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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마을...32..130910
의흥읍내 공장?(공방) 들..
1..정미소 겸 제재소
정미소 의 원조 톡티방간(톡티 방앗간)..뭘보고 톡티 방간이라고 하는가 하면 5마력 원동기 돌아
는 소리가 통통 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톡티 방간 이라고 했고 작업은 도정 과 밀가루 콩가루
빻기 가 전부다..그런데 이 원동기는 후일 알고보니 통통배(소형선박) 의 엔진으로 쓰이는 것인데
당시에는 기계가 별로 없던 시절이라 방앗간 원동기 가 된 것이다.
의흥읍내 톡티 방간은 손동수 어른이 운영하셨는데 옛날 하재문 네 집 옆 하수도 가 이며 작업을
하던 곳은 그 앞엔 옌자방아 한짝만 남아 있고..등개(등겨) 가 나와 날라다니 지 않게 한 등개창고
그리고 앞 마당은 멍석깔아 곡신담아 내고 받아내고 하는,,그리고 도정기계(호박) 이다.
나락을 양철로 만든 쓰레바키 큰것 같은 도구로 호박에 넣고 돌려 내면 쌀이 되어 나온다.
어릴적 나는 톡티방간 이웃에 살았으며 그집 외동아들은 팔용이 또는 금호 라고 부르는 형이 였다.
그리고 이 금호형 이 유모어 가 많은 분이고 좀 봉건적인 것을 꺼리는 성격이라 당시로서는 반항아
비슷 한 대우를 받았던 것 으로 기억된다..가출을 하는등등..간간이 방아간 일을 돕기도 하고 우리
의 웃음은 이 형이 많이 웃게 한것도 기억이 된다..
도정을 하는 것을 의흥말로 는 나락찧는다 라고 하고 나락찧으면서 먹거리 부족하여 부황이 나기
일 쑤 인 환경인지라 흘러나오는 쌀이 예사롭지 않고..이걸 한주먹 훔쳐먹는 것을 한줌 쥐어간다
라고 했지..그 구수한 쌀 한주먹 을 쥐어먹고 행복해 하며..히히 데던 시절이 참 그립다.
방앗간 앞으로 난 안보도랑 과 톡티방간은 6.25. 한국전쟁 후 에는 없어졌다.
이 톡티방간 없어진 그 자리에 김동희(김동필의 큰형님) 이 오무라상 집 앞에 버려진 인민군 트럭
의 엔진을 때어다가 이걸 원동기로 개조하고 도정공장 을 시작했으나 소규모 였다..그러나 도정
시설이 없든 때라 의흥읍내 사람은 너도 나도 이곳을 이용 했고 달리 방법은 디딜방아 뿐이다.
6.25.한국전쟁 이후에 디딜방아 는 도정공장 의 대신이 였고 나도 많이 디뎌본 경험이 있다.
그러다가 좀 세월이 지나서는 바퀴 하나 짜리 약2.~30마력 짜리 원동기가 들어오고 이 원동기로
제대로 된 도정공장 이 되었고..여기서 나락. 보리. 밀. 콩. 등과 목화로 솜 타기. 원목을 가르는
목제 제재..등을 하고..그 원동기는 거대한 덩치며 소리 또한 특이한 쿵쿵 소리 였지....
그 먼지나는 도정공장 과 그 먼지한톨 한톨에 담긴 애틋한 농부들의 사연들이 많기도 했지..
6.25.한국전쟁 직후 에는 의흥읍내동 에 큰 원동기 도정공장은 두곳이 였고 하나는 동필네..
하나는 신현직 씨..이 두곳이 한참동안 지키다가 그 후로 박수근 씨 배인오 씨 등이 도정업을 하
시기는 했으나 나의 추억은 동필 형네와 신현직씨 이 두곳의 방앗간 에 머물고 있어 이 두곳만
거론키로 한다..도정시설은 많이 생겼으나 우리시대 는 이 두곳이 대표적인 곳이다.
특히 당시에는 농촌에서 받은 수득세 나락을 도정하여 쌀만 우보역 으로 운송해다가 정부로 보내
졌다. 제도상..그레서 이 수득세 받은 나락삐까리(더미) 가 산처럼 높게 쌓이고 있었고 이를 몽땅
도정을 해야 하기 때문에..동필형 네 도정공장은 쉴틈 없이 돌아가고 여기에 종사는 기술지 또백이
등 유명? 인사와 청장년 들이 많았다..그리고 그 도정을 정부도정 이라고 했지..
그 도정공장 에 산같이 싸인 나락등게(벼의 겨) 는 냉수지 가지골 과수원 능금(사과) 보온용 으로
나중에는 가정용 땔감으로..나로용 보온용 등으로 쓰였는데 나락등게 한줌 고래에 넣고 풍로로
바람 부치면 이놈들이 온돌구들을 덮혀서 온 방이 절절 끓고..이 등게가 워낙 많다보니 아무나
공짜로 퍼가도록 하고..제재한 톱밥도 나락등게 처럼 싸였지 아무나 가져갔다..
도정의 부산물인 단가리는 개떡용..아니면 짐승의 사료로 쓰여서 나락임자 들이 가져가고..정부
도정 부산물은 팔려가기도 했다..단가리 한바가지 소죽위에 얹어 끓이고. 개밥이라야 단가리 한
바가지 물에 타서주면 되고..고운놈은 개떡을 쩌서 사람이 먹기도 했다..그 개떡 우리때는 소중한
먹거리 였지..우리 시절사람은 개떡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이다.
