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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문학·예술 속에 나타난 모습
우리나라의 기본 골격이 백두산으로부터 지리산에 이르는 산맥계가 중추가 된다는 인식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다. 그래서 지리산을 백두산이 흘러내린 산이라 하여 두류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전래의 지리 사상인 풍수지리설에서도 받아들인 바이거니와, 실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전혀 이의 없이 전수되어온 땅에 대한 우리 민족의 기초적인 관념인 것이다. 이것을 가장 극명하게 밝힌 이가 신경준이다. 신경준은 그의 「산수고」에서 산의 족보라고 할 수 있는 산맥세의 흐름을 상세하게 파악한 바 있는데, 뒤에 이것을 기초로 『산경표(山經表)』가 만들어졌다. 백두산을 시작으로 하여 지리산에서 끝나는 맥세를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지리산은 민족의 진원지며 영산으로 추앙받는 백두산의 한반도 남부를 대변하는 산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이것이 풍수사상에서는 민족적인 주체의식을 상징하는 의미를 띠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실상사의 풍수전설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백두산의 기맥(氣脈)이 이곳을 지나 일본으로 연결되는데 그 지기(地氣)를 끊어 놓기 위하여 창건한 사찰이 바로 실상사라는 것이다. 예컨대 경내 약사전에 봉안된 4,000근짜리 무쇠로 제작된 약사여래철불은 높이 2.5m로 좌대 없이 땅바닥에 그대로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은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과 일본 후지산(富士山)을 일직선상으로 바라보도록 좌정되어 있는데, 맨 바닥에 철불을 모신 이유가 일본으로 흘러가는 지기를 막자는 데 있다는 것이다. 보광전 범종에 그려진 일본 지도 역시 매일 종을 때릴 때 얻어맞는 위치에 일본이 그려져 있어 위의 이야기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지리산 도처에서 들을 수 있는 설화들인데, 남원시 주천면 노치산 갈재의 「숯막이야기」는 고종이 그곳에 숯 수천 가마를 쌓고 불을 놓아 일본으로 가는 지맥을 막았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혹은 동학운동 때 또는 의병항쟁 때 왜군을 피하여 들어간 사람들의 한맺힌 이야기들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지리산에는 지리천왕(智異天王)과 여신(女神)숭배의 설화들이 있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보면 그는 천왕봉에 발을 딛고 맨 먼저 그 천왕봉에 있는 성모묘에 제를 올리는데, 당집에 들어가 주과(酒果)를 차려놓고 성모상 앞에서 비는 일이 그것이었다.
이 성모상의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첫째로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는 설이 그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교에서 마야부인상을 숭배하는 전통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 설은 후세의 윤색이 아닌가 싶다. 둘째로 고려왕계를 성스러운 혈통으로 인식시키기 위하여 고려 왕실에서 도선선사(道詵禪師)로 하여금 이 성모상을 만들게 하였다는 설이다. 성모에 대하여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지금 지리천왕은 곧 고려태조의 비 위숙왕후(威肅王后)라 하고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의 이야기(三國遺事 感通 第七, ‘仙桃聖母隨喜佛事’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음.)