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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 간행
남한산성 < 만해기념관>은 남문주차장 안쪽 골목길로 들어가 외진 곳에 있다. 고교시절부터 만해에 심취한 전보삼(신구대 교수) 관장은 1968년 무렵부터 수집에 나서 만해 관련 자료 및 유물 600여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1998년 만해기념관을 설립했다. 기념관에는 일제 강점기인 1926년 5월 20일 발간된 초판본(회동서관, 168쪽)과 1934년 7월 30일 간행된 재판본(한성도서㈜)을 비롯한 지금까지 발간된 님의 침묵 130여개 판본이 소장돼 있다. 전시실에는 야송 이원자 화백이 그린, 백담사에서 님의 침묵의 산실 오세암에 이르는 30리 풍광을 담은 무강오세암도(无疆五歲庵圖)와 20편의 시.그림을 엮은 시화(詩畵)가 눈길을 끈다. 만해의 전신좌상을 석채화법으로 그린 만해당 용운대선사 진영(석명룡 그림)도 흥미롭다.
1926년 회동서관에서 초판을, 1934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재판을 펴냈다. 대표시 〈님의 침묵〉을 비롯해 〈독자에게〉·〈최초의 임〉·〈잠없는 꿈〉·〈당신을 보았습니다〉 등 90편의 시가 실려 있다. 대부분 불교적 비유와 고도의 상징적 수법으로 쓴 서정시들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민족에 대한 애정이 짙게 나타나 있다. 특히 시 〈님의 침묵〉은 빼앗긴 땅과 민족을 되찾으려는 끈질긴 의지를 담고 있으며, 은유와 역설을 뛰어나게 구사하여 사상성과 예술성을 조화시킨 시이다
[1977년] 파리-이스탄불간 오리엔트 특급열차 마지막 운행
← 오리엔트특급열차 최종편이 파리에서 출발 준비를 하고 있다.
1977년 5월 20일 오전 1시 13분에 `꿈의 대륙횡단 열차`라고 불리우던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마지막 운행이 있었다. 파리의 리옹역을 출발하여 6개국을 횡단, 터키 이스탄불을 종착역으로 하는 마지막 운행 열차였다. 리옹에서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마지막 운행을 지켜보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오리엔트 특급열차는 파리와 이스탄불을 잇는 유럽 최초의 대륙횡단 특급열차로 1883년 첫 기적을 울렸다. 특히 1889년에 운행이 시작된 직행 오리엔트 특급열차는 런던-파리-로잔느-밀라노-베오그라드-소피아-이스탄불 7개국 3500km을 횡단하며 1920~1930년대 철도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그후 2차대전에 비행기가 선보이면서 철도운행이 쇠퇴하기 시작,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운영하는 기업의 경영난 등을 이유로 1976년 9월 회의를 거쳐 운행 중지를 결정했다. 이로써 94년간의 역사를 마감했다.
[1927년] 린드버그, 대서양 횡단 비행
1927년 5월 20일 미국의 찰스 A. 린드버그가 최초로 뉴욕과 파리 간 대서양 횡단 무착륙단독비행에 도전했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항공기가 실용화면서 대서양 횡단비행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1919년 5월 글렌 커티스가 개발한 대형 비행정 NC-4가 미국에서 뉴펀들랜드, 아조레스 제도, 포르투갈을 경유해 영국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1927년 5월 20~21일에 린드버그는 단엽기 '스피리트 오브 세인트루이스'(Spirit of St. Louis)를 타고 약 5,800㎞를 33시간 39분 동안 비행하는 데 성공해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이 비행기는 배에 실려 유럽에서 미국으로 되돌아왔으며, 린드버그는 항공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이 비행기로 아메리카 대륙 전역을 비행한 후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기증했다./브리태니커
[1932년] 아멜리아 에어하트 여성 최초로 대서양 논스톱 횡단비행에 성공
1897. 7. 24 미국 캔자스 애치슨~1937. 7. 2(?) 태평양 중부 하울랜드 섬 근처에서 실종.
