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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함석헌
포로의 四半 세기
해방 후 십년이 지난 1956년 첫 머리에 나는 그때까지의 우리나라 기독교의 역사를 반성해 보는 글을 써서 사상계에 발표했던 일이 있다. 사실상 그것은 나의 첫 번으로 공개하는 글이었다. 일제 시대에 성서조선에 글을 쓴 일이 많지만 그것은 순전히 기독신자에 대해서 한 것이었고, 독자 수도 극히 한정된 것이었으므로, 일반 세상에서는 거의 아는 이가 없었다. 내가 감히 사회전체를 향해서 公言을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물론 그전에도 말로는 한 일이 적지 않게 있다. 그러나 같은 말이라도 말로 하는 것과 글로 쓰는 것이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그때 까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55년 여름 그때 사상계의 편집을 보던 안병욱님으로 부터 인생노트를 쓰라는 부탁을 받았다. 딱 달라 거절도 못했지만 쾌히 승락을 한 것도 아니었다. 가을이 다가도록 다시 채근이 없기에 안심했는데 12월에 가서 꼭 써야 한다고 독촉이 왔다. 그래서, 일기 하나 적어 두지 않는 사람이 인생 노트는 쓸 자격 도 없고, 또 아무거라도 좋다니, 그럼 나의 가장 관심 있는 것을 쓸 수밖에 없다 해서, 그 글을 쓴 것이었다. 논문으로가 아니라, 내 딴으로는 전체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내 보는 바를 내 논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원고료를 가지고 왔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이때껏 글이라면, 밥은 다른 길로 먹으면서, 公을 위해 의무로, 공헌으로 하는 것인 줄만 알았지, 글을 쓰고 값을 받는 줄은 몰랐다. 그래서, “아 이렇게 하는 것들인가?”하고 놀라면서 받기는 하면서도, 또 고맙기도 하면서도, 분개까지는 아니라도,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그 글을 내고 나서, 잘됐거나 못됐거나, 내 마음을 알아줄 줄 알았지, 거기 대해 시비를 하려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만큼 나는 어리석었다. 그랬는데 안팎에서 말썽이 크게 일어났다. 들리는 말에, 개신교 측에서는 여러 목사들이 분개하여 반박문을 내자고 하다가, 누가 “그러나 사실인 것을 어떻게 해?”해서 그만 두었다고 했고, 가톨릭에서 윤형중 신부님이 반박하기를 시작해서 여러 달 두고 논전이 벌어졌고, 한 때 사회에 화제 거리가 됐던 것을 세상이 잘 기억할 줄 안다.
그때 나는 한 마디로 우리나라 기독교를 늙어가는 증상이라고 진단했는데, 지금도 나는 그것을 고쳐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물론 밖에 나타나는 것으로는 많이 활발해진 점이 있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나는 그것을 결코 속 생명이 젊어져서 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동맥이 굳어지는데서 오는 건전치 못한 현상으로 본다. 언제 뇌일혈을 일으켜 전신 혹은 반 신 불수에 빠질런지 모른다.
그후 다시 15년이 지나갔다. 나는 이 글에서 이 25년 동안 온 것을 미루어서, 교회가 이 앞으로 제 할 사명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려고 하는데, 나더러 이름을 부치란다면 나는 이것을 포로의 四半 세기라고 하고 싶다.
구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뛰쳐나와 40년 동안을 목적지에 못 들어가고 빈들에서 헤맷다기에 굉장히 긴 세월로 알았고, 나라하기란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놀라기도 했고, 그렇게도 무지한 목곧이 민족이었나 의심도 했었는데, 막상 해방 후 우리가 일을 당하며 우리 자신을 살펴보니, 40년은 차라리 짧은 시간이요, 우리는 그들보다도 더 어리석 고 정신 빠진 민족이란 슬픈 느낌이 많다.
