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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학습여행 제2일차 - 세 번째코스 "공묘(孔廟), 공부(孔府)"
효학과 이 규 범
2012년 9월 2일 일요일 날씨;흐림/태산엔 안개비
소호릉을 떠나 우리는 공묘(孔廟)를 찾았다.
공묘가 있는 곡부(曲阜)는 공자의 고향이라고 한다. 1982년, 중국 정부는 공자유적을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하였는데 곡부는 문물과 고적이 많아 역사문화박물관으로 불린다.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았다고 한다. 사기「주본기」에 의하면 염제(炎帝)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황제(黃帝) 헌원(軒轅) 또한 곡부에서 동쪽으로 8리(里) 정도 떨어진 수구(壽丘)에서 태어났단다. 동이족의 수령 소호(少昊)도 이곳을 활동 근거지로 하였는 바, 곡부는 은나라부터 전국시대까지 34대 800년간 각 나라의 수도로 제후국 가운데 가장 오래 지탱되었던 도시이다.
공묘는 그 규모가 22만평이나 된다. 남북 약 1㎞, 본래 초가였던 공자의 고택이 있고, 공자를 제사하는 곳이다. 공자 사후(死後) 노나라 哀公 때부터 공자를 추모하다가 당 태종(637년)이후로 당송 양대에 걸쳐 수많은 개ㆍ증축이 이루어졌는데, 몽고 침입 때 불타 없어졌다가 원나라 때 12번에 걸친 중수를 거쳐 원상태를 회복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대개 명대 건축이고 청대 개축도 일부 개축하였다고 한다. 내부의 나무들은 대개 600년의 수령을 지녔다고 하는데 향나무가 많고, 그 향나무의 향 때문에 벌레가 없다고 한다. 전체 구조는 크게 둘로 나뉘는데 앙성문(仰聖門)에서 십상비정(13碑亭)까지는 引導部分, 그 안쪽부터 대성전(大成殿), 침전까지는 제사부분으로 구분된다.
공묘입구의 만인궁장(萬仞宮牆)으로부터 대성전에 이르기까지 많은 관문이 있는데, 이는 시대별로 건축한 것으로 건축할 때마다 먼저 건축한 것을 보존하고 그 밖에다 건축을 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① 만인궁장(萬仞宮牆) : 앙성문(仰聖門), 공묘의 바깥문. 명나라 만력22년(1594) 건축.
만인궁장(萬仞宮牆) 앙성문(仰聖門)
② 금성옥진방(金聲玉振坊) : 명나 라 嘉靖17년(1538년) 건립.“공자를 집대성이라 이른다. 집대성이란 金으로 소리를 퍼뜨리고, 玉으로 거두는 것이다 (금으로 소리를 내면 옥으로 화답한다.). 금으로 소리를 퍼뜨리는 것은 조리를 시작함이요, 옥으로 거둔다는 것은 조리를 끝냄이니, 조리를 시작하는 것은 智의 일이요, 조리를 끝내는 것은 聖의 일이다.”(맹자「만장하」)
③ 영성문(欞星門) : 공묘 제일도(第一道), 명나라 永樂 13년(1415년) 건립(목조), 청나라 乾隆 19년(1754년) 철량 석주로 개조, 영성문 글자는 건륭 황제 친필. 주변에 下馬碑가 있음
※ 청나라 도광 원년(1821년) 3월 10일, 어떤 사람이 소달구지를 끌고 이곳을 지나는데, 소가 갑자기 놀라며 하마비를 훼손, 이 일로 공묘 관리책임자 처벌받고, 이 비를 다시 건립하였다. 이후로 영성문 앞애서는 “누구도 차를 몰 수 없다”는 규정이 생겼다고 한다.
④ 태화원기(太和元氣) ; 영성문 다음의 출입문
⑤ 지성묘(至聖廟)
⑥ 성시문(聖時門) : 공묘 제이도(第二道), 명대 건립. 時宜適切한 聖人. 時中之道.(맹자「만장하」)
⑦ 홍도문(弘道門) : 공묘 제삼도(第三道), 명나라 洪武 10년(11377년) 중건. 송대까지는 홍도문이 입구. 전체 면적도 지금보다 훨씬 작았음.
“人能弘道 非道弘人”(논어「위령공」)
⑧ 대중문(大中門) : 송나라 때 처음 만들었고 북송 때는 이 문이 공묘의 대문이었다고 함. 명나라 홍치 13년에 증수했으며 청나라 건륭황제는 편액을 직접 써 하사했다고 한다.
