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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일대기
부처님의 단념과 범천의 권청 그리고 초전법륜(初轉法輪)
1) 부처님께서는 오랜 기간 고행으로 극도로 쇠약하신 몸을 이끌고 네란자라 강에 이르러 목욕하신뒤 수자타 소녀로 부터 유미죽을 얻어 잡수시고 기운을 차리시고 붓다가야 보리수 아래 금광보좌에 앉으시면서 "내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결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결심하고 깊은 선정에 드신지 7일째 새벽별을 보는 순간 위없는 깨달음의 진리에 이르셨고. 위대하신 성자 부처님(Buddha)이 되셨다.
부처님은 성도 후 49일 동안 법열을 즐기시다가 범천의 권청으로 법을 전하기로 결심하고 녹야원에서 최초 5비구에게 4성제의 진리를 전하며 전도 선언(초전법륜)을 하셨고 이 5비구의 귀의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지속적으로 전 할 수 있는 선가의 원형이 형성됨을 의미하며 이는 곧 불,법,승 삼보가 성립되는 것으로 불교라는 종교가 갖추어 졌음을 의미한다.
2) 부처님께서는 정각을 이루시고 다연림 속의 한 곳에 앉아서 깊은 선정에 들어 불안(佛眼)으로써 널리 세간을 살피셨다. 누구에게 가장 먼저 단 이슬 법을 가르쳐야 할까. 내가 증득한 이 법은 매우 깊고 미묘하여 보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려우며 분별하거나 헤아려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만약 이 법을 여러 사람들에게 설명한다하더라도 그들은 분명히 알지 못할뿐만 아니라 그 공덕까지 쓸데 없어지고 이익되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편이 낫겠다.
그 때 사바세계의 주인인 나계 범천왕이 부처님께서 법을 말씀하려 하지 않으시려는 속마음을 알았다. 그는 6만 8천의 범천권속들에게 둘러싸여 부처님에게로 달려와서 예를 갖추고는 <부처님이시여, 하늘과 땅은 복이 없어서 이제 헐어지고 무너지려 하고, 지금 이 세계 중생들은 귀의할 데가 없어 착함이 다 파괴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삶의 먼지가 적고 번뇌가 엷어 좋은 근기로 교화하시면 법을 알아듣는 사람이 있는데 법을 듣지 못한 까닭에 저절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 여래께서 이미 위 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얻으시어 최고의 정등각자가 되셨으면서도 고요히 선정에만 드시고 법을 말씀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옵니다. 뭇 괴로움이 침체하여 삼계를 빠뜨리고 있사오니, 원컨대 법의 바퀴를 굴리시어 중생들을 모두 교화하소서>
범천의 이 같은 간청이 옳음을 알고, 부처님은 부처의 눈으로써 모든 중생들의 근기도 상ㆍ중ㆍ하의 근기와 반드시 열반에 이르는 것이 약속된 자[正定聚]와 수행등을 열심히 하지 않아 반드시 지옥 등의 악도에 떨어질 것이 정해져 있는 자[邪定聚], 이 두 가지가 아직 정해져 있지 않는 자[不定聚] 즉 삼정취(三定聚)를 잠자코 살피셨다.
마치 어떠한 사람이 맑은 연못에 다달았는데, 그 연못가운데 붉은 연꽃, 푸른 연꽃, 흰 연꽃을 볼적에 붉은 연꽃은 아직 물위로 나오지 못하기도 하고, 푸른 연꽃은 물과 가지런하고 흰 연꽃은 이미 물위로 나와 있기도 하는 것과 같은 이 세가지를 분명히 보게 되는 것처럼, 부처님이 모든 중생들의 근기를 살펴보는 것도 그와 같으셨다. 부처님께서는 정정취중생들은 이미 법을 설하든 설하지 않든 모두가 분명히 알 것이고, 사정취중생들은 내가 법을 말하거나 법을 말하지 않거나 간에 결국 알지못할 것이다. 그러나 부정취중생들은 내가 법을 말하지 않으면 모르리라.
이와 같이 그들을 살펴보시고는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서 본래 나는 이런 중생들을 위하여 법의 바퀴를 굴리러 나왔음을 되새기시고 그들에게 단 이슬법을 내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때에 범천왕은 부처님께서 옳게 여기심을 보고 기뻐서 뛰며 부처님의 발에 예배하고 수없이 돌다가 전단향을 부처님 위에 뿌리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3) 맛지마니까야 주석서에 의하면 붓다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후 일곱 군데 장소를 옮겨가면서 한 장소에서 7일 동안 선정에 드셨다고 한다. 그렇게 49일 동안 깨달음의 기쁨을 누리시고 당신이 깨달은 진리를 사유하고 나서 아자빨라 니그로다 나무 아래에 앉아 있을 때 문득 당신이 깨달은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주저하셨다.
"내가 깨달은 이 법은 너무 심오해서 이해하기 힘들다. 일반적인 사유로는 알 수가 없다. 오직 지혜로운 자만이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감각적인 쾌락을 좋아하고 그것에 물들어 탐하고 즐긴다. 그런 사람들이 연기, 가라앉음, 포기, 벗어남, 소멸, 열반을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가 그들에게 그런 진리를 가르친다고 해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나만 피로하고 성가신 일이 될 것이다."[S6.1]
중생구제를 위해 붓다가 되겠다고 서원을 세우고 수 억겁을 수행한 그 동안의 노력과 결심을 포기하고 그냥 대열반에 들려고 한 것이다. 그러자 사함빠띠 범천이 나타나 붓다에게 중생들을 위해서 법을 설해줄 것을 권청한다.
범천(바라문교이 최고신)은 색계의 신들이다. 그 색계 신들 중에 한 사람인 사함빠띠 범천이 붓다에게 호소한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소서, 세상에는 눈에 번뇌의 티끌이 적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이 법을 듣지 않으면 쇠퇴할 것입니다. 법을 들으면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범천의 권청을 듣고서 성스러운 눈의 지혜로 세상을 두루 살펴보고 눈에 때가 엷게 낀 사람과 두텁게 낀 사람, 근기가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 선량한 사람과 악한 사람, 가르치기 쉬운 사람과 어려운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不死의 문이 열렸도다. 귀있는 사람은 신심을 내어 법문을 들어라."[S6.1]
4)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처음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나서 우루웰라의 네란자라 강둑에 있는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 아래에서 머무셨다.
2. 그때 세존께서 한적한 곳에 가서 홀로 앉아있는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마음에 일어났다.
'내가 증득한 이 법은 심오하여 알아차리기도 이해하기도 힘들며, 평화롭고 숭고하며,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미묘하여 오로지 현자만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을 좋아하고 감각적 쾌락에 물들어 있고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고 있다. 감각적 쾌락을 좋아하고 감각적 쾌락에 물들어 있고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사람들이 이런 경지, 즉 '이것에 조건짓는 성질인 연기를 본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또한 모든 형성된 것들의 가라앉힘, 일체의 생존에 대한 집착을 포기함, 갈애의 멸진, 탐욕의 빛바램, 소멸, 열반, - 이러한 것들을 본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설혹 내가 법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저들이 내 말을 완전히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피로를 줄 뿐이고 그것은 나에게 성가신 일이다.'
3. 다시 세존께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이러한 아주 경이로운 게송들이 떠올랐다.
'어렵게 나는 증득했나니
이제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탐욕과 성냄으로 가득한 자들이
이 법을 실로 잘 깨닫기란 어렵다.
흐름을 거스르고 미묘하고 깊고
보기 어렵고 미세한 법을
어둠의 무더기로 덮여 있고
탐욕에 빠진 자들은 보지 못한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숙고하면서 그의 마음은 법을 설하기보다는 무관심으로 기우셨다.