모세는 쓰라린 실패도 여러 번 했지만 그래도 홍해를 건넌지 일년만에 호렙산 밑에서 나라를 세웠고, 40년 동안 중간적인 종교적 군정으로 국민 훈련을 한 다음에는, 가나안 정복에 들어가기 전 요단강 이 편에서 벌써 완전히 짜인 정책과 법률을 발표했다. 우리는,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을 우리의 출애굽이란다면, 그 후 벌써 25년을 온전히 지났다. 25년이라 면 40년의 3분지 2다. 지금은 속도 시대니 지금 1년은 그때의 100년에도 더 맞먹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가나안 정복 완성까지는 몰라도 시작이라도 했어야 할 것인데, 아직도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 방향도 못잡고 있다. 그렇게 말하면 혹 반대하기를 대한민국이 이미 서 있지 않느냐 할지도 모르지만, 자유와 정의를 생명으로 여기는 국민이라면 그런 자기 아 첨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시내 광야에 그래 외국 군대와 외국 자본이 들어와 있었던가? 모세는 민중이 어리석게 반항하는 것을 당하고도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군사령관에 청하고 그 무기의 원조를 얻어 내 백성을 쏘지는 않았다. 그리고 민중이 잘못을 깨 닫고 순종하여 자진 모든 향락품을 몸에서 제해 버린 다음에야 새 종교의 교리와 제도를 발표했다. 한편에는 “도둑촌”이라 불리우리만큼 잘 사는 사람, 또 한편에는 인간 대접을 해달라 부르짓다 못해 “분신 자살”을 하는 사람을 만들어 놓고 발전이다 전진이다 하지는 않았다.
모세는 제 사명을 다한 후 40년이 다 되는 날, 꿈에 그리던 가나안을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기어코 피스카 산꼭대기에 기어올라 멀리서 그 장차 올 나라의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음을 머금고 숨이 졌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 그만한 지도 능력이 있나? 믿음이 있나? 역사의 내다봄이 있다고 할까?
모세는 갔어도 이스라엘에는 여호수아가 있었기 때문에 그 위대한 지도자를 잃고도 민중이 낙심하지 않고 한 덩어리가 되어 큰 역사적 사업에 달음질 해 나갔다. 오늘 우리 교회와 여호수아는 어디 있나? 20세기의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점령하고 낡아 가는 문명의 가나안 7족을 정복 하러 나설 자신 있는 젊은 세대를 가졌는가?
나는 눈과 양심을 가지고는 결코 “예”라고 대답할 수가 없다. 요단강이 아니라 홍해를 도로건너 애굽에 다시 기어 들어가 자진 종의 멍에를 집어 쓴 것 아닌가?
첫 가나안의 모습
우리 역사와 이스라엘 역사가 크게 다른 점은 그들은 첨부터 목적지인 가나안이 결정되어 있어 그것을 바라보면서 떠났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그들을 인도했다고 하는데 그들이 그 빛 속에 본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가나안의 모습이었다. 자도 가나안이요 깨도 가나안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와 달라 첨부터 이날껏 아무것도 보는 것이 없다. 해방이 본래 완전히 싸워 얻은 해방이 아니라, 첨에 어리둥절했던 것은 자연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4분의 1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아무 이념이 없다. 그것이 어떻게 그저 대세에 밀려 맹목적으로 임시 임시 더듬어 나가는 것이냐 하는 것은 그 국시(國是)와 교육 방침을 말하는 데 있어서 반공 밖에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 잘 증명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중 다는 못되더라도 적어도 모세는 첨부터 환히 내다 보는 것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국민이 분열하고 반항하는 아주 위태로운 자리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지도할 수 있었고, 또 그랬기 때문에 민중도 마침내 따르고야 말았다. 모세에게도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120년의 그 일생은 세 토막의 40년으로 나누인다. 첫 40년은 애굽 문화 속에서 둘째 40년은 시내 광야에서, 셋째 40년은 민중 속에서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둘째 40년이다. 보통 세상 사람으로는 누구나 마찬가지로 첫 40년에 다 됐다. 부족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보통의 애국자, 개혁자로는 참 창조적인 역사의 지도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래 위에 세웠던 공중 누각의 비참하게 부서진 꿈을 모래밭에 내버리고 40년을 빈들에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불길과 뇌성의 여호와의 산을 기어 오른 다음에야 “불이 붙어도 타지 않는” 영적인 생명에 이르렀다. 그런 다음에야 일의 나중과 처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애굽을 떠나기 전에 먼저 가나안을 보았던 것이다.
