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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돈 100원 주화 / 충무공 이순신 초상
이전의 글(옹달샘 <25>)에서 한국의 주화(1원, 5원, 10원, 50원, 100원, 500원)의 최초 발행연도를 언급한 바가 있다.
100원 주화는 1970년 11월 20일에 처음 발행되었다. 100원 주화 앞면에는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의 초상이 들어 있고, 뒷면에는 발행연도와 액면가(100), 발행처(한국은행)가 적혀 있다. 뒷면의 디자인은 1982년 변경 발행했다. 이전의 주화 뒷면 디자인은 제각각이었다. 1982년 500원 주화를 처음 발행할 때 다른 주화들도 뒷면의 디자인을 하나로 통일했다. 모든 주화의 뒷면의 디자인을 위에서 아래로 ‘발행연도-액면가-발행은행’으로 배치했다. 그래서 주화 뒷면의 디자인이 500원은 하나뿐이지만, 100원 이하의 주화는 두 가지가 함께 통용되고 있다.
▲1970년 11월 20일 발행한 한국의 돈 100원 주화 앞면
▲1970년 11월 20일 발행한 한국의 돈 100원 주화 뒷면
▲1982년 6월 12일 뒷면 디자인 변경 발행한 한국의 돈 100원 주화 뒷면
100원 주화 앞면의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세종대왕’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주화는 면적이 좁기 때문에 인물 이름을 적어 넣지 않는데다, 군복(軍服)을 입은 이순신 장군이 아닐 뿐만 아니라, 주화인 탓에 원래 초상화의 얼굴 모습이 정교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100원 주화의 인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1962년 6월 10일 화폐개혁 이래 화폐에 들어간 첫 번째 인물은 1965년 8월 14일 발행된 100원 지폐의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태조 5년)-1450(세종 32년), 재위 1418-1450}’이다.
1962년 6월 10일 화폐개혁 이래 화폐에 들어간 두 번째 인물은 1970년 11월 20일 발행된 100원 주화(지폐에서 주화로 바뀜)의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1545(명종 원년)-1598(선조 31년)} 장군’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초상은 1973년 9월 1일에 발행된 500원 지폐에도 들어갔다. 이 500원 지폐는 1982년 6월 12일 500원 주화{두루미(학)가 들어간}가 발행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은 한 인물로서 두 화폐에 들어간 유일한 분이다(9년 동안). 1973년 9월 1일 발행한 500원 지폐는 아래와 같다.
▲1973년 9월 1일 발행한 한국의 돈 500원 지폐 앞면(상)과 뒷면(하)(현재 미유통)
1973년 9월 1일 발행한 500원 지폐에 들어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초상은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1912-2005) 화백의 작품이다. 1970년 11월 20일 발행한 100원 주화 속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역시 월전 장우성의 같은 작품이다. 주화이다 보니 다른 얼굴 같아 보일 뿐이다.
1973년 9월 1일 발행한 500원 지폐의 앞면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그 배경에는 ‘거북선’이 들어갔고, 뒷면에는 아산 ‘현충사(顯忠祠)’가 들어갔다. 1970년대에 이 돈을 많이 사용해서 그런지, 디자인이 정말 마음에 든다. 현재에는 지폐에서 이순신 장군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한 인물을 그린 초상화는 많이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한 인물을 다른 얼굴로 그려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먼저 그린 화가에 대한 예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초상화 전시회 하면 여러 인물의 초상화를 모아서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2009년 여름 ‘통영향토역사관’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초상화만을 전시한 ‘이순신과 통제영’이라는 특별기획전이 열렸었다. 그만큼 이순신의 초상화는 많다. 우리나라에서 화폐, 사당, 기념관, 서책 등에서 가장 많은 초상화가 있는 인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현존하는 이순신의 초상화는 20여 종이 넘는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도 명확하게 이순신의 실제 얼굴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실제 얼굴을 보고 그린 도사(圖寫) 초상화 또는 원본 초상화가 없기 때문이다. 전란 바람에 이순신의 도사(圖寫) 초상화는 없어졌다 하더라도 추사(追寫 : 생존하지 않은 인물의 얼굴을 기록과 기억에 의해 그리는 것) 초상화는 분명히 있었다. 왜냐하면 이순신 장군은 사후(死後)에 초상화 제작의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은 순국하신 지 3년째인 1601년(선조 34년) 여수(麗水) 충민사(忠愍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충렬사와 같은 사당은 나라를 위하여 큰 공을 세우고 순국(殉國)한 충신을 위하여 임금의 명령에 의해 전적으로 국가가 세우고 유지하는 사당(祠堂)이다. 또 이순신 장군은 1604년(선조 37년)에 선무공신(宣撫功臣) 1등에 녹훈(錄勳)되었고,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동시에 좌의정(左議政)에 추증(追贈)되었고, 1606년(선조 39년)에는 통영 충렬사(忠烈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선무공신 1등은 전쟁에서 최고의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리는 훈장에 해당하고, 부원군(府院君)은 왕의 장인(丈人), 즉 국구(國舅) 또는 정1품(正一品) 공신에게 내리는 작호(爵號)이며, 좌의정은 정1품으로서 영의정 다음의 벼슬이다. 또 1643년(인조 20년)에는 ‘충무(忠武)’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고, 1706년(숙종 32년)에는 아산 현충사(顯忠祠)에 배향(配享)되었으며, 1793년(정조 17년)에는 최고 벼슬인 정1품의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이후에도 이순신 장군을 위한 사당이 계속 세워져서 우리나라 전국에 30여 곳이나 된다. 우리나라 5천년 역사상 한 인물을 위하여 이렇게 많은 사당이 세워진 것은 이순신 장군이 유일하다.