4. 그때 사함빠디 범천(브라만)이 마음으로 세존께서 마음에 일으키신 생각을 알고서 이렇게 생각하였다.
'오, 세상은 끝이로구나. 세상은 파멸하는구나. 참으로 세존께서 법을 설하기보다는 무관심으로 마음을 기울이시다니!'
그러자 사함빠디 범천은 마치 힘센 사람이 구부렸던 팔을 펴고 폈던 팔을 구부리는 것처럼 범천의 세상에서 사라져서 세존 앞에 나타났다. 사함빠디 법천은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윗옷을 입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세존을 향해 합장하여 인사를 올리면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법을 설하소서. 선서께서는 법을 설하소서. 눈에 먼지가 적게 들어간 중생들이 있습니다. 법을 듣지 않으면 그들은 파멸할 것입니다. 그러나 법을 들으면 그들은 법에 대해 구경의 지혜를 가진 자가 될 것입니다."
5. 사함빠디 범천은 이렇게 말씀드렸다. 이렇게 말씀드린 뒤 다시 게송으로 이렇게 말씀드렸다.
"때 묻은 사람들이 고안해낸 청정치 못한 법이
전에 마가다에 나타났습니다.
불사의 문을 여소서.
때 없는 분이 깨달으신 법을 듣게 하소서.
마치 산꼭대기에 선 자가
모든 곳에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듯이
현자시여, 그와 같이 법으로 충만한 궁전을 오르소서.
모두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신 분이여,
슬픔을 제거한 분께서는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태어남과 늙음에 압도된 저들을 굽어 살피소서.
일어서소서 영웅이시여
전쟁에서 승리하신 분이시여
대상의 우두머리시여, 빚진 것이 없는 분이시여
세상에 유행하소서.
세존께서는 법을 설하소서.
구경의 지혜를 가진 자들이 생길 것입니다."
6. 그러자 세존께서는 범천의 간청을 충분히 알고서 중생에 대한 연민 때문에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두루 살펴보셨다. 세존께서는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두루 살펴보시면서 중생들 가운데는 눈에 때가 엷게 낀 사람도 때가 두텁께 낀 사람도 있고, 근기가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있고, 선량한 자질을 가진 사람, 나쁜 자질을 가진 사람, 가르치기 쉬운 사람,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도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저 세상과 비난에 대해서 두려움을 보며 지내는 것도 보셨다.
예를 들면, 어떤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은 물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성장하고 물에 잠겨 그 속에서만 자란다. 어떤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은 물 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성장하여 물의 표면에 닿는다. 어떤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은 물에서 생겨나 물에서 성장하여 물로부터 벗어나 당당하게 서서 물에 젖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세존께서는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두루 살펴보면서 중생들 가운데는 눈에 때가 덜 낀 사람도 때가 두텁게 낀 사람도 있고, 근기가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있고, 선량한 자질을 가진 사람, 나쁜 자질을 가진 사람, 가르치기 쉬운 사람,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도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저 세상과 비난에 대해서 두려움을 보며 지내는 것도 보셨다.
7. 이렇게 보신 뒤 세존께서는 사함빠디 범천에게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그들에게 불사의 문들은 열렸도다.
귀를 가진 자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
범천이여,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을
피로해질 뿐이라는 인식 때문에
나는 설하지 않았다."
8. 그러자 사함빠디 범천은 '나는 세존께서 법을 설하시도록 기회를 만들어 드렸다.'라고 생각하고 세존께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아 경의를 표한 뒤 그곳에서 사라졌다.
- 상윳따 니까야 범천 상윳따 첫번째 품 권청경(555절-561절)
5) 1. 정각자의 고독
붓다께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직후의 상황들은 팔리어 <율장(律藏)> '대품(大品)'에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율장>에 의하면, 붓다께서는 성도 후 5주째 7일 동안은 라자야따나(Rajayatana) 나무를 떠나 아자빨라 니그로다(Ajapala Nigrodha) 나무로 다시 자리를 옮겨 깨달음의 희열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때 사함빠띠(Sahampati)라는 범천(梵天)이 나타나 세존께 법을 설하시도록 간청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범천권청(梵天勸請)'의 설화입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범천의 권청이 있기 직전의 상황을 묘사한 경전이 있습니다. <상응부경전(相應部經典)>의 '공경(恭敬, Garavo)이라는 경'1)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경전에 묘사된 내용도 세존께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후 다섯 번째 주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2) 이 경전에 깨달음을 이룩한 정각자의 고독을 표현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경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괴롭다. 나는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을 존중하고 가까이해야 하랴."3)
붓다께서 깨달음을 성취한 것은 더 없는 즐거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아도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은 붓다 자신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같은 생각을 지닌 자가 있다면 흉금을 털어놓고 대화라도 나누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토로할 대상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무엇인지 모를 고독과 불안을 느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이것을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는 '정각자의 고독'이라고 표현했습니다.4) 그때 붓다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차라리 내가 깨달은 법, 이 법을 존중하고 가까이하면서 살리라."5)
이 대목을 한역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는 범천의 입을 빌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직 바른 법이 있어서, 세존께서 스스로 깨달아 다 옳은 깨달음을 성취하였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래께서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할 만한 것으로써, 그것을 의지해 살아 가셔야 할 것이옵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모든 여래 · 응등정각(應等正覺, 다 옳게 깨달은 이)도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았고, 미래의 모든 여래 · 응등정각(應等正覺)도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도 그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아가셔야 할 것이옵니다."6)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별역잡아함경(別譯雜阿含經)>에서는 범천의 입을 빌리지 않고, 붓다께서 직접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습니다. "일체 세간에 살고 있는 생류(生類) 중에서 계(戒, sila) · 정(定, samadhi) · 혜(慧, panna) · 해탈(解脫, vimutti) · 해탈지견(解脫知見, vimuttinanadassana)이 나보다 뛰어난 자가 있다면, 내 마땅히 가까이 하여 그에게 의지하고 공양·공경하겠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아도 세간의 인천(人天) · 마(魔) · 범(梵) · 사문(沙門) · 바라문(波羅門)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다. 일체의 세간에서 계 · 정 · 혜 · 해탈 · 해탈지견이 나보다 뛰어난 자가 있다면 나는 의지할 것이다. 그렇지 못할 바에야 '내가 깨달은 법(法)'을, 내가 지금 마땅히 가까이 하고 공양·공경하며 성심껏 존중할 것이다."7)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후세의 불교 용어로 표현하면,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내가 깨달은 법'을 객관화하여 흔들리지 않도록 확립해 놓아야 할 필요성이 제기됩니다. 거기에서 설법이라는 과제가 새로이 그의 앞에 다가오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8)
2. 범천의 권청
붓다께서 설법하시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은 앞에서 소개한 팔리어 <율장>의 [대품]에 아주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9) 여기서는 가능한 필자의 의견을 생략하고 문헌에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세존께서는 7일이 지난 뒤 삼매에서 깨어나셨다. 그리고 라자야따나 나무를 떠나 아자빨라 니그로다 나무로 가서 머무셨다.
그곳에서 홀로 선정(禪定)에 잠기신 세존의 마음에는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도달한 이 법은 깊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숭고하다. 단순한 사색에서 벗어나 미묘하고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집착하기 좋아하여, 아예 집착을 즐긴다. 그런 사람들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도리와 연기의 도리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또한 모든 행(行)이 고요해진 경지, 윤회의 모든 근원이 사라진 경지, 갈애(渴愛)가 다한 경지, 탐착을 떠난 경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경지 그리고 열반(涅槃)의 도리를 안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내가 비록 법을 설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만 피곤할 뿐이다.'
그때 세존께서는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게송을 떠올리셨다.
'나는 어렵게 도달하였다.
