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생활하는 중요한 삶의 자리 가운데 하나가 교회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교인들이 교회가 무엇인지 잘 모른 채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찰스 콜슨 목사의 책 <러빙 갓>에 있는 교회에 대한 설명입니다. 성경을 통해 교회를 볼 때, 교회는 세상에서 우리가 흔히 보게 되는‘조직’이 아닌 ‘유기체’입니다. 조직은 하나의 목적을 갖고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 사람들을 세우고, 재정을 조달해서 운영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세상의 조직과 다른 유기적인 생명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은‘기념물’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운동체’입니다.
그것은 지역안에 있는 여러 공동체중의 하나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그것은 세상 질서에 속한 집단이 아닌 주변 사회의 가치들과 날카롭게 충돌하는 새로운 가치를 지닌 새로운 질서입니다. 교회는 누룩처럼 주변에 있는 덩어리를 그 내부로부터 변화시킴으로써 전체를 뒤흔듭니다. 소금처럼 자신이 들어가 녹아 버린 곳에 맛을 내고 그곳을 보존시킵니다.
그러나 누룩이 많은 입자들로 구성되고 소금이 무수한 결정체로 이루어져 있듯이, 교회도 많은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주셨고, 그리스도인으로 홀로 살지 않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혼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2세기의 기독교변증가인 아리스티데스가 로마 황제 하드리안에게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그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그들은 과부를 돕고 고아들을 학대하는 자의 손에서 구해 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있는 것들을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나그네를 보면 집으로 초대하여 마치 친형제라도 되는 것처럼 반가워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보통 의미의 형제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성령으로 한 형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아리스티데스의 말에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담겨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증거하는 공동체입니다. 유기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교인들이 지체가 된 생명의 몸이라는 뜻입니다. 살아있기에 따뜻하고, 생명의 움직임을 갖고 있으며, 세상을 향해서 우리가 가진 생명력을 나누고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라.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안에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천국을 교회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완벽한 천국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행하면 됩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서로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어른들이 사랑의 표현에 서툽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쉽게 못하고, 사랑의 표현도 서툴러서 퉁명스러울 때가 더 많습니다. 사랑을 표현하도록 교육을 받는 서구의 아이들과 달리 우리 아이들도 부모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병적인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을 표현해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자기들이 사랑받는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어른들도 그렇지 않을까요? 결혼생활이 파국으로 치닫던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남편은 좀더 상냥하고 부드러운 여성을 만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고, 아내는 좀 더 책임감이 강하고 활동적인 남자를 만나지 못한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 부부의 얼글이 밝아졌습니다. 이웃 주민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그러자 부부가 말했습니다. “우리 부부를 아시는 분이 우리에게 충고해주신대로 하고 잇습니다. 우리 부부는 서로를 향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고백을 한 후부터 서로에게 완벽한 기대나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게 됐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한답니다.”
특별한 방법이 아닙니다. 사랑을 먼저 표현하고 서로를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한 것이 화목한 관계를 가져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에게 소개하는 요한일서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일을 통해서 아브라함을 세상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누는 통로로 사용하시려고 계획하셨습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채고 하란으로 도망치는 야곱을 먼저 찾아와 주신 것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얍복강에서 형을 만나면 죽을까봐 두려워 떨던 야곱을 먼저 찾아와 주신 것도 하나님입니다.
죄를 짓고도 그 죄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범죄인지 모르던 다윗을 나단을 통해 먼저 찾아와 주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수많은 병자들이 연못 바닥만 보고 있을 때 그 병자들중 가장 불쌍한 38년된 병자를 먼저 찾아오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교회안에서 훈련해야 합니다. 먼저 찾아가주는 사랑!