를 듣고 이를 그들 임금의 핏줄로 삼고자 이를 만들어 받든다고 하였다. 셋째로 도선이 지리산에 선암(仙巖)·운암(雲巖) 등 삼암사(三巖寺)를 세우면서 이 절을 세우면 삼한을 통일할 수 있다는 성모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 뒤 고려를 세워 후삼국을 통일한 뒤 계시를 내린 성모상을 세워 받들었다는 설이다. 넷째로 중국의 여신인 마고(麻姑)가 동쪽으로 와 정착한 것으로 믿고, 그 여신 숭배가 이 성모상을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전설에 지리산의 산정에 사는 여신의 이름이 마고 또는 마야고(麻耶姑)로 불린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다. 그래서 마고성모라는 복합어를 쓰기도 한다. 「마고전설」은 지리산의 능선을 형상화하고 있는 면도 있다. 마고는 반야(般若)를 사랑하였다. 어느날 반야는 돌아오겠다고 기약하고 떠났으나 오지를 않는다. 마고는 기다림의 초조로 나무를 할퀸다. 이것이 지리산 주능선 부근의 고사목(枯死木)이다. 그 올로 베를 짜던 자리가 세석평전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천왕봉의 돌무덤 위에 앉아서 서쪽 하늘을 보면 낭군봉인 반야봉이 마치 달려올 듯한 산세로 눈에 담긴다. 산 주변에서 익히 들을 수 있는 설화·전설들 외에도 음악에 있어서 민요가 주변 산촌에서 불려지고 있을 법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지리산을 주대상으로 삼은 것 같지는 않다. 예컨대 아리랑의 경우, 「남원아리랑」·「하동아리랑」 등이 있으나 지리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지리산을 소재로 혹은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들을 보면 『고려사』 악지나 『증보문헌비고』에 작자나 연대는 알려지지 않은 「지리산가(智異山歌)」라는 백제 때의 가요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아마도 이것이 지리산에 대한 최초의 문학·예술 작품이 아니었겠는가 여겨진다. 구례의 한 여인이 지리산 밑에 살았는데, 용모가 아름답고 부덕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임금이 그 여자를 데려가고자 하나 죽기를 한하고 듣지 않으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본격적인 지리산 기록은 역시 기행문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조선 시대의 기행문으로는 김종직의 「유두류록」(佔畢齋集 권2), 이륙(李陸)의 「유지리산록(遊智異山錄)」(東文選 권21), 남효온(南孝溫)의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秋江文集 권6), 김일손(金馹孫)의 「속두류록(續頭流錄)」(濯纓集 권5), 조식(曺植)의 「유두류록」(南冥文集 권4), 양대박(梁大樸)의 「두류산기행(頭流山紀行)」(淸溪集 坤), 박장원(朴長遠)의 「유두류산기(遊頭流山記)」(久堂集 권15), 정협(鄭悏)의 「유두류록(遊頭流錄)」(東文選 권21), 송병선(宋秉璿)의 「두류산기(頭流山記)」(淵齋文集 권21) 등이 있다. 이 중 김일손의 지리산 기행문 내용에서 몇 가지 표현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일행은 종자(從者)를 제외하고 정여창(鄭汝昌)·임정숙(林貞淑) 등 세 사람이며, 날짜는 4월 14일이다. “단성(丹城) 서쪽으로 15리를 지나 또 비탈을 타고 서너마장을 가니 골짜기 입구 바위에 ‘광제암문(廣濟巖門)’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자획이 고고(高古)하여 세상에서 최치원(崔致遠)의 수적이라고 전한다.……나무를 휘어 농기구를 만들고 쇠를 달구어 연장을 만드는 것으로 생업을 삼는 마을이 있어 감탄하니, 따라온 중이 일러주기를, 이런 외진 땅에 사는 것은 이정(里正)의 박해가 없고 과중한 부역의 고통을 받지 않은 지 오래이기 때문이라 하였다.……길은 없고 다만 천길 바위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마치 은하수를 거꾸로 쏟는 듯하고, 오가는 나무꾼이 작은 돌멩이를 올려놓아 길을 표시하여 두었는데 나무그늘이 하늘을 가리어 햇볕이 들지 않았다.
