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주께서 부활 하심으로 말미암아(최한나)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벧전 1:3-4 말씀 아멘!!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1장 1절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다. 그러나 일부 학지들의 주장처럼 베드로전서의 헬라어가 뛰어나다는 점(베드로는 어부였다) 베드로전서에 나타난 외부의 박해 (4:12 등)가 로마제국의 전반에 걸쳐 있었던 박해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5장 1절에 언급된 장로라는 교회의 직제 등은 베드로 이후의 시기를 반영한다고 볼 때 베드로가 아니라 그의 제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설사 베드로가 아닌 그의 제자가 실제 저자라고 해도 그가 받거나 배운전승은 베드로에게서 온 것이다.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베드로는 펀지를 하나님에 대한 교리로 시작 한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시며 인간을 구원히실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베드로는 먼저 하나님을 찬송하고 이어서 예배와 감사의 표현을 연상시키는 특별한 행위를 언급한다. 곧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셨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시며(벨전 1:3), 그분을 죽은 자들가운데서 부활케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영원한 소망을 갖게 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메시아임을 입증히는 것으로써, 단지 그 분만의 부활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한 모든 사람들의 부활을 내포하는 사건이기에 그것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은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 하다고 그 이유를 밝힌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인들 에게 산 소망을 주셨다는 것이다(벤전 1:3). 베드로는 계속해 좀 더 구체적으 로 산 소망을 설명한다. 이 소망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으며 쇠하지 않는 유업이다(벧전1:4).
부활의 아침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기적이 아닌, 우리의 삶과 신앙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사건이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전서 1장 3-4절을 통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게 된 복된 소망과 유업에 대하여 알아가고자 한다.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가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성도들은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기에, 베드로는 그들에게 소망과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이 편지를 썼다. 베드로는 서신의 첫 부분에서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온 놀라운 축복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산 소망에 대해 설명한다. 베드로는 3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고 시작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자비의 결과로 “산 소망”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주어진 것이다.
소망의 의미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세상적인 소망과는 다르다. 세상적인 소망은 불확실한 바람이나 기대일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확실하며,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확증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에, 우리도 동일한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있다.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때론 힘들고 어려울 때, 이 산 소망이 우리를 붙잡아 줄 것이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을 때, 그분의 부활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4절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얻었다고 말한다. 이 유업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으며, 이 땅의 어떤 것도 그 가치를 훼손할 수 없다. 유업의 특징에는 본 문의 유업은 세상의 재물이나 권력과는 다른 것이다. 세상의 유업은 썩거나 더럽혀지거나 쇠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유업은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다. 이 유업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상속자로서 우리가 누릴 영원한 생명과 복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유업을 얻기 위해 노력하거나 자격을 갖출 필요가 없다. 이는 오직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우리는 이 유업을 바라보며, 세상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주님의 부활이 주는 현재와 미래의 의미는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미래에 있을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 우리의 삶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으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럼 현재의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우리는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으며,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삶은 단지 죄에서 벗어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능력과 권세를 포함한다. 미래의 의미에는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할 미래를 보장해 준다. 이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이 땅의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있음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삶에 확실한 소망과 영원한 유업을 주었다. 우리는 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또한,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새로운 피조물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가기를 결단하여야 한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이 놀라운 축복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길을 따라가는 우리모두가 되시기를 바란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산 소망과 썩지 않는 유업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땅에서 부활의 능력을 의지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 삶을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0. 예수님은 누구신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5:39절 말씀 아멘!!
요한복은 5장은 예수님의 신성을 입증한 제3-5표적 및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배척과 오해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5장, 6장의 전반부이다. 본문의 39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연구한 목적과 성경의 중심이 누구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증거가 나온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상고한 목적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다고 믿는 까닭이었다. “상고했다”는 말은 그들이 날마다 계속해서 성경을 자세히 살핀 것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들이 읽은 그 말씀을 이해하는 빛이 없어 성경을 자구적으로만 알았기에 성경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말았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또 깊이 연구하는 것이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신앙 성장을 돕거나 유익을 주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의 실패가 이 사실을 입증하여 준다.