그러나 지금 결코 드러낼 수 없다.
탐착과 분노에 억눌린 자들은
이 법을 원만히 깨달을 수 없다.
흐름을 거슬러 가기도 하고
미묘하고 깊고 보기 어렵고 섬세하니,
탐착에 물든 자들이
어떻게 이 법을 보겠는가?
어둠의 뿌리로 뒤덮인 자들이.'
이와 같이 깊이 사색한 세존께서는 법을 설하지 않기로 하셨다.
그때 사함빠띠(Sahampati)라는 범천이 자신의 마음으로 세존의 마음속을 알고서 이렇게 생각했다.
'아! 세상은 멸망하는구나. 아! 세상은 소멸하고 마는구나. 여래 · 응공(應供) · 정등각자(正等覺者)가 법을 설하지 않으신다면.'
그리하여 사함빠띠는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혔던 팔을 펴고 폈던 팔을 굽히는 것처럼 재빠르게 범천의 세상에서 사라진 뒤 세존 앞에 나타났다. 그는 한쪽 어깨에 상의(上衣)를 걸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은 다음 세존을 향해 합장하며 간청했다.
"세존이시여, 법을 설하소서. 선서(善逝)께서는 법을 설하소서. 삶에 먼지가 적은 중생(衆生)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법을 듣는다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을 설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조차 쇠퇴할 것입니다."
사함빠띠는 다시 게송으로 간청했다.
"세존 이전의 마가다국에는
어지러운 법이 설해져 있었으니
때묻은 자들이 사유한 것이었네.
이제 세존께서 오셨으니 불사(不死)의 문을 여시어
그 법을 듣고 때 없는 자들이 깨닫도록 하소서.
지극히 현명한 분이시여,
모든 것을 보는 분이시여,
슬픔이 제거된 분이시여,
산의 정상에 있는 바위 위에 오르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법으로 이뤄진 누각 위에 올라서
태어남과 늙음에 정복당하고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소서.
영웅이시여,
전쟁의 승리자시여,
일어나소서.
빚 없는 대상(隊商)들의 지도자처럼
세상을 다니소서.
세존이시여, 법을 설하소서.
아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사함빠띠의 청을 들으신 뒤 그에게 말씀하셨다.
"범천아, 나는 생각했다. '내가 도달한 이 법은 보기 어렵고 …… 열반의 도리를 본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내가 비록 법을 설한다해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만 피곤할 뿐이다.'
범천아, 그때 나에게 이런 게송이 떠올랐다.
'나는 어렵게 도달하였다.
……
이떻게 이 법을 보겠는가?
어둠의 뿌리로 뒤덮인 자들이.‘
범천아, 이런 깊은 사색 끝에 나는 법을 설하지 않기로 하였던 것이다."
사함빠띠 범천은 다시 그리고 또다시 반복해서 세존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범천의 청이 지극함을 아시고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일으켜 부처님의 눈[佛眼]10)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셨다. 그리고 참으로 여러 중생이 있음을 아셨다. 더러움이 적은 사람, 더러움이 많은 사람, 영리한 사람, 둔한 사람, 착한 사람, 악한 사람, 가르치기 쉬운 사람,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 그 중에는 후세와 죄과에 대해 두려움을 알고서 사는 사람, 후세와 죄과에 대해 두려움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셨다.
비유하면 연못의 연꽃들과 같으니, 그곳에는 푸른 연꽃, 붉은 연꽃, 흰 연꽃이 있다. 그들은 모두 물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물의 보호를 받는데, 어떤 연꽃은 물에 잠긴 채 자라고 어떤 연꽃은 물의 표면에 있고 어떤 연꽃은 물 위로 솟아 나와 물에 젖지 않은 채 있다.
그와 같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참으로 여러 중생이 있었다. ……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사함빠띠에게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을 열겠으니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
범천아,
나는 단지 피로할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에게 덕스럽고 숭고한 법을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함빠띠는 세존이 설법을 허락하셨음을 알고는 공손히 절하고 오른쪽으로 돈 다음 그곳에서 사라졌다.
이상에서 인용한 '범천권청'의 내용을 요약하면, 붓다께서 처음에는 설법을 망설였는데, 사함빠띠라는 범천이 나타나 붓다의 마음을 되돌려 마침내 설법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 심리적 전환의 경위를 이 경은 '범천의 권청'이라는 신화적 수법을 통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범천(Brahma)이란 인도인이 받들어 오던 신인데, 그 신이 붓다의 속마음을 알고 붓다를 예배하면서 설법을 하여 주시도록 권청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름답고 구성면에서도 빈틈없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불교학자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는 "붓다의 설법 결의는 결코 그러한 객관적인 계기로 이루어졌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11)고 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무릇 고대인의 문학적 수법은 거의 심리 묘사를 무시하는 데에 특징이 있다. 그들은 흔히 심리적 과정을 객관적 사건을 통해 묘사한다. 마음속에 나쁜 생각이 떠오르면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표현하고, 훌륭한 생각이 떠오르면 범천 같은 신을 등장시킨다. 그것이 불교 경전의 문학 형식의 상례이다. 그러면 이에 범천 설화의 양식으로써 묘사된 붓다의 설법 결의의 진상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을 푸는 열쇠 또한 앞에 든 '정각자의 고독'을 이야기한 경 속에 감추어져 있는 듯하다. 새로운 사상을 자기 혼자 지니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리라. 그것을 어떻게든 남에게 알려서 동조를 얻고 싶어지리라. 인간이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며, 붓다도 인간이기 때문이다."12)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는 붓다의 설법 결의는 '범천권청' 때문이라기보다도 '정각자의 고독'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여튼 붓다께서 범천의 간청에 의해서 최초로 설법을 하려고 결심한 '범천권청'의 설화는 그 실재성 여부를 떠나서 불교의 출발점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즉 깨달음의 내용을 설법의 형식을 통해 객관화시키는 것은 깨달음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13)
Notes:
1) Samyutta Nikaya(PTS) Vol. Ⅰ, pp.138-140; <雜阿含經> 권44, 1188經(大正藏 2, p.321下); <別譯雜阿含經> 권5, 101經(大正藏 2, p.410上-中) 전재성 역주, <쌍윳따 니까야> (서울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1999) 제1권, pp.316-319.
2) Samyutta-Atthakatha(Saratthappakasini), Ⅰ, p.203.
3) Samyutta Nikaya(PTS) Vol. Ⅰ, p.139.
4) 마스타니 후미오 지음 · 이원섭 옮김, <불교개론> 개정2판(서울 : 현암사, 2001), pp.131-134 참조.
5) Samyutta Nikaya(PTS) Vol. Ⅰ, p.139, "Yam nunaham yvayam dhammo maya abhisambuddho tam eva dhamma sakkatva garukatva upanissaya vihareyyan-ti."
6) <雜阿含經> 44권, 1188經(大正藏 2권, p.322上), "唯有正法. 如來自悟成等正覺. 則是如來所應恭敬宗重奉事供養. 依彼而住者. 所以者何. 過去諸如來應等正覺. 亦於正法恭敬宗重奉事供養. 依彼而住. 諸未來如來應等正覺. 亦當於正法恭敬宗重奉事供養. 依彼而住. 世尊亦當於彼正法恭敬宗重奉事供養. 依彼而住."
7) <別譯雜阿含經> 권5, 101經(大正藏 2, p.410上).
8) 마스타니 후미오 지음 · 이원섭 옮김, <불교개론>, p.132.
9) Vinaya Pitaka(PTS) Vol. Ⅰ, pp.4-7; 최봉수 옮김, <마하박가1> (서울 : 시공사, 1998), pp.47-53.