시내가 그치고 대숲을 헤쳐 나오니 이윽고 땅은 모두 돌인데, 칡덩굴을 더위잡고 굴면서 숨가쁘게 10여 리를 걸어서 한 높은 고개에 오르니, 철쭉꽃이 활짝 피어 별천지를 이루고 있었다. 우람한 봉우리 세존암(世尊巖)을 만나 마침 사다리가 있어 올라가 바라보니 천왕봉이 10리 정도 되어 보였다.여기서 5리쯤 가서 법계사(法界寺)에 닿으니 중은 한 사람밖에 없고, 산꽃이 곱게 펴 저문 봄철을 수놓았다. ……저물녘에 봉우리의 절정에 오르니 바위 위에 한 칸의 판옥(板屋) 한 채가 겨우 서 있었다. 그 안에 여자의 석상이 있는데 이른바 천왕(天王)이란다. 지전(紙錢)이 어지러이 들보 위에 걸리었고, ‘김종직·유호인(兪好仁)·조위가 성화 임진(成化壬辰, 1472년)에 함께 오르다’고 쓰여 있었다. 예전에 구경 온 사람들의 성명을 훑어보니 당세의 호걸들이 많았다.” 위의 일부 인용한 글로써 당시 지리산의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을 정도로 그 묘사가 섬세하다. 또 알려진 한시로는 김부의(金富儀)의 「등지리산(登智異山)」, 김돈중(金敦中)의 「지리산차계부운(智異山次季父韻)」, 이색(李穡)의 「두류산」, 이첨(李詹)의 「두류산」, 양성지(梁誠之)의 「지리산」, 최익현(崔益鉉)의 「등두류산(登頭流山)」·「천왕봉(天王峯)」, 유방선(柳方善)의 「청학동(靑鶴洞)」 등이 있다. 현대작품으로는 이병주(李炳注)의 『지리산』, 문순태(文淳太)의 『달궁』과 『피아골』, 서정인(徐廷仁)의 『철쭉제』 등의 소설이 있는데, 이들은 거의가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좌우 대립에 따른 민족의 뼈아픈 과거를 묘사하고 있다. 이는 지리산이 현대사에서 차지하였던 첨예한 이념 대립의 공간적 현장성의 반영인 것으로 보여진다. 또 산을 둘러싸고 있는 전라북도·전라남도·경상남도의 작가들로부터도 시·소설·수필 등 다양한 소재의 작품들이 발표되었으나, 대부분이 서정성을 짙게 풍기는 것들이다. 이것은 아마도 직접 몸으로 그 뼈저린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쓰라린 상처를 덮어두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혹은 묵중하고 푸근한 지리산의 웅자가 그 섬세한 정기로 모든 인간의 아픔을 감싸안은 것인지도 모른다.
자원과 이용
이 지역에는 고령토·규석·금·은·니켈·수연 등의 광물이 산출된다. 고령토는 산청·하동 일대에 넓게 분포하며 세계적으로 희귀한 암석인 변성아노르소사이트가 오랜 세월을 두고 풍화작용을 받아 생성되어 매우 품위가 높다.
요업의 원료 광물로 귀하게 쓰일 수 있는 양질의 고령토는 매장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수출 위주로 없애기보다는 주요 전략 지원 광물로 비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남원시 산내면 뱀사골과 그 밖의 여러 지역에서는 반도체 원료로 쓰이는 질 좋은 규석광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편마암류를 관입한 석영맥에서 산출되고 있다. 이 밖에도 니켈과 수연광이 운봉읍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경제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은 남한의 총 삼림 축적량의 19%를 차지하는 방대한 임산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전나무·잣나무·가문비나무·주목 등의 경제적 가치가 있는 수종은 기존 임목을 보호함과 아울러 파괴된 식생을 완전 식생으로 복구시켜야 할 것이다. 또한 사방조림용 임목도 지리산에서 자생하고 있는 잔디·칡·오리나무 종류를 사용함으로써 생태계를 자연 상태에 가깝도록 유지하는 것이 임산자원을 확보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지리산은 산형이 다기다양(多奇多樣)하고 고준광대(高峻廣大)하면서 중후인자(重厚仁慈)하여 아버지 같기도 하고 어머니 같기도 한 웅대한 산악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1967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리산은 천왕봉·반야봉·노고단 등의 3대 주봉과 함께 해발 1,500m 이상의 큰 봉만도 십지(十指)를 보유하고 있고, 피아골·뱀사골·화엄사계곡 등 10㎞ 이상의 계곡이 10여 개나 된다. 또한 불일폭포(佛日瀑布)·구룡폭포(九龍瀑布)·칠선폭포·가내소폭포 등이 명소를 이룬다. 북동쪽으로는 남강(南江)이, 남서쪽으로는 섬진강이 흘러 강과 산의 조화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지리산은 세석평전을 덮고 있는 철쭉나무 군락, 피아골의 원시림,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노고목(老古木)과 전설처럼 신비한 고사목(枯死木), 그리고 사향노루·산양 등 동물의 안락한 서식지로서의 가치와 함께 의미 깊은 관광자원들이 많은 곳이다.