정치를 가르치는 글인 “大學” 첫 머리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물유본말, 사유종시(物有本末, 事有終始)
지소선후, 즉근도의(知所先後, 即近道矣)
이 종시(終始)라고 하는 말이 뜻이 있다. 현상계에 있는 물건에서는 밑이 먼저 있어서 끝이 나오지만, 정신계의 일은 나중 올 것이 먼저 있어서 일이 전개된다. 그러므로 종시(終始)다. 모세는 애굽을 빠져 나온 후 생각 끝에 가나안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첨부터 가나안으로 가란 명령을 받고 애굽을 떠났다. 예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죽어 가지고 무덤 속에서 무 슨 힘을 얻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 먼저 죽지 않는 생명으로 부활해 가지고 그 다음 십자가에 달렸다.
그러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는 첨부터 약속의 역사였다. 하나님과 민중이 서로 약속을 했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동안에 역사가 풀려 나왔다. 가나안은 곧 약속의 나라다. 나라가 본래 약속이다. 루소가 말하는 민약(民約)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약속이다. 약속의 나라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인 동시에 또 조상의 땅이다. 가나안은 갈대아 우르, 곧 역사의 처음부터 받은 가나안이지, 중간에 얻은, 혹은 도둑질한 땅이 아니라. 조상 없이 역사 없고, 땅 없이 조상 없다. 떠돌이는 조상이 못된다. 이스라엘 역사는 이것을 증 명하잔 표본이다.
가나안은 약속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이요, 잃었으면 찾아야 한다 (이말은 시온이즘을 옳다는 말은 아니다. 어떻게 찾는가 그 방법이 문제다) 이랬다 저랬다가 있을 수 없고, 이놈 저놈을 용납할 수 없다. 이것이 이른바 나라세움의 이념이란 것이요 민족의 정신이란 것이요, “나라를 반석 위에 놓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약속은 약속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으면서 도 또 변한다. 약속은 늘 새로해서만 변하지 않는 약속일 수 있다. 변하지 못하면 아주 큰 변이 나버린다. 죽는다. 이 세계는 변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모세는 민중을 보고 이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라 하면서도, 또, 이 약속은 너희 조상에게 하셨던 약속과는 다른 새 약속이라 했다. 이점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옛 사람에게 하신 말씀은 너희가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하면서 가르치셨다.
요단강 이쪽 저쪽
그럼 그 가나안 약속의 내용은 무엇이었나? 요단강 이쪽과 저쪽의 역사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성경에 있는 말로 하면 “일곱 족속의 정복, 이지만 이것을 역사의 의미에서 볼 때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첫째 그것은 부족사회(部族社會)에서 민족사회에 넘어가는 일이었다. 애굽에 있었을 때 이스라엘 민중은 이미 강력하게 발달한 정치 조직 밑에 있으면서도 아직 목축경제로 부족 사회의 습관을 못 면하고 있었다. 그러는 한 노예 생활을 면할 수 없었다. 거기서 벗어나 자유하려면 농업 공업의 경제를 토대로 하는 하나의 민족으로 묶이지 않고는 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그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자각시켜 묶어 세우나? 모세의 고심은 우선 여기 있었을 것이다. 아직도 종사리와 바꾸어서라도 고기 냄비를 사모하는 민중이었다. 모세가 사흘이면 갈 수 있는 가나안을 가는 데 바로 가지 않고, 일부러 험한 홍해와 시내산 길을 택해 모험의 길을 가게 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옛 노예의 굴을 영원히 버리고 다시 낡은 껍질에 되돌아가지 못하게 하잔 것이 그 요점이었다. 거기 큰 경제적 곤란이 있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자립과 단결의 정신은 그 고난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하늘만 처다 보았던 “만나 경제”가 실지로 어떤 것이었던지 지금에 알 수 없으나, 하여간 40년 동안에 경제 조직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만은 짐작할 수 있다. 이제 각 부족에 절대권을 가졌던 족장들의 권력이 약해지고 사회의 통일이 차차 강화되게 됐다.