이 두곳의 도정공장 은 제재업도 겸 했다..이는 6.25.한국전쟁 직후라 가옥등 제반시설이 폭격으로
파괴되고 소실되고 한 시기라 제건에 몰두하던 시절인지라 목제가 다량으로 사용되는 시기였고
국내의 삼림은 빈약하여 외국에서 원조? 로 들어온 원목이 많아 제재를 하여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제재 역시 아주 훌륭한 사업으로 자리 매김 할 시기 였기 때문 일 것이다.
원형으로 된 거대한 톱이 원동기 힘으로 돌아가고 한쪽에서 제단을 하여 톱에 얹어 밀면 다른 한쪽
은 이를 쇠 갈고리로 찍어 잡아 당기고..하여 나무를 켜 판자 또는 기둥을 만든다..이 톱돌아가며
나무 켜지는 소리 쇄~~~앵 하는 독특한 소리는 그 시절 이후는 들어 보지 못했다..여기에서 과수원
과일상자 제작용 판자도 만들어내고 가지골 냉수지 사람들 이 가져가고...
목재로 쓰이지 못하는 핏쪽은 장작대신 땔감으로 유용하게 쓰여졌고..우리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는
교실에 쓸 난로연료로 이 핏쪽을 쓰기도 했는데..간혹 제재소 핏쪽을 얌생이 해 오기도 하고 들통이
나도 꿀밤도 안먹이는 고함 뿐이던 그런 인심의 시절이기도 했지..여기에서 각목을 얌생이
몰아 수겟또 도 만들고 판자도 슬쩍 많이 했고 심한경우는 한 아름씩 안고 나오기도 했다..
여름철 도정공장 곡식 도정할 적에 나는 먼지 가 가물 가물 사람이 보일동 말동 한 그 공장내부 에
마스크도 없이 까끄레기 뒤집어 쓰고 땀이 비오듯 해도 어이 어이 고함치며 작업하던 일..이 일은
우리 청년시절 까지 이어졋고 열심히도 일하던 그 동욱이형 동필 인길 팔이 등등 우리 친구들..
아직도 살아서 생생 하지만 역사는 아득한 옛 일 처럼 되어 버렸다.
원목 매어 들고 영차 제재하고 톱이 낡아지면 이를 줄로 날을 다시세운다고 갈아 부치던 강노인
둥글고 큰 톱을 자식인양 애지중지 하시던 어른..여기에 종사하던 우리 형빨 들..
지금은 다 무엇을 하시는고...이런 도정공장도 두곳모두 사라지고 그 자취를 조차 찾을 길없이
다른 시설들이 차지하고 있지만 그 시절의 추억은 어제만 같다.
고향마을...33..130910
의흥읍내 공장?(공방) 들..
2.마방
마방 이 무엇인고 하니 마방은 바로 말 다갈(말 신발) 을 만들고 이를 말의 발에 박아 신기는 일
을 하는 곳을 마방 이라고 한다..얼마전 까지 자동차가 대중화 되기전 에는 말이 중요 운송수단
으로 쓰였다..특히 의흥장날 마다 각지에서 장사꾼 들의 물건짐을 싣고 장으로 들어오는 말 구루
마 행열은 진풍경중 하나며..이런 말 구루마가 많게는 20~30 대나 되었다.
따라서 이 구루마 끌고온 말과 구루마 꾼(구루마 운전수) 들이 쉬고 먹고 하는 곳이 마방이며 또 말도 매어두고 쉬게 하며 여물을 먹이고 물을 먹이는 곳 도 마방이다..이 마방근처 에는 식당?
(주막) 이 있고 주로 구루마 꾼 들의 주식을 제공하고 휴식을 하도록 하였으며..말의 신발을 갈아
신기기 위해 평행봉 처럼 생긴 틀을 만들고 말을 그 속에 넣어 매어 놓고 다갈을 박는다.
말 다갈을 박는 모습을 보면 먼저 신발이 낡아 웃자란 발톱을 칼로 오려내고 그 자리를 인두 같은
도구로 지진다..다음은 발 바닥에 오물을 제거하고 쇠로된 말다갈을 불에 달구워서 말의 발에 붙
이고..쇠로된 말다갈 용 못(특별히 제작 한것)을 박아 발에 고정시킨다..이 말다갈 박을 적에 나는
발톱 타는 냄새는 수준급 노랑내 가 난다..아~~그 노랑네
옛날 마방은 곡물전 덜 가서 동사(사영정) 앞에 있었고 수양버들 고목과 프라타나스 거목이 있었
으며..이 일을 하신분은 손동수 어른이다..그리고 주식을 팔기도 했고..한편 톡티방간도 운영 하신
여러 방면의 기술이 있는 분 이 셨다...장짐을 싣고 왔다가 파장이면 다시 물건을 싣고 떠나는데
올때 모양처럼 갈 때 모양도 진풍경이 였다..일열로 서서 달리는 조랑말 말 구루마 들이..