10) 불안(佛眼, Buddhacakkhu)은 부처님이 갖추게 되는 완전한 직관 능력을 말한다. 오안(五眼)의 하나이다. 오안을 북방에서는 ①육안(肉眼), ②천안(天眼), ③혜안(慧眼), ④법안(法眼), ⑤불안(佛眼)이라고 한다. 그런데 남방전통에서는 ①육안(肉眼), ②천안(天眼), ③혜안(慧眼), ④불안(佛眼), ⑤보안(普眼, samantacakkhu, 두루 빠짐없이 살피는 눈) 등으로 분류한다.
11) 마스타니 후미오 지음 · 이원섭 옮김, <불교개론>, p.134.
12) 마스타니 후미오 지음 · 이원섭 옮김, <불교개론>, p.134.
13) 스가누마 아키라 지음 · 편집부 옮김, <부처님과 그 제자들> (서울 : 봉은사출판부, 1991), p.58.
초전법륜(初轉法輪)
1. 최초의 설법
붓다는 바라나시(현재의 베나레스) 근처의 이시빠따나(Isipatana, 仙人住處)에 있는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예전에 함께 수행했던 다섯 수행자들을 만났습니다. 붓다께서 녹야원에 도착했을 때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처음에는 환영하지 않기로 서로 약속하였지만 붓다의 위의(威儀)에 압도되어 결국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붓다는 다섯 수행자들에게 최초로 법을 설하였는데, 이 최초의 설법을 일반적으로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합니다.
붓다께서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왕위를 계승하면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서 세계의 통치자가 되고, 출가를 하면 부처님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해탈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예언되었습니다. 전륜성왕과 부처님은 완전한 정복자라는 의미에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자는 외면적인 지배자인데 반해서 후자는 내면적인 지도자입니다. 전륜성왕의 상징인 윤보(輪寶)가 나아가는 곳에 저항하는 자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설법도 또한 반론할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는 그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설법을 법륜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1)
고대 인도에서는 우주의 바퀴를 ‘범천의 바퀴’, 즉 브라흐마 차크라(Brahma Cakra)라고 하여, 이를 돌리는 자는 신들 가운데서 최고의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상에서의 이상적인 왕은 일곱 개의 보물을 소유하고, 그 하나인 윤보(輪寶)를 굴리는 자라는 뜻에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붓다께서 행한 최초의 설법도 이와 같은 전통과의 연관 속에서 ‘법(진리)의 바퀴’, 즉 다르마 차크라(Dharma Cakra)를 처음으로 굴린다고 비유되었던 것입니다.2)
아쇼카왕이 건립한 석주에는 가끔씩 ‘법의 바퀴’가 등장합니다. 또 최초의 설법을 표현하는 불상의 대좌 등에 법륜을 묘사하는 일이 많은 것은 이때 석존이 법의 바퀴를 굴렸다고 하는 전승에 의거한 것입니다. 불상의 인계(印契, mudrā) 중에는 양 손가락을 서로 끼고 있는 설법인(說法印)이 있는데, 이것은 ‘법륜을 굴린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후대에 와서는 법륜이 붓다의 설법뿐만 아니라 붓다의 교법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사용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널리 친숙해져 있습니다.3)
이와 같이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은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을 선포하시어, 법륜이 구르기 시작하였고, 또 다섯 고행자가 귀의한 곳이기 때문에 교법[法]과 승단[僧]의 탄생지가 되었습니다. 아쇼카왕은 이 성스러운 지점을 순례하고서 많은 건조물을 세웠는데, 그 중에서도 기운찬 사자 네 마리를 새긴 대접받침(柱枓)의 석주는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이 대접받침은 법륜을 떠받치고 있어 불법의 흥륭(興隆)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르나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오늘날 인도의 공식적 국가 상징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날을 기리는 법륜제(法輪祭)가 지금도 스리랑카에서 봉행되고 있습니다.4)
자와할랄 네루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베나레스 근처 사르나트에서 나는 부처님이 첫 법문을 설하고 계시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경에 나오는 말씀들이 2500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곧장 나의 귀에 먼 메아리처럼 다가오는 것 같았다. 명문(銘文)에 새겨진 아쇼카의 석주는 그 장엄한 언어로 나에게 한 인간, 황제였지만 황제 이상으로 위대했던 한 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5)
2. 최초 설법의 의의
초전법륜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이 이를 갖가지로 전하고 있으며, 또 후대의 경전은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 중도(中道), 무아설(無我說), 십이인연(十二因緣) 등 체계화된 불교 교리의 모든 것이 여기서 설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6)
비교적 오래되었다고 생각되는 전승을 보면 쾌락과 고행 두 가지 극단을 떠난 중도를 설하고 있는데, 내용적으로는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과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이 초전법륜의 골자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실제 역사적 사실을 전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예로부터 붓다가 행한 최초의 설법의 내용이 중도(中道), 팔정도(八正道), 사제(四諦)로 인정되어 왔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7)
붓다의 설법을 듣고 다섯 명의 수행자 가운데 가장 먼저 가르침을 이해한 이는 꼰단냐(Kondañña, 憍陳如)입니다. 그는 붓다께서 다시 출가 수계(受戒)하여 최초의 출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뒤이어 나머지 네 명도 가르침을 이해하여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불교교단(sangha, 僧伽)이 성립하여 비로소 불(佛), 법(法), 승(僧) 삼보가 갖추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 후 붓다는 다시 오온무아(五蘊無我)의 가르침인 [무아상경(無我相經)]을 설하였는데, 이것을 들은 다섯 명의 비구는 모두 아라한(阿羅漢, 聖者)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8)
3. <전법륜경>의 내용
초전법륜의 내용은 [전법륜경(轉法輪經)]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때 붓다는 마가다를 중심으로 한 동쪽 지방의 방언으로 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팔리어, 산스끄리뜨어, 한역, 티베트어역으로 20여종이 전해지며 이전(異傳)도 적지 않습니다. 남방불교의 전승인 팔리 [율장(律藏)]에 의하면, 최초의 설법, 즉 [전법륜경]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9)
세존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두 가지 극단이 있으니 출가자들은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여러 가지 애욕에 빠져 그것을 즐기는 것이니, 그것은 열등하고 세속적이고 범부의 짓이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 되는 바가 없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짓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니, 그것도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 되는 바가 없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원만히 잘 깨달았다. 중도는 눈을 뜨게 하고 앎을 일으킨다. 그리고 고요함과 수승(殊勝)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여래가 원만히 잘 깨달았고, 눈을 뜨게 하고 앎을 일으키고, 고요함과 수승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되는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八正道]를 말하는 것이니,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원만히 잘 깨달았고 열반에 도움이 되는 중도이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여기에 성스러운 고제(苦諦)가 있다. 곧 태어남도 괴로움, 늙음도 괴로움, 병듦도 괴로움, 죽음도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도 괴로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간단히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집제(集諦)가 있다. 곧 재생(再生)을 유도하고 희열과 탐욕을 동반하여 이곳 저곳에 집착하는 갈애이다. 다시 말하면 애욕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멸제(滅諦)가 있다. 곧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하고 포기하고 버리고 벗어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도제(道諦)가 있다. 곧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말하는 것이니,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것이 성스러운 고제이다’라는 예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법에 눈을 떴고 지혜가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성스러운 고제를 두루 알아야 한다’라는 예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법에 눈을 떴고 지혜가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성스러운 고제를 이미 두루 알았다’라는 …… 비구들이여, 나는 ‘이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집제를 이미 끊었다’라는 …… 비구들이여, 나는 ‘이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멸제를 이미 증득했다’라는 …… 비구들이여, 나는 ‘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도제를 이미 수습했다’라는 예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법에 눈을 떴고 지혜가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비구들이여, 만약 내가 이 사성제(四聖諦)를 이와 같이 세 번씩 열두 단계로 관찰하지 않아, 있는 그대로 깨끗하게 알지 못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나는 천신, 악마, 범천의 세계와 사문(沙門), 바라문, 인간의 세계에서 가장 높고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훌륭히 성취하였다고 선언할 수 없다.
