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金聖灝(1898 ~ 1961)】 "광복군 총영의 선천경찰서 폭파사건 주도"
1898년 1월 14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수청면(水淸面) 학현리(鶴峴里)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김성호(金成浩)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선천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6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1919년 11월 출옥 후 만주 안투현 도산(島山, 奶頭山)으로 망명하여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에 가입하였다. 대한정의군정사 사찰과 서기로 임명되어 과장 강호연(姜浩連)과 함께 사찰과 직원 50명을 지휘하였다.
그 후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무장 투쟁에 가담하였다. 광복군총영은 1920년 7월경 콴뎬현(寬甸縣)에서 결성되었다. 처음 광복군사령부 제2영장이던 오동진(吳東振)은 콴뎬현 향로구에서 광복군사령부를 광복군총영으로 개칭하고 좀 더 효율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광복군총영은 총영장 오동진을 중심으로 군사부장 겸 참모부장에 백남준, 경리부장 이관린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국내에 천마별영과 벽파별영을 설치하였다.
광복군총영에서는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할 때 이들에게 한국인의 독립 투쟁 의지를 보여주고자 결사대를 통한 거사를 준비하였다. 결사대의 임무는 일제의 주요 기관을 폭파하고, 일제의 수괴를 암살함으로서 한국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것이었다. 결사대는 3대로 나누어 파견되었다. 제1대는 서울 지역으로, 제2대는 평양 지역으로, 제3대는 선천과 신의주 방면으로 파견되었다. 제1대 결사 대원은 김영철·김성택·김최명이며, 제2대 대원은 장덕진·박태열·문일민·우덕선·안경신이었고, 제3대 소속의 결사대원은 이학필(李學弼)·임용일(林龍日)·김응식(金應植) 등이었다. 제3대 결사대원들은 박치의(朴治毅) 등 동지를 규합하여 선천경찰서 등을 폭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때 제3대의 결사대원과 행동을 함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낌새를 알아차린 일제가 국경의 경비를 강화하면서 거사에 사용할 무기의 반입이 늦어졌기 때문에 미국 의원단은 이미 선천을 통과하여 거사의 시기를 놓쳐버렸다.
이에 결사대원들은 계획을 수정하여 1920년 9월 1일 선천군청의 지적창고(地籍倉庫)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다. 한편, 박치의는 처음의 뜻을 굽히지 않고 9월 1일 새벽 3시 이학필과 함께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현관을 파괴시키고, 「적국의 관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 등 여러 종류의 유인물 수십 매를 살포한 후 피신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끈질긴 추적으로 이를 지원하였던 20여 명의 동지와 함께 1920년 9월 7일까지 모두 체포되었다. 신성학교 옆에서 박치의라고 쓰여있는 부채가 발견되면서 지방 유지 다수가 체포된 것이다.
1921년 7월 2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5년 형이 확정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으며, 1927년 9월 25일 신병에 의한 형집행정지로 출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