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도서관
정옥현
새 냉장고가 들어왔다. 부엌에 놓여있던 책장이 한 데로 나앉았다. 그동안 베란다에서 제 역할을 해내던 오래된 냉장고가 끝내 수명을 다했다. 벼르고 벼르던 신제품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반은 핑크 반은 하늘색인 냉장고가 부엌을 새로운 감각으로 꾸며 놓았지만,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았다.
일흔을 넘은 엄마가 우리 집 부엌일을 도와준 지 오래되었다. 직장 생활하는 딸이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부터 반찬을 만들고 냉장고 정리까지 도맡아 했다. 음식을 준비할 때마다 베란다로 가는 게 죄송했는데 새로 들인 냉장고가 그 수고를 덜어 주어 마음이 편했다. 대신 언젠가 읽을 거라며 애지중지 모았던 책은 멀리 유배 보낸 선비 처지가 되었다. 애가 탔다. 강한 햇볕에 누렇게 뜨지 않을까 장마 때 곰팡이가 슬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었다.
말은 안했지만, 가족들이 부엌 넓은 벽면을 차지했던 책장 두 개를 마뜩잖은 시선으로 본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나 또한 책의 모양, 크기, 색깔이 제각각이라 혼란스럽기는 했다. 게다가 진중하게 책 읽는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어울리지 않았던 관상용 도서관을 부엌에 그대로 두기는 염치가 없었다.
다 얻거나 다 잃는 것은 없다고 했던가. 식탁을 냉장고 옆에 다붙였다. 일인 독서실로 나무랄 데가 없었다. 벽을 보고 앉으니 책보다 더 재미있다고 유혹하는 거실의 텔레비전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작은 공간이 아늑함을 주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예쁜 조명이 나를 집요하게 비추었다. 마치 책을 통해 마음의 양식을 쌓고 정신적인 자양분을 얻으라고 독서를 권하던 선생님의 따스한 눈빛 같았다. 책장 가득히 꽂힌 저 책들을 다 읽겠노라고 결의를 굳게 다졌다. 서고를 지키는 노련한 사서 같은 식탁 위에 귀퉁이가 닳은 소설책과 책갈피를 끼워둔 문학책을 올려놓았다.
이튿날, 퇴근하고 베란다로 나갔다. 못 보던 종이 상자 3개가 놓여있었다. 엄마의 책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속이 상하면 늘 서점에 간다고 했다. 그곳에서 마음을 삭이며 하나둘 고른 눈물의 책이었다. 몇 번이나 가져가라고 내게 일렀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었다. 내일이라도 하늘이 부르면 가야 하니 살아있을 때 주고 싶다고 으름장을 놓아도 듣지 않았다. 결국 엄마가 손수 무거운 책을 갖다 놓았다.
쓸쓸히 웃으셨다. 그 미소엔 당신이 세상을 떠나면 아무리 엄마 물건이라도 꺼려지지 않겠느냐는 염려가 들어 있는 듯했다. 줄 것이 이것밖에 없다며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산더미 같은 내 책부터 읽어야겠기에 미리 받은 엄마의 유산은 풀다 말고 한쪽에 밀쳐놓았던 나는 머리만 긁적였다.
“이제 책 안 살란다. 너거 집에 있는 책, 내 죽을 때까지도 다 못 보겠다. 별의별 책 다 있네.”
언젠가부터 냉장고 옆에서 책 읽는 엄마를 발견했다. 빨래를 돌려놓고 혹은 물을 끓이면서 짬짬이 보는 모양이었다. 가끔 책 읽은 내용과 이런저런 넋두리를 들려주었다. 하고 싶은 공부를 못한 것이 한이라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외할아버지를 많이 원망했다. 초등학교만 다닌 것이 가슴에 응어리졌을까. 틈만 나면 책 보는 것으로 한을 푸는 것 같았다. 재미있는 책도 있지만 젊은이들도 벅찬 글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다고 말하는 엄마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분량도 많고 어려워 나도 조금 읽다가 포기한 책이었다.
“엄마, 그 책 어렵지 않나?”