비구들이여, 나는 사성제를 이와 같이 세 번씩 열두 단계로 관찰하여, 있는 그대로 깨끗하게 알았기 때문에, 나는 천신, 악마, 범천의 세계와 사문, 바라문, 인간의 세계에서 가장 높고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훌륭히 성취하였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알고 보게 되었다. 나의 해탈은 흔들림이 없다. 이것이 최후의 생존이니, 이제 다시 괴로운 존재를 받지 않는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다섯 비구는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 세존께서 이 가르침을 설하시자, 꼰단냐는 먼지와 때를 멀리 여윈 법안(法眼)을 얻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았던 것이다.
세존께서 법륜을 굴렸을 때, 땅의 신들이 소리쳤다.
“세존께서 바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서 가장 훌륭한 법륜을 굴리셨다. 이것은 사문, 바라문, 천신, 악마, 범천 등 세상의 어떤 누구도 굴리지 못한 것이다.”
땅의 신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 사왕천(四王天)의 여러 신들도 외쳤다.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셨다.” 그들의 소리를 듣고서 삼십삼천(三十三天)의 신들도 외쳤다.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셨다.” 야마천(夜摩天)의 신들도 도솔천(兜率天)의 신들도, 화락천(化樂天)의 신들도,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신들도 외쳤다.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셨다.” 그 소리를 듣고서 범천(梵天)의 신들도 외쳤다.
“세존께서 바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서 가장 훌륭한 법륜을 굴리셨다. 이것은 사문, 바라문, 천신, 악마 등 세상의 어떤 누구도 굴리지 못한 것이다.”
이와 같이 순식간에 범천에까지 그 소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그때 일천 세계(一千世界)가 격렬하게 진동했고, 신들의 위엄을 능가하는 한량없는 광채가 세상에 나타났다.
그때 세존께서는 감흥을 읊으셨다.
“아,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구나.
아,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구나.”
이리하여 꼰단냐 장로는 그때부터 안냐 꼰단냐(Añña Kondañña)로 불리게 되었다.
진실로 안냐 꼰단냐는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알았고, 법을 꿰뚫었다. 의심에서 벗어났고, 망설임을 제거했고, 두려움이 없었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은 필요 없게 되었다.
그가 세존께 청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자 합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오너라, 비구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안냐 꼰단냐는 이렇게 구족계를 받았다.
세존께서는 나머지 비구들에게도 교법을 설하셨다. 그때 밥빠(Vappa) 장로와 밧디야(Bhaddiya) 장로가 먼지와 때를 멀리 여읜 법안을 얻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은 것이다.
진실로 그들은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알았고, 법을 꿰뚫었다. 의심에서 벗어났고, 망설임을 제거했고, 두려움이 없었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은 필요 없게 되었다. 그들이 세존께 청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오너라, 비구들이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두 장로는 이렇게 구족계를 받았다.
세존께서는 가져온 음식을 드시고 난 뒤, 다시 나머지 비구들에게 교법을 설하셨다. 이렇게 세존과 비구들은 세 비구가 걸식해 온 음식을 먹으며 지냈다.
세존의 교법을 듣던 사이에 마하나마(Mahānāma) 장로와 앗사지(Assaji) 장로가 먼지와 때를 멀리 여읜 법안을 얻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았던 것이다.
진실로 그들은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알았고, 법을 꿰뚫었다. 의심에서 벗어났고, 망설임을 제거했고, 두려움이 없었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은 필요 없게 되었다.
그들이 세존께 청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오너라, 비구들이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두 장로는 이렇게 구족계를 받았다.
Notes:
1)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서울 : 샘터, 1990), p.160.
2) 中村元著, 金知見譯, [불타의 세계] (서울 : 김영사, 1984), p.211.
3) 中村元著, 金知見譯, [불타의 세계], p.211.
4) 피야다시 지음, 정원 옮김, [부처님, 그분: 생애와 가르침] 법륜, 하나 (서울 : 고요한 소리, 1988), p.37.
5) 자와할랄 네루, [인도의 발견], p.44: 피야다시 지음, 정원 옮김, [부처님, 그분 : 생애와 가르침], p.37 No.2에서 재인용.
6) 中村元著, 金知見譯, [불타의 세계], p.211.
7)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서울 : 민족사, 1989), p.43.
8)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p.43.
9) Vinaya Pitaka(PTS), Vol. Ⅰ, pp.10-13; 최봉수 옮김, [마하박가 1] (서울 : 시공사, 1998), pp.59-66; E. H. 브루스터 편저, 박태섭 옮김, [고타마 붓다의 생애] (서울 : 시공사, 1996), pp. 74-79 참조.
[부처님의 일생] 강의 5. 초전법륜과 교단의 형성
[출처] [부처님의 일생] 강의 5. 초전법륜과 교단의 형성|작성자 정토행자
1. 어떻게 교화할 것인가
1) 해탈의 법열(法悅)
* 부처님께서 6년 고행 끝에 고행을 버리시고 중도에 새로운 길을 발견하시고, 그에 따라 용맹정진 하셔서 마왕의 세 가지 유혹을 물리치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셨다. 인간과 신과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나서 인간과 신의 스승의 지위에 오르셨다.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모든 고뇌가 사라지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대 자유인이 되셨다. 그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존재가 되셨다.
*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께서는 1주일간 그 깨달음의 기쁨(법열), 진리를 증득한 기쁨을 만끽하셨다. 만약에 깜깜한 것이 답답한 것이라면, 밝아지니까 무엇이든지 뚜렷하게 보였다. 나뭇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을 봐도 그 아름다움이 그지 없었다. 발데 밟히는 모래알 하나하나도 그 촉감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 2주째는 자리를 약간 옮기셔서 가만히 앉아서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그 보리수나무를 응시를 하셨다.
* 3주째는 보리수나무 곁을 열아홉 발자국씩 오고 가면서 천천히 움직이면서 선정에 드셨다.
* 4주째는 보리수나무 북편에서 선정에 드셨는데 몸에서 빛을 발했다.
* 5주째는 보리스나무 동편에 앉아 계셨는데, 한 바라문을 만났다. 바라문은 부처님께 '이 세상에서 제일 고귀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을 올렸다. 부처님께서 '마음이 청정한 자가 고귀합니다.'라고 하자, 그 바라문은 자리를 떠났다. 이 바라문은 부처님을 제일 처음으로 만났으나 부처님의 진실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의 사상, 가치관, 기득권, 자기의 이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진실을 볼 수가 없었다.
* 6주째에는 엄청나게 폭우가 쏟아졌다. 부처님께서 앉아 계시던 보리수 나무 아래 강가가 전부 물바다가 되어 버렸는데, 그때 큰 뱀(무차린다 용왕)이 나타나 부천님을 보호해 드렸다.
* 7주째, 부처님께서 앉아 계시는데, 두 상인이 장사한 물건을 싣고 그 숲속으로 지나갔다. 숲속의 짐승이나 강도로부터 두려움을 갖고 있더 두 상인은 마침 앉아계시던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 처음으로 공양을 드신 것이다. 두 사람은 공양을 올리고, 복을 빌었다. 그러나 법을 청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복을 빌어서 복은 얻었지만 법을 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을 듣지 못했다.
* 이렇게 7주간, 49일 동안 부처님께서는 보리수나무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자리를 옮겨가면서 법열을 즐기셨다. 그 전 49일 간 자신의 깨달음을 향해서 선정을 닦았다면, 그 이후 49일 동안은 '이 기쁨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교화할 것인가?'가 하나의 과제였다.