이 말 구루마는 자동차가 대중화 되면서 없어지기 시작하여 지금은 그의 없게 되고 따라서 마방도
자취를 감추었고..마방 수양버들과 프라타나스 나무도 사라졌다. 그러나 내 뇌리에는 마방근처가
아직도 보이며 진한 추억속에 나는 말 발톱 타는 냄새도 나고 있는 듯 하다..마방이 사라지고 사람
도 사라지고 남은것 보다 없어 진것이 더 많은 오늘 이 어쩐지 씁쓸하다,
3.가지야 방
가지야 방은 구루마를 만드는 곳이며 부업으로 철물로 각종연장 도 만드는 곳이다..말구루마 뿐만
아니라 소 구루마 도 만들고 농기구 일부도 만들며 수리도 했지..농촌 이여서 농가의 농산물은
모두 소 가 담당하고 소의 맨몸에 질매와 걸체가 간단한 운반수단이라면 구루마는 특별 운반수단
에 속하고 이 소구루마는 말 구루마 같이 생긴모양 이지만 규모가 크다.
그 시절 구루마들은 타이어로 바퀴를 한 것이 아니라 나무바퀴에 철로 타이어를 만들어 썼는데,,
나무바퀴 축을 행굼통 이라 했고 행굼통 에 심보(의흥 말) 을 박아 양편에 바퀴를 고정 시켰다.
말구루마 바퀴는 좁다랗고 소 구루마 바퀴는 넓직 하며 이 나무와 쇠로된 바퀴가 굴러갈적에 포장
도 안된 울퉁불퉁 시골길 말구루마는 달그닥..소 구루마는 들커득. 소리가 달랐다.
말 구루마 나 소 구루마 나 모두 말이나 소가 들어가 질매얹어 끌고갈 틀이 있고 이 틀을 가지야
(의흥 말) 라고 했고 이를 제작하는 곳을 가지야방..이를 만드는 기술자는 가지야 상(일본 식)
으로 불렀고 말구루마는 의흥읍내에 단 한 대며 말도 조랑말 한 마리뿐으로 귀했어나 소구루마는
여러대 있었고 좀 크다는 농가에는 꼭 있는 물건 이 였다.
이 소구루마 는 우리집 에도 있었는데 추수철 논 밭의 곡식걷어 면 실어나르고 봄 여름 에는 간벌
허가 받아 청소깝 실어 나르고 겨울이면 먼산 나무하러 다니며 잠시도 쉬지않고 늘 굴러다니던 구루마..그 소.구루마..소 구루마 를 운전? 하는 사람(운전수..일꾼)이 구루마 를 타는 경우는 더물 었고 아이들이 얻어타고 호사 한다고 하며 행복해 한 그 구루마..의 추억.
이 가지야 방은 6.25.한국전쟁 직후 에는 안보랑 가 폭격맞은 우리집 바로 앞(현재 박수근씨 집)
에 있다가 그기에 정미소를 하는 바람에 장터로 이사를 했는데 옛날 김순용 형 네 집 바라 옆이다.
구루마 바퀴를 만들 적에는 먼저 나무바퀴를 만들고 바퀴둘레에 철로 동태(바퀴) 를 만들어 붙이
는데 이 철동태 를 형틀에 부은 주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쇠를 녹이고 달구어 두드려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작업이 힘들고 어렵고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일 이라 가지야 상은 대우를 받았
고..철 동태를 만들적에 는 작은망치(중망치) 로 내리칠 곳을 툭 쳐서 가지야상 이 지정을 하면
조수역활 을 하는 사람이 큰망치(오햄머) 로 내려쳐서 고르게 다듬고 나면 다시 달궈서 가지야상
이 중 망치로 원형을 만드는데 과히 예술이다..작품이라고 해야 맞나?..
이 쇠동태를 운반하는 무지큰 집게 하며 단쇠에서 나는 열기 하며 그리고 작업의 요체 흙으로 만든
큰 화덕 여기서 나는 열기 등 으로 가지야 방 은 항상절절 끓어 올랐고..작업은 항상 3인이 라야
할수 있다. 불을 조절하며 불무질을 하는 사람 과 바퀴를 만들때 큰 망치질 하는 사람 그리고 이를
지휘하고 지시하며 균형을 잡는 사람 이렇게 3인이 있어 야 작업이 가능 하다.
그리고 이 작업들은 기계가 하는 부분은 전연없이 사람의 몸과 손으로 했고 재료가 모두 쇠이기
때문에 약골은 이 일을 하지 못 한다..그야 말로 강철같은 육체라야 견뎌낸다..그레서 가지야상
고 가지야방 에 일하는 일꾼들은 모두 힘이 보통이상 의 장사 급이다..완성된 쇠 동태는 다시 불
로 달궈서 나무바퀴 에 끼우는데 그 때 나무타는 냄새와 적당한 시간에 박는 기술??은..
오랫동안 하면 나무가 타버려서 쓸모가 없어지고 너무 이르면 전체가 단단하지 못하니 실하고 안전
한 쇠동태 끼우는 기술이 가지야상 의 특기이고 이를 전수 받으면 받는 그 사람이 가지야 상이
된다..이런 구루마 한 대 주문제작 하는 것이 농가의 큰일 중에 큰일이며 경제적인 부담도 당시의
형편으로는 너무 고가인지라 작은 농가에서는 제작 시도를 하지 못 한 것이다.