둘째는 그것은 자연력(自然力) 숭배의 종교에서 높은 도덕적 정신적 종교로 올라가는 일 이었다. 애굽에는 이미 굳게 제도화한 자연력 숭배가 있었고 이제 들어 가려는 가나안도 애 굽 메소포타미아 두 큰문명의 접촉하는 지점에 있어서 농사, 공업이 이미 상당히 발달해 있었으므로 그와 밀접한 관계있는 자연력의 신인 바알의 숭배가 성하게 유행되고 있었다. 이 스라엘 민중이 거기 들어가면, 요샛 말로 그들은 선진국인데, 그 영향을 받을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이스라엘 민중은 선조 대대의 전통에 의해 주위의 여러 민족 보다는 정신적으로 훨씬 높은 종교의 씨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은 아직 민간신앙의 정도를 못 면했고 여호와 하나님도 아직 부족신의 형태를 못 면한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모세의 고심은 이점에 관해 가장 깊었다. 어떻게 하면 이것을 천지 만물의 주재인 영적 하나님 숭배에 까지 다듬아 올리느냐, 그리고 어떻게 그 자연력 숭배의 종교와 싸워가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이 점은 단 순히 이스라엘 역사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 볼 때에 크게 의미 있는 사실이다. 인류의 정신사에서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이스라엘 고난의 역사에서 등뼈가 되는 예언자의 계열은, 시내산에서 계시된 이 높은 종교 이상을 지키고 실현해 가려고 민족 전체가 애를 쓰는 동안에 이루어져 나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정치 이상을 생존경쟁적인데서부터 세계 구원인 데로 까지 발전 시키는 일이었다. 모세오경이 모세 한 사람의 지은 거냐 아니냐 그것은 직업적 종교가를 내놓고 역사를 하나님과 민중 사이의 약속의 과정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느 천재 한 사람의 지은 것이 아니고 전체 인류가 긴 세월을 두고 하나님과 부대끼는 동안에 얻어진 진리라 생각할 때 더욱 눈물겹게 고마운 것이다. 하나님은 내려 씨우고 강요하는 독재자가 아니고 오래 참으며 자라기를 기다리는 아버지다. 한사람이 썼거나 여럿이 엮었거나 모세오경 특히 신명기는 인류의 영원한 보배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애굽의 문명, 희랍 로마의 문명이 아무리 있었어도 신명기에 나타난 정치 이상이 없었다면 서양 문명은 없다. 고대의 놀랍던 모든 문명이 오래 못가고 망해 버린 근본 원인이 그 너무 군국주의적 국가주의적인데 있었다는 것은 많은 생각있는 사람들이 지적하는 말이다. 만일 역사가 그것만이었다면 어찌 됐을까? 신명기 전체를 통해서 흐르는 놀랍게 높은 인도주의적인 사상, 그것은 좁은 의미의 종교적인 자리에서 보다도 넓게 문화사적인, 진화론적인 입장에서 크게 평가돼야 한다.
이런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이상을 실현하잔 것이 모세와 여호수아와 광야에서 죽은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맡았던 역사의 의미였다. 그것이 어떻게 어려웠던 것은, 반란을 일으켰다 무참히 죽은 허다한 무리는 말할 것도 없고, 애굽에서 떠났던 60만 중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은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라는, 모세 자신 조차도 못들어 갔다는 표현이 잘 말해주 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렇게 엄중하단 말, 다시 말해서 역사의 의미를 깨닫기는 그렇게 어렵다는 말이다. 40년이란 곧 낡은 세대는 완전히 망했다는 말이다.
둘째 가나안
그러나 슬프게도 이 가나안 정복은 완성이 되지 못하고 말았다. 요단강을 건너가기 전에 벌써 모든 계획을 짜고 종교 교리 의식, 정치 제도 규정을 다 만들어까지 주었건만, 나팔만 불고 손 하나 대지 않고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던 그 믿음 그 용기는 얼마가 못가서 곧 내리막에 들게 됐다. 다윗 솔로몬의 영화를 말하지만 그것도 잠깐 동안이었고, 곧 민족 분열의 비극이 일어났다. 이 민족 분열의 원인도 결과도 다 토착 이방 문화인의 관계에 있다. 이렇게 볼 때 그것은 실패의 역사다.
그러나 이 의미에서도 이스라엘 역사는 모든 역사의 표본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엄정한 의미에서 실패의 사람이 듯이, 모든 역사는 곧 실패의 역사기 때문이다. 역사의 이상은 실패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정의는 짓밟힘으로만 살아나고, 자유의 참 맛은 노예만이 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만일 요단강 이 편에서 짰던 프로그램대로 진행이 됐더라면 예언자란 것은 없었을 것이고, 예언자가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을 것이고, 기독교자 아니라면 이스라엘 역사의 의미는 알 수가 없어진다. 끊어진 등뼈의 토막토막이 잇달아 있어서만 그 속에 등골이 있을 수 있고, 그 등골이 있어서 사람의 안팎 모든 활동이 이루어진다. 그와 같이 부서진 이스라엘 민족사에 계속해서 나오는 예언자를 통해서 인류구원의 역사관은 뻗어 나간다. 곧 역사의 내면화(內面化) 운동이다.