왕명에 의해 세워진 사당에는 반드시 초상화(肖像畵)가 봉안(奉安)된다. 그런 점에서 이순신 장군의 공인 초상화는 있었다. 그렇다면 그 원본 초상화들은 다 어디 갔을까? 일제(日帝) 때 일본인들이 다 없애버린 것이다.
그 후의 이순신 초상화들은 추사(追寫)에 의한 것들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연산군 7년)∼1570(선조 3년)} 선생의 수제자이자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이 발발했을 때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던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중종 36년)-1607(선조 40년)과 이순신과 무과급제 동기생이자 풍기(豊基) 군수와 의병장(義兵長)을 지낸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 1553년(명종 8년)-1623년(인조 1년)}이 각각 『징비록(懲毖錄)』과 『태촌집(泰村集)』에서 이순신의 용모를 기록해놓은 것이 있으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이순신에 대하여 유성룡은 “이순신의 용모는 단아하여 마치 수양하는 선비 같았다”라고 했고,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정하여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으나, 안으로는 담기(膽氣)가 있었다”라고 했으며, “순신의 사람됨에는 대담한 기운이 있어 일신을 잊고 순국했으니 본래부터 수양해 온 까닭이라 하겠다”라고 묘사했다. 고상안은 “그 언론과 지모는 과연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주였으나, 얼굴이 풍만하지도 후덕하지도 못하고 관상도 입술이 뒤집혀서 복 있는 장수는 아니로구나 생각했다”라고 묘사했다.
‘몽타주(montage)’라는 용어는 ‘조합하다(assembly)’라는 뜻의 프랑스어 동사 monter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원래 건축(建築)에서 부품들을 조합‧조립한 것을 말한다. ‘몽타주(montage)’는 회화(繪畵)와 영화(映畵)에서 사용되는 하나의 기법(技法)이기도 하다.
‘몽타주’ 그림은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범인을 검거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범인을 목격한 증인들의 진술을 듣고 그 얼굴을 그린 것을 몽타주라고 한다. 몽타주 화가가 몽타주를 그리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그 사람의 얼굴 윤곽과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정확한 진술이다.
그런데 이순신의 얼굴에 대한 유성룡과 고상안의 묘사는 충분하지가 않다. 정확한 얼굴 윤곽과 이목구비의 진술이 없다. 이순신의 얼굴에 대한 두 사람의 묘사는 상반되어 보인다. 유성룡의 묘사는 너무 추상적이고, 고상안의 묘사는 부정적이고 호의적이지 않다. 고상안의 묘사는 아무리 봐도 꼭 악성 댓글 같다. 악성 댓글은 ① 선(善)을 가장한 것, ② 약 주고 병 주는 것, ③ 노골적인 것, ④ 막말, ⑤ 욕설이 있다. 고상안의 이순신 묘사는 ②와 같다. 그 때문에 고상안의 이순신 묘사는 초상화를 그리는 데에서 제외되었다. 어쨌든 두 사람 다 이순신의 얼굴 윤곽과 이목구비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없으니 이순신의 초상화에서 보는 이순신의 얼굴은 실제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로 올수록 이순신의 초상화는 유성룡의 묘사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여 점의 이순신 초상화 가운데 대표적인 몇 점을 소개한다.