성경을 연구하되 이해의 빛 아래서 즉 성령의 도우심으로 연구해야 바른 이해가 가능하고 유익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이해의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성경이 주는 유익을 얻으려면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게 해야 한다. 누가복음 24:27절을 보면 모든 성경은 예수님의 관한 기록이다. 또한 디모데후서 3:16절 상반절을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 라고 기록되었다. 율법이든지 선지자들의 글이든지 시 문학이든지 그 내용은 각기 다를지라고 그것들이 모두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있음을 알아야 성경의 바른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누구든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하면 그것은 더 이상 아무 의미나 능력도 없는 일개 종교의 법전이 되고 만다. 마귀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소위 학자라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이 작업을 시도하고 있으므로 성도들은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한다.
또한 유대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두 가지 일에 힘썼는데 그 하나는 선행이었다. 그들은 영생을 위해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선행을 찾아 그것을 행하고자 노력했다(마 19:16). 다른 하나는 성경을 연구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율법 준수 여부를 따라 생과 사, 복과 화를 취하게 된다고 믿었으므로(신 30:15-20) 성경을 묵상하는 일은 경건한 유대인들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시 1:1, 2).
이러한 사실은 쿰란 공동체가 금욕적인 삶과 함께 성경 연구를 가장 중요시했던 데서 잘 나타나 있다. B.C. 586년 솔로몬의 성전이 파괴된 후 포로 생활 중의 유대인 학자들은 성전 의식과 희생제물을 드리지 못하게 된 대신에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였으며, 회당을 지어 가르쳤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모든 삶의 기준일 뿐 아니라,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었다(시 119:93).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그들은 성경을 읽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바(구원, 영생 등등)를 이룰 수 있는 도구를 찾으려 했다’고 말했다.
루터(Luther)는 ‘성경 어디에서나 예수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눅 24:27, 44). 예수는 성경이 그의 희생을 예언했으며(3:14, 15), 고난의 사건 일부를 기록하고 있다고 가르치셨다(12:14, 15, 18:9, 19:24, 28, 36). 만약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생략되거나 무시된다면 그것은 한낱 이스라엘의 역사와 고전 문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성경의 중심이십니다. 본문 39절에서 예수님은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구약 성경은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하고 준비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창세기에서부터 말라기까지,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 사역, 죽음, 부활을 예표하고 예언한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원시 복음(창세기 3:15)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약속을 담고 있다. 이사야서에서는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으며, 다윗의 시편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이 예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예언과 예표의 성취이다.
예수님은 영생의 근원이셔서 유대인들은 성경을 연구하면서 그 안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의 문자와 율법에만 집중한 나머지,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경이 영생에 이르는 길을 가리키지만, 그 길이 바로 자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선언하셨다. 영생은 예수님을 믿고 그분 안에서 거할 때에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예수님은 성경의 중심이며, 영생의 근원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고, 그분을 믿을 수 있을까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난다고 로마서 10장 17절은 말씀한다.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 연구의 목적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믿는 데 있어야 한다. 단순히 지식을 얻기 위한 성경 공부는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을 만나기를 갈망하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요한복음 5장 39절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예수님은 성경의 중심이시며, 영생의 근원이시다. 성경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도구이며,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만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연구할 때 예수님을 찾고, 그분을 만나며,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며, 참된 복음의 본질이다. 예수님은 구원의 문이시며, 그분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31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6 말씀 아멘!!
12제자 중 베드로는 부르심을 입은 이후 그의 적극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에 따라 예수 앞에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고 남보다 앞서서 나서는 등 열성적인 면을 보여 주었다. 본문에서도 역시 베드로는 다른 동료 제자들이 주저하며 마음속으로 신앙 고백을 준비하고 있는 순간에, 담대하고도 신속하게 천금갈은 신앙 고백을 하게 된다. 한편 ‘시몬’이란 이름은 히브리어 본명으로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이 있다(4:18).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신앙고백 사건을 통해 시몬에게 ‘게바’(수리아 명칭으로서 ‘반석’이라는 뜻), 곧 ‘베드로’(게바와 동일한 의미인 헬라어 명칭)란 이름을 새로 주셨다.