내면화 운동은 깊이 말한다면 생각하는 인간이 진화의 무대에 나왔을 때 이미 시작됐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랜 동안 천천히 또 파란 많은 걸음을 걸어 왔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에 있어서 그것은 큰 진보를 했다 할 것인데 그 원인은 그들의 역사가 유달리 고난의 역사 실패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일이 뜻대로 돼서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가던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그러한 운동의 결과가 예수였다. 그가 날 때 메시아의 소망은 거의 다 끊어졌다. 가나안은, 눈과 양심이 있는 한, 하나의 깨여진 꿈이었다. 예수는 전혀 새로운 역사의 해석을 내렸다. 낡아 빠진 약속을 형식적으로 반복할수록 그것은 하나의 자기 속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가나안을 완전히 영적인 것으로 승화시켜 버렸다. 그러함에 따라 새 차원의 세계가 열렸다. 그는 그것을 하늘나라라 했고, 그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보면 이제 아브라함에게서 난 것이 그 자손이 아니라 그의 믿음의 계승하는 것이 그 자손이다. 그러함에 따라 이스라엘은 밖으로는 망하면서 안으로 세계적으로 자랐다. 그러므로 이제 할례의 필요가 없다. 육체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야말로 할례기 때문이다. 이제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 제사장이 아니라 참 제사장은 멜기세덱처럼 족보와는 관계없이 영적으로 임명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의, 논리라면 우리는 이런 단안을 내릴 수 있다. 즉 역사는 이 앞으로도 다시금 더 내면화해야 한다. 더 승화, 더 영화돼야 한다. 가나안은 또 다시 더 새롭게 파악돼 야 한다.
20세기 가나안
역사를 보는데 두 가지 서로 반대 되는 생각이 있다. 하나는 역사는 되풀이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되풀이는 절대 없다는 것이다. 둘이 다 옳은 말이면서 또 잘못된 말이다. 역사는 되풀이 하면서 영원히 새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요, 영원히 새로우면서 되풀이 되풀이 증험이 되는 것이다. 시대적으로 볼 때 옛날에는 거의 되풀이 한다는 사관이 지배적이었고 지금은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많다. 그것은 옛날은 문명의 발달이 느려서 사회가 가만 있는 사회였기 때문이고 지금은 문명의 걸음이 빨라서 사회가 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사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두면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었다. 되풀이 하는 것 같아도 되풀이 아닌 새 것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에 온 것이고, 또 반대로 오늘은 그대로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자꾸 새 것만인 것 같지만, 새 것이 새 것으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 속에 있기 때문이다. 마치 비유한다면 수레와 그 바퀴의 관계와 같다. 바퀴는 늘 제 바퀴를 도는데, 수레는 앞으로 나간다. 혹은 나사못과 같다 할수도 있다. 나사못 대가리를 돌리면 돌릴수록 못 뿌리는 깊이 들어간다.
이 두 서로 반대되는 운동을 종합해 말한다면 역사는 나선운동(螺線運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법칙으로 파악하려면 가로 짤라 보아야 하기 때문에 잘라 놓으면 그것은 하나의 어긋난 고리가 되고 만다. 가락지처럼 완전한 고리가 되면 되풀이 밖에 할 것 없는데 이것은 어긋난 고리기 때문에 제 자리에 돌아 온듯 하면서도 돌아온 것이 아니고 위로 올라가게 혹은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된다. 이것을 이름을 붙인다면 역사의 세 번 변하는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가 인간의 생각 속에 붙잡히는 때에 맨 첨에는 개인은 없는 전체만인 부족 사회가 있었다. 다음에 개인의 자각이 일어나 자기를 전체에서 해방시켰다. 그러나 개인 없 는 전체가 있을 수 없듯이 전체 없는 개인도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각은 다시 전체로 돌아가게 됐다. 그러나 역사가 거꾸로 되돌아가는 법은 없다. 이미 발견한 개인을 잊을 수는 없다. 그래서 전체지만 이것은 개인을 모르는 옛날의 전체가 아니라, 개인이 자유하는 인격으로 완전히 깨어 자진해서 하는 협동체에 의해서 되는 전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단 높은 전체다. 지금 우리는 바로 이 단계에 와 있다. 최근 3천년 동안 인간은 돌이켜 묻기를 허락지 않는 전체주의에 반항해서 많은 값을 내고 자기 발견을 하여 개인의 위치를 올렸다.