“어렵든 쉽든 나는 첫 장 펴면 그냥 무조건 끝까지 다 읽는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인생도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아버지처럼 별난 사람과 한평생 살며 까다로운 시아버지 수발에 자식처럼 어린 시누이, 시동생 키워 시집, 장가 다 보냈으니 그 속이야 말해 뭣할까. 하고 싶은 말 꾹꾹 삼키며 속을 억누를 때마다 책을 펼쳤을 것이다. 홀로 책장 넘기던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온몸을 휘감은 열로 잠이 깼다. 쉰 살이 넘으니 내게도 갱년기 증상이 찾아왔다. 부채질도 소용없었다. 거실로 나와 부엌문을 열었다. 희붐한 어둠 속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기린처럼 긴 목을 빼고 앉은 책이었다. 밀란 쿤데라의‘농담’을 꺼내 펼쳤다. 새벽의 고요함이 루드비크의 처절한 마음을 이해해 보라며 나를 체코로 이끌었다. 그의 삶이 안타까운 농담처럼 곳곳에 박혀있다. 한참을 책 속에서 나 자신과는 다른 인생을 만나고 나왔다. 식탁 위에는 아직도 미지의 세계를 품은 해 묵은 책이 잔뜩 웅크리고 있다.
늦잠을 자고 싶은 휴일 새벽에 기꺼이 눈을 뜬다. 눈곱만 떼고 식탁 앞에 앉았다. 누구의 방해도 없는 행복한 이 시간이 더디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친김에 대구시에서 주관하는‘독서모임의 리더 되기’과정을 신청했다. 수료하는 날, 조원들과 배운 것을 몇 차례 실습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즉석에서 독서 모임을 결성하고 천천히 나아가자는 의미로 ‘뚜벅뚜벅’이라는 이름도 지었다. 조원들의 추천으로 6권의 책을 정해 2주에 한 번씩 모였다. 돌아가면서 사회자, 발제자를 정하고 논제를 발췌해서 토론을 진행해 나갔다. 한 주기가 끝나고 그만두기에는 다들 열정과 애착을 보였다. 아쉬움에 계속 이어 나가기로 했다. 그렇게 부엌 도서관에서 읽은 책이 백 권이 넘었다.
책의 힘은 컸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진리는 또 한 번 혜안을 갖게 했다. 종이에 적힌 글자의 조합이 사람을 얼마나 바꾸는지 놀랍다. 소설만 읽던 내가 자기 계발서, 과학 책, 가벼운 경제 서적도 눈여겨보았다. 시간은 쌓이는 내공이 되었다. 다져진 내공 속에서 나는 조금 더 깊고 오래 생각할 뇌를 얻었다. 세파에 찌든 딱딱했던 마음이 말랑말랑해져갔다. 이제는 누군가의 의견에 맞장구를 치고 꼭꼭 숨긴 속내를 드러내기도 한다. 책이 나를 길들이고 다양한 모자이크로 재단해 갔다.
얼마 전 남편과 사소한 대화 끝에 오해가 생겼다. 남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방으로 들어갔지만 내 속에서는 갈등이 횡포를 부렸다. 혼자 치고받는 혈투를 벌여도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그 사이를 책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속 상하지라며 나를 식탁에 앉혔다. 별일도 아닌 것 같은데 기분 전환하라고 나직이 소곤거렸다. 조금 전에 티격태격해 소화시키지 못한 마음을 울컥 토해냈다. 책갈피를 끼워 둔 안면이 있는 책이 다가와 등을 다독거렸다. 나는 갓 끓인 물로 뜨거운 차를 우려 마시며 마음을 만지작거렸다. 책이 수렁에 빠질 뻔한 나를 구해주었다. 책으로 인해 스스로 화해하는 법을 깨우쳤다.
우리 집에는 24시간 개방된 부엌 도서관이 있다. 많은 책이 소장되어 있지 않지만 가끔 신간 서적이 보충되고 지혜가 흐르는 샘터 같은 곳이다. 엄마 혼자서 꾸미고 엄마 혼자서 준공식을 가졌지만 폐관될 걱정은 없다. 당신이 앉았던 그 자리에서 내가 책을 읽고 딸아이가 읽고 손주들도 책을 놓지 않을 테니 말이다.
청년기 이후 다시 책을 만나게 해 준 엄마와 뚜벅뚜벅은 나를 더욱 나답게 만들었다. 엄마가 가꾼 부엌에서 책을 읽고 요리를 하면서 삶이 조금씩 익어가는 것을 느낀다. 낮에는 엄마의 독서실이 되고 밤에는 내 독서실이 되는 채 한 평도 안 되는 부엌 도서관에서 독서가 마음을 숙성시키고 삶의 빈 공간을 채워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남편과 아이도 경험해 보았으면 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집에서 같은 음식을 먹으며 살아도 서로의 생각이나 마음을 모를 때가 많다. 언젠가 가족 독서 모임을 만들어 책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할 수 있는 때가 진정 오기를 꿈꾼다.
첫댓글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