올초 우리는 교회의 지체들에게 한걸음더 가까이 가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과연 지난 9개월간 거리를 좁혀왔습니까? 만날 때마다 위로와 격려의 말로, 안부를 묻는 인사로, 그 사람은 모르지만 그의 가정과 하는 일, 자녀들을 축복하는 기도로, SNS를 통해서 성경구절을 교환하고 기도의 제목을 나누면서 우리는 교회의 지체들에게 우리의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런 우리들의 모습이 교회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입니다. 교회안에서 당신이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두 번째는 나보다 우리를 앞세워야 합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경영인이 한 사람 있습니다. 세계적인 대기업 제너럴 일렉트릭(GE)사의 최고경영자로 20년간이나 재직했던 잭 웰치입니다. 그가 현직에서 물러나면서 쓴 자서전 『끝없는 도전과 용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1인칭을 쓰는 게 정말 싫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이룬 거의 모든 것들은 다른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책을 쓸 때에는 누구나 ‘우리’를 의미할 때조차 어쩔 수 없이 ‘나’라고 쓰게끔 강요받게 됩니다. 부디 독자들은 이 책에서 ‘나’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그것이 내 동료와 친구들을 함께 의미하는 것임을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좋은 리더는 내가 아닌 우리를 앞세우는 사람입니다. 혼자의 성공이 아닌 함께 하는 성공을 더 가치있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는 참된 지도자가 없습니다. 한국사회의 이 뿌리깊은 병폐는 교육에서 왔습니다. 우리의 교육은 경쟁에서 이긴 사람을 위한 교육입니다. 모든 학생들을 위한 교육이 아닌 것입니다. 아이들은 사회에 나와서 실패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이미 실패를 경험하고 상처를 받습니다. 더구나 그 경쟁이 공정하지 않을 때 아이들은 실패의 상처만이 아니라 세상의 불공정에 대한 분노를 품게 됩니다. 독일 같은 선진국에서도 교사에게 강한 교권을 부여합니다.
학부모가 담임교사에게 직접 연락을 하지 못하게 하고, 학교 교직원을 통해서 연락하도록 합니다. 이것 하나만 바꿔도 선생님들의 극단적인 선택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생 인권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것도 교육의 일환입니다. 그리고 인권의 중요성을 가르치면 동시에 반드시 그에 따르는 책임도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들도 아이들이 혼자 세상을 살수 없으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양보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를 배우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권리는 있는데 책임이 없는 인권은 혼란과 무질서를 부추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대로 가면 안된다는데 많은 국민들이 공감합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문제를 풀어가야할지 모른다고들 말합니다. 제 개인적인 소견에 교육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오랜 시간이 걸려도 그렇게 해야 나라의 근간이 바로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정치적인 혼란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너”가 없는 “나만”존재하는 대한민국이 될까봐 두렵습니다. 우리가 사라진 대한민국이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목회하는 교회의 목사님들이 교단을 초월해서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그 모임에는 각 교회 성도들이 찍은 사진으로 사진전을 하는데 심사를 해주시는 폴 손 선생님이 함께 하셨답니다. 그분의 해박한 지식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진에 대해서, 그리고 그 분이 섬기시는 교회, 기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이 하셨던 이야기 가운데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교회를 영어로 church라고 합니다. 그 단어에서 모음은 ‘u’ 하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u’가 없으면 단어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단어를 설명하면서 그분은 교회라고 하는 곳은 ‘u’ 즉, 당신이 있어야 성립이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꾸만 교회에 ‘I’ 즉 나를 부각시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없으면 안되는 곳이 교회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church라는 단어에 ‘I’가 들어가면 단어 자체가 안되고 'u'가 들어가야 교회라는 단어가 성립되는 것처럼 교회도 나보다는 당신이 있어야 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답고 교회로서의 올바른 모습을 가지려면 나보다는 당신을 더 많이 생각하고 강조해야 합니다. 당신이 꼭 있어야 되는 곳이 바로 교회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빌2:3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은 자기보다 다윗이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사람은 왕위 계승자로서 다투는 대신 형제보다 더 서로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수 있는 지식과 경험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자신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공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판단은 정의롭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자신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를 이루는 방법입니다. 판단과 정죄 대신 너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의 ‘토비아스의 우물’ 이야기입니다. 사막 한 가운데 자리잡은 마을 사람들은 물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물의 주인 토비아스가 물을 거저 주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토비아스는 아들과 함께 먼 길을 떠나며 하인에게 ‘누구에게든지 물을 거저 주라’며 우물 관리를 맡겼습니다.
하인은 주인의 말대로 모든 사람에게 물을 주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에게만 물을 주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자기에게 잘 보이는 사람에게만 물을 주었습니다. 주민들은 하인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물가에 주인의 아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사람을 차별하여 물을 준 하인을 꾸짖고 주민들에게 예전처럼 마음껏 물을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주민들은 주인의 아들에게 사람을 차별한 악행을 저지른 하인에게 물을 주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하인에게도 물을 주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라며 종을 용서했습니다.
우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인마저도 품은 나라입니다. 그가 행한 악한 일에 대한 심판 대신 하나님은 용서를 통한 하인의 새로운 삶을 택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실천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먼저 공동체를 생각하며 ‘너’를 품는 예신 가족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