한편 그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 때까지 자신의 인간적 열성을 나타냄으로써 게속 실패했으나(23절, 17:4, 5, 26:31-35, 69-75),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성령이 임하신 오순절 이후에는 제자들 가운데서 항상 우선이 되어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며(행 2:14, 3:3-7, 4:8, 8:14) 예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역할을 하였다(갈 2:9). 주 예수에 대한 고백 중 가장 완벽한 것 가운데 하나로서 그리스도교 신조의 핵심을 구성한다. 이 고백 안에 예수의 인성 ‘그리스도’과 신성‘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예수의 본질적 신분 등이 담겨 있다. 물론 베드로의 이 고백은 전혀 새롭고 획기적인 내용이 아니라, 일전에 몇몇 제자들(요 1:41, 49)과 가버나움에서 무리가 예수를 떠나갈 때 베드로에 의해 고백된 것이다(요 6:69). 그러나 예수의 초기 사역 당시(4장) 예수의 메시아되심을 단순히 정치적 측면에서 받아 들이려 했던 대중들의 기대를 피하시기 위해 그러한 신앙 고백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으셨다. 하지만 이제 메시아의 신분과 사역의 특성 및 목적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오류들(14절)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바른 신앙 고백을 요구하시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주’(Σὺ 쉬)는 단순히 2인칭 대명사인 ‘당신’을 뜻한다. 그리고 ‘Χριστός 그리스도’란 히브리어 ‘מָשִׁיחַ 마쉬아흐’(H4899)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이다.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으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종이시라는 뜻이다. 이는 그분의 인성을 대변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21절, 20:28, 눅 24:7). 그런데 구약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은 제사장, 왕, 선지자들이었다(출 29:29, 30:30, 삼상 16:13, 26:11, 왕상 19:16, 시 89:20, 사 45:1). 따라서 예수께서는 대제사장, 왕,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실 참 메시아이신 것이다(1:1, 눅 1:32, 33, 행 3:22, 23, 히 4:15, 5:6, 10).
한편 본문에는 ‘그리스도’라는 말과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 앞에 관사 ‘ὁ 호’가 붙어 있는데 이는 예수, 바로 그분이 일반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을 능가하는 오랫동안 대망해 오던 구원자, 곧 메시아가 되심을 힘주어 강조함과 아울러 그분의 절대 유일성과 초월성을 강조해 준다. 또한 ‘살아 계신’이란 ‘내재적 생명이 충만하신’, ‘영원히 생존하시는’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오직 영원 자존적 존재이신 하나님께만 사용될 수 있는 표현으로(요 5:26, 살전 1:9) 과거와 더불어 지금과 미래에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적 탁월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또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그분의 신성을 강조하는 말로서 그분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냄 받으신 분(요 7:28, 29, 8:18, 19)이요, 하나님과 하나되신 하나님의 본체시라는 점(요 5:17, 18, 10:29, 30, 33) 등을 나타낸다.
본문에서 예수는 사람들의 집중 공세를 받는 갈릴리 지역을 벗어나 한적한 가이 사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을 깨우치고자 질문하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의 대답은 객관적인 보고였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그리고 예레미야는 모두 예언자들인데, 예수는 그런 예언자 중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예언자라는 평가는 기독론적 칭호나 신앙 고백적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믿지 않는 사람 들이 예수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막연한 생각을 나타내고 있는 단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에게 보다 주체적이고 고백적인 대답을 듣고 싶어 하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시몬 베드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이는 풍랑 속에서 베드로를 구원하신 예수의 능력을 보고 제자들이 행한 고백(14:33)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듯이 보이지만, 여기에서는 그 의미가 훈속적인 대화를 통해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다.
이곳의 “하나님의 아들” 기독론은 인자 기독론 또는 예언자 기독론에 비해 예수가 기대했고 교회가 요구했던 신앙 고백이었다. “하나님의 아들”로 서 예수를 소개하고 있는 부분은 마태복음 전편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만 (킹스베리, 「마태복음서 연구」,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2장 참조), 이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직후에 하늘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 이라고 음성이 들린 장면(3:13~17)이다. 두 장면 모두 하늘의 계시를 통해 예수의 정체성이 세상에 공개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이러한 계시가 일어나고 있는 시점이다. 세례 장면은 공생애의 선포(4:17~16:20)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에 위치하고 있으며,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예수의 수난과 영광의 사역(16:21~28:20)이 시작되기 직전에 자리하고 있 다. 즉, 하나님의 계시 없이 예수를 알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칭찬 받기에 충분한 고백이었지만, 그것은 결코 그의 자랑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하는 신앙 고백과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적 은총에 의존한다. 오직 이러한 바탕 위에서만 교회는 설립되고 존재한다. 이밖에 어떠한 요소도 교회를 순수하게 만들지 못한다. 이러한 신앙 고백의 반석(헬라어로 ‘페트라’) 위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인 “맺고 푸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맺고 푸는” 일이란 청지기들이 정확하게 업무를 수행하듯이 교회는 하늘 나라를 대리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임과 동시에 위임 명령이다. 이것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늘 나라의 비밀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해 이 칭호가 말하는 의미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심각한 논쟁이 있어 왔던 문제이다. 가장 기본적인 이해는 성육신하신 주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눅 1:32, 요일 5:18). 그러나 이 칭호에는 그처럼 단순한 설명만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1. 하나님의 아들(들):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자녀(들)는 세 형태의 인격체를 지칭한다.