미국의 여성비행가 아멜리아 에어하트(Earhart, Amelia, 1897~1937)가 이날 여성최초로 뉴펀들랜드에서 아일랜드까지 대서양을 논스톱 횡단비행했다. 거센 바람과 연료탱크가 새는 등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는 3,241Km를 13시간 30분만에 돌파했다. 미국은 열광했고 전세계가 들끓었다. 에어하트는 그로부터 석달이 지나 로스엔젤레스에서 뉴욕까지 미국 대륙을 단독 횡단했고 1년뒤에는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까지 논스톱 비행했다. 1897년 미국 캔자스주 애치슨에서 태어난 그는 1차대전이 끝난 뒤 캐나다 토론토에서 곡예비행을 구경하고 비행기에 매료됐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때 조종을 배운 뒤 몇 년 안되어 비행기록 500시간을 돌파할 정도로 비행에 열심이었다. 1928년 6월17-18일 조종사와 기관사 두사람과 함께 3발 단엽기로 대서양을 횡단해 유명해졌지만 자신이 조종하지 못한 점을 늘 아쉬워하다 이날 결행했다./조선
[1932] transatlantic solo flight
← Lockheed Vega 5b flown by Amelia Earhart as seen on display at the National Air and Space Museum
At the age of 34, on the morning of 20 May 1932 Earhart set off from Harbour Grace, Newfoundland with the latest copy of a local newspaper (the dated copy was intended to confirm the date of the flight). She intended to fly to Paris in her single engine Lockheed Vega 5b to emulate Charles Lindbergh's solo flight. Her technical advisor for the flight was famed Norwegian American aviator Bernt Balchen who helped prepare her aircraft. He also played the role of "decoy" for the press as he was ostensibly preparing Earhart's Vega for his own Arctic flight. After a flight lasting 14 hours, 56 minutes during which she contended with strong northerly winds, icy conditions and mechanical problems, Earhart landed in a pasture at Culmore, north of Derry, Northern Ireland. When a farm hand asked, "Have you flown far?" Amelia replied, "From America." The site now is the home of a small museum, the Amelia Earhart Centre.
[1875년] 미터 조약 조인
← 자, 유척,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1875년 5월 20일 파리에서 국제도량형국 설립에 합의해 '미터 조약'이 조인되었다.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변하지 않는 자연물리적 단위에 기초한 체계를 만들기 위해 1791년부터 조사·연구를 시작했다. 길이의 기준을 파리를 통과하는 경선상에서 지구 원주의 1/4의 1/10,000,000로 삼고, 6년간의 조사 끝에 '미터'('측정'을 뜻하는 그리스어)라는 새로운 단위가 39.37008인치(in)임을 밝혀냈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1799년 길이의 단위를 미터(m), 질량의 단위를 킬로그램(㎏)으로 전환했으며, 이후 대부분의 국가에서 미터법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875년 설립된 국제도량형국에서는 국제표준원기를 보관하고 도량형학 연구를 수행했다. 센티미터-그램-초(CGS)와 미터-킬로그램-초(MKS) 등의 체계는 국제단위계가 수립될 때까지 사용되던 주된 미터법 체계들이다.
* 국제단위계[International System of Units]
(프)Le Systéme International d'unités. SI 단위계라고도 함.
미터법의 단위계에서 파생하여 이를 확장시킨 국제적인 십진도량형 체계.
이 체계는 1960년 제11차 도량형총회(General Conference on Weights and Measures)에서 채택되어 국제적으로 SI라는 약어로 통일되었다.
19~20세기에 들어 과학기술이 빠르게 발전함에 따라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전공분야에서 실제적인 용도에 맞도록 임시변통으로 단위계를 만들어 사용하게 되어 몇몇 중복된 측정단위 체계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미터-킬로그램-초(MKS) 체계라는 초기의 국제체계가 마련되었다. 1937년 국제도량형위원회는 전기에 관한 기본단위를 정의하면서 새로운 3가지 기본단위를 추가하였다. 이 기본단위들은 질량 1㎏의 물체에 1m/s2의 가속도를 줄 때 필요한 힘으로 정의되는 힘의 단위(N:뉴턴), 1N의 힘으로 물체를 작용점에서 힘의 방향으로 1m 이동시키는 데 드는 일로 정의되는 에너지 단위(J:줄), 그리고 1J/s의 비율로 행한 일로 정의되는 일률의 단위(W:와트)이다. 이 3개의 단위는 유명 과학자들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60년 국제단위체계는 MKS 단위계로 정립되었다. 기타의 단위들을 유도할 수 있는 7개의 기본단위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길이의 기본단위인 m(미터)는 진공중에서 빛이 1초 동안 진행한 거리의 2억 9,979만 2,458분의 1로 정의된다. 질량의 기본단위인 ㎏(킬로그램)은 백금과 이리듐으로 제작되어 프랑스 세브르 소재 국제도량형국(International Bureau of Weights and Measures)에 보관된 킬로그램 원기(原器)에 의해 정의되며, 1㎏은 1,000g에 해당된다. 시간의 기본단위인 초(s)는 세슘 원자가 특정 전이에 상응하는 복사를 91억 9,263만 1,770번 방출하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정의한다. 전류의 기본단위인 A(암페어)는 자유공간에서 1m 떨어져서 같은 크기의 전류가 흐르는 나란한 두 도선에서 단위 길이당 받는 힘이 2×10-7N일 때 도선에 흐르는 전류를 1A라 정의한다. 광도(光度)의 기본단위인 cd(칸델라)는 백금의 응고점 온도에서 1㎡의 복사공동(radiating cavity) 광도의 1/600,000(대략 파라핀 양초 1개의 밝기)로 정의된다. 물질의 양을 나타내는 기본단위인 mole(몰)은 0.012㎏에 해당하는 탄소-12(12C) 원자의 개수(6.02×1023)로 정의된다. 또 열역학적 온도의 기본단위는 K(켈빈)이다.