▲작자미상 <충무공 이순신상>(조선시대이나 연대미상, 조선 말기 추정, 비단에 전통 채색, 28×22cm, 동아대학교박물관)
현존하는 이순신 초상화로서 가장 오래된 것이기는 하나, 정통 초상화가가 그린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무인상으로서 가치는 있어 보이나, 실제 얼굴을 보고 그린 것은 아닌 것 같고, 또 민화풍(民畵風)으로 보인다.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 <한산충무(閑山忠武)>(1918년작, 비단에 전통 채색, 154×48cm, 간송미술관)
이전 글(‘옹달샘 <27>’)에서 언급했듯이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은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 1853-1920)과 함께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의 제자로서 전통 한국화를 후학들에게 가르치고 전수한 유명 화가이다.
심전 안중식의 <한산충무>가 전시돼 있는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인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제자인 33세의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 전 재산을 털어 세운 우리나라 최초 민간박물관임. 그는 우리 문화재가 일본인에 의해 유출되는 것을 막았고, 이미 반출된 문화재를 되사오기도 했음.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을 꼭 가볼 필요가 있음}에 처음 가서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대개 깜짝 놀란다. “이분이 정말 이순신 장군인가?”라며…. 왜냐하면 우리가 화폐 등에서 흔히 본 그 이순신 장군의 얼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직접 얼굴을 보고 그리는 도사(圖寫) 초상화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무인상(武人像)으로 그린 것이다.
칼도 이순신 장군이 사용한 칼이 아니다. 이순신 장군이 실전에서 사용한 칼은 전통적인 조선의 칼인 참도(斬刀)인 쌍룡도(雙龍刀) 2자루였다. 일본도(日本刀)가 거의 직선인데 비해, 조선도는 약간 곡선을 이루며 굽어 있다. 아산 현충사에 봉안돼 있는 훨씬 긴 칼은 이순신 장군의 의전용(儀典用) 칼이라고 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쌍룡도에는 이런 글씨가 새겨져 있다.
三尺誓天山河動色(삼척서천산하동색)
一揮掃蕩血染山河(일휘소탕혈염산하)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이순신이 잡고 있는 칼은 관우(關羽)의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이다. 중국의 관우는 우리나라에서 군신(軍神)으로 여기고 여러 곳의 사당에 모시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 동대문 곁에 있는 동묘(東廟)이다. 심전 안중식이 <한산충무>에서 청룡언월도를 잡고 있는 것은 충무공을 그러한 군신의 의미로 그린 것이지, 무지해서 그렇게 그린 것이 아니다. 문학가처럼 화가는 그림 재능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미술뿐만 아니라 폭넓은 관련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하다. 문학에서처럼 미술에서도 수사학(修辭學)이 필요하고, 비유법(譬喩法)이 적용된다. 이런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림을 마구 비평하여 화가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청룡언월도를 직설법으로 보면 안 된다. 비유법으로 보고, 화가가 말하고자 하는 그 의미를 봐야 한다.
그림과 그림 속의 행서(行書)로 쓴 한시를 보면 심전 안중식이 이순신 장군의 시조 「우국가(憂國歌) 또는 한산도가(閑山島歌)」(1595년 8월)의 내용을 묘사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閑山島月明夜上戌樓(한산도월명야상술루)
撫大刀深愁時何處(무대도심수시하처)
一聲胡笛更添愁(일성호적경첨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歌)는 남의 애를 끊나니
‘수루’는 ‘수루(水樓)’가 아니라, ‘술루(戌樓)’이다. ‘수루(水樓)’는 ‘물가에 세운 누각’이고, ‘술루(戌樓)’는 ‘적군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성 위에 세운 누각’이다. ‘술루’에서 ㄹ 자음이 탈락하여 ‘수루’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이순신 장군이 배를 탄 모습이 아니라, 성 위의 수루에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 그림은 심전 안중식이 초상화로 그린 것이 아니라, 인물풍경화(人物風景畵, 풍경을 배경으로 한 인물화), 즉 풍속화(風俗畵) 형식으로 그린 것이다. 유럽에서는 풍속화를 ‘장르화(genre painting)’라고 하는데, 17세기에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장르가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 때 조선에 들어왔으며,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영조 21년)-1806?(순조 6년)}와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758(정조 34년)-?}은 풍속화의 대가가 되었다.