가지야상 그 분은 박XX 씨 였고 아마 돌아가셨을 것 이다. 그 가지야상은 승마도 곧 잘 하셨는데
구루마 끌던 중마 대마 를 길들이는데 명수시며 안장도 없이 마다리 한 장 말등에 얹어 그 위에
올라타고 달리는 그의 승마기술은 몽고인 을 닮았지..그리고 그 분의 인상은 늘 웃는상이며 한번도
성난 얼굴을 보지 못했다..작업중 내 뱃는 유머는 게그멘 이상이 였고..
이런 시절도 이제는 옛일이 되는 구나..그 일을 하던사람은 아직도 살아 잇는데,,살아있는 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구나..이처럼 세월이 빨리 가고 한사람이 두세상 셋 세상를 살게되는 현실
이 오늘의 삶이다..우리도 크게는 두 세상쯤은 살았고 잘게는 몇 세상을 살았는지 가물가물 하다.
참 세월이 유수라더니 유수 도 못 따라 잡을 시대의 변화라..정신어 없다..참
고향마을...34..130910
의흥읍내 공장?(공방) 들.
4.함석 공방
함석 공방은 점포없이 수시로 제작 수리를 하는 곳이 한곳..점포를 가지고 함석으로 작업을 하는
곳 한곳 두곳이 있었다..시기는 6.25.한국전쟁 직후..이 시기만 기록한다.
그 시절은 요즘의 알미늄 용기들 처럼 함석이 대신 했고..이 함석으로 만드는 물건은 두르박.
대야. 다라이..등등 다양 했음은 지금의 알미늄 용기들 과 닮았다.
우선 함석으로 기계없이 순전히 수공업으로 만든 물건 들과 생활용기를 기억나는 데로 적어 보면
난로의 연통. 가정에서 켜는 호롱. 세숫대야. 다라이. 두르박. 바가지. 조로 그 밖에도 많은물건을 만들 었으나 모두 기억하기 에는 한계를 느낀다..수공업으로 제작할 때 사용하는 함석자르는 함석
가위. 집게. 망치. 납뗌인두. 등은 오직함석 작업을 위한 특수한 모양의 것 들이 였다.
나무와 함석으로 만든 파레바가지..날 가문해 에는 밥보와 이전보 등에서 파레구덩 일 파고 물을
가두어 .. 밤세워 파레질로 들에 물을 공급하던 우리의 아제 형님 들 이 였고 그 파레 바가지가
무거운 어떤 재료를 사용해서 만들었다면 배나 힘이 들었을 것이다..이 함석집이 있는동 없는동
별 소문 없이 늘 한쪽에서 두르박 등 을 만들었고 그 작업들이 일을 쉽게 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지금은 함석으로 작업하고 제작 하는 것은 건물신축시 들어가는 닥터..등을 만들어 오는 모습을
보는데 나의 머리에서는 그 옛 풍경..두드리고 자르고 납으로 땜질하고 하면서. 작은망치로
탕탕 치는 모습이 떠 오를 뿐이다..그 일을 하시던 분은 정일의 선친과 친구단칼 의 형 였고
정일네는 골안(토곡동) 에 단칼의 형은 지금의 정다방 앞에 가게가 있었다..
5.판(밥상) 집
당사자 님 들에게는 죄송하나 사실성을 넓이기 위해 부르던 그대로 부른다면 “판쟁이”라고 했다
여기에서는 둥근밥상(두리기 상).네모상 단독상. 개다리 상. 등을 판매 하는 것이 주업이며 수리
도 해 줬는데..이 밥상은 가정마다 없는 집이 없을 정도의 생활필수 품이고 한번 장만하면 오랫
동안 사용 하였고..기타 고장? 이 나면 수리를 한 것이다.
사람이 먹는 음식(주식)은 밥상에 올려놓고 먹는다..이것은 너나없는 상식이며 그에 따른 수요도 많았을 것이나 한번 구입하면 장기간 사용을 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수요는 이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이를 공급하던 판집도 쉬엄 쉬엄 쇠퇴 한 것이다..이 판집이 없어 진 후로는 의흥에 다시
판집을 하려는 사람도 없었다..그시기는 6.25.한국전쟁 전과 그 직후 까지다.
이 판집이 의흥과 우보 산성 고로 등 4개면 가정마다 의 판을 담당? 했기 때문에 그런대로 당시에는 수입이 좋았던 것이고 그집 딸 xx는 당시로서는 어렵고 어렵던 중등교육을 받게 한점 을
보아서..는 아마 수입이 솔솔 했던 것으로 여겨 진다..아마 좌상님은 아실 것이다 그 또래니..
그리고 그집 아들은 큰아들이 일준. 둘쩨가 이준 모두 3남매 였고...
대 가족이 모여살고 핵가족이 이루어지기 이전 에는 집집마다 식구가 많아 끼때가 되면 온가족이
둥근 두리기 밥상에 둘러앉고 어른은 네모밥상이나 개다리 상으로 독 상 을 차지하고 음식의 질
이야 한없이 빈약하거나 풍성하거나 그 모인사실 들이 인정을 교환하고 희.노.애.락.을 나누던
그야 말로 정도 애환도 섞여서 흐르던 그 밥상머리 인정이 참 그립다.
6.가마니 공장
가마니 공장은 우체국 뒤편 에 있었고..창고를 겸한 주택이 였다. 지붕은 초가였고 단간처럼 4모
가 난 건물이나 그 내부에 주거공간과 가마니 제작공장 창고 를 구분해 둔 한 건물이였다.