[1799년] 발자크 Honoré de Balzac 출생
← 발자크, 은판 사진(1848)
1799년 5월 20일 태어남 / 1850년 8월 18일 죽음
"당신은 인간이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바를 그리시지요. 저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그린다고 자부합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옳습니다. (중략) 단지 제게는 저속된 존재들이 더 흥미로울 뿐입니다. 저는 그들을 확대시키고 추함과 어리석음이라는 방향으로 이상화시키지요." - 오노레 드 발자크, 조르주 상드에게 보낸 편지
발자크는 사실주의 소설을 확립한 프랑스의 작가이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3년간 서기로 일하면서 <크롬웰 Cromwell>(1819)과 기타 비극 작품을 몇 편 발표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후 출판업·인쇄업·활자주조업 등에 손댔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는 간신히 파산을 면했으나 늘어나는 부채를 갚기 위해 쉴새없이 글을 썼다. 이때부터 발자크는 새로운 문학성으로 창작에 전념하게 되었다. 1833~35년은 창작의 절정기로 <시골 의사 Le Medecin de campagne>(1833)·<외제니 그랑데 Eugenie Grandet>(1833)·<골짜기의 백합 Le Lys dans la valee>(1835) 등 걸작들을 발표했다. 또한 프랑스 사회 전체를 이해하는 수단으로 소설 전체를 한데 묶고자 했던 발자크는 1842~48년 17권으로 된 <인간 희극 La Comedie humaine> 전집을 출판했다. 물질적 풍요를 중시하는 부르주아 가치관이 귀족사회의 도덕적 가치관을 대치해가던 당시의 사회상을 충실히 그려낸 발자크는 에밀 졸라, 마르셀 프루스트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브리태니커
[1915년] 이스라엘 군인·정치가 다얀 [Dayan, Moshe] 출생
1915. 5. 20 팔레스타인 데가냐~1981. 10. 16 이스라엘 텔아비브.
근처 아랍국들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안보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스라엘 최초의 '키부츠'에서 태어나 최초의 성공적인 협동농장(모샤브) 나할릴에서 성장했다. 1937년 야간특수부대에서 영국 장교 오데 윙게이트로부터 게릴라 전술을 습득함으로써 군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야간특수부대는 아랍 반란군과의 전투에 대비하여 조직되었고 이스라엘군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스라엘 독립의 길은 오직 투쟁뿐이라고 확신한 모세 다얀은 불법자위대인 '하가나'에 가담했고 영국 당국에 의하여 체포·구금되었다(1939~41). 출옥한 뒤에는 시리아에서 비시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팔레스타인의 유대군을 지휘했다. 다얀은 교전중 왼쪽 눈을 잃었는데, 그후 검은 안대가 그의 상징처럼 되었다.
다얀은 1948년 독립전쟁에서 예루살렘 지역 사령관이 되었고 이듬해 요르단-이스라엘 휴전협상에 참석했다. 이스라엘군 참모총장(1953~58)으로 있으면서 1956년의 시나이 반도 침공을 계획·지휘했으며 이 전투에서 군사령관으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전쟁회고록인 〈시나이 전투일지 Diary of the Sinai Campaign〉가 1966년에 출간되었다. 1959년 노동당연합 내의 '마파이' 소속으로 크네세트(의회)에 진출했고 오랜 후견인이었던 데이비드 벤 구리온 총리에 의하여 농업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64년까지 장관직에 있었으나 벤 구리온 지지파와 신임 총리 레비 에슈콜 세력 사이에 알력이 계속되자 사임했다.
벤 구리온이 설립한 신당 라피(이스라엘 노동자동맹) 소속으로 1965년 하원의원에 재선된 다얀은 1967년 6월 1일 아랍 인접국들과의 전쟁이 임박하자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참모총장 이츠하크 라빈과 함께 6일전쟁(1967. 6. 5~1967. 6. 10)을 지휘했으며 뒤에는 점령지의 행정을 담당했다. 다얀은 1970년대 초반 이스라엘 외교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기습공격(욤 키푸르)했을 때 미처 대비하지 못하여 문책을 받았다. 1974년 6월 라빈이 골다 메이어에 이어 총리에 취임하자 내각에 기용되지 못했으나, 4년 후 메나헴 베긴내각의 외무장관을 지내면서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성사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베긴 총리가 법적으로 요르단 영토이던 웨스트 뱅크 지역에서 이스라엘 주권을 행사하려 하자 1979년 10월 관직을 떠났다. 1981년 신당 '텔렘'을 창당했고 '1967년 전쟁'으로 획득한 점령지에서 무조건 철수할 것을 주장했다. 자서전인 〈나의 인생 이야기 The Story of My Life〉가 1976년에 출간되었다.