2) 미묘한 법의 바퀴를 굴리소서
*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시고, 이 좋은 법을 나누기 위해 수행을 할 때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되었던 두 스승을 생각하셨지만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함께 수행하던 다섯 명의 수행을 생각하셨다. 그 다섯 명의 수행자는 바라나시 근교에 사르나트에 있었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부처님은 길을 떠났다.
* 그때 마왕이 와서 다시 속삭였다. 그러자 하늘의 범천왕이 부처님께 법을 청하라고 권했다. 이를 범천왕의 권청이라고 한다.
* 부처님이 나무 아래에서 계속 머물렀던 것은 오직 고통 속에서 해매는 중생들의 고통을 가슴 깊이 느끼며 자신이 중생 구제를 위해 이 땅에 왔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법을 전할 수 있을까 고심했던 것이다.
** 마왕의 속삭임과 범천왕의 권청 **
그때에 다시 마왕 파순(파피야스)이 부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불사안온(不死安穩)에 이르는 길을 그대가 진정 깨달았다면, 그 길은 그대 홀로 감이 좋도다. 어찧여 남에게까지 설하려는가. 그들은 암흑에 덮여 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대를 비난할 것이오. 그대 혼자 법열을 즐기다 열반에 드는 것이 현명할 것이오." (상응부경전)
그때에 대범천왕이 부처님 앞에 나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릅을 땅에 대고 합장 공경한 후 말했다.
"세존이시여, 먼 옛날로부터 무수한 생사고해에 머물면서 눈과 머리며 온몸을 버리어 보시를 함으로써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받으시며 도를 구하신 것은 오로지 중생을 위하는 자비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지금 세존께서는 비로소 위없는 도를 이루셨는데 어찌하여 침묵을 지키며 법을 설하지 않습니까. 중생들은 오랜 세월 동안 생사고해의 수렁에 빠지고 무명의 암흑 속에 떨어져 있어 뛰쳐나올 기약이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많은 중생 가운데는 지나간 세상을 선한 벗을 친하고 가까이 하여 덕의 바탕을 쌓읁라 부처님의 법을 듣고 받아 지닐 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오직 원컨대 부디 이들을 위해 큰 자비심을 내어 미묘하 법의 바퀴를 굴려주소서." (과거현재인과경)
이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너 악마의 왕인 파순(파피야스)이여, 나는 본래 서원을 세워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려고 큰 보리를 구하여 한량이 없는 겁을 지나면서 애써 덕을 쌓았었고, 이제 그 큰 도를 성취했노라. 그러나 일체 중생이 나의 법 가운데서 아직 이치와 이익을 얻지도 못했거늘 어찌하여 속히 나에게 열반에 들라 하느냐. 또 묘한 법을 아직 말하지 못했고 세간에 삼보가 아직 갖추어지지 못했고 중생이 아직 조복되지 못했으며 한향없는 보살들이 아직 무상정등정각의 마음을 내지도 못했거늘 어찌하여 나에게 열반에 들라 하느냐. 나의 열반은 아직 그 시기가 이르지 않았느니라. 나는 뭇 사람들이 대지와 저 천상, 인간에 두루하여 모두가 해탈을 증득하기를 기다리느니라. 나는 이때에 비로소 열반에 들리라."
또 부처님은 권청하였던 여러 범천과 세상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내 이제 그대들의 원을 받아 마땅히 법비를 내려 감로의 문을 열리라. 청정한 믿음으로 귀를 기울이라. 기꺼이 법을 설하리라." (방광대장엄경)
** 갠지스 강의 뱃사공 **
이때에 부처님께서는 여러 마음을 거치며 마침내 이른 아침에 갠지스 강 기슭에 도달했다. 부처님께서는 강ㄱ에 이르자 뱃사공에게 나아가서 강을 건네주기를 청했다.
그때 뱃사공은 부처님께 말했다.
"존자여, 만약 능히 나에게 뱃삯을 준다면 나는 이제 곧 존자를 건네 드리겠으나 그렇지 앟으면 건네 드리지 못하겠나이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나는 오직 이로 인해 생활하고 처자를 양육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 신통으로 허공에 날아올라 저쪽 강 언덕에 도달하셨다. 그때 그 뱃사공은 부처님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마음에 큰 뉘우침을 내어 스스로 한탄하고 꾸짖으며 기절해 땅에 넘어졌다. (불본행집경)
* 깨달음을 얻으신 후 부처님이 처음으로 만나신 바라문, 상인, 뱃사공은 상징성을 담고 있다. 첫 번째 사람은 지식인임에도 자신의 가치관, 이념, 사상에 사로잡혀 진리를 보지 못했고, 두 번째 상인들은 사업하는데 집착이 되어 있어 복은 빌지만 법을 들을 귀는 없었던 것이고, 마지막 뱃사공은 너무 가난해서, 살기 바빠서 진리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2. 교화의 첫걸음, 초전법륜
1) 법의 도반을 찾아서
* 이렇게 해서 부처님께서는 바라나시의 사르나트(녹야원)로 가셨다. 바라나시는 당시 카시국의 수도로서 강가강(갠지스강) 지류의 하나인 바루나강과 아시강 사이에 도시가 형성되어 바라나시라고 부른다.
* 바라나시 북쪽 바루나 강 거너 북쪽에 노예들이 죽으면 시체나 갔다 벌는 시타림이 있었다. 시타림을 수행자들은 고행림이라고 부르고 그 곳에서 주로 수행을 했으며 부처님과 함께 수행하던 5명의 수행자도 사르나트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다.
** 다섯 수행자와의 만남 **
이때 다섯 수행자들은 부처님이 자리에 앉으신 것을 보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장로 고타마시여, 신색(身色)과 피부가 대단히 좋고 청정하오며 면목이 원만 하옵고 또 광명이 족하오며 모든 근이 청정하나이다. 장로 고타마시여, 이제는 좋고 묘한 감로를 만났거나 청정한 감로의 성도(聖道)를 얻었습니까?"
그때 부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나를 여래(如來)라고 부를 것이요, 고타마라고 하지 말라. 무슨 까닭인가. 나는 이미 감로의 도를 발견하였고, 나는 이제 감로의 법을 갖추었으며 고요하고 번뇌가 없어서 마음에 자재로움을 얻었느니라."
이때에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다섯 수행자는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장로 고타마시여, 예전에 6년간의 극심한 고행을 하면서도 무상정등정각을 증득하지 못하였거늘, 모든 성인들이 수행하였던 그 같은 길을 정진하지도 못하였거늘, 하물며 장로께서는 지금 육신의 욕망을 좇아 나태를 내어 선정을 잃고 해태함이 몸에 얽혀 있는데 어찌 무상정등정각을 얻었다고 하십니까?"
그때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행자여,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여래는 욕망에 끌리지 아니하며 선정을 잃지도 않고 또한 해태함이 몸에 얽혀 있지도 않다. 그대들은 스스로 알리라. 내 지난 날 사람들에게 망령되이 거짓을 말한 적이 있는가. 또한 일찍이 상호가 이처럼 청정하고 원만히 빛나던 때가 있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여."
이때에 부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그대들이 만약 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면 내 그대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그대들이 나의 가르침을 받아 지녀 따르고 청정히 수행한다면 곧 해탈락을 얻으리라. 그대들이 만약 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면 이제 조용히 법을 들을 귀를 준비하라." (불본행집경)
2) 초전법륜
* 부처님께서 다섯 수행자와 북쪽으로 장소를 옮겨 초저녁에 함께 침묵하면서 선정에 들었다. 그리고 한 밤 중에 선정을 풀고 마음을 편하게 가졌다. 새벽녘이 되어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셨다.