(1) 하늘 존재들은 창조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 하늘 회의에서 여호와를 만난 하늘 존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렸고, 창조의 때에 “모든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뻐 소리를 질렀다”(욥 38:7). (2) 하나님의 백성들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들”이라고 불린다(신 14:1, 호 2:1, 사 45:11). 하나님의 백성은 창조와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출 4:22-23). (3)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아들”로 불렸다(예를 들어, 삼하 7:14). 하나님께서는 왕을 “나의 장자”로 지명했다(시 89:27, 참고 시 2:7). 왕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임명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이런 사례로 보면 “아들”이라는 용어가 상징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연 수정과 출생을 통해 자녀로 삼지 않는다.
2. 그리스도의 영원한 아들 되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다. 바울은 이렇게 적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 4:4). 그리스도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선재하신 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히 1:2).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은 독특하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에게서 영적으로 태어났지만 아들은 하나님에게서 영적으로 태어났다고 결코 묘사되지 않는다. 그분은 아들이시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직접 오셨다(요 16:28). 그분은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시며 의지에서(요 14:31, 15:10), 품성에서(요 14:8-11), 목적에서(요 15:16, 16:15, 17:4-8), 본질에서(요 8:58) 아버지와 하나 되신다. 그러나 그분은 별개의 인격체이시다. 우리는 “아들”이라는 말을 은유적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3. 은유적 의미 : 우리 인류 사회에서, 아들의 형상은 몇몇 분명한 사상을 전달한다.
(1) 아들의 본질은 부모의 본질과 동일하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릴 때, 우리는 아버지와 같이 그분도 신적 존재라고 말한다(요 5:18). (2) 자녀는 부모와 구별된다. 아들의 비유는 비록 그리스도와 아버지가 본질이 동일하더라도, 그들은 별개의 인격이며 이것은 신성 내에서 복수의 인격이 함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3) 부모와 자녀들의 관계는 독특하다. 그들의 연합은 실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비유는 신성의 구성원들 안에 존재하는 깊은 연합(요 17:5)을 위한 훌륭한 상징이다. (4) 사람의 아이는 자연 출생을 통해 부모에게서 온다. 그렇지만 신성의 경우에 아들은 신적 유출이나 자연 출생을 통해서가 아니라 창조와 구속 사업을 행하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기인된다(요 8:42, 16:28).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영원히 생성되었다는 성경적 근거는 전혀 없다. (5) 지상의 아버지-아들 이미지는 신성 안에서의 하나님 아버지-아들 관계에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 자연적 아이는 시작이 있다. 반면에 신성 내에서의 아들은 영원하시다. “아들”이라는 용어는 신성에 적용할 때 은유적으로 사용된다. 그것은 신성 내에서 인격들을 구분하고, 영원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본질이 동등하다는 사상을 전달한다. 엘렌 화잇은 이렇게 적는다.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뚜렷한 하나님의 개성을 지니고 존재하셨으며 하늘 아버지와 하나이셨다”(가려뽑은 기별 1권, 247). 이 고백은 그 비유의 주요 목적을 잘 요약한다.
베드로의 고백은 단순한 말의 표현을 넘어 그의 삶과 행동으로 나타났다. 물론 베드로는 이후에 여러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예수님을 증거하며 살아갔고, 순교의 길을 걸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믿음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전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거하며, 그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사랑과 진리를 반영할 때, 우리는 진정한 제자로서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수천년전 베드로의 고백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도전과 기회를 준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고백하며, 그분의 제자로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믿음이 단순한 지식이나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진리를 세상에 전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을 믿는 자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주어신다. 이 복된 진리를 굳게 붙잡고, 날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32. 간구의 영을 보내주신다.
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슥12:10-14 말씀 아멘!!