가마니를 만드는 것도 역시 수공업 으로 만 작업을 하던 말하자면 6.25.한국 전쟁 이전 까지만
본것을 서술한다..그 후는 개인별로 농가에서 직접 만들었다.
가마니 공장내부 에는 나무로 된 가마니 틀 새끼 그리고 추린 짚 뭉치 들이 쌓여있고 그 한켠에
가마니 짜는 분은 북을 들어올렸다 짝~ 내리고 척~ 하면서 가마니를 짰다. 이 가마니들은 정부
수매. 공출. 등에 쓰이도록 납품 이 되고 했어나 해방이후는 아마 수입이 별로 여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았고..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이들의 애환을 전부 기억에 담지는 못했다.
우리 민족은 여름 보리수확과 가을 나락수확 이 두철에 대량으로 곡식이 쏟아져 나왔고 지금도
그러하다..그런 곡식을 담고 운반하는 것이 바로 가마니. 저장에도 쓰이고. 장석. 뒤주. 섬.등
이 저장에는 필수로 필요한 것 들이였다..지금사 모조리 마데로 담아 네지만 그 당시에는 마데
한 장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 처럼 어려운 그런 시절이 였기 때문 이다.
열섬들이 스무섬 드리 장석이 둥글게 쳐지고 집으로 이은지붕은 한물간 농촌의 속 풍경이고 지금
은 민속촌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풍경 이지만 당시 까지는 일반적인 농촌 풍습이 였다..
그리고 보리섬. 나락섬..한섬은 가마니 가 기본 한가마니의 무개는 80kg정도..한섬은 100kg 이상
이 무개를 지개에 얹어 지고 일어나 몇십리를 걷기도 한 우리 선조들 그리고 선친들..
두지(뒤주)는 도장(고방.창고) 한 편에 간을 내어 앞에는 나무판자로 한 께단씩 문을 만들어 그 속
에 보리.나락.들을 보관하는데 이는장석 처럼 대량으로 저장하는 시설이다..장석에서 보리 떨어지
면 나락이 들어가고..뒤주에서 도 같은 형상이 였다..운반은 너나 없이 모두 가마니 나 섬을 이용
하는 것이 통상적인 사례고..머슴의 세경도 일년에 몇섬 이런식으로 곡식으로 환산되던 시절이다.
지금의 마다리(마대) 에 담는 것들을 가마니.섬.으로 담고 한섬은 대두10말. 한 가마니는 대두5말
이 정해진 기본단위 이며..곡식 몇말 몇되. 몇가마니. 몇섬. 이 농촌의 대부분 계량단위 였고
가치의 측도 였다..지금은 몇g.몇kg. 등등으로 환산하지만 당시에는 저울이 있기는 했어나 몇 섬
몇 가마니 등 약간의 무개차이는 묵인되는 넉넉함이 있었다..
마다리 가 대중화되고 나서 없어진것은 가마니, 섬. 장석. 두지. 뿐만이 아니다..이것들이 없어짐
따라 넉넉 하던 인심도 자취를 감추었고 허허 웃어넘기던 일들이 분쟁으로 변하다가 이제는 법으
로 따지고 문제를 삼는 시절이 되어 버린것 이다..이처럼 편리함이 주어지는 대신 사라지는 것도
따르는 것이니 우선의 편리보다는 좀더 넉넉함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도 필요한 것 이 아닐까.한다.
고향마을...35..130911
의흥읍내 공장?(공방) 들.
7.새끼 집
지금의 로프. 대신 쓰인것이 짚으로 만든 새끼가..아직도 초가지붕은 잉개와 용마름(용마루)얹고
새끼로 가로 새로 아담하게 집을 이고(덮고) 있기는 하지만 극소수일 뿐이고 지붕은 99%가 슬라브
아니면 프라스딕 기와 토 기와 등이다. 그레서 새끼를 사용하는 양이 적어지고 보니 새끼만 전문
으로 꼬아 팔던 시절은 지났으나 그 때 는 새끼 전문 집도 있었다.
농촌밤 일꾼 초당은 새끼꼬는 일이 대종이고 그 외에 멍석.방석 매고 짚소쿠리 만들고 오쟁이 매고
등등 짚으로 하는 일이 대부분 이였다. 이처럼 새끼는 농가마다 필수 의 것이여서 시간만 나면 새끼 를 꼬았고 이름난 풍속화 마다 지개와 새끼가 자주 등장한다.새끼 비비는 굳은살 투성이
손들과 풍경이 꼬아서 사려둔 새끼들 그리고 새끼꼬는 짚은 북덕이를 가려서 가즈런히 놓고....
이 끊어짐 없이 이어져 오던 작업이 새끼 꼬는 기계의 등장으로 전문집이 생기고 사시장천 좁은
헛간에서 발로젓고 손으로 짚 먹여 새끼를 꼬고 차곡차곡 쌓아두면 농가에서 장사집에서 사 가고
해서 의흥에서 새끼집은 과수댁이 했어나 수입이 솔솔 해서 딸내미 고등교육도 시킬 정도 였고..
그 딸내미는 내 후배 이기도 하고 몹시 귀여워 한 기억이 난다..참 귀염둥이 였는데..