거기에 웅대한 사찰들과 유서 깊은 암자들, 국보와 보물·사적·천연기념물들이 지리산의 정취를 한결 돋보이게 한다. 세석평전에는 매년 5월에 철쭉제가 열리고, 매년 4월에는 자작나무에서 받은 수액으로 약수제를 지낸다.
지리산10경으로 노고운해(老姑雲海)·피아골단풍·반야낙조(般若落照)·섬진청류(蟾津淸流)·벽소명월(碧沼明月)·불일폭포·세석철쭉·연하선경(烟霞仙景)·천왕일출(天王日出)·칠선계곡을 꼽는다. 웅대하고 수려한 산세로 등산객들이 많이 찾으며 다양한 등산길이 정비되어 있다. 등산로로는 화엄사에서 노고단·임걸령·반야봉·뱀사골산장·연하천·벽소령·덕평봉·세석평전·장터목·천왕봉·법계사중산리에 이르는 지리산 종주 코스, 백무동에서 한신계곡·하동바위·장터목·천왕봉에 이르는 길, 신흥에서 대성동·세석·천왕봉에 이르는 길, 중산리에서 법계사·천왕봉에 이르는 길 등이 있다. 인근 도시에서 버스편으로 당일에 가볼 수 있는 관광지도 있다. 남원에서 16㎞ 떨어진 호경에서는 구룡폭포를 볼 수 있고, 32㎞ 떨어진 산내에서는 실상사를 볼 수 있다. 이곳에서 4㎞를 더 들어간 경상남도 마천에서는 백무동계곡과 칠선계곡을 구경할 수 있으며 다시 산내에서 8㎞를 더 들어간 반선에는 유명한 뱀사골계곡이 나온다. 화엄사는 구례에서 6㎞인데,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10㎞밖에 안 되기 때문에 쉽게 노고단에 오를 수 있다. 구례에서 연곡을 지나 연곡천을 끼고 8㎞를 더 오르면 내동에 이르고, 여기서부터 피아골계곡이 시작된다. 진주에서 35㎞ 떨어진 중산에서 천왕봉까지는 12㎞밖에 되지 않아 이 길이 지리산 주봉을 오르는 최단 거리이다.
교통편은 경부선·호남선·전라선이 연결되어 남원·구례·진주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어 편리하다. 화엄사의 표고버섯탕과 구례의 은어회가 별미이다.
참고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동문선(東文選)』
『점필재집(佔畢齋集)』
『택리지(擇里志)』
『산경표(山經表)』
『족암문집(族庵文集)』
『대동지지(大東地志)』
『호남읍지(湖南邑誌)』
『지리산국립공원 야생동물생태계 정밀조사』(국립공원관리공단, 1998)
『지리산국립공웜 자연생태계보전 계획』(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관리사무소, 1997)
『한국지지』지방편 Ⅲ(건설부국립지리원, 1985)
『전라북도종합개발계획』1982∼1991(전라북도, 1982)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2)
『한국지지』총론(건설부국립지리원, 1980)
『지리산국립공원식물자원조사』(건설부, 1979)
『지리산지역개발에 관한 조사보고서』(지리산지역개발조사연구위원회, 1963)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10-10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