사망 후 그가 소장하고 있던 다량의 골동품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정부의 승인도 없이 비과학적으로 발굴하여 수집한 것들이었다. 2번째 부인은 이 골동품들을 이스라엘 박물관에 매각했다.
[1881년] 한말 독립운동가 이장녕 [李章寧] 출생
1881(고종 18). 5. 20 충남 천안~1932. 1. 24.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백우(白于). 장영(長榮)이라고도 한다. 한국무관학교(韓國武官學校)를 제3기생으로 졸업하여 1900년 대한제국 육군 참위가 되었고, 1903년 부위(副尉)가 되었다. 1907년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황실친위대에 입대하라는 특명이 있었으나, 사양하고 가족과 함께 망명하여 1908년 만주 펑톈 성[奉天省] 류허 현[柳河縣] 쑤위안푸[三源堡]에 도착했다. 그뒤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윤기섭(尹琦燮)·김동삼(金東三)·김창환(金昌煥)·주진수(朱鎭洙)·이광(李光) 등이 만주로 건너오자, 이들과 함께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황무지를 개척하고, 독립군의 기간요원을 양성하고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전신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와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고 교관을 지냈다. 1919년 8월 대종교(大倧敎)의 지도자 서일(徐一)을 비롯하여 현천묵(玄天默)·김좌진(金佐鎭)·계화(桂和)·조성환(曺成煥)·박성태(朴性泰)·정신(鄭信)·박두희(朴斗熙)·이홍래(李鴻來)·윤창현(尹昌鉉)·나중소(羅仲昭)·김성(金星) 등과 함께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을 기반으로 전투체제의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를 조직하고 참모장에 취임했다. 이해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라 개칭하고, 각 처에 경찰사무와 정보연락을 담당하는 경신분국(警信分局) 등을 두어 활동하는 한편,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가 설립되자 교관이 되어 독립군을 양성했다. 1920년 청산리전투 이후 북로군정서·대한독립단·간도대한국민회·대한신민회·도독부(都督府)·의군부(義軍府)·혈성단(血誠團)·야단(野團)·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등 여러 단체가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자 참모총장으로 활동했다. 1922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자 참모를 지냈으며, 1924년 현천묵·나중소 등이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하자 조성환·김규식 등과 함께 참모로 활약했다. 이해 7월 지린[吉林]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가 열리자 윤각(尹覺)과 함께 대한독립단 대표로 참가하여 신민부(新民府) 발족에 기여했다. 1925년 북로군정서 출신을 중심으로 신민부가 조직되자 참의원으로 활동했다. 1930년 홍진(洪震)·지청천(池靑天)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감찰위원장에 임명되었고, 한중연합군을 조직하여 무장항일운동을 했다. 1932년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에게 피살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82년] 노르웨이 소설가 운세트 [Undset, Sigrid] 출생
1882. 5. 20 덴마크 칼룬보르~1949. 6. 10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그녀의 작품은 전세계에서 널리 읽히며 192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고고학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그녀의 집안은 전설, 민속, 노르웨이 역사로 가득했다. 여기서 받은 영향과 자신이 겪은 인생 이야기가, 어린시절에 관한 소설 〈11년 Elleve aar〉(1934)에서부터 나치의 점령하에 있던 노르웨이를 탈출하는 이야기로 원래 영어로 출판된 〈미래로 돌아가라 Return to the Future〉(1942)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작품 속에 나타난다. 그녀는 10년 동안 전자회사에서 일하다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초기 소설은 현대의 중하류계층의 낭만 없는 세계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위치를 다루었으며, 〈거울 속의 영상 Splinten av troldspeilet〉(1917)·〈제니 Jenny〉(1911)와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그후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녀의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3부작 〈크리스틴 라브란스다테르 Kristin Lavransdatter〉(1920~22)를 썼다. 놀라울 정도로 중세적인 분위기를 띠면서도 여전히 여성의 운명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자부심과 독립심이 강한 크리스틴이 매력적이지만 책임감 없는 남자와 결혼하면서 강하지만 겸손하고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여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소설과 4권으로 된 역사소설 〈올라브 오이둔쇤 Olav Audunssøn〉(1925~27)에서는 종교문제가 두드러지면서 작가가 이 문제에 큰 관심이 있음을 보여준다. 1924년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하여 당대의 주제로 돌아온 후기 소설에서는 새로운 종교가 큰 역할을 한다. 나치가 노르웨이를 점령했을 때 탈출하여, 남은 전쟁기간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전쟁으로 지친 고국과 망명정부에 관해 강연하고 글을 쓰면서 지냈다.