그러므로 심전 안중식의 <한산충무(閑山忠武)>(1918년작)는 초상화로 보려고 하기보다는 인물화(人物畵) 또는 풍속화(風俗畵)로 봐야 화가의 의도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화가는 왜적(倭敵)의 침략당한 나라를 걱정하며 어떻게 하면 그들을 물리칠까 하는 수심(愁心)과 결의(決意)에 찬 무인상(武人像)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묘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치솟은 짙은 눈썹, 치켜 뜬, 매서운 눈빛, 굳게 다문 붉은 입술, 칼처럼 뻗은 팔자수염, 결코 물러섬이 없을 것 같은 묵직한 얼굴 윤곽으로 그려놓은 것이리라. 무서우면서도, 주도면밀하고 인자하며 여유 있는 모습이다.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72) <이충무공상(李忠武公像)>(1932년작, 비단에 전통 채색, 해군사관학교박물관)
이 초상화는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과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 1853-1920)의 제자인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72)이 그린 것으로서, 스승의 <한산충무(閑山忠武)>(1918년작)를 모사(模寫)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상범의 이순신 초상은 안중식의 이순신 초상보다 더 무섭고 단호해 보인다.
이 초상화가 그려지게 된 데에는 일화가 있다. 서울에서 태어난 이순신과 그 가족은 10세경(정확한 연대는 모름)에 외가가 있는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牙山)으로 이주했다. 그리하여 그곳은 이순신 장군의 선영(先塋)이 되었다. 1598년(선조 31년) 12월 16일 이순신 장군이 순국하셔서 가매장(假埋葬)된 곳, 즉 가묘(假墓)는 충렬사(忠烈祠)가 있는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350번지였다. 1599년(선조 32년) 봄에 선영이 있는 아산 금성산(錦城山)으로 이장(移葬)되었고, 1614년(광해군 6년)에는 현재의 장소인 덕수 이씨 선영인 아산 어라산(於羅山)으로 이장(移葬)되었는데, 이는 현충사(顯忠祠)에서 서쪽으로 8km 위치에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31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에 “2천원 빚에 경매당하는 이충무공의 묘소위토”라는 제목의 기사가 났다. ‘위토(位土)’란 묘소와 사당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한 토지를 말한다. 그 토지에서 나는 농작물로 묘소와 사당을 관리, 유지했던 것이다. 종가(宗家)의 가세(家勢)가 기울어져 은행에 빚을 져서 위토를 경매하게 되었고, 결국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 신문 기사가 난 이튿날부터 전국 각지로부터 성금이 모여들었다. 이 과정에서 ‘충무공유적보존회’가 결성되어 불과 1개월 만에 빚 2,272원 22전을 모두 갚게 되었다. 그러나 성금은 계속 답지하여 1년 만에 16,021원 30전이 모였다.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1932년 퇴락한 현충사를 중건했다. 현재 현충사는 1966년부터 1974년까지 대대적으로 확장, 중건한 것이다.
1932년 현충사를 중건할 때 청전 이상범 화백이 <이충무공상>을 그려서 현충사에 봉안(奉安)했던 것이다. 그런데 현충사에 봉안된 이상범 화백의 <이충무공상>(1932년작)은 고증(考證)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1953년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張遇聖, 1912-2005) 화백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1952-1953년작)으로 대체되었다. 이상범 화백의 <이충무공상>(1932년작)은 진해 해군사관학교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 1853-1920)과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의 제자로서 이순신 초상 등 많은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조선 마지막 어진화가(御眞畵家)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고종 29년)-1979}이다.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이순신 초상은 아래와 같다.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 <이충무공상(李忠武公像)?>(1949년작, 비단에 전통 채색, 한산도 충무사)
김은호 화백의 초상화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지명도가 높았으나, 점점 다른 화가들의 작품으로 대체되는 경향이다. 특히 친일 논란 속에 들어가면서 더 그렇다. 이 작품은 1949년 이래 한산도 충무사(忠武祠)에 봉안되어 왔으나, 1978년 ‘대통령 초상화가’로 잘 알려진 서양화가 정형모(鄭炯謨, 1937- )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1978년작)으로 교체되었다.