그러나 그 발달한 개인은 인간의 절반 밖에 모르는 합리주의로 전체를 배척했다. 이제야 겨우 그것이 잘못임을 깨닫고 인간은 다시 전체, 곧 보다 높은 정신적인 전체를 찾는다.
역사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이 점은 절대로 잊어서는 아니된다. 우리는 오늘의 가나안을 이러한 생각 밑에서 찾아야 한다. 첫째 팔레스틴의 가나안도 실패 했지만 둘째 번 어거스틴 식으로 그려진 가나안도 실패돼야 했다. 오늘의 가나안은 어디 있나?
칸트가 철학을 하늘로부터 땅위에 끌어 내렸다는 말이 있지만 오늘의 종교는 가나안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 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늘 위엣 것만을 말하다가 비로소 저 자신에게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근대의 철학이 퇴보가 아니라 인간이 자란데서 오는 참 의미의 진보였다면, 종교가 하늘 종교에서 땅 종교로 내려오는 것도 퇴보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설혹 거기 잘못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역사적인 의미로서는, 인간의 성장에서 오는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오늘의 세속화 주장이 다 옳다는 말 아니다 잘못이 많이 있을 수도 있다. 설혹 전체 이론이 다 틀렸다 하더라도 역사를 이해하려 할 때는 거기다가 한 자리를 허락 아니 하고는 아니 된단 말이다. 유다의 행동은 잘못이지만 그러나 십자가를 이루기 위해 그것은 없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체에서 보면 헤매임도 올라가는 운동의 한 토막이다. 이렇게 생각해서만 세계는 구원된다. 옛날엔 몰라도 적어도 오늘날에는 그렇다. 그러지 않고는 전체는 죽은 것이지 살아 날 수가 없다. 지옥은 있겠지만 지옥에 갈 사람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하늘 나라는 아마 지옥을 사치품으로 두는 곳일 것이다.
종교가 첨으로 사람의 살림에 나타났을 때 그때는 안팎의 구별이 없었다. 정치와 종교가 하나였다. 그러므로 그 종교는 땅의 종교였다. 하나님은 “저 천당 먼 곳”에 있지 않고 그 부족 속에 같이 살았다. 그후 문명이 발달함을 따라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었다. 이것도 타락이 아니라 자람으로 된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종교는 종교적이기 위하여 내면화를 힘썼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일은 곡식과 가라지가 한데 서 있는 밭 같은 것이다. 선이 자랄수록 악도 자란다. 이리하여 땅에서 떠난 저 세상의 종교는 번성하게 됐다. 세속화 소리는 이에 대한 반동으로 나왔다. 이 의미에서 종교는 또 다시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 그러나 그 땅은 옛날의 부족와야의 어머니 노릇을 하던 땅일 수는 없다. 이것은 땅이지만 하늘에 올라가 있는 땅, 혹은 땅에 내려와 있는 하늘이다. 요점은 하늘 땅이 떨어진 것일 수 없단 말이다. 물론 구별 없는 혼돈이어서는 아니 되지. 하지만 또 서로 배척하는 대립일수도 없다. 한때 우리가 어릴 때 그것은 진리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자랐다. 혼돈은 아니지만 하늘 속에 땅을 보고 땅 속에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면 아니 된다. 병과 죽음을 사랑함이 없이 삶을 사랑할 수 없다. 어릴 때는 복종과 숭배가 덕이지만 자란 후에는 이해와 협동이 덕이 된다.
어느 종교나 제 출애굽과 제 가나안을 가진다. 20세기의 애굽은 무엇일까? 그것이 국가주의인 것은 토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공산주의를 구별할 것 없이 신격화한 자연력을 숭배하는 소수의 지배자들이 조직적으로 폭력을 써서 전체 민중을 압박 착취하는 데서는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 현대판 바로의 혹독한 손아귀에서 인간을 건지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세계 1차 대전, 2차 대전이 아마 그 홍해 바다요, 호랩산일 것이다.