[2006년] 세계 최대 싼샤댐 (长江三峡大坝) 준공 - 간소한 준공식
그는 파리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가브리엘 마르셀에게 철학과 신학을 배웠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E.후설의 저서들을 탐독한 것이 계기가 되어 후설 연구가로도 알려졌다. 1950년 후설의 ‘현상학의 이념’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프랑스에 소개했다. 여기서 그는 현상학을 통하여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밝히고 그러한 유한성으로 초월적 존재인 신을 해명하려고 노력했다.
1948∼1956년 스트라스부르대학, 1956년부터는 파리대학에서 철학교수로 재직했다. 이 기간 동안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1949)에서 의지에 관한 현상학적 기술을, ‘유한성과 죄악 가능성’ (1960)에서 종교적인 상징에 대한 해석학을, ‘해석에 관하여’ (1965)에서 정신분석학적 상징에 관한 해석학을 개진하는 등 활발한 연구활동을 했다. 1966년 그리스도교 좌파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하여 낭트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1968년 학생혁명이 좌절되자 급진적인 학생들과 지식인들로부터 외면당하여 1970년 해임됐다. 그 뒤 시카고대학과 파리대학을 중심으로 강의와 저술활동을 했다. 그 동안 몰두해온 해석학의 철학적인 주제도 상징에서 텍스트로 바뀌게 됐다.
그는 상징언어에 대한 해석의 폭이 너무 좁다고 여겨, 텍스트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인간 존재를 이해하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로 1975년에 ‘살아 있는 메타포’를, 1983 ·1984 ·1985년에 연이어서 ‘시간과 이야기 1, 2, 3’를 펴냈다. 1990년에는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1992년에는 대표적인 논문을 모아놓은 ‘강좌 Lecture’를 출간했다./조선
[2002년] 동티모르 독립 선포
동티모르(East Timor)가 2002년 5월 20일 0시(한국과 동일 표준시) 수도 딜리 인근 타시톨로 광장에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등 전세계 80여개국 지도자와 주민 20여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독립을 선포, 신생국으로 탄생했다. 아난 총장은 이에 앞서 19일 밤 11시50분쯤 동티모르의 모든 통치권을 신생 정부에 공식 이양, 유엔기가 내려지고 동티모르 국기가 게양됐다.
유엔은 1999년 동티모르 독립투표 가결에 반발한 친(親)인도네시아계 민병대가 유혈폭동을 일으킨 후 과도행정기구(UNTAET)를 통해 동티모르 건국 준비 작업을 주도해왔다.
4월 14일 대선에서 승리한 사나나 구스마오(Gusmao, Xanana, 1948~ ) 대통령 당선자는 국회의장 앞에서 취임 선서문을 낭독, 1524년 포르투갈 식민지 편입 후 약 500년 동안의 외세 점령과 동족상잔의 비극적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유엔은 평화유지군(PKF) 소속 군병력 5000여명과 경찰 1250명을 주둔시켜 동티모르의 국경 수비와 치안유지가 정착되도록 도와주었다. 앞서 미국 등 27개국과 15개 국제기구 대표들은 5월 14일 딜리에서 회담을 갖고, 동티모르 해저원유ㆍ가스가 본격 생산되는 2005년까지 4억4000만달러를 지원키로 합의했다. 동티모르는 1975년 포르투갈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자치정부를 수립했으나, 1주일 만에 인도네시아군 침략을 받아 27번째주(州)로 편입됐다. 이후 1999년 8월 주민투표에서 독립을 가결, 유엔의 도움을 받아 신생국 건설을 준비해왔다.
인도네시아와 호주 사이에 위치한 동티모르의 면적은 남한의 6분의 1이며, 인구는 약 84만명. 언어는 공용어 포르투갈어와 테툼어를 포함해 15개이며, 주민은 말라이인과 파푸아인 등 36개 종족으로 구성돼 있다. 주민 대다수(91.4%)가 가톨릭을 믿고 있으며, 2001년 8월부터 미국 달러화를 공식 통화로 사용하고 있다.
[1980년]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사형 확정
1980년 오늘!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즉 10.26사건을 일으킨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해 대법원이 사형을 확정한다.
김 씨는 1979년 10월 26일 밤 서울 궁정동 만찬회 석상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쏴 사살했다.
사건발생 40일 만인 1979년 12월 4일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첫 공판이 열렸고 김 씨는 공판 개시 14일 만에 내란목적살인과 내란미수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김 씨는 대법원의 사형확정 판결이 있은 지 나흘 만인 1980년 5월 24일 서울구치소 사형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0.26사건은 박정희 유신체제의 종말을 가져오고 전두환, 노태우 씨 등 신군부 세력에 의한 정권 탈취와 제5공화국 수립의 계기가 됐다.
