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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8일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대림절 둘째 주일)
“오십시오, 주 예수님”
말3:1~4; 빌1:3~11; 눅3:1~6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과거 2천 년 전, 주님은 로마의 속국, 유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2천 년 전에 오신 우리 주님의 탄생을 기억하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가 대림절입니다. 우리 성경은 창세기의 “태초에..”로 시작하여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으로 끝이 납니다. 요한계시록을 쓴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환상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어두웠고 혼란스러웠으며, 온갖 전쟁과 대결로 인해 세상의 역사는 한 마디로 피흘림의 역사였습니다. 지금도 이곳 저곳에서는 전쟁과 폭력적인 정쟁이 계속되고, 아직도 세상 어딘가에선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이들이 있지만, 우리 역사에서 우리가 이만큼 안정적인 삶을 누리는 것은 최근의 몇십 년입니다. 우리의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부유하고 안정적인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 마음의 풍경은 그렇게 평화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어떨 때는 메마르고, 어떤 때는 찬바람이 불고, 어떤 때는 폭풍이 일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무시무시한 환상들은 어쩌면 우리 시대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또 우리의 마음 속 풍경일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은 그 모든 폭력과 상처와 눈물에도 불구하고, 결국 주님이 다시 오시고 새하늘과 새땅이 열릴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 모든 계시를 증언하시는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계22:20)
대림절과 성탄절은 아기 예수가 태어나기를 감상적으로 기다리는 절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대림절을 산타클로스에게 선물 받을 일을 기억하며 성탄절을 기다리는 순진한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기다릴 수 없습니다. 화려한 백화점의 성탄트리와 값진 선물들, 그리고 성탄을 배경으로 하는 따듯하고 감미로운 미국 영화는 더 이상 우리의 현실을 바로 보여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미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런 성탄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대림은 그런 성탄의 추억이 아니라, 우리의 척박한 현실 속에서 “오십시오, 주 예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희망이 우리 가운데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성인이 되어버린 우리의 질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요청하면서, 혹은 우리의 불안이나 불만을 없애달라고 요구하면서, “왜 주님은 나에게 이렇게 해주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인생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습니까?”라고 탄식합니다. 하지만, 정작 “오십시오, 주 예수님”이라고 말하기는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주님께 온전히 승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실 자리를 비워놓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주시는 “완전한 충만함”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실, 주님의 “완전한 충만함”은 언제나 올 것이라서 우리가 요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할 일은 “깨어 있는” 일 뿐입니다. 리차드 로어 신부는 대림절을 대표하는 5개의 a로 시작하는 단어가 있다고 합니다. 알아차리다(aware), 살아있다(alive), 주의를 기울여라(attentive), 경계하라(alert), 깨어있으라(awake). 그러면서 그는 말합니다. “대림절은 무엇보다도 완전한 의식에 대한 요청이자 의식의 정점에 대한 예고다.” 저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오늘 대림절에 우리가 “오십시오, 주 예수님!”이라고 응답하는 일은, 주님께서 우리 인간의 의식을 조금씩 조금씩 성장시키고 진화시키는 아주 긴 과정에 우리가 깨어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결국은 주님께서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삶의 진보를 완성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대림절은 우리가 깨어있어 우리의 의식이 점점 자라는 것을 기억하고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어린애 같던 의식에서 어른의 의식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보는 방식, 다른 사람을 보는 방식, 세상을 보는 방식이 성숙한 시선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좀 더 전체를 볼 수 있는 시선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에 따르면,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는 것”(엡4:13)이요, 골로새서의 말씀에 따르면,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것”(골2:8)입니다.
오늘 우리는 깨어있는 한 사람, 성숙한 의식을 가진 세례자 요한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사람들에게 메시야의 도래를 알린 사람입니다. 동시에 세례자 요한은 우리 모두에게 의식의 변형의 필요성을 깨우친 사람입니다. 그는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쳤는데, 이는 의식의 변형, 즉 의식이 더욱 성장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은 이때의 시대적 배경을 여러 번 중복해서 말해줍니다. 디베료(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제15년(서기28~29년),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행정관)으로 유대를 통치하던 때(서기26~36년 어간), 그리고 세 명의 분봉왕(헤롯 안디바, 빌립, 루사니아)이 유대의 각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때(이때 유대는 헤롯대왕 이후 그 아들들에 의해 네 지역으로 나뉘어 다스려졌다), 그리고 안나스와 사위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던 때.
다중의 시대 표기입니다. 나중에 폭군이 된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헤롯 대왕 이후 나라를 분할 통치하면서 권력의 암투를 벌였던 헤롯의 아들들, 종교권력을 쥐락펴락 했던 종교권력자 대제사장! 얽키고 설켜 유난히 복잡하고 치열했던 시대입니다.
바로 이때 세례자 요한이 하나님의 메신저로 등장합니다. 그는 “오실 그분”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분이 오시도록 길을 준비하라는 것이지요. 미리 길을 닦가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광야에서 그 소명을 받습니다.
