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서] 까치밥 한 알 맺지 못하는, 그러나 우리나라 최고의 감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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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26]
겨울 숲에 다녀왔습니다. 여느 겨울이 그러했듯, 나무는 천천히 고요 속에 잦아들어, 깊어가는 겨울을 차분히 맞이합니다. 가장 눈에 뜨인 건 아무래도 목련입니다. 이른 봄 되어야 피어나는 하얀 꽃을 잉태한 소담한 꽃봉오리들이 뽀얀 솜털 이불을 덮고 나뭇가지마다 잔뜩 솟아올라왔습니다. 처음 보는 풍경은 아니지만, 언제나 이 즈음에 목련 꽃봉오리를 보면, 이른 줄 알면서도 봄을 그리워 하게 됩니다. 환장하게 아름다운 목련의 봄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목련보다는 감나무가 더 어울리는 계절입니다. 대개의 마을에서는 이미 빨갛게 맺힌 감을 따셨을 겁니다. 날짐승의 겨울 먹이로 남겨둔 몇 개의 빨간 감이 '까치밥'이라는 이름으로 더 선명하게 남았겠지요. 엊그제 방영한 KBS TV의 '6시 내고향'의 '나무가 있는 풍경'에서도 감 따는 풍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경북 청송의 지경리라는 작고 한적한 마을에서 감을 따고, 곶감을 만들기 위해 감 껍질을 깎아내고, 감나무에 매달린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찾는 여행자의 이야기였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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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감나무 가운데 가장 큰 나무는 경남 의령군 정곡면 백곡리 마을 어귀에 서 있는 감나무입니다. 키는 무려 28미터나 되고, 가슴높이 줄기둘레는 5미터나 되는 매우 큰 나무이지요. 우리 시골 마을 어디에서라도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이지만, 이만큼 큰 감나무는 쉽사리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많이 맺는 대개의 유실수가 그렇듯이 감나무는 비교적 수명이 길지 않은 탓에 이만한 크기로 자라는 건 어려운 일이지요.
백곡리 감나무는 나이가 450살 정도로 짐작되는 오래 된 나무입니다. 나이만으로 치면 이 나무보다 오래 된 나무가 몇 그루 있긴 합니다. 이를테면 경남 산청 남사마을의 한 고가(古家) 뒤란에는 600살이 넘은 감나무가 있지요. 그러나 450살이라 해도 감나무 가운데에는 오래 된 나무임에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그리 오래 살아온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나무의 건강 상태는 여느 늙은 감나무에 비해 아주 좋은 상태여서 단연 돋보이는 감나무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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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는 백곡리 감나무에 남다른 각별함이 있습니다. 제가 이 나무를 처음 만난 건 10년 쯤 전인 2002년 이른 봄이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인터넷을 통해 '나무 편지'를 쓰던 초기였어요. 당시에 욕심을 부려서 우리나라의 큰 나무들을 찾아보겠다는 마음을 먹고, 감나무 가운데에 기록할 만한 큰 나무로 찾아낸 나무가 바로 이 백곡리 감나무였습니다. 나무를 찾아가는 게 처음엔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나무가 서 있는 의령 백곡리를 찾아가는 길도 쉽지 않았지만, 처음 이 나무를 멀리서 보았을 때에는 감나무인지 아닌지를 구별하기 어려웠지요.
감나무라고 믿기에는 지나치게 컸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다가가서 감나무임을 확인하고는 그 규모의 놀라움으로 한참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야릇한 것은 이리 크고 훌륭한 나무의 주변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겁니다. 나무 줄기는 가운데가 썩어 텅 비었지만, 누가 관리하기는 커녕, 오히려 구멍난 안쪽에 불장난을 한 흔적이 있었고, 나무 줄기 한쪽에는 농기구나 비료 푸대를 어지러이 쌓아놓기까지 했습니다. 나무의 위용에 비해 대접이 지나치게 소홀하지 싶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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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아한 마음에 마을 어른들을 찾아뵙고 사연을 톺아볼 수밖에요. 마을 어른들이 이 감나무를 돌보지 않는 이유는 명백했습니다. '감이 안 열린다'는 것이었지요. 그때 뵈었던 마을 어른은 먼저 '감도 안 열리는 저깟 나무를 뭣하러 찾아왔느냐'며 시큰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는 '베어내야 하는데, 워낙 나무가 커서 베어내지도 못하고 그냥 둔 것'이라는 말씀까지 덧붙였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감이 아주 안 열리는 건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잘 열리면, 열에서 열 댓 개 정도의 열매가 가지 끝에 맺히긴 했습니다. 그러나 이만큼 큰 나무에서 고작 여나문 개 맺힌다는 걸 보면 얼마나 하찮아 보였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마을 분들에게 나무는 성가신 존재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백곡리 감나무가 원래부터 이렇게 열매를 맺지 못한 건 아닐 겁니다. 지난 4백 여년 동안 나무는 열심히 사람의 입맛에 맞는 감을 무성히 맺었을 겁니다. 긴 세월 동안 그 많은 열매를 맺느라 이제 나무는 더 이상 열매를 맺을 힘을 잃은 것이지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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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감을 맺을 여력이 남지 않은 감나무를 바라보는 마음이 안타까울 수밖에요. 고작 글쟁이인 저로서 당시에 할 수 있는 일은 이듬해 봄에 펴낸 책 '이 땅의 큰 나무'에서 백곡리 감나무를 자세하게 소개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 책에서 저는 백곡리 감나무를 우리나라의 모든 감나무를 대표할 만한 '큰 나무'로 꼽았습니다. 몇 그루의 감나무를 더 찾아보았지만, 백곡리 감나무만큼 건강하고 아름답게 늙은 감나무는 찾을 수 없었으니까요.