본장 1절부터 언급된 가시적인 육적 구원에서 비가시적인 영적 구원으로 내용이 전환된다(신 30:1-10, Expositers Com.). 14절까지 이어지는 본 단락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전개될 예루살렘의 회개 운동(행 2:14-41)과 그로 말미암아 일어난 교회의 점진적인 확장을 예시하고 있다. 이는 구약 시대의 종결과 함께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 의한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예언이기도 하다. 그중 10절에 내가,,,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의 본 구절에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제유법적 표현인 바, 이는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언약 백성을 가리킨다. 한편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은 곧 ‘은총을 전달하고(히10:29), (사람들에게) 간구할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이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Perowne). 실로 하나님의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전 인격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아 알게 하고 그의 잠재된 죄의식을 일깨워서 사유와 구원의 간구를 하도록 인도하시는 바, 이러한 성령의 사역의 시작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성취되었다(욜 2:28-29, 행 :1-4).
그리고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통곡하듯 하리로다”에는 성령의 사역을 통한 본격적인 예루살렘의 회개의 정황이 묘사된다. 한편 본 구절의 ‘그를’(אֵלַי 엘라)은 문자적으로 ‘나를’(me, KJV, NIV)이란 뜻으로 본장의 화자인 하나님 자신과 연관되는 말인 바, 이는 본 절의 예언적 정황에 비추어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곧 그 백성들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 그들이 죽인‘찌른 바’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바라보고’ 독자의 죽음을 슬퍼하듯이(렘 6:26, 암 8:10), 또한 출애굽 당시 애굽 사람들이 장자의 죽음을 슬퍼하듯이(출 11:5-6) 전심으로 회개하고 애통해 할 것임을 예시한다. 한편 이 예언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후 베드로의 설교(행 2:36)를 들은 유대인들의 회개로 일차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그러나 완전한 성취는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다(롬 11:25-27).
스가랴 선지자는 그 날에 있을 전 국가적인 회개의 광경을 역사적 사건을 통해 비유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의 애통’은 곧 요시야가 므깃도 골짜기에서 있었던 애굽과의 전쟁에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죽은 후에 그의 죽음에 대해 온 이스라엘이 애곡한 역사적 사실을 가리킨다(대하 35:20-27). 한편 ‘하다드림몬’의 정확한 위치는 할 수 없으나, 단지 므깃도 골짜기 근처의 한 성읍으로만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제롬(Jerome)은 이를 예루살렘과 근접한 ‘막시미아누폴리스’(Maximianupolis)로, 현대의 주석가들은 므깃도 근처의 ‘엘-랏준’(el-Lajjun)으로 각각 이해한다.
12~14절의 ‘온 땅 각 족속’은 이하 구절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각 족속을 모두 포괄하는 말인 바, 그 회개가 거국적인 것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본문에 ‘따로’란 말이 11회나 반복되고 있는 것은 그 회개가 비록 거국적인 것이지만, 그 회개의 실질적인 효용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각 개인에게 속한 것임을 주시시키기 위함이다(요일 1:9,10). 이러한 사실은 ‘아내들이’란 말의 반복 속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난다. 특별히 여기서의 ‘아내들’은 각 가정의 소속원 개개인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한편 본문에서 특별히 거론된 내 족속 중 ‘나단’은 다윗의 아들이고(삼상 5:14), ‘시므이’가 레위의 손자라는 사실(민 3:17, 18, 21)을 고려할 때, 이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대별된다. 즉 다윗과 나단의 족속은 다윗의 가계로 이어지는 통치 계급을, 레위와 시므이의 족속은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제사 계급을 각각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지도층 족속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14절에 언급된 ‘모든 남은 족속’과 함께 12절의 ‘온 땅 각 족속’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혜를 구하며 용서를 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이 배반했던 하나님을 바라보며 독자를 잃은것처럼 통곡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심령을 조금씩 주시는 것이 아니라, 넘치도록 부어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건설하시는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들의 심령이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에 잠겨 철철하게 변화하는 것을 경험한다.
은혜를 구하며 용서를 구하는 심령이 필요하다. 은혜는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는 사랑을 말한다. 자격이 있는 자에게 주는 것을 일종의 보상이요, 대가다. 하나님 앞에소 우리는 철저하게 자격을 상실했다. 그로므로 우리는 우리의 공로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한다. 그 은혜의 가장 근본은 용서로서, 우리는 용서받은 뒤에 다른 은혜를 더하여 구할 수 있다. 용서라는 것을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셨다. 이제 용서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돌아오셔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불러 주시는 것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돌아오셔서 자기 백성을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것을 용서라고 한다면 스가랴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이미 하나님께서는 돌아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건설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그렇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스가랴 12장 10-14절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간구의 영을 부어주시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회개 하며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간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회복과 구원의 기쁨을 주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