그럼 현대 교회는 어디다가 그 가나안을 가졌나? 국가주의에서 탈출하면 어디로 가려나? 무슨 힘으로 열 가지 권능을 베풀어 폭력 숭배를 꺾으려나? 이 공업주의 기술주의 향락주의의 문명을 청산하고 새 살림에 이르는 동안까지의 광야의 혹독한 시련을 인도해 줄 구름기둥 불기둥을 어디서 발견할 것인가?
이점에 현대 교회 무력의 원인이 있다. 모세도 첨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가자고 부르짖었고 예수도 나설 때부터 분명이 “하늘나라 가깝다”고 외쳤는데, 지금은 아무 도 분명히 확신 있게 장차 올 나라를 주장하는 사람이 없다. 2차 대전후 세계적으로 교회의 운동이 매우 활발은 해졌으나 아직 초점은 아니 잡힌 듯하다.
그러나 또 여기가 중요한 점이다. 어느 때도 종교는 미래에 대한 기대를 주면서 기대는 사실 어긋난다. 그래서 모세도 첨에는 받아 드린 사람이 적었고 예수의 경우는 그보다도 더했다. 이번은 아마 또 그보다도 더 어긋나지 않을까? 거기가 바로 20세기의 출애굽, 가나안이 있는 곳 아닐까?
아마 개인적인 메시아나 교조로는 되지 않을 것 아닐까? 인격의 개념이 이미 개인 속에는 갇혀 있을 수 없이 된 때라 그보다도 조직이 이렇게 발달한 이때에는, 어떤 민중 운동 식 으로 될는지도 모른다. 그리나 그것도 16세기 종교개혁 식의 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종교, 하나님, 하는 그 개념조차 분명치 않으리만큼 인간의 생각은 폭넓게 복잡한 교차로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국가주의가 핵 과학, 전문화한 기술, 우주 개발, 인구 문제로 인해 막다른 골목에 들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암시적인 현상이다. 국가주의는 그 자체를 위해 이런 길로 나갈 수 밖에 이런데, 바로 그것 때문에 끝점에 이르렀다.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앞을 내다볼 때 이런 말만은 할 수 있지 않을까? 곧, 생명은 점점 더 자신을 내면화 시키는 방 향으로 나갈 것이다. 그 날, 그 때, 그 곳은, 예수 말씀대로,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이 자기 권능 속에 두신 것일 것이다. 그러나 동이 터올 때 그 불그레한 동방은 지적할 수가 있다. 오늘의 구름기둥 불기둥인 진실 된 종교적 철학적인 혼과 과학적인 머리 위에 반사되는 빛에 의하면 우리는 그 내면화의 경향을 단정할 수 있다. 사실 그것이 거의 유일의 홍해의 길이다.
안나가는 한국 교회
한국 기독교에 참 생명이 살아 있었다면 우리야말로 20세기 가나안의 탐색 부대가 됐어야 하는 것이었다. 고난의 역사를 영광의 역사로 살리는 것은 그길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못했다. 대체로 볼 때 보수주의다. 열심 있다는 말이 있지만 그 열심은 어리석은 열심이다. 그들은 20세기 안에서 계몽주의(啓蒙主義) 세례도 못 받은 17세기를 살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환상을 하나도 본 것이 없다. 그것으로 역사적 사명을 다할 이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해방과 6.25라는 중대한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도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새로 나라를 세우는 데 높은 이념을 보여 준 것이 없고, 공산주의 와 만나서 기독교의 믿음과 사랑을 발휘할 때인데 겁내고 미워하기만 했지 이긴 것이 없다. 참혹한 전쟁을 겪으면서도 민족적 회개의 운동도, 깊은 역사적 의미 파악의 노력도 보여 준 것이 없었으며 전쟁이 지나간 후도 새 건설의 설계도를 내는 것도 없다. 자유당 10년에 반항 하나 한 것 없기 때문에 4.19 역사적 운동에 아무 참여를 못했고 5.16에 대해서도 정당한 책망 하나 못했다. 한일 회담 때는 첨에는 상당히 강한 투쟁을 했으나 오래 가지 못했고, 명분 없는 월남 전쟁에 대해서는 사실상 찬성을 한 셈이니 이제 와서 무슨 소감이 있는가? 없는가? 이때껏 남의 나라의 침략 속에 사는데 평화 운동 하나 일으킨 것이 없지, 젊은이들이 그렇게 고민하는데 강제 징병에 대한 양심적 거부 하나 지도해 준 것이 없지, 그리고 오직 하나 생긴 것이 있 다면 교회 재벌이다.
