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민족의 고난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이후 조선은 서구열강의 잔치상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과 1895년, 명성황후의 시해사건, 1904년, 러일전쟁과 ,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합방으로 가는 조선의 멸망행로는 그야말로 참담하였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후, 한반도의 주도권은 이미 일본제국주의의 손아귀에 있었습니다. 한국은 지리적으로 가장 좋은 토양과 함께 가장 불행한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외국간의 전쟁이 조선반도내에서 일어나고 패자는 물러갔지만 승자는 여전히 조선에 남아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조선에서 일본화폐를 혼용할수 있도록 법제화 하였습니다. 봉건적 신분제와 가족제도, 관료특권에 관한 개혁을 단행함으로서 조선인을 해방한다는 명분으로 일본화 정책을 실현하였습니다. 조혼제도를 폐지하고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이상 결혼할 수 있으며,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였습니다. 얼핏 들어보면 근대화에 필요한 조치라는 측면에서 일부 계층의 지지를 받을수도 있으나 이것은 모두 일본의 조선지배에 관한 명분 쌓기용에 지나지 않는 법조항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조선인에게는 그 어떤 자유와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 무법천지 세상이 되는 기로에 선 것이었습니다. 1895년, 천진조약을 통해 중국군대를 조선에서 완전히 퇴각시킨후 정치, 경제, 사회전반의 모든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의정부, 내무, 군무, 경무청, 행정, 재정, 군사, 경찰부서에 관한 일본 고문인의 제도개편이 추진되었습니다. 10월 개편된 김홍집 내각은 망건착용 폐지와 외국복제의 착용을 개방화정책의 1단계로 발표하고 거리 곳곳에서는 상투를 자르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1895년 7월6일, 명성황후는 러시아공사 “웨버”와 결탁하여 박영효 등 친일세력을 추방하고 친러파인 “이완용”을 내각에 합류시킨후 일본군대마져 해산해 버렸습니다. 이에 분노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우”가 1895년 10월7일, 일본인 조폭들을 고용해 명성황후 암살을 주도하였습니다. 명성황후의 옷을 찢고 발가벗겨 시신을 유린하고 불에 태워버린 사건에 대하여 “도움이 가장 필요한 그 순간 조선에서 누구하나 용기있는 자를 찾아 볼수 없었다”고 제임스 게일은 회고하였습니다. 힘이없는 조선인들의 일본에 대한 감정은 격화되고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지만 실효성있는 대책과 방안은 전혀 강구되지 않았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후 고종황제는 신변에 위협을 느끼며 불안해 하였습니다. 고종은 알렌과 언더우드, 에비슨, 헐버트 선교사들에게 협조를 구하고 이들을 통하여 신변보장을 받으려고 하였습니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계열의 친미, 친러파 관리들은 고종황제를 궁궐밖으로 이어하려는 “춘생문 사건”(春生門事件)을 일으켰습니다. 시종원경 이재순, 시종 임최수, 탁지부사계국장 김재풍, 참령 이도철과 정동파 관료출신 이범진, 이완용, 윤웅렬, 윤치호, 이하영, 민상호, 현흥택과 미국공사관 알렌과 러시아공사 베베르 등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여 고종황제를 궁궐밖으로 모시려 하였으나 친위대 대대장 이진호의 배신과 밀고로 이 사건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조선왕실과 선교사들의 밀착관계로 신뢰를 얻은 기독교 선교사들은 압박받는 조선왕실과 조선인들에게 굳건한 신앙심을 심어 줌으로서 애국으로 이어져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기독교 사상은 일본제국주의 사상과 모든 면에서 불일치 하였고 이것이 애국으로 이어졌습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후 정동감리교회에서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설교로 대규모 추모예배가 있었습니다.
