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는 나무, 혹은 자유의 나무?
천지창조 후,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셋째 날 생명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들 중 ’푸른 풀‘은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거의 먹이로,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모든 나무‘는 사람에게 먹을거리로 주셨다고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아마도 창조주께서는 모든 종류의 식물과 동물을 개별적으로 언급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므로, 그중 중요하고 대표적인 것만을 말씀으로 보여주셨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오늘날 중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열매 맺는 나무로는 대추야자 나무(종려나무), 올리브나무(감람나무), 포도나무를 들 수 있고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유향나무, 유칼립투스, 레바논 백향목(Cedar), 삼(杉) 나무(Cypress) 등이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 어떤 나무의 자질이 되기를 바랄까? 13세기 이란의 시인 사디 (Saadi Shirazi, 1184-1210)의 산문집 「장미의 정원(Rose of Garden, or Flower of Garden)」 에는 이러한 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8장 삶의 행동규범, 격언 81’, On Rules for Conduct in Life, Maxim 81)
“사람들이 현자에게 묻기를, 지고(至高)한 신이 드높고 울창하게 창조한 온갖 이름난 나무들 가운데, 열매를 맺지 않는 삼나무를 빼놓고는, 그 어느 나무도 ’자유의 나무‘라 부르지 않으니 그게 어찌 된 영문이나이까? 현자가 대답하기를, 나무란 저 나름의 과일과 저마다의 철이 있어서, 제철에는 싱싱하고 꽃을 피우나 철이 지나면 마르고 시드는 도다. 삼나무는 어느 상태에도 속하지 않고 항상 싱싱 하느니라. 자유로운 자들 (즉 종교적으로 독립된 자들)은 바로 이런 천성을 가지고 있느니라. 그러니 그대들도 덧없는 것들에게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칼리프들이 망한 다음에도 티그리스강은 바그다드를 뚫고 길이 흐르리라. 그대가 가진 것이 많거든 대추야자 나무처럼 아낌없이 주어라. 그러나 가진 것이 없거든 삼나무처럼 자유인이 되어라.”(강승영 옮김의 ’Walden‘ 중 ‘숲 생활의 경제학’에서 따옴, ( )안의 내용은 역자가 부연한 것임)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다중적 의미로 표현한 liberal 이란 영어단어이다. 즉 이란어 원문의 영어 번역에서, ‘아낌없이 주어라’는 뜻을 ‘be liberal like a date tree’라고 했고, ‘자유인이 되어라’라는 뜻도 ‘be liberal like the cypress’로 나타냈다. liberal 이란 영어단어에는 ‘자유인의, 아낌없이 주는, 풍부한, 충분한, 문자적 해석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신과 다른 견해에 관대하며 수용적인’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아낌없이 준다는 사실’ 자체가 풍부함에서 비롯되었으니 자신이 가진 것을 그렇게 처분함이 곧 ‘자유인의 모습’이 될 것이다.
그러면 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그의 「자유론 (On Liberty)」에서 각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에도 사회가 개인에게 강제나 통제를 가하지 못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단 하나의 예외는 개인의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해(害, harm)를 끼칠 때이다. 이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각자가 주권자가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첫째 양심의 자유, 생각과 감정의 자유, 그리고 절대적 의견과 주장의 자유, 둘째 자신의 기회를 즐기며 자기가 희망하는 것을 추구하는 자유, 셋째 어떤 목적의 모임들을 자유롭게 결성하는 결사(結社)의 자유를 누려야 함을 주장했다. 이는 모두 개인으로서 ‘해야 할’ 자유를 언급하고 있다. 결국, 그의 「자유론」은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의 탄생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41년 연두교서에서 네 가지 자유를 제시했는데, 처음 두 가지는 ‘할 수 있는 자유’ 곧 언론과 의사표시의 자유, 그리고 다음 두 가지는 ‘어떤 상태로부터의 자유’ 즉, 결핍과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했다.
이처럼 현대인이 독립된 개인으로서 자유인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전체주의 사회나 독재국가에서 개인이 누리는 자유는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것이 불행한 사실이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페르시아 시인이 노래한 ‘자유인의 속성’을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1258년 시인 사디 (Saadi)가 쓴 「장미의 정원」에는 ‘제왕을 위한 충고’의 내용이 많이 있다. 그해 1258년에 시인이 한때 공부했던 바그다드가 몽골의 침공을 당했다. 그는 고향에서 참혹한 전쟁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자유인의 속성‘이 나오는 ’제8장 삶의 행동규범‘에는 격언이 82가지, 훈계가 21가지, 이야기 2편이 수록되어있다. 혹 ’격언 81‘의 ’자유인의 속성‘이 제왕을 위한 국가경영에 관한 충고라면, 자유의 의미를 나름대로 상상하여 이렇게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은 바그다드의 침공을 보며, 제국에 요구되는 것은 국부(國富)이지만, 그보다 먼저 국가의 안전을 우선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국부란 제철을 따라 풍성한 열매를 맺으나 이내 시들고 마르는 과실나무와도 같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외부의 어떤 위험이나 환경에도 구속이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이는 항상 싱싱함을 유지하는 푸르른 삼나무와도 같이, 국민은 자유를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유가 총구에서 나온다는 혹자의 말과 같이, 국가의 안전을 외부로부터 굳건히 지키는 것이 제왕이 행해야 할 첫 번째 책무임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즉 국가가 부(富)를 이루면 아낌없이 국민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그러나 나눌 부(富)가 없다면, 최소한 국민에게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자유에 관한 생각에서,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의 존엄성을 유지하려면, 각 개인에게는 ‘할 수 있는 자유’와 ‘어떤 상태로부터 구속받지 않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자유’가 선행되어야 함을 명쾌하게 제시했다.
예수님은 자유의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셨을까? 요한복음(8장 32-36)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하셨다. ‘진리와 자유란 상관관계에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기에 자유롭게 되리라는 말은 합당치 않다고 했다. 이에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라고 깨우치셨다. 그러면서 자기가 누구인지 선언을 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증언하셨다. 진리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 사건, 사실이나 영적 현실의 실재이고 실존이다. 결국, 진리 되신 예수님만이 죄의 종이 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곧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의 죄로 파괴된 창조질서의 회복을 뜻하는 것으로, 자유의 사전적 의미인, 폭정이나 독재 지배로부터의 자유, 행동의 자유, 의무나 규정 등에서 벗어남, 동작이나 행동의 편안함, 태도나 말투의 스스럼없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경지이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동안, 우리는 자연법의 지배(Rule of Law) 아래 독립된 개인으로 한껏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자유에 관한 궁극적이며 본질적인 물음을 묻고, 가장 선한 가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