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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내에서 종가와 종택 그리고 종손과 불천위 사당을 고루 갖추고,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을 실천해 종가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집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약봉 종가는 이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의정부를 지나 하송우리라는 이정표와 육군 제1291부대 표지판을 보며 종택을 찾았다. 마침 묘소를 단장하고 있는 15대 종손인 서동성(徐東晟, 1955년생)씨를 만났다.
종손은 소년 시절에 백부(伯父)에게 출계(出系·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여 약봉의 종통(宗統)을 이었다.
생가(生家·생부모 집) 부친은 약봉의 14대손인 서기원(徐基源, 1925년생)씨다. 80이 넘은 고령임에도 건강하고 온화한 모습에 절로 경의가 표해진다. 종택에 얽힌 이야기를 요청하자 한국전쟁 때의 수난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이 지역의 대표적 종택에 걸맞는 건물 규모 때문에 인민군 사령부로 사용되었고, 펄럭이는 인공기가 목표점이 돼 미군기의 집중 폭격을 받아 전소됐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안동의 소호헌(蘇湖軒·조선 중종 때 약봉의 부친 서해 선생이 서재로 쓰기 위해 지은 별당) 앞에서 고색창연하게 자라던 50여 그루의 노송 역시 이 무렵 폭격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하는 수 없이 묘소 아래의 재실(齋室·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을 보수해 살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이 집이라고 한다. 첫눈에도 약봉 종택의 위상으로는 다소 미흡한 단촐한 신식 건물이다.
하지만 곱게 단청한 불천위 사당과 재실은 그런대로 규모를 갖추고 있었고 최근엔 신도비의 비각까지 조성했다.
약봉 종가는 서기원씨의 백씨(伯氏)인 서세원씨(1917년생)가 무남독녀를 남긴 채 일찍(25세) 세상을 떠나면서 종통의 맥이 끊길 위기를 맞았다. 당시 서기원씨는 열세 살의 어린 나이였다고 한다. 종가를 지키기 위한 고단한 여정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부친은 60세 전에 돌아가셨지만 아들들에게 평소 명문가라는 가르침과 경조 사상에 대해서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육했다.
묘소를 수호하고 상대(上代)의 묘사 날짜를 조정하는 문제, 대종회와의 협조, 종친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 생전에 세세히 알려주었다.
종통을 잇기 위해 아들을 양자로 보낸 서기원씨의 처지를 영남지방에서는 보통 ‘대원군’이라 칭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400여 년을 사이에 두고 되풀이된 약봉가의 역사 순환엔 참으로 묘한 기분마저 든다.
춘헌공 서엄, 가풍 잇게 한 일등 공신
오늘날의 약봉가는 당연히 약봉 서성 선생의 성취에 뿌리를 둔다. 그러나 그 기반에는 약봉의 부친인 함재 서해, 그리고 그의 부인인 고성 이씨, 약봉의 중부(仲父)인 춘헌공(春軒公) 서엄(徐山+奄)의 뒷받침이 있었다.
특히 춘헌공은 약봉을 학문의 길로 인도했고 명문가 규수를 배필로 맞게 했다. 그는 또한 장래에 가문을 일으킬 인물임을 알아본 지인지감(知人之感)을 지녔고 지속적으로 도움도 주었다. 말하자면 후견인, 시쳇말로 멘토(mentor)인 셈이었다.
필자는 책으로만 보았던 춘헌공의 역할을 오늘날 약봉 종손의 부친인 서기원씨를 통해 다시 확인했다. 종통의 끊어짐은 종가의 문을 닫는 것을 의미한다.
그 위기의 순간에 서기원씨가 심사원려(深思遠慮)를 발휘했다. 종가에서 종손이 후사를 잇지 못하면 당내(堂內) 또는 근친 간에서 양자를 구하게 된다. 종손으로 양자를 가게 되면 자신은 종손이지만 생가의 부친은 종손이 아닌 ‘대원군’인 것이다.
안동 지방의 대표적 명문 광산 김씨 양간공파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선생의 종가 역시 그러한 경우다. 김준식씨가 종손이고 생가 부친인 죽초(竹肖) 김택진(金澤鎭)씨는 ‘대원군’이다.
역사상 대원군으로 가장 유명한 흥선대원군의 경우 소위 수렴청정을 통해 정사에 적극 개입했다. 왕가가 그러할진대 사가(私家)의 종가 역시 생가의 부친은 종가의 일에 개입할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그 개입이 정도(正道)를 넘어 욕심에서 나오면 이는 흥선대원군이 나라를 그르친 이상으로 나쁜 폐해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약봉 종가의 생가 부친인 서기원씨는 문중의 학덕이 높은 어른인 문장(門長)과 같은 역할을 했다.
종손 서동성씨(52세)가 받았을 중압감은 일반인으로서는 헤아리기 어렵다.
중학교 1학년 때 약봉 선조의 불천위 제사를 모셨다는 그는 이미 그때 문중사나 의례에 익숙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문중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밖에 못나왔다고 말하지만, 그가 보인 예의와 언사 등은 대학을 졸업한 사람 이상으로 예사롭지 않다.
“제가 늦둥이를 보았는데,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 그 녀석도 제사 절차에 대해선 훤히 알아요”라는 말에서 명문가는 역시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고, 그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닌 것이다.
종손의 맏아들은 올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재료공학부에 입학했다. 그의 이름은 상덕(尙德)이다. 상덕은 퇴계 선생을 모신 도산서원의 사당 이름과 같다.
약봉의 부친인 함재 서해 선생이 젊은 시절 안동의 퇴계 선생을 찾아가 학문을 배워 크게 인정을 받았던 일이 오버랩된다. 역사의 반복을 또 한번 느낀다고나 할까.
약봉은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여러 아들들에게, "나라 일이 이지경이 되었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너희들은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글을 읽고 선(善)을 행하도록 하여라. 가화(家禍)가 있다고 해서 상심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지금도 약봉가는 이 말을 요약해 '勿怠爲善(물태위선)'을 가훈으로 쓰고 있다. "착한 일을 하는 데에 게으르지 말라"는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