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산은 보령시 미산면과 성주면에 겹쳐 있는 높이 680m의 산으로 오서산과 함께 보령을 상징하는 명산이다. 예로부터 성인, 선인이 많이 살았다 하여 성주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고, 산림이 울창하고 단풍 등 경관이 아름다워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고 하나 겨울 성주산은 간간히 서 있는 소나무가 더욱 고고하게 보일 뿐이다.
♣성주산사
성주사는 백제 시대에 오합사(烏合寺)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절로 전사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호국사찰이었다 한다. 백제 멸망 후 폐허가 되었다가 통일 신라 시대 때 당나라에서 선종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무염대사(無染, 801~888)가 머무르면서 선종불교의 9대산문 중 하나로 위세를 떨칠만큼 번창하였다. 이에 신라말 문성왕이 성주사라고 이름을 내려주어 성주사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 시대에 임진왜란을 겪으며 쇠퇴하다가 17세기말 폐사되어 지금의 터만 남았다.
당시의 절들은 산골에 자리 잡았지만,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자리하는 가람의 형식을 택하였다. 대개 절을 다니면서 보면 제일 먼저 일주문을 두고, 이어서 금강문 또는 사천왕문, 마지막이 불이문 등으로 나열한다. 불이문을 들어서면 금당(대웅전, 극락전, 미륵전 등)을 짓고, 금당 앞에 탑, 금당 뒤에 요사채, 강당 등이 있다. 이렇게 배치를 하는 것을 가람배치라고 하는데, 가람이란 범어의 승가람마(Sangharama)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 약하여 가람이라 한다.
승가란 중을, 람마란 원의 뜻하는 것으로, 가람은 본래 많은 승려들이 한 장소에서 불도를 수행하는 장소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를 합해 ‘중원’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현재 성주사지에는 국보 제 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와 보물로 지정된 석탑 등 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는데 낭혜화상탑비는 통일신라 말기 성주사에 머무르면서 선문9산(禪門九山)의 하나인 성주산문을 일으킨 무염(無染, 801 ~ 888)을 기리기 위해 왕명을 받들어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최인연이 해서체로 써서 세운 비석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당시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무염의 성장과 출가, 중국 유학, 귀국 후 성주사를 일으키고 불법을 일으킨 과정,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 등이 기록되어 있어 신라 선종사(禪宗史)와 당시 신분제도 연구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낭혜화상 무염(無染: 800-888)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선종(禪宗)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왕자 흔(昕)의 청으로 오합사에서 선종의 9산선문 중 하나인 성주산문을 형성하였다.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내리었다.
통일신라말기에 유행한 선종(禪宗)은 어려운 불경을 모르더라도 수양을 잘하기만 하면 마음속에 있는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불교 종파이다. 그리하여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아 크게 유행하였고, 선종 불교의 큰 중심지 절이 전국에 9개가 세워졌는데, 이를 9산선문이라고 한다.
선종의 최대 목적이자 핵심인 교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즉 선종은 모든 인간이 내면에 본래 불타("본성 · 本性 · 불성 · 佛性")가 있다고 믿고 수행을 이용해 자기 내면에 있는 본래 불타를 발견하여("견성 · 見性") 열반에 도달("성불 · 成佛")을 최대로 목적한다.
오늘날의 조계종을 말하는 것으로 수행 면에서는 좌선이나 참선을 중요한 수행 방법, 즉 선종의 특징은 정진(精進: 힘써 전진)을 수단으로 삼는 것으로 경전을 읽는 것을 수행수단으로 하는 교종(敎宗)과 판이한 독자성이 있다.
전국에 비로봉이 많고 비로봉 아래에는 유명 사찰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비로봉도 무량사가 있어서 붙은 명칭으로 보이는데 비로란 불교 용어로 범어의 바이로차나(Vairocana)의 음역이며, 비로자나불(毘盧蔗那佛)의 준말이다. 원래 뜻은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법계에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것으로 ‘부처의 진신’을 일컫는 말이다.
무량사는 극락전에 봉안되어 있는 아미타여래좌상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상은 동양 최대의 규모라 한다. 그리고 매월당 김시습의 초상화와 부도탑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번 배우면 곧 익힌다 하여 이름도 시습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정치에 회의를 느껴 평생을 떠돌다시피 하다가 성종 24년에 59세의 나이로 무량사에서 일생을 마쳤다. 금오신화 등 소설뿐만 아니라 당대를 꼬집는 수많은 글들을 남겼으며, 벽에 붙어 있는 한명회의 글
청춘부사직(靑春扶社稷)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백수와강호(白壽臥江湖)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를 보고, 선뜻 붓을 들어 '부'(扶) 자를 '망'(亡)자로, '와'(臥) 자를 '오'(汚) 자로 고쳐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로 만든 일화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