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최경은
양파 외
바람은 오랫동안 불지 않았다
베란다에 걸린 양파들이 말라가고
점점 뒤꿈치를 드는 줄기와 뿌리들이 허공을 읽고 있다
시한부인 내가 마지막 선택한 거처는 바닷가 낡은 빌라였다
거실에서 베란다를 바라보면 양파가 바다 위에 둥둥 떠 있고
나를 갉아 먹던 암세포도 양파처럼
싱싱하게 내 몸을 더듬고 있었다
해변 앞 느림보 우체통 속 편지들처럼
죽음이 나를 향해 천천히 도착하고 있었다
토마토 스프를 만들어 먹던 일상이 떠오르는
닫혀있던 여백의 그림자
소란스런 낮을 보냈던 태양이 저녁을 향해 기울어졌다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던 가장자리가 붉게 타올랐다
바다. 태양. 물새. 등대...
죽어서도 되고 싶은 것들이 늘어났다
나의 무의식이 더딘 걸음으로 옮겨가는 언덕이
어느새 내 앞에 쏟아졌지만,
진통제를 한 움큼씩 삼킬 때 마다
각오도 한 움큼씩 삼켰다
뭉개져 쪼그리고 앉은 양파를 화분에 옮겨 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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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 드로잉
한 아이가 모자를 눌러 쓴 채 그림을 그린다
레고처럼 계단이 놓여지고
미끄럼틀 사이로 회색 구름이 걸쳐있다
다른 아이는 없고
아이 하나 남아
모래 위의 뭉개진 얼굴을 다시 그리고 또 그린다
그림 속 아이는 아이 얼굴을 닮지 않았다
귀가 유난히 큰 얼굴
너는 토끼를 좋아하는 구나
내가 물으면
이건 블랙홀이야
불안한 눈빛,
하지 못했던 말들이 내 입 안에서 맴돈다
여섯 살이 가진 블랙홀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고아는 아니지만
고아 같았던,
아이가 우주를 짊어지고 있었다
빠져나올 수 있을까?
놀이터에는 아이 하나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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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은|2020년 한국NGO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