사실 언제나 타락은 황금에서 온다. 광야 교회는 금송아지 숭배로 타락이 됐다. 다른 사람도 아닌 믿고 택해 세운 아론, 미리암이 앞장을 서서 그렇게 했다는 데 더 슬픔이 있다. 속담에「제 갗에서 좀인 난다」는 말이 있다. 제 생명을 먹어 치우는 독한 벌레가 제 살 속에서 난다는 말이다. 이야말로 제 갗의 좀이었다. 기독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두 벌 옷이 있는 사람은 하나를 남을 주라는 가르침을 그대로 지키고 아무것도 준비한 것 없이 지팡이에 신만 들 매고 전도를 나설 때 기독교는 살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돈을 겸해 섬기지 못한다는 명령을 잊었다기보다도 약은 생각에 우습게 여기고 교황이란 것이 황금과 보석의 관을 쓰고 보좌에 앉을 때 교회는 죄악의 소굴이 돼 버렸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전쟁으로 인해 불쌍해진 사람 구제해주라는 물자와 종교弗이 교회 재벌의 밑천이 됐으니 거기서 세계 구원의 비전을 찾아보라는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황금이 무엇인가? 이미 있는 질서 제도, 권력의 심볼이다. 한국 가톨릭 200년, 개신교 100년 역사에 한 가지 환한 사실은 올 때는 밑층 사회의 불쌍한 민중의 종교였던 기독교가 지금은 중류계급의 종교가 돼 버렸다는 것이다. 중류에는 중류의식(中流意識)이 있다. 언젠지 모르게 현상 유지를 원하는 기풍이 교회 안을 체워 버렸고 그러니 가나안의 소망이 “안나가”의 현상유지로 타락해 버렸다. 이상하게도 “가나안”이 거꾸러지면 “안나가”가 되지 않나? 오늘 한국 교회의 특징을 말한다면 “안나가”는 부대다. 그들은 사회악과 겨루는 역사의 싸움에서 뒤를 빼고 송아지 앞에서 절을 하고 둘러 앉아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을 예배라고 한다. 그러니 하나님의 발가락인 아래층 사회가 교회에 빠져나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빠져 나간 것이 아니라 내 쫓은 것이다.
이점은 소위 새로 일어난 교파라는 데서도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신흥 종교란 것은 지금 있는 제도에 불만해 하는 개혁 의식의 발로라 할 것인데 해방 전후에 일어난 모든 새 종파를 보면 이상하게도 공통되는 특색이 있다. 그 첫째는 사교적(邪敎的)인 성격이다. 그들이 다 꼭 같이 소위 “혹세무민(惑世誣民)”식의 교리와 선전 방법을 가진다. 그중 가장 크게 발전했다는 세 파에 있어서도 그렇다. 둘째는 그들이 다 언제나 지배 세력과 맞붙어 먹는다. 정국이 세 번 바꿨는데 그들은 언제나 집권자들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이것은 그들이 어떻게 사회의식 역사의식이 부족한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사상의 빈곤이다. 무식이다. 전시대적인 착취의식이다.
그러니 이 25년의 역사는 뛰쳐나왔던 애굽을 다시 들어가 그 멍에를 쓴 것이다. 그것도 싸우다 잡혀간 것이 아니라, 옛날 노예 시대에 먹던 고기 냄비 생각에 이끌려 다시 제 발로 기어들어 간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일본이 어디 군대 가지고 쳐들어 왔던가? 이쪽에서 옛날 상전님 제발 와서 살려주십시사 해서 온 것이지. 그럼, 싸우다 불행히도 넘어져 끌려 간 포로가 아니고, 제 발로 기어 들어가서 된 노예라면 천대 학대가 전날 보다 더할 것은 분명한 일이다. 누구의 생각이 옳은가 두고 봐야지!
씨알의소리 1971. 8월 3호
저작집30; 16-167
전집20; 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