새끼 꼬아 타래만들고 잉개역서 지붕이고 용마루 틀어 얹고 새끼로 가로새로 단단히 묶고 널부러
져 나온 집회기 낫으로 잘라 초가삼간 노랗게 아담하고 예쁘게 꾸미고..뒷곁 장독대 봉선화.채송화
백일홍.달구비슬 피고 뚜꽈리 익어가고..양철두루박 우물에 담궈 물 기르고..옹기 물동이 물버지기
이고 물 나르던 그 시절 그 풍경이 정말 다시보고 싶다.
새끼는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민족이 쓴 물건..그네를 매고 줄당기기 하는 굵은 새끼줄 가마니 묶고
집 지붕이던 새끼..이 새끼에는 민족혼이 담긴 물건이며 특히나 농촌에서는 농부의 애환이 담긴 것
으로 우리와 떼지못할 인연이 있다..그 새끼도 이제는 로프 서양식 밧줄로 바뀌어 지고 그네 매던
고목대신 마른기둥 높다랗게 새워 그네를 만드니 참 세월따라 모습도 많이 변하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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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마을...36..130911.
8.농방(목공소)
농방은 의복을 넣는 농을 만드는 것이 주업이지만 자개장 처럼 고급 농이나 기타 고급 가구를 만드
는 곳은 의흥읍내 에는 없었고..내가 아는 것도 6.25.한국전쟁 전후한 기간 동안 뿐이다.
그리고 혼례 때가 되어 잘사는 집에서는 농을 만들어 혼수로 보네기도 하는 것을 보았으며 이를
전문 적으로 제작하는 분은 박대목 과 또다른 박대목..두분 뿐이다가 한참후 더 생겼다.
이 윗대의 박대목 분들은 의흥읍내 토박이가 아니고 타지에서 의흥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가
지금은 별세 기타의 사정으로 이일을 그만두고 다시 타지로 이주 했으며 내 친구가 이들로부터
기술을 전수 받아 한참을 목공소를 경영 했으나 그도 대구로 이주하고..아마 지금은 의흥읍내에
는 목공소 가 없을 것이며..타지에서 구입해다 쓸 것이다.
목공소에서 한 일들은 농. 반다지. 괘짝. 창호(문). 찬장. 신축건물의 문틀. 들이며 그 밖에 나무
로 된 가구의 수리 정도 였고..농 만들기 이전에 백골을 짜고 짠 백골에 칠을 입히고 고리와 장식
을 달고 꾸미면 그 가격이 당시 농촌에서는 대단한 고가여서 혼사 이외에 필요에 의해서 농을 만드
는 일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후에는 단스 라 하여 서양식 이 되었지만..
그리고 작업역시 인력에 의한 수공업이라서 대패. 망치. 톱. 짜구(자귀). 끌. 곡자. 먹줄. 은 필수
품이고..사시장천 목공소에서는 대패밥 이 나오고 톱밥이 싸였고 먼지도 많았고..목수의 이마는 수
건이요 귓바퀴 에는 연필..손에는 자 등연장을 들고 ..재단 하며 자질하여 밀고.파고.다듬고.끊고
하는 나무들과 의 씨름을 하는 모습을 많이 보기도 하고 배우기도 조금 했다.
문틀 짜고 미닫이. 장문. 동문. 달고 봉창내고. 흙장판. 삿자리. 돗자리 낡은것 도..깔고 찱흙,
황토흙 바른 벽 알매쳐 그 위에 바른 흙 가리는 한지 천정..그런 초가 좁다란 방에서 추위 더위
모르고 자란 우리가 아닌가..우리시대 사람으로 이런 환경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 이다.
네모난 성냥곽 같은 아파트에서 이런 모습을 꿈인양 그려 본다.
9.목수(대목) 들
의흥읍내 목수 하면 박대목. 김대목 들이 생각난다..이 두분이 6.25.한국전쟁 전후한 시점에 전쟁
으로 폭격맞아 없어진 집터위에 새로운 집을 거의 모두 지었고 간혹 타지에서 집을 짓는 일에 종사
하는 대목들이 몇분 다녀가기도 했다..내가 살던 소전걸 원조물자로 지은 기와집 은 타지에서 원정
온 목수가 지었던 기억이 난다..그 무작스럽던 시멘기와 빈약한 석가레? 참
박대목은 주로 학교등 큰 건물을 많이 지었고 김대목은 초가등 작은 주택을 전문으로 지었다..
당시에는 건축 또는 토목공사 에 쓰이는 제료들이 전쟁탓 에 엄청 부족한 시기여서 주로 외국에서
들어온 원조물자 인 목제와 공구 심지어는 못 까지 미제 였는 경우가 많았다..박대목이 공사하신
구..의흥중학교..구 의흥초등 학교..구 면사무소..등등이 또렸이 기억된다.
당시로서는 의흥읍내 에서는 가장큰 규모의 건물이며 이 신축공사를 박대목 홀로 설계에서부터
완공에 이르기 까지 담당 하셨고 보조일꾼은 지방 사람들이 였다..건물을 지을 때마다 널어서는
목제들은 라왕.육송. 등 원목을 제단하여 제재 소에서 제재 해다가 쌓아두고 다시 자질하여 먹줄
놓고 톱으로 자르고 끌로 파고 대패로 미는 모습을 많이도 보았다.