* 첫 번째로 설한 법이 중도(中道)였다. 수행자는 쾌락을 쫓아서도 안 되고, 고행으로 쫓아도 안 된다. 양극단을 피해야 한다. 즉 사물을 보는 관점을 먼저 정리하였다. 그리고 중도에 대해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팔정도,八正道)을 설하시고, 사성제(四聖諸)를 설하셨다.
** 초전법륜 **
이때에 부처님께서 기수월 보름 전 12일에 해가 사람의 그림자 반을 지날 무렵, 북쪽으로 향하여 앉으셨다. 부처님은 초야분(初夜分)이 되자 더 말씀을 않고 묵좌(默坐) 가운데 계셨다. 중야분(中夜分)에는 대중을 편안하게 위로하여 기쁨을 내게 하였다. 이윽고 후야분(後夜分)이 되자 부처님은 다섯 수행자를 행하여 말씀하셨다.
"수행자들이여, 잘 알아야 한다. 출가 수행자에게는 반드시 버려야 할 두 가지의 장애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 장애인가?
첫째는 마음이 욕망의 경계에 집착하여 쾌락에 빠지는 것이니 이는 어리석은 범부들이 찬탄하는 바이며, 둘째는 육체를 스스로 괴롭히는 것에 열중하여 고행에 빠지는 것이니, 이는 출가의 목적과 수단을 전도한 것으로써 심신이 모두 고통의 과보에 떨어질 뿐 출가인의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느 버려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는 해탈의 원인이 아니며 욕망을 소멸하는 원인이 아니며, 부처를 성취하는 원인이 아니므로 반드시 버려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치우침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깨달았다."
"수행자들이여 중도란 무엇인가? 이는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팔정도)를 말함이니, 곧 바른 눈(정견 正見), 바른 관찰(정사유 正思惟), 바른 말 (정어 正語), 바른 행(정업 正業), 바른 생활(정명 正命), 바른 노력(정정진 正精進), 바른 집중(정념 正念), 바른 마음의 통일 (정정 正定) 이니라. 이 중도는 모든 것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알 수 있는 통찰력과 직관이므로 지혜를 낳아 범부의 눈을 뜨게 하고 마음의 평화와 진리의 크나 큰 체험으로 열반을 성취케 하리라."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고집멸도(苦集滅道)의 네 가지 거룩한 진리[사성제 四聖啼]를 말씀하셨다.
"수행자들이여 '괴로움'이라고 하는 진리[고제 苦啼]가 있다. 태어나는 것도 괴로움이며, 늙는 것도 괴로움이며, 병을 앓는 것도 괴로움이며, 죽는 것도 괴로움이다. 근심과 걱정과 슬픔과 안타까움도 괴로움이다. 미워하는 사람끼리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며, 우리들의 인생 전부가 괴로움이다.
수행자들이여, 이와 같은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을 말하는 진리[집제 集啼]가 있다. 미혹한 생존을 있게 하고, 기쁨과 탐욕을 동반하고, 모든 것에 집착하는 애욕과 갈마이 곧 괴로움의 원인이다. 그것은 정욕적인 애욕과 생존에 대한 갈애(渴愛)와 생존이 없어질까봐 집착하는 갈망의 셋이다.
수행자들이여, 이와 같은 '괴로움이 소멸'된 진리[멸제 滅啼]가 있다. 이 갈애를 남김없이 없애고, 버리며, 떠나고 벗어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수행자들이여,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길'인 진리[도제 道啼]가 있다. 그것은 여덟 가지 거룩한 실천이다."
"수행자들이여, 괴로움에 대한 거룩한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바로 알아 철저히 인식해야 하며, 괴로움의 원인을 발견하고 그것을 끊어버려야 한다. 괴로움이 소멸된 경지를 증득하고자 괴로움을 없애는 기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여야 한다. 나는 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각각 세 가지 단계로 나누어 바르게 알고, 소멸시키고, 닦고 증득함으로서 부처가 되었다. 이 네 가지 법은 다른 이로부터 듣거나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오, 세상의 법을 수순하여 이치대로 관(觀)함으로써 지(知)가 생기고 눈이 뜨여서 두루 밝게 살핌으로써 혜(慧)가 생겨서 광명을 얻었느니라."
"수행자들이여, 세상 사람들은 고통으 바다에 빠져 있나니[고 苦], 이 고통은 잘못된 탐욕과 집착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집 集]. 그런 까닭에 눈을 떠서 이 탐욕과 집착의 뿌리를 뽑아 버리면 고통을 벗어나 무한 생명의 기쁨을 성취하리니 [멸 滅], 그대들이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 [팔정도]을 힘써 행하여 닦으면 [도 道], 누구든지 눈을 뜨고 큰 깨침을 얻을 것이다. [사성제 四聖啼] (불본행집경)
* 이 가르침을 듣고 카운티냐(교진여)가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님은 자신의 깨달음이 모든 중생에게 해탈을 줄 수 있음을 확신하고 기뻐하셨다. 부처님가 카운디냐는 이 감격에 머무르지 않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리의 담론을 지속해 나머지 수행자도 깨달음을 얻어 계를 받았다.
* 이로서 스스로 깨달은 이 붓다(佛), 깨닫지 못한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한 깨달은 이의 가르침 담마(法), 그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이 상가(僧), 불법승 삼보가 성립되었다.
** 최초의 제자, 다섯 비구 **
"오, 카운디냐는 깨달았다. 카운디냐는 정각을 얻었다. 여래의 교법은 깊고 깊어 말로는 다 할 수 없고 오묘하고 적정하여 이름 붙일 수도 없다. 이제 가장 뛰어난 카운디냐가 여래의 진리의 법안을 밝히니 이제 부처의 법이 그 빛을 찾았구나."
이때 모든 신들 중에 땅의 신들이, 이를 보고 듣고 일시에 크게 외쳐 선언하였다.
"모든 하늘이여, 들으라. 오늘 부처님께서 바라나시 성 녹야원에서 위없는 미묘한 법바퀴를 굴리시도다. 일체 세간의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천상의 범천이나 마군이나 그 누구도 참으로 이런 법바퀴를 굴릴 수 없으리라. 이 여래의 교법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결코 뒤집혀질 수 없으리라."
이때 사문 카운디냐는 법안을 열어 여실히 모든 법을 보고 알았으며, 여실히 모든 법을 증득하였다. 또한 여실히 모든 법을 보고 알았으며, 번뇌의 험한 벼랑을 건넜고 혼돈과 의혹은 숲을 건넜고 마음 가운데 결정코 걸림이 없어 이미 두려움이 없음을 얻었으니, 남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여래의 위신력이었다. 그때 카운디냐는 그 법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오른 무릎을 꿇고 합장한 채 부처님께 아뢰었다.
"위대하신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법에 들어가겠사오니 세존께서는 저를 건지시와 구족계(具足戒)를 주시고 비구가 되게 하여주소서."
그때 부처님께서는 카운디냐에게 이르셨다.
"어서 오너라, 법은 이미 잘 설해졌다. 그대는 괴로움의 뿌리를 뽑을 때까지 청정한 수행을 하라." (불본행집경)
3) 재가자로서의 첫 출가자, 야사
* 야사는 바라나시의 부호인 구리가 장자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야사의 출가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부처님은 수행의 길과는 거리가 먼 야사를 교화함으로써 일반인을 교화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 아들을 찾으러 온 구리가 장자 부부도 야사의 권유로 부처님께 법을 듣고 깨달아 스스로 삼보에 귀의하여 최초의 재가 신자가 되었다.