여기서 친일(親日)과 친북(親北) 문제를 잠깐 이야기할까 한다.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지배에 의한 친일과 6‧25전쟁과 남북분단에 의한 친북 문제에 대한 정리를 하지 못해서 국력의 집결과 국민(또는 민족)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엄청난 손실을 보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는 이스라엘이 말한 “용서한다. 하지만 잊지는 않는다”라는 ‘용서와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나치에 대한 프랑스도 같은 기조이다. 통일 후의 독일도 그러하다. 그래야 통합된 국력이 나온다. 그러면 이스라엘과 프랑스의 역사 정리는 어떤 것인가? 그들은 적(敵)은 물론 이적행위(利敵行爲)를 한 자국민에 대해서 A급만을 처단 또는 매장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용서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미주알고주알 식으로 완전무결(完全無缺)하게 정리하자면 다시 적국과 전쟁을 하거나 자국민 절반 이상을 어떻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적행위를 한 자국민 정치인이나 외교관, 군인이나 법관에 비해 문화 관련 인물, 즉 문학인이나 예술인에 대해서는 더 아량을 베풀었다. 왜 그럴까? 전자는 무기나 권력으로써 이적행위를 했지만, 후자는 펜이나 붓, 악기를 든 문화 관련 인물들로서 총칼의 위협 하에서 자의(自意)사 아니면서도 이적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문화 관련 인물이라 하더라도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처럼 행동했어야 원칙에 맞는다. 그러나 전 국민이 그렇게 행동하는 나라는 이 지구상에 없다. 얼렁뚱땅하자는 것이 아니다. 문화 관련 인물이라 하더라도 자의적이고 노골적인 이적행위를 한 A급 친일‧친일 인사가 있다면 처단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A급이라고 할 수 없는 이적 문화 활동을 한 사람들까지 다 몰아치면 창씨개명(創氏改名)한 농민들도 처벌해야 한다. 친일 인사를 색출하는 일을 맡은 사람의 조상이 친일이나 친북 이력을 가지고 있거나, 친북 인사를 색출하는 일에서도 그와 같은 일이 있기도 하니 문제가 아닌가? 아직 역사 정리를 완료할 수 있는 때가 이르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속히 온 국민이 지혜를 모아 역사 정리를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전진할 수 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우리나라 문학인, 예술인들 가운데 정말 꼿꼿한 분들도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와 전쟁 중에 이적행위를 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섣불리 하면 우리나라의 문학, 미술, 음악 작품을 다 없애야 할 판이다. 미술의 경우 이당 김은호의 친일행위는 그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스승들과 그의 제자들에 대한 논란도 있다. 그래서 어느 선에서 용서하고, 과거 역사를 기억하여 다시는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 <이충무공상(李忠武公像)?>(1957년작, 승주 충무사(忠武祠)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 <이충무공상(李忠武公像)?>(1962년작)
무관(武官)으로서 관복을 입은 모습의 이순신의 초상이다. 무관도 조정에 나갈 때 관복을 입는다. 정1품, 정2품 무관의 관복 흉배 도안은 각각 범과 표범이다.
이외에도 이당 김은호가 그린 장군의 초상은 더 있지만, 정부의 동상‧영정심의위원회의 심의에 의한 이순신 ‘표준영정(標準影幀)’에는 끝내 들지 못했다.
아래 그림은 이상범 화백의 <이충무공상>(1932년작) 대신에 1953년에 아산 현충사에 봉안된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張遇聖, 1912-2005) 화백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1952-1953년작)이다.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張遇聖, 1912-2005) <충무공 이순신 장군>(1952-1953년작, 비단에 전통 채색, 193×113cm, 아산 현충사)
1953년 현충사에 봉안된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張遇聖, 1912-2005)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1952-1953년작)은 1973년 10월 정부의 동상‧영정심의위원회의 심의를 통해 이순신 ‘표준영정(標準影幀)’으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이 초상화는 유명하고, 전 국민의 눈에 익은 이순신 장군의 얼굴이 되었다.
1932년 현충사 중건 때 봉안되었던 청전 이상범 화백이 <이충무공상>(1932년작)이 내려져야 했던 까닭은 ‘고증(考證) 불충분’이었다. 그래서 월전 장우성 화백은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 내용 연구는 물론, 이순신 장군의 후손들의 골격까지 연구해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1952-1953년작)을 그렸다고 한다.