⑨ 규문각(奎文閣) : 장서루(藏書樓), 책을 보관하는 순수 목조건물. 북송대 처음 건축됐다 명대 홍치 13년(1500년) 확장. 명조시절 6.5의 강진(强震)이 발생하여 주변 모든 건축물이 무너졌지만 규문각만 온전하였다. 규문각은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모두 나무로 이어 맞춰 지었다. 벽돌로 기초를 하였다.
⑩ 대성문과 계단 용조각 : 대성전에 들어가는 마지막 문. 특히 계단에 용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이 특이했는데, 이 무늬는 황궁에도 새겨져 있다고 한다. 곧 공자에 대한 대우가 황제에 버금가는 것인데, 다만 이곳의 계단이 2단으로 되어 있는데 반하여 황제가 있는 황궁의 계단은 3단으로 되어 있어 여기보다 훨씬 높고 크다고 한다.
대성문과 계단의 용조각
⑪ 행단(杏亶) : 공자가 강학했다고 하는 곳. 송나라(1021년) 때 건립되었는데 지금의 건물은 명나라 때인 1569년에 증축된 것이라 한다.
⑫ 13비정(13碑亭) : 보통 황제가 제사를 지내고 기념비석을 건립. 당, 송, 금, 원, 명, 청조. 이 비각들 가운데 명대 홍무비각, 영락비각을 제외하고는 모두 금, 원, 청대 등 정복 왕조시절의 비각으로“사람의 마음을 정복하는 것”“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곧 천하를 얻는 것”이라 판단, 공자를 높이다 보면 한족의 마음도 얻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 제사를 지냄. 북경에 있는 공자 사당도 원래는 몽고족의 작품이라고 한다. 제일 먼저 공묘에 제사를 지낸 황제는 漢 高祖 [劉邦]이고, 가장 많이 공묘를 찾은 황제는 淸朝 乾隆帝로 9회나 찾았다고 한다.
⑬ 대성전(大成殿) : 명나라 성화19년(1483년)에 건립, 청나라 옹정3년(1725년)에 중건되었다고 함. 현판에“生民未有”라고 하여 공자를 기리고 있다.
※ 生民未有 ;“自有生民以來 未有孔子也”,“自生民以來 未有夫子也”(맹자「공손추상」)
※ 중앙에는 면류관을 쓴 공자, 동쪽에는 復聖 顔淵, 述聖 子思, 서쪽에는 宗聖 曾子, 亞聖 孟子을, 주변 동쪽엔 先賢 40명과 先儒 39명을, 서쪽엔 先賢 38명, 先儒 37명 등 모두 134명을 배향하고 있으나 荀子만 없음
※ 이 대성전은 태화전(자금성), 대묘(태산)와 함께 중국 고대 3대 건축물의 하나이며, 대성전 앞 계단은 북경 자금성의 계단이 3단계로 되어 있는 것에 비해 높이도 훨씬 낮은 2단계로 되어 있지만 공자를 높이 기리는 의미가 짙게 배어 있다. 또한 대성전의 기둥 용주(龍柱-용을 조각한 기둥)로 되어 있는데, 8각 용주[용 9마리×8면(8명)=72(공자의 72제자)]이다. 대성전의 양편 동서쪽으로는 역대 선유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건물 양무(兩廡)가 약 150m에 걸쳐 건립되어 있다.
대성전(大成殿)
생민미유(生民未有) 공자를 기리는 성어(成語)들
⑭ 침전(寢殿) : 공자의 부인 신주를 모신 곳. 대성전 뒤에 있음. 침전 좌측엔 공자의 고택(古宅-이전엔 초가였던 집으로 지금은 기와집으로 바뀜. 한고조의 제사처)
⑮ 가보비(家譜碑) : 공자의 가계도(家系圖)를 새긴 돌. 공자부터 12세 후손까지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한다. 가운데엔 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부터 鯉, 伋, 白, 求 순으로 아래로 적어 놓았고, 오른쪽엔 1世, 2世 등으로 적어 놓았다.
가보비(家譜碑)
⑯ 노벽(魯壁) : 명대 장서(藏書) 발견 장소를 기리며 건립하였음.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피해 논어, 상서, 효경 등을 숨겨둔 곳. 서한(西漢)시대에 발견
노벽(魯壁)
⑰ 공부(孔府) : 총넓이 18만평. 역대 공자 후손들이 살던 저택 겸 관공서. 송대(宋代) 寶元2년(1039년) 건립 후 여러 차례 개보수하였음. 현재의 건물은 청대(淸代)의 건축물로 전형적인 봉건귀족의 장원(莊園)으로 436개의 방을 가진 광대하고 화려한 건물. 공씨의 위세를 알려줌
※ 연성공(衍聖公) : 공자의 후손이 받았던 작호. 1936년까지 약 880년간 유지. 연성공은 북경 자금성 하마비에서도 말을 타고 갔다고 한다.