** 구리가 장자의 귀의 **
때에 구리가 장자는 다시 부처님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위대하셔라, 세존이시여. 위대하셔라, 세존이시여.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 주듯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듯이, 길 잃고 헤매는 자에게 길을 가리키듯이, 혹은 '눈이 있는 자는 보라.'하고 어둠 속에 등불을 밝혀 주듯이,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세존께 귀의하여 받들고자 합니다. 또 세존의 가르침과 승단에 귀의하여 받들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 주십시오. 저는 오늘부터 목숨이 다학까지 귀의합니다. " (경집)
부처님은 이것을 묵언으로 허락하셨다. 이리하여 그는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삼보에 귀의한 최초의 재가신자가 되었다. (불본행집경)
* 부처님께서는 구리가 장자의 귀의를 칭찬하시며 삼보에 귀의한 자로서 오계를 지녀야 함을 설하셨다. 이렇게 해서 '몸과 목숨을 바쳐 이 계율을 꼭 지키겠습니다.'고 맹세를 하여 야사 비구의 어머니, 아버지인 구리가 장자 부부가 최초의 여자신도, 남자신도가 되었다. 수행자는 출가해서 수행하는 사람(출가수행자)과 세속에 있으면서 수행하는 사람(재가 수행자)가 있었다. 출가 수행자, 재가 수행자 모두 수행자이다.
4) 야사를 따른 옛 벗들의 출가
* 야사의 출가는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다. 특히 야사와 항상 어울려 놀던 네 친구는 보통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많은 부를 누리던 장자의 자제들이었다. 이들은 녹야원으로 야사를 찾아 갔다.
* 야사를 만난 네 친구는 며칠 사이에 변한 야사의 모습을 보고 놀랐으며, 부처님의 모습에 크게 감복했다. 그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마음의 문이 열려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로서 최초의 비구 5명과 야사와 그의 친구들 5명, 총 출가한 스님이 10명이 되었다.
* 야사에 이은 야사 친구들의 출가는 바라나시를 뒤흔들었다. 그들의 출가는 쾌락과 환락의 질퍽한 늪에서 허우적대며 살던 많은 장자의 자제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갈증 속에서 살던 그들에게 이들의 출가소식은 용기를 주었다. 그리하여 50명의 청년들이 출가해 계를 받아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고, 이들 역시 더 이상 세속의 가치에 물들지 않는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다.
3. 전도의 길
1) 중생을 위해 전도를 떠나라, 전법선언
* 부처님은 처음으로 형성된 교단의 제자들을 모아놓고 전도를 떠나라는 전법선언을 설하셨다. 이들은 모두 60명으로 최초의 다섯 수행자와 야사, 그리고 야사의 친구들이었다.
** 전법선언 **
이때에 부처님께서는 바라나시 성 녹야원에서 여름을 보내신 후, 모든 비구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이미 그것이 천계의 것이건 인간계의 것이건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해탈하였다. 그대들도 또한 천계와 인간계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수행자들이여, 이제 모든 천인과 인간들 속에서 그들을 제도하라.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안락을 주기 위하여,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이익이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안락을 주기 위하여,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이익과 안락을 구해주기 위하여 속히 떠나가라. 마을로 들어갈 때는 홀로 스스로 갈 것이요, 두 사람이 함께 가지 말라.
수행자들이여, 유행을 할 때는 많으 사람들을 위해 애민하여 섭수하고자 법을 전하되, 항상 처음과 중간과 끝을 모두 올바르게 설해서, 의미가 분명하고 어구가 명료하여 의심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수행자들은 항상 원만구족하고 청정한 범행을 보여주어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세상의 많은 중생들은 업장이 두텁지 않고 마음이 더러움에 적게 물들었으며 번뇌가 엷어서 선근이 성숙되어 있으나, 바른 법을 듣지 못해 고통 받고 두려워하고 있다. 이들에게 법을 번하라.
수행자들이여, 나도 이제 곧 우루벨라로 가서 병장촌에 머무르면서 그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리라. " (잠아함경)
2) 카샤파 3형제의 귀의
* 마가다국의 우뤨벨라에는 불을 섬기는 사화외도(事火外道)인 카샤파 3형제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나이란자나 강가에 수행처를 두고 있었다. 맏형인 우루벨라 카샤파는 가장 상류 부근에서 500명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고, 둘째 나디 카샤파와 셋째 가야 카샤파는 각각 300명과 2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 부처님은 먼저 맏형 우루벨라 카샤파와 그의 제자들을 위의와 설법으로 교화하셨다. 이후 둘째와 셋째 카샤파와 그들의 제자들도 모두 제자로 받아들이셨다. 부처님은 카샤파 형제와 그의 제자들을 교화하시고자 3,500가지의 신통력을 행사하셨다고 한다. 이는 카샤파 형제를 조복시키는 일이 쉽지 않았고 오랜 시일과 노력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 부처님께선 카샤파 3형제를 설복해 1,000 여 명의 제자를 거느린 교단을 형성함으로써 본격적인 교화 활동을 펴는 데 필요한 교두보를 마련하셨다. 부처님은 천 명의 제자를 위해 타오르는 불의 설법을 하셨다.
** 불의 설법 **
"비구들아, 탐.진.치 세 가지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는 것은 나를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세 가지 불을 멸하려면 나의 근본을 끊어야 한다. 이 나의 근본을 끊을 수 있게 되면 세 가지 불길은 스스로 꺼지고 삼계를 윤회하는 모든 괴로움은 스스로 사라지리라. 이제까지 너희는 이 세가지 불을 섬겼으나 지금 이것을 버렸느니라. 이제 외도를 버렸으나 아직 삼독의 불길은 너희 안에서 타고 있다. 이것을 빨리 멸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의하여 닦아야 하느니라. "
3) 마가다국 빔비사라 왕과 죽림정사(竹林精舍)
* 120살의 카샤파가 젊은 사문에게 귀의했다는 소식은 마가다국 전체를 뒤흔들어놓았다. 카샤파를 숭상했던 빔비사라 왕가 마가다국의 백성들은 사실 여부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 빔비사라 왕은 라자그라하 부근 숲에 계신 부처님을 찾아갔다. 부처님은 마음에 의심이 남아 있는 빔비사라 왕과 백성들을 위해 카샤파에게 직접 말하도록 하셨다.
** 우루벨라 카샤파의 고백 **
"붓다의 가르침을 듣기 전까지는 불을 받드는 것이 가장 으뜸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불을 섬기는 것이 윤회의 씨앗을 뿌리는 것에 불과함을 알았습니다. 불을 받드는 것은 내생(來生)을 구하기 위한 것입ㄴ디ㅏ. 바라문의 제사는 하늘과 땅 위에 사람으로 태어날 공덕은 있으나 탐욕과 진심과 어리석음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생존의 집착이며 구차함인 줄을 알아 제사도 공희(供犧)도 버리게 되었습니다.
* 카샤파의 말이 끝나자 부처님은 비로소 그들을 위해 법을 설하셨다. 빔비사라 왕과 그의 권속과 신하 그리고 마가다국의 많은 백성이 부처님의 설법에 감화를 받고 귀의했다. 빔비사라왕은 다음과 같이 부처님께 귀의했다. "세존은 실로 하늘과 땅에 사는 모든 것의 스승이십니다. 저 같은 사람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계십니다. 이 나이게 세존을 만나 그 제자의 무리 속에 끼워주신 것을 무상의 기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세존은 저의스승이십니다. 저는 세존의 가르침을 듣는 제자입니다."
* 이후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승단을 위해 사원을 지어 기증했다. 이 사원이 불교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이다.
[출처] [부처님의 일생] 강의 5. 초전법륜과 교단의 형성|작성자 정토행자
첫댓글 부처님은 성도후 49일동안 해탈의 법열을 즐기셨고 그 이후 범천이 나타나 인류 구원을 간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