월전 장우성 화백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초상화는 더 있다.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張遇聖, 1912-2005) <충무공 이순신 장군>(1962년작, 비단에 전통 채색, 정읍 충렬사)
이 정면 응시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1962년작) 초상화는 1962년 정읍 충렬사에 봉안되었다.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張遇聖, 1912-2005)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 정면 응시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초상화는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순신 초상이다.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張遇聖, 1912-2005)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1970년작)
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1970년작)은 월전 장우성 화백이 화폐 제조를 위한 의뢰를 받아 그린 것으로서,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나, 얼굴은 약간 돌리고 있는데, 1970년 11월 20일 발행된 한국의 돈 100원 주화 앞면과 1973년 11월 20일 발행된 500원 지폐 앞면에 들어간 초상화이다.
▲서양화가 정형모(鄭炯謨, 정형모, 1937- )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1978년작, 캔버스에 유채, 한산도 충무사 및 통영 충렬사)
1978년 정부가 사적 정비사업을 벌일 때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 화백의 <이충무공상(李忠武公像)?>(1949년작)을 내리고, 서양화가 정형모(鄭炯謨, 1937- )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1978년작)으로 교체했다. 이것은 이순신 장군의 초상을 전통 한국화가 아닌, 서양화의 유채(油彩)로 그린 최초의 초상화이다. 복장은 전시의 갑옷이 아니고, 무관이 조정에 출사할 때 입는 관복도 아닌, 조선의 전통 두루마기형 군복이다. 전투복이 아니라, 근무복이다. 얼굴은 월전 장우성 화백의 이순신 초상, 즉 이순신의 ‘표준영정’ 그대로이다.
대한민국 대통령 등 세계 정치인의 초상화를 많이 그린 서양화가 정형모(鄭炯謨, 1937- )는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처럼 기이하고 재능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가난하고 기회를 놓쳐 미대(美大)를 가지 못했으나, 화백이 된 사람이다. ‘나무꾼 소년’이 화가가 된 사람이다. 그의 초상화가 1970년대 초에 이미 그림에 재능이 많은 박정희 대통령을 감동시켜서 청와대에 초대되었던 사람이다. 그는 당시 박 대통령이 초면인 그에게 담뱃불을 붙여주어서 맞담배를 한 사람이다. 24세나 연상인데다 대통령인 사람 앞에서…. 그만큼 역경 가운데서 화가가 된 인간 정형모와 그의 초상화가 박 대통령을 감동하게 했던 것이다. 정형모는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초상화가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를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무관(武官) 이순신이고, 다른 하나는 문관(文官) 같은 이순신이다. 표준영정과 화폐 속의 이순신은 후자에 속한다. 이 점에 있어서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문관 같은 이순신의 초상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순신의 본관(本貫)은 덕수(德水)이다. 덕수는 고려의 수도, 즉 오늘날의 개성(開成)이다.
덕수(德水) 이씨의 시조(始祖)이자 이순신의 12대조인 이돈수(李敦守, ?-?)는 고려 중기의 제23대 고종(高宗, 1192-1259, 재위 1213-1259) 때 신호위중랑장(神虎衛中郞將 : 중앙군 하위급 장군)으로서 1216년(고종 3년) 거란이 침입했을 때인 1218년(고종 5년) 거란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고려 때는 양반{兩班 : 문반(文班)과 무반(武班)} 가운데 무관(武官)이 문관(文官)보다 더 위세가 높기도 했다. 이 무인정치(武人政治)는 불교(佛敎)와 함께 고려 멸망의 한 원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朝鮮)은 문관을 더 우대하는 선문후무(先文後武), 유교를 국교로 하는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을 쓰게 된 것이다. 조선의 삼정승{三政丞, 영의정‧좌의정‧우의정 : 3정승을 ‘삼의정(三議政)’ 또는 ‘상신(上臣)’이라고도 함}이 총 336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무관 출신은 단 7명뿐이었다. 이는 조선의 문관과 무관의 차이를 잘 말해준다. 양반 가문의 자제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진 과거(科擧) 시험에서 무과(武科)보다 문과(文科)를 더 선호한 당시 시대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이 문약(文弱)으로 흘러 오히려 조선이 약해진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고려에서 무반 가문이었던 덕수 이씨는 조선에 들어와서 문반 가문이 되었다. 이순신의 5대조 이변(李邊, 1391-1473)은 세종-세조 때 공조판서(工曹判書, 정2품 : 판서는 오늘날의 장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중추부의 으뜸 벼슬로서 정1품)에 이르렀다.
