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당 조덕행
포덕73년(1932) 황해도 개성 출생
여성회본부 감사
"온 식구가 지극 정성으로
시일 모셨죠"
결혼한 햇수가 많이 지났네요. 55주년 돼요. 결혼 전에는 천도교에 대해서는 몰랐고. 그때가 포덕 돼요. 92년(1951 결혼 전에는 년)도 인가, 그 때니까 뭐. 난리통에 피난들 넘어 오셔서 그 이듬핸가 그랬어요. 이북 사람들이 시흥서 살았는데 그리로 많이 피난을 나왔어요. 중매 하신 분이 천도교인인데, . 남편이 58부대라고 미군 부대 경비대 대장을 지내셨어.
우리 집 양반 이영복 종법사은 그때 당시에 영어 통역도 하고 그러셨어요. 그 때까지 천도교 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고 유교 사상이 강한 집안에서 태어났거든요. 내 고향은 개성이에요. 아홉 살에 남한으로 넘어왔지요 전쟁 당시라 사실 교회도 나갈 수가 없었어요. 서울에 올라 다니기도 힘들었고. 시흥에 교구라는 것도 없고.
천도교인 하고 살았지만 교회도 못 나가고 청수도 못 모셨어요.
그래 가지고 몇 년 시흥에서 살다가 서울로 올라오게 됐지요 그때부터 총부를 나가기 시작해 가지고 성미 일일이 꼭 아침저녁으로 뜨고 성미 자루를 해서 싸 가지고 가서 쌀로 바치고, 그때 당시에는 그랬죠.
포덕 101년(1960년) 되기 전에 서울로 와서 그렇게 시 작했을 거예요. 그 때부터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그랬어요.
그 때 기억나는 건, 지금은 다 돌아가시고 안 계신데 연세 많으신 할머니들 따라다니면서 옛날 역사 얘기 듣고 배우고, 그 때 당시에는 월산 선생님이 산에서 내려오셔 가지고 그 후부터는 수련도 열심히 했고 참 재미있게 지냈어요.
우리 집 양반이 포덕 118년(1977년)에 교령 출마하시고 거진 한 삼십 년 가까이 돼죠.
제가 원래 말 주변이 없지만, 교령에 딱 당선돼 가지고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교회에 나가서도 사모님들이나 선생님들이 말씀하시면 잘 듣기만 하고 예, 예, 대답만 잘 하라고 하더라구요. 잘 알지도 못 하는 것 가지고 말 함부로 하다가 잘못 되면 큰일나는 데라구. 그렇게 주의를 주세서, 말하는 병어리라고 하는 소리까지 듣고 그랬지요. 그러면 서 오늘날까지 지내왔어요.
애로점이라는 건 어디든지 다 그렇지만 교회라는 데가 사단도 많고 그렇잖아요. 그래서 조금 환멸도 느끼고 그런 적이 있어요. 근데 신앙이나 수련하는 것도 다 사람이 하는 거니까 그럴 수 있겠지, 하고 이해도 하고 그러면서 좋은 거만 생각하자 그렇게 지내왔죠. 의견이 좀 달라도 신앙으로서 다 받아들이고 나쁜 거 있어도 언제 그랬더냐 다 잊어버리고 좋은 것만 생각해서 화합하고 잘 되나가는 게 원이죠, 다른 거 없어요, 나는.
근데 그래요, 비교를 하면 안 되겠지만, 솔직히 불교나 기독교나 천주교나 교인들도 많고 커 나가고 그러는 거 보면 너무 부러워요. 그런데 천도교는 젊은 사람들이 자꾸 입교를 하고 그러면 좋은데, 노인분들 자꾸 돌아가시고 교회가 침체되고 숫자가 주는 것 같고, 너무 속상하고 안타깝고 좀 그렇습니다.
교회 나가서 시일식을 보면 연세 많으신 선생님들, 사모님들 많이 계신데, 아유, 저 분들이 다 돌아가시면 어쩌나, 그렇게 걱정을 해요.
하나밖에 없는 딸 이금주 외국에서 살고 있어서 일 년이면 매 한두 번씩은 해외에 나갔다 와요. 한 이삼 개월씩 있다 와요. 딸이 시집 가기 전에는 외국인 회사에 다니다가 외국 사람하고 결혼해서 잘 살고 있지만, 혼자 나가있으면서 외로우니까 자꾸 들어오라니까 오라면 한 육 개월씩 있다가 들어와서 또 들어가 고 이러면서 살았어요.
우린 딸 때문에 캐나다니 중국이니 일본이니 하고 살지만 타국에 나가서도 꼭 청수 모시는 것은 잊지 않고 지내왔고 , 그런 덕분인지 한울님의 감응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힘들고 어려 운 일이 있으면 늘 주문 외고 오늘날까지 살아왔어요
우리 집 양반은 저한테는 과분한 분이시지요 옛날에 십 년 차이라면 굉장히 많은 나이 차이인데, 연분이니까 금방 결혼이 되대요 결혼해서는 십년 차이니까 젊다고 끔직이 사랑해 주시고, 나는 남편 겸 선생님으로 그렇게 모시면서 살아왔고 . 지금 언젠 까지도 신앙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돈독하시고. 가정 화목하게 끔찍이 생각해 주시고 딸 하나라도 잘 키우고 돈이 없어도 건강하고 화목하게 근심 걱정 없이 오늘날까지 잘 살아왔어요.
자랑은 아니지만 우리 부부같이 전 교인들이 많이 부화부순 이 되고 교회가 커 나가면 약간의 힘이 되지 않을까 싶고.
우리 딸이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잘 쳐요 대학 졸업하고 캐나다 가기 전까지만 해도 계속 대교당 시일식에서 피아노 반주를 했지요. 세 식구가 지극정성으로 시일이면 정성스럽게 시일식을 모 시면서 그렇게 살아왔어요.
다른 가정들도 온 가족이 애들 데 리고 손목 잡고 나오면 그 아이들 골수에 박혀서 배워 가지고 계속 성장해 나가면 우리 교회도 앞으로 커 나갈 수 있지 않을 까하는 그런 마음이에요.
■구술일 :147년(2006년) 10월 8일
#이영복 #조덕행 #이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