[1978년] 일본 나리타공항(신동경국제공항) 개항
1978년 오늘은 일본의 관문, 나리타 국제공항이 개항한 날이다. 나리타공항은 인근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개항이 당초 예정보다 늦게 이뤄졌다. 개항이 원래 두 달 전으로 예정돼 있었지만 주민들이 관제탑에 난입해 기기를 부순 사건 때문에 뒤로 미뤄진 것이다.
나리타공항은 도쿄 중심가에서 북동쪽으로 6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나리타공항은 하네다국제공항의 수용능력이 한계에 이르자 1968년 착공한 지 12년 만에 활주로 1개로 문을 열었다.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
←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한 유권자가 투표권을 행사하고 있다.
제3대 민의원 선거가 1954년 5월 20일 실시됐다. 이 선거는 여당인 자유당과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이 선거사상 최초의 입후보자 공천제를 채택해 선거를 실시함으로써 정당정치의 기틀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3대 민의원 선거도 2대와 마찬가지로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국회의원 선거법’을 적용했다. 투표율은 91.1%였다. 선거결과 203명의 국회의원이 탄생했고 정당-단체별 당선자는 여당인 자유당이 114명, 무소속이 67명,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이 15명, 국민회 3명, 대한국민당 3명 등이었다.
제3대 국회는 6월 9일 개원하여 의장에 이기붕, 부의장에 최순주, 곽상훈을 선출했는데 약3개월 후 자유당이 이승만 대통령의 3선을 위한 개헌안을 제안함으로써 초기부터 정치적 격돌을 빚어냈다./조선
[1949년] 남로당 국회프락치사건 발표
← 국회 프락치사건 판결문 표지.
1949년 5월 20일 검찰은 이문원, 최태규 등 국회 소장파 의원 6명이 남로당의 지령을 받아온 증거를 포착해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이들 소장파 의원들은 1948년 10월 13일 `외국군 철수안`을 긴급동의했으며 1948년 12월 하순경에는 제헌국회 개원 이전에 체결한 각종 한미협정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 이들은 국회의원 62명의 연서로 외군군철수촉구 건의안을 유엔한국위원단에 제출했으며 1949년 2월에는 `남북평화통일방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수사가 확대됨에 따라 국회부의장 김약수와 노일환 배중혁 의원 등이 잇따라 잡히는 등 관련 국회의원이 13명으로 늘어났다. 노일환 이문원은 징역 10년, 김약수 박윤원은 징역 8년, 김옥주 김병회 강욱중 황윤호는 징역 6년, 최태규 이구수 서용길 신성균 배중혁 등은 징역 3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들은 1950년 2월 1일 징역3년에서 10년까지 모두 실형선고를 받아 수감중 한국전쟁을 맞아 북한군에 잡혀갔다./조선
[1927년] 사우디아라비아, 영국으로부터 독립
사우디아라비아가 건국된 것은 1927년이다. 전에는 홍해 연안의 헤자즈 지방(중심은 메카)과 중앙 고지로부터 페르시아만(아라비아만)에 걸쳐 전개되는 네지드 지방(중심은 리야드)으로 갈라져 있던 것을 리야드 출신의 압둘 아지즈왕(통칭 이븐 사우드)이 통일하였다. 1932년 9월에 현재의 국명으로 바꾸었다. 왕은 1953년에 사망하고 장남 이븐 사우드가 뒤를 이었다. 1950년대에는 중동의 여러 나라들이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민족주의를 앞세워 정치적 격동기를 맞이함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도 그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외교는 물론 국내 정책까지도 시류(時流)에 따라 보수와 혁신 사이에서 방황하였다.
[1902년] 쿠바공화국 수립
19세기 초 아메리카대륙에서 일어난 미국독립혁명의 영향이 이곳에도 파급되어 1812년에는 아폰테의 지도 아래 대규모 흑인반란이 일어났다. 그후 노예제도 폐지, 농민혹사 금지와 독립을 요구하는 세력이 점차 확대되어 1868∼1878년의 ‘10년 전쟁’에 돌입하였다. 이 독립전쟁 기간 중 공화제 헌법이 공포되고 데 세스페데스의 공화정권이 수립되었으나, 1878년 정치·경제의 개혁과 노예해방을 약속한 ‘산혼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은 일단 종결되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의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1895년 쿠바 혁명당을 결성한 호세 마르티를 중심으로 제2차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어 1898년 아바나항(港)에 정박 중인 미국 선박 메인호(號)에서 원인 모를 폭파사건이 일어나 미국은 에스파냐에 선전포고를 하고 이 전쟁에 개입하였다.
