화포와 북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울렸다.
처음에는 두렵고 무서워서 견디기 어려웠지만, 해가 지날수록 오히려 귀에 익숙하니 별로 무서워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따금 그 물소리는 깊숙이 우거진 소나무에 바람 스치는 소리가 마치 퉁소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그것은 듣는 이가 청아(淸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산이 찢기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이 들리는 것은 듣는 사람이 분노(忿怒)한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라 했다.
또 뭇 개구리가 다투어 우는 것 같은 것은 듣는 이가 교만(驕慢)한 탓이며, 천둥과 우레가 다투는 듯이
들리는 것은 듣는 사람이 놀란 마음으로 들었기 때문인데, 이는 사람이 소리를 바르게 듣지 못하고
마음속에 품은 생각 따라 귀에 들리는 소리를 그렇게 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요하를 아홉 번이나 건너는데 눈으로는 볼 수 없고, 귀로만 강물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귀로 듣는 것이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몸 둘 바를 몰랐다면서 비로소 도(道)를 깨달았다고 했다.
즉 마음이 어두운 자는 눈과 귀가 누(累)가 되지 않으며, 눈과 귀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뚜렷하게 밝혀져 오히려 병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 요하를 건너는데 한 번 떨어지면 물을 땅을 삼고, 옷을 삼아서 물과 내가 한 몸이 되며
성정(性情)을 이루어서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내 귀에 무서운 강물소리가 사라지고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이나 건너는데도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고 했다. 마치 배 안은 내가 살고
있는 집 안방의 보료 에 누워있는 것처럼 편안했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심안(心眼)이라 했던가?
세상만사가 마음먹기에 따라 행, 불행이 결정되고 생사고락(生死苦樂)이 판가름 난다.
마음의 눈을 어떻게 뜨고 어떤 시각(視角)으로 보는가에 따라 인생 그 자체가 각각 다르게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세상을 보는 눈을 2분법적으로 크게 나눈다면 옵티미즘과 페시미즘, 즉 낙관주의와 비관
주의로 나눌 수 있다.
세상사 풍향(風向)따라 이리저리 시시각각 변하고 어려운데 연암 같은 관점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게 얼마나 슬기로울까? 그렇게 보고 듣고 생각하며 살아가야 조화옹(造化翁)이 우리에게 허여(許與)한
하나의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아니할까 보다.
출처:통도사 반야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