이순신의 증조부 이거(李琚, ?-1502)는 성종-연산군 때 역시 문관으로서 최고직으로서 병조참의(兵曹參議, 정3품 : 참의는 오늘날의 차관)를 역임했다.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李百祿, ?-?)은 정사(正史)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고 하고, 덕수 이씨 가계(家系 : 족보)는 문과에 급제하여 미관말직(微官末職) 종8품이었다고 한다.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李貞, 1511-1583)도 정사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고 하고, 덕수 이씨 가계는 문과에 급제하여 창신교위(彰信校尉 : 무관 종5품)였다고 한다. 이순신의 아버지 대에서 이순신의 가문은 문반(文班)에서 무반(武班)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하여튼 이순신의 가문은 할아버지-아버지 대에 이르러 몰락한 양반 가문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조선의 개국(1392년) 이래 권세는 왕의 친인척인 신하들, 즉 척신(戚臣)과 개국과 정난(靖難) 공신(功臣)인 훈신(勳臣)들의 것이었다. 이들을 ‘훈구공신(勳舊功臣)’이라고 한다. 이러한 정치 그룹을 ‘훈구파(勳舊派)’라고 한다. 이러한 훈구파의 득세는 제7대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 때까지 이어졌다.
세조의 손자이자 14세에 제9대 왕에 즉위한 성종(成宗, 1457-1494, 재위 1470-1494)은 20세가 되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끝내고 친정(親政)을 하면서 젊은 신하들을 대거 등용했다. 이 신진(新進) 세력을 ‘사림파(士林派)’라고 했다. 사림파의 거두(巨頭)는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었다.
훈구파는 노장(老壯) 보수파(保守派)이고, 사림파는 소장(少壯) 진보파(進步派)이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권력쟁탈전(權力爭奪戰)이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재위 1495-1506) 때부터 네 번이나 일어났다. 이것이 ‘사림(士林)의 화(禍)’, 즉 ‘사화(士禍)’이다. 4대 사화이다. 즉 ①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연산군 4년), ②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연산군 10년)}, ③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 13년)}, ④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명종 원년)}이다.
이 사화에서 글자 그대로 사림파들은 피의 숙청(肅淸)을 당했다.
그런데 반정(反正)에 의해 왕이 된 제11대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은 성종(成宗)처럼 사림파를 재건하려고 했다. 조선 4대 천재라는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사림파의 거두로서 시대에 앞서가는 개혁정책을 밀어붙이다가 반정세력인 훈구파에 의해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 13년)}에서 제거되었고, 사림파는 또 다시 일망타진(一網打盡)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21년이 지난 1540년(중종 34년)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李百祿, ?-?)은 조광조의 개혁정책을 두둔했다는 혐의로 파직당했다.
이 즈음에 이순신이 서울 건천동{乾川洞 : 지금의 중구 인현동(仁峴洞)}에서 4남{① 이희신(李羲臣), ② 이요신(李堯臣), ③ 이순신(李舜臣), ④ 이우신(李禹臣)}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역사 기록이 없는 시대를 ‘선사시대(先史時代)’라고 한다. ‘신화시대(神話時代)’라고도 한다. 중국에도 우리나라의 선사시대인 고조선(古朝鮮)과 같은 시대 또는 그 이전 시대에 ‘삼황오제(三皇五帝)’가 있었다고 한다. 역사 기록이 없어도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엿가락 늘이듯이 하는 중국인들은 신화(神話)와 전설(傳說)을 허구(虛構)로 잘도 쓴다. 예를 들면 복희(伏羲)는 상반신이 사람이고, 하반신이 뱀이다. 삼황오제의 인물에 대해서도 이 주장이 다르고, 저 주장이 다르다. 서로 다른 5-7가지 설이 있다. 그 중의 하나를 들어본다.
3황은 ① 수인(燧人), ② 복희(伏羲), ③ 신농(神農)이고(『풍속통의(風俗通義)』), 5제는 ① 황제(黃帝), ② 전욱(顓頊), ③ 제곡(帝嚳), ④ 당요(唐堯), ⑤ 우순(虞舜)(『세본(世本)』)이다.
그 다음, 우(禹)가 순(舜)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① 하(夏)를 세우고, ② 상{商 : 과거에는 ‘은(殷)’이라고 했으나, ‘은(殷)’은 ‘상(商)’ 나라의 수도라고 함}으로 이어지며, ③ 주(周)로 이어졌다.