1894년,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 1887년,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반을 수료한 “홍정후”, 1895년, 미국 밴드빌더대학을 졸업하고 남감리교를 창설한 “윤치호”, 1896년, 김홍집 내각의 고문을 맡은 “서재필”은 모두 어려운 환난의 조선시대 애국자들이었습니다. 1896년 4월7일, 배재학당내에 사무실을 둔 “독립신문”이 창간되었고, 윤치호, 이승만, 주시경 등 배재학당 교사들이 신문발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1898년 2월21일, 이들이 주도한 “독립협회”는 윤치호 등 135명의 제의에 의해, 결사적인 구국운동을 서약하고 국가의 재정권, 군사권, 인사권을 회복하고 전장법도를 준수하여 국권을 자주하자는 구국상소를 올렸습니다. 3월10일, 종로4거리에서 1만명의 군중을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라는 대중 집회를 개최하였으나 일본제국주의는 간부 17명을 투옥하고 1899년, 강제해산 하였습니다. 이승만이 투옥되자 감리교 “벙커” 목사가 매주일 정기적으로 감옥을 방문하여 주일예배를 드렸으며, 이승만의 요청으로 감옥에 도서관을 개설해 기독교서회와 성서공회 서적들을 보급하였습니다. 독립협회 관련으로 투옥된 정치범 가운데 12명이 벙커에 의해 세례를 받았고, 이들 모두가 출옥한 후 “연동교회” “게일” 선교사로부터 성경진리를 배웠습니다. “이원긍”은 서울 “묘동교회” 장로가 되었고, 1906년, “유성준”은 국한문신약전서 역간에 공헌하고 서울 “안국동교회” 장로가 되었으며, “이상재”와 “신흥우”는 “YMCA설립”과 발전에 공헌을 하였고, “김정식”은 일본 동경에 “한국인 YMCA”를 설립하고 한국유학생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지식인 계층 가운데 관찰사 “박승봉”은 안국동교회 장로, 성천군수 “조종만”은 묘동교회 장로, 왕족 “이재형”은 양평교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는 일본의 독주를 견제하고 조선에 친러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불리우는 고종황제의 러시아 공사관 파천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발단으로 일어난 것이지만 러시아도 각종 이권에 개입하며 제국주의적 근성의 민낯을 드러내었습니다.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러시아 정교회”가 조선에 파송되었고 1904년, 9천명의 신도로 성장하였습니다. 같은 시기 압도적인 군사력을 키운 일본은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조선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평양을 비롯한 전국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발발하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인에게로 향하였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승리는 영국과 미국이 제공한 4억달러의 차관이 한몫을 하였습니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일본지원은 러시아를 고립시켰고 극동지역 군사력만으로는 결코 전면전을 치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유럽의 강자, 러시아의 후퇴는 일본에게는 더 큰 제국주의적 야욕을 주었고, 세계 제1차대전으로 가는 전초전이 되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제국주의는 1904년 2월23일, “한일협정서”를 통해 조선에서의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 미국과의 “가츠라 태프트‘(Taft–Katsura agreement) 밀약은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의 대한제국에 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것을 골자로 1905년 7월29일,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내각 총리대신 “가츠라 다로”가 동경에서 회담한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함께 1905년 8월,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고 일본의 조선 지배권 강화에 동의하면서 영국의 인도 지배권을 확보하는 제국주의적 약육강식이 계속되었습니다.
1905년 11월17일, “을사조약”(乙巳條約)으로 불리워지는 “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었습니다. 1904년 8월22일,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재정, 외교의 실권을 박탈하였습니다. 11월9일, 추밀원장 “이토”(伊藤博文)를 고종위문 특파대사로 파견하여 고종황제를 위협하였습니다. 11월15일, 고종황제를 2차 배알하여 한일협약안에 서명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거절당하고 11월17일, 일본공사가 한국정부 대신들을 불러 강제승인하게 하였으나 거부결의로 결정되었습니다. 이토는 주한일군사령관 “하세가와”를 대동하여 세차례 고종황제를 알현하였으나 거절당하였습니다. 이에 분개한 이토는 무장한 헌병들을 대동하고 입궐한 자리에서 다시 회의를 강제 속개하고 한명씩 가부를 물었습니다. 한규설(참정대신)과 민영기(탁지부대신)는 절대 반대, 이하영(법부대신)과 권중현(농상공부대신)은 소극적 반대하다가 권중현은 협박에 굴복하여 찬성, 이완용(학부대신)과 이근택(군부대신)과 이지용(내부대신)과 박제순(외부대신)은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수정조건 찬성을 표하였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구명하기 위해 찬성표를 던져 나라를 일본에 팔아버린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등 5명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말하지만 이미 조선은 망해버린 나라였습니다. 을사조약의 체결로 사실상 나라를 잃은 조선에 주둔하였던 주한 외교공사들과 모든 외교기관들은 전부 폐지되었고, 본국으로 철수하였습니다.
1905년 11월20일,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발표하고 일본의 제국적 침략과 만행을 규탄하였으며, 고종 황제는 11월22일, 미국에 체재중인 황실고문 “헐버트”(Hulburt, H. B.) 선교사에게 무력으로 위협된 양국사이의 조약은 무효임을 선언하고 미국정부의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조선 기독교청년회 등 기독교는 을사조약의 부당성과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여 독립의 의지를 굳건히 세워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