누가가 이렇게 자세하게 시대적 배경을 알리는 이유는 뭘까요? 어떤 학자들은 본디 이 3장이 누가복음의 시작(원시 누가복음)이었다고 말합니다. 1~2장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시절 이야기는 나중에 서론 격으로 붙은 거라는 거지요.
사정이야 어쨌든, 우리는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 치열하게 돌아가는 정치적, 사회적 시대 속에서, 정치권력, 종교권력이 백성들을 통치하고 있던 그때에, 광야에서 외쳐지는 한 소리를 듣게 됩니다. “디베료 황제가 왕위에 오른지...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권력 잡은 자들의 세계와 멀리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작은 소리가 대비되어 부각됩니다. 권력의 암투가 있고 짓밟고 올라가는 경쟁이 있고 바쁜 비즈니스가 있는 세계, 쾌락과 만족이 있는 동시에 심한 스트레스와 긴장이 있는 이 세계 저 뒤 켠에, 저 멀리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습니다. 광야는 황제나 총독이나 분봉왕이나 대제사장들에게는 가려져 있고 숨겨져 있는 곳입니다. 권력 잡은 자들의 세계 속에서 광야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그들은 보려고 하지도 않고 볼 필요도 없는 곳입니다. 광야는 권력이나 쾌락이나 만족과는 거리가 먼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부터 그 곳에서는 계속해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길을 준비하라고, 그 길을 곧게 하라고, 골짜기는 메우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라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하라고... 그래서 오실 그분을 맞이하라고!
여러분,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두 세계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권력의 암투가 있고, 무한 경쟁이 있고, 바쁜 비즈니스가 있는 이 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 세계의 톱니바퀴에 따라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계를 벗어나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주 멀리 광야와 같은 곳에서, 일상과는 먼 저 깊은 곳에서, 들리는 소리도 있습니다. 주님의 길을 준비하라고, 태어날 아기를 맞을 준비를 하라고, 참된 너 자신이 되라고, 좀더 진정성 있는 삶을 살라고... 이 소리는 정치적 이슈도 아니고 경제적 이득과도 상관이 없고 심리적 만족과도 같지 않습니다. 심지어 종교적인 위안도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소리는 영적인 소리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 이 소리는 한밤중 아니면 이른 새벽 문득 깨어났을 때, 혹은 혼자 있는 외로운 시간, 기도하는 고요한 시간 중에 들려올 수 있습니다. 아니면 꿈속에서 들려오기도 합니다. 이 소리는 너무 희미해서 “깨어있어”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거의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 왠지 모를 불안함으로, 뒤숭숭함으로, 심란함으로, 혹은 우울증으로도 찾아옵니다. “오십시오, 주 예수님!”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편견과 어린아이 같은 유치함을 넘어 우리의 의식의 지도를 바꾸고 넓히라고, 그래서 새로운 시대를 맞을 준비를 하라고!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라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하라고!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 만이 아니라, 특별히 2024년 대림절 첫 주간에 우리나라는 엄청난 대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계엄의 트라우마가 있는 우리로서는 믿기지 않은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은 다시 한번 춥고 긴 겨울밤을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빨리 이 혼돈이 진정되어 안정과 평화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는 이 역사적 혼돈이 한번 정돈 되고 나면, 우리나라는 더 확고한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직 우리의 민주주의가 덜 여물었던 것입니다. 아이도 한번 아프고 나면, 더 약아지고 더 성장합니다. 지금은 우리 역사가 다시 한번 홍역을 앓으면서 출렁이는 시간입니다. 깨어있어 추이를 보면서 기도하고 행동할 때입니다. 대림절이 인간의식의 진화와 성장에 대한 기다림이라면, 그리고 진정 그리스도가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시라면, 여전히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도 어제보다는 조금씩 더 성장하고 있습니다. 지난 백 년 동안의 역사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세례자 요한의 등장을 알리는 대목에서 누가는 먼저 당시의 통치자들을 자세히 열거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 세상과 불가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유토피아 같은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그 속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선 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기도와 행동은 바로 광야 같은 곳, 일상과는 먼 저 깊은 곳과 연결되도록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억합시다. 우리는 자신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고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오만을 버려야 합니다. 각자가 지금 자신이 선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행동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성경 하나 놓고 계시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각자가 자신의 선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행동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행동을 할 때, 거기에는 내가 모를 그 사람만의 깊은 연원과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동일시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생각을 동일시하는 것은 더욱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어쩌면 어떤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유일한 하나”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결정하고 행동하는 일은 언제나 “잠정적인 최선”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똑똑한 몇 사람이, 혹은 힘센 권력자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인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고, 하나님께서 진화시켜 나가신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살림교회 식구 여러분, 오늘 사순절 둘째 주일에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우들에게 했던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강 주변을 찾아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볼 때, 회개는 내 안에 있는 장애들을 치우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골짜기는 메우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라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곧은 길을 내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도록! 그래서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도록!
다시 한번 사도바울의 기도를 기억합시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서,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이 없이 지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차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