특히 이 중에서도 복희(伏羲)는 훌륭했고, 황제(黃帝)는 천하를 통일했다고 하면서, 우리가 단군(檀君)을 시조로 하듯이, 중국인들은 황제가 중국의 시조라고 말한다. 그리고 당요{唐堯 : ‘당(唐)’은 나라 이름}, 즉 요(堯)와 우순{虞舜 : ‘우(虞)’는 나라 이름}, 즉 순(舜)을 명군(明君), 성군(聖君)으로 칭송한다. 그 다음의 우(禹) 역시 성군으로 친다.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던 조선에서는 이러한 중국의 신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왔다.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李貞, 1511-1583)은 중국 신화 속에 나오는 복희(伏羲)의 희(羲), 요(堯), 순(舜), 우(禹)를 따서 네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신(臣)’은 항렬(行列)이었지만, 성군을 만나서, 성군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하가 되어라는 뜻으로 이런 작명을 했다는 것이다. 제14대 왕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가 이순신의 아버지가 의미한 그 성군은 아니었지만, 이순신은 아버지의 염원대로 충성을 다하고 또 충성을 다했던 것이다.
서울에서 보낸 어린 시절 이순신{李舜臣, 1545(명종 원년)-1598(선조 31년)}은 그보다 세 살 위인 유성룡{柳成龍, 1542(중종 36년)-1607(선조 40년)}을 한 동네에서 만났다. 그 만남을 계기로 해서 이순신은 훗날 임진왜란 중에 파직되었을 때 정탁의 상소 덕분에 복직되어 나라를 구하는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
사화의 여파(餘波)로 위기를 겪으며 몰락한 이순신의 집은 더 이상 서울에서 살지 못하고 이순신이 10세쯤 됐을 때 외가가 있는 아산(牙山)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아산에서 이순신은 문과(文科)를 준비했다. 그의 가문은 고려 때 무반 가문이었으나, 조선에서는 문반 가문이었다. 조선에서는 문반이 더 명예로운 가문이었으니 그의 부친이 이순신에게 문관이 되기를 원했거나, 이순신 자신이 문반 가문을 회복할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도에 마음을 바꾸어 28세인 1572년(선조 5년) 무과(武科)에 응시했다. 본과(本科)가 아닌 별과(別科)였다. 본과가 정기적 시험이라면 별과는 부정기적 시험으로서 특별히 필요할 때 실시되었다. 그러나 낙방했다. 32세인 1576년(선조 9년)에 무과에 급제했다. 조선의 과거급제 평균 연령이 30세이므로 그리 늦은 급제는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순신의 응시 과목 변경이다. 이순신이 문과에 급제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문과 준비를 한 이순신이 마음을 바꾸어 무과에 응시한 것은 그야말로 구국(救國)을 위한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고 할 수 있다. 무과는 무술과 병법 이론을 준비해야 했고, 문과는 요즘으로 치면 주관식 논술시험으로서 문학, 역사, 철학 등 방대한 분량을 준비해야 했다. 무과에 비해 문과는 훨씬 더 많이 공부해야 했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문과 준비를 다 해놓고서 진로를 무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글을 잘 쓴 것은 문과에 급제할 수 있을 정도로 문과를 준비했던 덕분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는 7년 동안 거의 매일 기록한 진중일기로서 7책 205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서 1962년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201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세계사상 이런 전쟁일기는 없다. 이순신이야말로 문무겸전(文武兼全)한 장군이었고, 문관보다 더 문관 같은 무관이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초상에 대하여 어떤 군인 출신은 무인(武人)의 초상이어야 한다고 비판하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순신 장군이 무인(武人)보다 문인(文人)의 용모를 한 초상이 오히려 더 잘 어울린다고 본다.
이순신의 호칭을 ‘해군 장성(將星)’에게 붙이는 ‘제독(提督, admiral)’이라고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당시 조선의 군사조직은 육군‧수군(해군)의 명백한 구분이 없었다. 임진왜란 이전 원균{元均, 1540(중종 34년)-1597(선조 30년)}과 이순신{李舜臣, 1545(명종 원년)-1598(선조 31년)}은 육군으로서 북방의 여진족과 싸우다가 임진왜란 직전에 각각 경상우도(경상도 서부 지역)와 전라좌도(전라도 동부 지역)로 수군으로서 파견되었다. 경우에 따라 ‘제독’으로 불러도 되지만, 이순신의 공식 호칭은 ‘육군 장성’에게 붙이는 ‘장군(將軍, general)’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하여 할 이야기는 끝이 없다. 애초에 이 글에서 이순신의 생애와 업적을 쓰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순신 초상 이야기에 지면을 많이 할애하다보니 그 생애와 업적은 독자의 연구 몫으로 남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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