공부(孔府)의 내부
⑱ 계탐도(戒貪圖) : 공부의 벽에 그려져 있는 벽화로 모름지기 사람들이 탐욕을 경계할 것을 가르치는 그림. 갖가지 전설적인 동물의 합성으로 된 상상의 동물이 온 몸으로 탐욕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계탐도(戒貪圖)와 안내문
공림 입구 ; 왼쪽에 공림이라 쓴 자그마한 간판이 보임
⑲ 공림(孔林) : 至聖林. 공자 및 그 가족들의 묘지. 神道의 길이가 1266m인 세계 최대의 가족묘지. 면적은 약 200만평에 이른다.
※ 공림 3다(3多) ; 무덤(10만본 이상), 나무(제자들이 3년상을 치르고 심음 - 나무는 후손의 번창을 상징), 비석(3600여개)
※ 공자=至聖, 안자(顔淵)=復聖, 자사(子思)=述聖, 맹자=亞聖
※ 지성선사(至聖先師) : 공자의 호칭, 한국에서는 문선왕
※ 입구 첫 번째 표범상 ; 웃고 있다. 공자로부터 감화 영향이라고 하며, 공자를 보호하는 동물로 상징함
※ 두 번째 상상의 동물 : 하루에 1만 8천리를 달린다고 하며, 연락관, 통역관을 상징함
※ 자공수식계(子貢手植楷) : 자공이 당시 지팡이를 짚고 왔다가 6년상을 치루고 돌아가던 길에 꽂아 두었던 것이 싹을 틔고 살아났다고 함
※ 손자 자사묘 : 근國述聖公
※ 아들 孔鯉묘 : 泗水侯. 식단의 잉어는 공자 아들 이름(잉어 鯉) 때문에 홍어로 부름
공자묘 입구 子貢手植楷
손자 자사의 묘 아들 공리의 묘
공자묘의 안내판 공자의 묘 공자의 묘비“~~ 文宣王”
공자에 대한 이 개대한 유적, 그리고 문화유산. 중국이 오늘에 와서 공자를 재조명하는 대대적인 정책을 펴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며, 한편으로는 우리의 경우 위대한 학자들이 충분히 있음에도 이토록 거국적으로 재조명하는데는 인색하다는 생각이 들어 아쉽고 씁쓸한 마음 지울 수 없었다. 날씨는 비가 종일 내리면서 을씨년스러웠지만 공자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서 마음만큼은 훈훈했다.
그런데 이곳의 교통질서는 정말 실망스러웠다. 교수님의 안내에 의하면 이곳은 사람보다 차가 우선인 교통질서(?)라고 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길을 건널 때는 사람이 조심해서 눈치껏 건너야 한다고 했는데, 정말 그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단체로 곡부에서 길을 건너려고 한국에서 유치원 아이들이 하는 것처럼 손을 들어 차가 잠시 멈추어주기를 표시했는데 운전사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차를 우리 일행이 있는 곳으로 밀고 들어왔다. 하마터면 다칠 뻔 했다. 그러고보니 이곳에 온 후로 느낀 것인데, 도로는 고속도로도 개설되는 등 상당 수준 현대화 되었는데 사람들의 교통질서에 대한 의식수준은 저급했다.
공자를 만나는 것으로 오늘의 일정을 마친 우리 일행은 오늘의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4성급의 니산서원호텔. 말이 호텔이지 실은 공자문화를 연구하는 연수원이다. 하지만 시설 수준이 4성급 호텔수준이어서 니산서원호텔이라고 했다. 이곳의 정식명칭은“尼山聖源書院”. 중국의 각 대학의 유학 연구에 관계되는 학자(교수), 학생들이 이곳에서 각종 세미나 및 연수를 받는다고 한다. 금년에도 지난해에 이어 이곳에서“제2회 니산세계문명논단”이라 불리루는 세계공자사상연구가들의 국제 세미나가 이곳에서 열였었단다.
우리는 교수님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산동대학‘안병강’교수의 특별 배려로 특별히 이곳에서 숙식을 하게 되었다 한다. 실제로 시설이 매우 훌륭했다. 우리는 늦은 저녁식사와 함께 술도 마시고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내일은 다시 이곳의 공자유적을 돌아보고, 이어 맹자, 증자, 그리고 수호지의 고향 양산박을 방문하도록 되어 있다. 밤 10시, 잠자리에 들었다.
첫댓글 긴 답사여정을 한달음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해 주셨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