이 건물들의 대들보는 갓쇼(일본 말) 라 해서 볼트낫트가 동원되고 하였으며 석가래는 각목으로
하고 지붕은 함석이며 천정은 아예 없고 바닥은 나무마루 를 놓았다..그 때 까지 학생들 개인용
책상과 걸상은 없었고 멘 마루바닥 에 책받침 을 우릎에 얹고 그위에 책을 펴 공부 했다.
난로도 없어나 남쪽으로 난 창문으로 들어오는 했빛으로 교실 또는 사무실은 춥지 않았다.
학교나 면사무소나 큰 건물의 창은 남쪽으로 배치한 탓으로 태양열 덕을 톡톡히 보도록 한 것 이지
학생이 다 차지하지 못할만큼 교실이 많아서 남은 교실 하나에 채육관을 마들고 메트를 깔아 유도장 도 만들고 했다..우리는 방학때면 빈 학교 교실에 교단을 쌓아 탁구대를 만들고 탁구도치고
운동장(소학교운동장) 에서는 정구를 치기도 했고 그 장비들은 중학교 에 나온 원조 물자 였다.
그리고 박대목은 여러 일에 능숙하신 분이라 의흥읍내 장성백이에 물래방아 를 만들어 잠시 운영
하기도 하셨고 장골의 체격에 구렛나루 수염을 달고 목소리는 위엄이 있는 보스 스타일 이 셨다.
그 집 자녀 들이 우리 후배가 되고..한참을 의흥에서 살다가 울산인가 어디로 이주 하신후 큰 공
사를 하는 대목은 의흥읍내 에는 없어지고 지금의 건물들은 외지 기술자 들이 지은 것 이다.
김대목 이분은 나의 선친또래 연세 셨고 그의 아들이 나와 동갑쟁이 쯤 된다..이 아들이 후일에
는 그의 부친의 업을 계승 했지만..이 김대목님 은 주로 가정집 을 짓는 전문가로 많은 초가와
기와집을 지었다. 김대목 그 키큰양반 짧은 곰방대 무시고 내 키만한 짜구로 대들보감 나무를
손질하시면서 언제나 말이 별로 없으시던 그 어른 이 기억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정해진 집터 터가 정해지지 않은 집은 터를 잡아 먹줄놓아 땅에 홈을 파서 집 모양 을 그리고 기둥
나무 곧지 않어면 짜구로 다듬어 세우고 가로 새로 중방놓고 대들보 얹고 석가래 가지런히 놓아 집
모양을 만들면 알매치고 지붕이고 또는기와 올리고 주춧돌 내려 앉지 않나 끈임없이 살피며 집을
짓는다..왕토장인 벽바르고 구들장인 구들놓고 벽에는 대나무 아니면 지랍으로 벽살을 하고.
바르는 그 벽은 두께가 20~30cm 이나 되는데 그 두께에 황토찰흙으로 벽을 바른다..그 흙칼질이며
작두에 설은 집섞어 발로 밟아 이긴 그 진흙들...그 처럼 두꺼운 면을 한점 흙도 흘리지 않고
바르던 왕토장인(미장 장인)..구들뼈 노으면 그기에도 찰흙으로 방온도 조절하며 바르고 그 위에
모래와 황토가루 섞어서 해초넣고 긇인 물로 이겨서 제세를 하던 그 흙칼질..
흙집 담집 흙벽돌 집..구분 없이 왕토(미장) 은 필수였고 부엌발라 부뚜막 만들고 굴뚝에도 흙칼
작업하시고 소위 미장에 관한일을 모두 맡아 하신 그 어른..은 가지골 사셨고 우리가 꼬맹이 시절
넷가에서 살챙이라도 잡아모으면 지나가시다 보시고 이 살챙이를 배도 따지않고 그대로 후르륵
쩝쩝 하시던 그 먹성좋던 그 어른 은 아이들을 무척좋아 하시던 기억이 난다.
의흥읍내 장인 들.
10.구들 장인.
구들장인 은 천수 아제..집이 신축되면 우리나라 집 들은 온돌이 주 이기 때문에 반듯이 구들을 놓는다. 따라서 어느지방이나 구들놓는 장인은 있기 마련이고 의흥읍내 구들장인은 천수 아제다..
구들을 놓을려면 구들뼈(구들 을 형성 하는 돌) 와 곱돌(구들뼈 지탱하는 돌) 이 필수로 필요하다.
구들 뼈는 주로 향교앞 안보수멍 바로 앞 언덕에 잘일어 나는 바윗돌을 뜨다 섰다.
이 구들뼈 에 쓰이는 돌은 평평하고 넓직해야 하고 불질열기에 견디는 돌이라야 하고 마땅치 않으면 멀리 타지까지 가서 구해오기도 했다..곱돌은 갱분에서 적당한 돌을 주워다가 사용 했다.
구들놓을 자리에 골을 파고 곱돌노아 그 위에 황토찰흙으로 두텁게 바르고 그 위에 제세를 한다
제세후 불을 때어 말리고 나면 그 위에 장판신 을 신기고 장판을 바른다..
장판 이라야 제대로 된 진품 장판지는 없다 싶이 했고 점방에는 있어도 고가라 이를 피하고
잘 해야 비료푸데 종이 신은 신문지..벽지 역시 마찬가지..배료푸데 종이로 장판을 대신하여
바르고 난후 이 비료푸데 종이에 콩기름 을 먹이고 들끼름을 먹여 광을 낸다..