그게 그리 쓸모 없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 책을 꼼꼼히 보신 분 가운데에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독립 피디가 계셨어요. 그 분께서 이듬해 제게 연락을 하셨지요. '정말 책에 소개한 것처럼 감나무가 크냐?' '4백 년이 넘도록 오래 살아온 것도 사실이냐?' '그 모든 게 사실이라면, 이 감나무를 한햇동안 촬영해서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찍어보겠다. 도와주겠느냐?' 그게 그 분의 말씀이었어요. 감이 안 열린다는 감나무의 결정적 흠을 이야기했지만, 그 분은 '감나무는 사람이 정성을 들이면 감을 맺는다'는 말까지 던지며 마침내 촬영에 들어가셨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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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곡리 감나무는 그래서 2004년 겨울부터 이듬해 겨울까지 한햇동안 다큐멘터리 작품의 주인공이 되어 촬영됐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에 걸쳐 나무를 촬영하는 동안 나무를 둘러싼 사정은 급격히 달라졌습니다. 우선 마을 분들의 생각이 그랬습니다. 나무를 베어내려고까지 생각했던 마을 분들은 나무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됐고, 다큐멘터리 촬영감독과 함께 나무에 정성을 들이기 시작했어요. 우선 나무 주변 청소부터 시작했고, 나무 앞에는 나무의 존재감을 강조하는 돌비석까지 세웠지요.
마을 분들 뿐이 아니었습니다. 의령군청에서도 나무에 대한 관심을 높이게 되었지요. 군청에서는 썩어 구멍난 나무 줄기 부분을 충전재로 메우는 외과수술을 시술했고, 또 당시로서는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던 백곡리 찾아가는 길을 가리키는 도로 안내판을 의령군 곳곳에 커다랗게 설치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1년이 흐르고, 이듬해인 2006년, 드디어 백곡리 감나무가 KBS 텔레비전에서 편성한 설날 특집으로 '감나무, 자서전을 쓰다'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되어 당당히 제 이름을 알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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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얼마 뒤, 문화재청에서 전국의 유실수 상황을 조사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조사 대상 중에 백곡리 감나무가 들어있었고, 저는 문화재청의 조사 업무 가운데 일부를 맡아서 이 나무를 다시 조사해 꼼꼼한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해가 지난 2008년, 문화재청에서는 백곡리 감나무를 천연기념물 제492호로 지정하게 됐습니다. 기쁜 일이었습니다. 천연기념물 지정이 확정된 그 날, 예의 다큐멘터리 감독과 저는 서로 기쁨에 겨워 서로의 공이라고 격려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 몇 년이 흐른 지난 가을에 다시 나무를 찾았습니다. 나무 곁에 있던 우사(牛舍)도 들녘 건너편으로 옮겨가고, 나무 주변에는 그리 나쁘지 않은 울타리도 둘러치는 등, 나무 주변의 분위기는 한껏 달라졌습니다. 이제 나무는 그야말로 나라에서 인정하는 자연물로서는 최고의 대접을 받게 된 것이지요. 바라보는 내내 뿌듯한 마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날 나무 앞에서 팔순의 마을 노인을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눈 뒤에 신문 칼럼에 나무 이야기를 풀어 썼습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그 칼럼의 원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나무와 사람 이야기 (100) - 의령 백곡리 감나무] 신문 칼럼 원문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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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께서 하신 여러 이야기 중에 '감나무는 저렇게 사람에게서 떼어놓으면 안 되는 거야. 나무 줄기에 소도 매어두고, 사람도 매달리며 놀아야 하지. 소똥이나 사람들 발소리가 감나무에게 좋은 거름이거든'이라는 말씀도 남기셨습니다. 오래도록 기억해 두어야 할 이야기이지요. 나무에 얽힌 자세한 이야기는 위 단락에서 링크한 신문 칼럼을 통해 살펴보세요. 오늘 나무 편지 한 편으로 이야기를 죄다 털어놓기에 백곡리 감나무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 기회에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