그 결과 전쟁은 4개월 만에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파리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에스파냐는 쿠바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종전 후 3년 동안 쿠바에서는 미국 군대의 군정(軍政)이 실시되었으며, 1901년 공화제 헌법 제정과 때를 같이하여 미국의 내정간섭과 군사기지 설치를 인정하는 ‘플래트 수정조항(修正條項)’이 추가되어 1903년부터 1999년을 예정으로 관타나모만(灣) 등에 미국의 해군기지가 설치되었다. 미국의 군정 종결과 함께 1902년 5월 E.팔마를 수반으로 하는 공화제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양질의 토지, 사탕산업, 교통수단 등 쿠바 경제의 중추적 기능은 미국자본이 장악하였다.
[1883년]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 섬 화산 폭발
← 2007년 11월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 섬(Krakatau I.)에서 1883년 5월 20일 화산이 폭발했다. 1883년의 폭발은 유사 이래 가장 큰 화산활동 가운데 하나였다. 과거 100만 년 사이의 어느 시점엔가 화산이 폭발하면서 분석과 재로 된 화산암질의 원뿔형 화산이 형성되었다. 해저 300m 아래에서 해발 약 1,800m 높이까지 솟아 있던 이 화산은 그후 산꼭대기가 파괴되어 칼데라, 즉 지름이 6㎞나 되는 사발 모양의 움푹한 땅을 이루었다. 칼데라의 일부는 물 위로 솟아올라 북서쪽의 세르퉁(베를라텐) 섬, 북동쪽의 랑 섬과 폴리쉬햇, 남남서쪽의 라카타 섬 등 4개의 작은 섬을 만들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3개의 새로운 화산이 형성되어 하나의 섬으로 합쳐졌다. 3개의 신생 화산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은 해발 813m에 달했다.
1883년의 대폭발에 앞선 것으로는 1680년에 일어났던 다소 온건한 분화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83년 5월 20일 화산 가운데 하나가 다시 활동을 시작하면서 재를 실은 구름이 10㎞ 높이로 치솟았고, 폭발음이 160㎞ 밖의 바타비아(자카르타)까지 들렸다. 5월말경에 활동을 멈추었던 화산은 6월 19일에 다시 활동을 시작하여 8월 26일경까지 격렬하게 활동했다. 마침내 26일 새벽 1시에 폭발하기 시작해 이날 오후 2시에는 검은 재구름이 크라카타우 위로 28㎞ 솟아올랐고, 절정기에 달했던 27일 오전 1시경에는 3,520㎞가량 떨어진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소리가 들리고 80㎞ 높이까지 재들이 날아가는 폭발이 일어났다. 이때 생긴 대기 중의 압력파가 지구 전역에서 기록되었다. 폭발은 하루를 지나며 줄어들어 28일 아침에는 조용해졌다. 작은 폭발들은 1884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크라카타우의 폭발로 거의 21㎦에 달하는 바위조각들이 공중으로 날아갔으며, 대량의 화산재가 인근 80만㎢ 지역을 뒤덮었다. 화산 근방에서 떠돌다니는 돌조각들이 너무 커서 배를 운행할 수 없었으며, 주변지역은 공중에 분출된 재들 때문에 이틀 반 동안 어둠에 빠졌다. 미세한 먼지가 지구를 떠다녀서 다음해 내내 붉은 석양이 이루는 장관을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폭발 이후 해저 270m, 해발 800m 높이의 작은 섬만 남아 있었다. 재와 부석(浮石) 파편들이 세르퉁 섬과 랑 섬, 라카타 섬의 남부지역에 60m 높이로 쌓였으며, 이 물질들을 분석한 결과 이전의 중앙 화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암석의 파편들은 섬에서 떨어져 나간 부분들의 10%도 되지 않는 미량인 것으로 밝혀졌다. 쌓인 물질들 대부분은 땅속 깊은 곳에서 새로 분출된 마그마로 본래 마그마가 지니고 있던 가스가 팽창하면서 부석이 되거나 날려 입자가 떨어지면서 된 것이었다. 따라서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원래 있던 화산들이 폭발하여 대기중으로 날아간 것이 아니라, 화산 상층부가 하층부에서 터져나온 마그마 때문에 붕괴되어 없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 폭발은 해양계에도 큰 영향을 끼쳐 남아메리카와 하와이처럼 먼 곳에서까지 연속적인 해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폭발 직후 자바와 수마트라 근방의 해안도시에서는 높이 36m에 달하는 거대한 해일이 일어나 3만 6,000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크라카타우 제도의 모든 생물은 두껍게 깔린 불모의 화산회 아래에 묻혔으며, 그후 5년 동안 나무와 동물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크라카타우는 1927년 12월 29일 이전의 화산과 같은 선을 따라 해저에서 화산활동을 시작했다. 1928년 1월 26일에는 새로 생성된 화산추가 해면 높이로 솟아올라 아나크 크라카타우('새끼 크라카타우'라는 뜻)로 불리는 작은 섬을 이루었다. 그 후로도 산발적인 활동이 계속되어 1973년경에는 해발 186m 높이로 솟았으며, 1980년대초까지도 분화가 계속되었다.