이것도 저것도 없어면 흙장판을 만들고..삿자리 깔기도 한 그런 것이 집이며 우리가 살았다.
구들돌 및 골을 불들어가는 고래라고 했는데 이를 잘못만들 경우에는 불이 밖으로 나와 방이 덥
혀지지 않고 굴뚝에 연기도 나지 않고 그 연기가 역류하여 불 때는사람 앞으로 나온다..
이렇게 되면 구들장인 천수아제 곤욕을 치르고 욕을 먹는다.
해서 신중에 신중을 더해 구들을 놓지.
집을 아무리 잘지어도 겨울에 방이 춥고 여름에 더우면 실패작이 된다. 구들장인이 하는 일이 간단
한것 같아도 이 모든사정 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것이고..요즘처럼 엑셀
이나 동관을 깔고 보일러 설치하여 물을 이용 하는 난방처럼 생각하면 오산이다..이렇게 구들놓아
화목때는 집은 이제는 사라지고 천수 아제 그 사람좋다던 분도 이 세상사람 이 아니다..
고대광실 이나 찌거러진 초가삼간 이나 짓는 이치는 같은 것이라서 어디에나 구들이 있고 벽이 있
다 그리고 철마다 수리를 하고 흙을 날라다가 흙일을 했던 것이다..이는 궁궐이나 민가나 양반이
나 상놈이나 차이가 없는 작업이며 이 구들장인은 누구에게나 대접을 받는 사람이 였다..
그러니 구들장인은 만인평등 을 몸소 실천하는 장인이라 여겨진다.
11.우물장인
우물장인은 바람골 노인..그 분도 키가 예사롭지 않게 컷지 그리고 눈동자 부리부리 하고 약간
붉은 빛이 나기도 하고 일종의 신기 비슷한 감이 느껴지기도 하는 어른이 셨고 6.25.한국전쟁
직후 에 노인 연세셨고 하여 사람들이 바람골 노인이라고 불렀다.,노인이지만 장정같이 정정하시
고 힘도 장정이상 쓰시고 그만큼 장골이라 고 할 분이시지..
이 분은 요즘처럼 수맥을 찾는다 고 기구를 들고 이리저리 탐사하는 일은 전연없고 다만 육안 하나
로 살피다가 여기에 물이 난다고 지정 하신부분은 우물을 파면 반드시 물이 나는 신기한 기술을
가지신 분이다..비록 우물을 파고 축을 쌓는 막 노동 을 하시지만 어느 누구도 이 분을 함부로
대하지 못 했다..생명의 원천인 물(수분) 을 재공하시는 분이라서 그렜다.
어디에나 같은 사정일 터이지만 의흥읍내 역시 우물이 몇 되지않고 인구는 많아서 공동우물이 여기
저기 있고 우물마다 물긷는 풍경이 연출되고 우물가 문화? 도 생겨나게 된 것이다.
집집 마다 물긷는 것이 기본으로 된 것이 아낙 들의 삶이며..물동이 이는 힘이 생긴여성을 처녀취급 을 했던 것이다.,,물동이 이지 않고 자란 여인이 몇 이나 될까??
우물은 그 집의 터주가 자리한 중요한 지점이라 신을 청하거나 모실적에는 첫 새벽그날 아무도 다녀 가지 않은 맑은 우물을 길어다 정화수 로 쓰며 이 물로 하늘에게 별에게 신에게 기원을
드린다..이 우물은 생명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활 뿐 아니라 인간의 심신정결과 지극한 정성을 표시
하는 역할로도 사용된 것이고 지금도 그리 쓰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우리민족 뿐만 아니라 어느민족이건 물없이는 생존하지 못할 것이며 물없이는 생명을 유지한다는것
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 마치 공기의 중요도와 같다..풍,흉 을 조절하 며 여기에서 발생하는 여러 인심을 좌우하는 물..이 물이 어디에 감춰저 있을 것을 환히 아시던 바람골 노인의 능력은 참
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것 이다..이 노인이 소전걸 우리집 우물도 팠다.
아마도 의흥읍내 의 우물들은 거의 전부 이분의 손을 거친듯 이 여겨진다.
이런 놀라운 장인도 이제는 가버리고 수백을 찾는 공부를 하고 수맥찾는 도구로 이리저리 물을 찾아 해매는 시대가 지금이고..물값이 기름값과 맞먹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우물도 모두 매워지고 생수공급은 막대한 이익 산업이 된 오늘이 지 않은가..
문화의 발달과 문명의 발전이 좋기는 하나 좋은 만큼 싫어진 구석도 많다는 것을 유념 할 필요가
있다..좋은것 뒤에는 나쁜것이 반드시 따라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수도를 놓고 편한 세상
처럼 되었어도 편한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일 뿐 마음 깊은 곳 에서는 그 시절의 좋은 점들이 더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물 긷던 인심 은 어쩌자는 건지..안타깝다.
온것과 올것과 가버린 것 세가지 일들이 만나 조화를 찾는 것이 급선무다..조화 이것은 만번을 말
해도 가치가 있는 것이며 이 조화를 찾아 지금도 공부하는 사람들도 많고 많으며 그들의 목표는
조화선국 이다..조화의 도를 성취하여 세상을 혼란에서 구한다고 하여 도성구우 라고 도 한다..
인류의 염원은 이 조화를 성취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이에서 벗어나면 혼란만 생산하게 된다..