[325년] 그리스도교 최초의 공의회 ‘니케아 공의회’ 개최(~6.19)
← 콘스탄티누스 I세
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황제(Constantinus I, 274~337)가 325년 5월 20일 니케아에서 그리스도교 최초의 공의회를 개최했다. 교리해석 차이로 분열되어 있는 그리스도교를 통합하기 위해 지역적 종교회의를 일체 중지하고 ‘니케아 공의회(Councils of Nicaea)’를 통해 모두가 승복할 만한 결론을 내리자는 취지였다.
종교논쟁에 관심이 없는 서방에서는 대표들이 거의 참석치 않은 반면 한창 종교논쟁에 시달리고 있는 동방에서는 대규모의 파견단이 참석했다. 당시 동방에서는 3개 종파가 서로 교리문제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특히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2개 종파의 반목이 심각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처럼 영원하고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도구로 창조했으므로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아리우스파의 교리해석과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알렉산드로스파의 교리해석이 첨예하게 맞붙어 수백명의 아리우스파가 파문을 당하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아리우스파에 다소 불리한 결론을 내렸으나 계속적인 설득으로 그들로 하여금 최종합의문에 서명케 했다. 교리논쟁을 불식시키고자 개최한 공의회는 결국 콘스탄티누스의 승리였다. 모든 주요 쟁점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거의 만장일치로 결정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1822년] 1901년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한 프랑스의 경제학자 파시 출생
열렬한 평화주의자로 알려졌으며, 국제평화동맹(國際平和同盟)(1867) ·국제조정기구(國際調停機構)(1870) 등을 설립하였다.
프랑스 최고 행정재판소의 회계감사관(1846~49)으로 일한 뒤 파시는 여러 경제개혁과 자선활동에 관련된 저술과 강연, 조직활동에 몰두했다. 열렬한 자유무역주의자인 그는 영국의 경제학자인 리처드 코브던이나 그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존 브라이트와 함께 19세기 자유주의 전통에 속한다. 평화를 위한 파시의 활동은 크림 전쟁(1853~56) 때부터이다. 정기간행물 〈탕 Le Temps〉(1867)에 평화를 호소하는 글을 실어 룩셈부르크를 차지하기 위한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의 전쟁을 막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같은 해 그는 국제평화연맹(Ligue Internationale de la Paix)을 창설했는데, 이 조직은 후에 국제분쟁의 중재를 위한 프랑스 협회로 알려졌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 뒤 그는 알자스로렌의 독립과 영구중립을 제안했다. 1881년부터 프랑스 하원의원으로서 프랑스령 기아나와 수리남 간의 경계에 관하여 프랑스와 네덜란드 사이에 벌어진 분쟁을 중재하여 성공했다. 그는 국제의회연맹(IPU:1889) 설립에 일조했고 여생을 평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저서로 《평화운동의 역사 Historique du mouvement de la paix》(1905) 등이 있다.
그밖에
2007년 북한 선적의 상업적 정기 화물선 강성호가 분단 후 첫 부산항 입항
2006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피습
2005년 수원 삼성- 잉글랜드 첼시 친선경기
2001년 나차긴 바가반디 몽골 대통령, 재선
1999년 대구서 6세 남아에 황산테러
1999년 인천 영종도 신공항 관제탑 상량식
1999년 미국 조지아주 고등학교서 총기 난사 사건 발생 - 학생 6명 부상
1993년 공직자윤리법 개정
1989년 조자양 중국공산당 총서기 실각
1986년 서울대 이동수군 분신자살
1983년 국제축구연맹(FIFA) 86년 월드컵 멕시코서 개최키로 결정
1983년 서울 성북역서 열차 추돌 35명 부상
1982년 영국군 포클랜드섬 상륙작전 개시
1980년 대법원 10.26사건 관련자 확정 판결
1980년 신현확내각 국내 소요사태에 인책코 총사퇴
1974년 한국-사우디 경제기술 협력협정 체결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 방소 등정
1965년 카이로 부근서 파키스탄 여객기 추락 121명 사망
1964년 서울대 문리대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후 데모
1961년 장도영 내각수반 취임
1949년 미국 국무성 미군철수를 발표
1948년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 해산
1946년 영국 탄광국유화법 하원통과
1939년 미국 팬아메리칸항공 뉴욕-유럽간 정기노선에 양키클리퍼호를 취항
1935년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 해체
1928년 독일연방 의회선거, 사회민주당, 독립사회민주당 양당 승리
1923년 토요회 결성
1923년 임시정부 정무(政務)연구위원회 설치
1920년 런던서 영국-프랑스 경제협정 조인
1920년 독일 공화국 제1회 국민대회
1920년 멕시코 초대 대통령 카란사 사망
1913년 발칸전쟁에 관한 2차 런던강화회의 개막
1882년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3국동맹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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